이주일 전쯤인가, 저녁 시간에 집에서 만난 아내가 요즘 무슨 특별한 일은 없었느냐고 인사치레로 묻길래 별 일 없었다고 하다가 마침 그날 낮 수영장에서 있었던 '조금 특별한 일'이 생각나서 잠깐 그 얘기를 해주었다.

그날 몸이 찌뿌듯해서 점심시간을 이용해 수영장에 잠깐 갔었는데 탈의실에서 옷을 다 벗고 샤워실로 들어갔더니 파우치 안에 수영복이 없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수영모자나 안경은 전에도 잃어버린 적이 있지만 수영복을 잃어버린 건 처음이었다. 할 수 없이 옷을 다 입고 밖으로 나와 카운터에서 가서 여직원에게 혹시 습득 신고가 들어온 수영복이 있는지 물었더니 없단다. 맞은편에 있는 매점으로 가서 주인 아줌마에게 새 수영복을 달라고 했다. 처음 갔을 때 내게 수영복을 무척 비싸게 팔았던 아줌마였다. 수영복을 분실했다고 했더니 아줌마가 수영복 잃어버린 게 무척 잘한 일이라도 되는 것처럼 환하게 웃으며 새 수영복을 내주었다. 이번에도 비싸게 팔면 뭔가 항의를 하려고 했는데 어느새 눈치를 챘는지 좀 저렴한 제품을 권했다. 새 수영복을 받아들고 다시 탈의실로 가서 옷을 벗고 샤워를 했다.

수영복을 착용하고 수영장 안으로 들어가며 물안경을 썼더니 이번엔 물안경 끈이 툭 끊어지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물안경 없이 수영을 하면 눈이 몹시 아프고 충혈도 되는데. 할 수 없이 다시 나와 옷을 입고 매점으로 갔다. 아줌마가 안 그래도 기다리고 있었다며 반가워했다. 내가 물안경 줄이 끊어질 줄 어찌 알고 기다렸냐고 물으려고 하는데 아줌마가 내 카드를 디밀었다. 수영복을 사고 신용카드를 안 가져 가셨다는 것이었다. 나는 굳은 얼굴로 고맙다고 인사를 하며 물안경도 하나 달라고 했다. 아줌마가 또 몹시 기뻐하는 환한 얼굴로 물안경을 권했다. 비싼지 아닌지 따져 볼 겨를도 없이 물안경을 들고 다시 탈의실로 가서 옷을 벗고 샤워를 한 뒤 수영복과 물안경을 착용하고 수영장으로 들어갔다. 시간이 너무 흘러서 레인을 몇 번 왔다갔다 하지도 못하고 뛰쳐나와서 늦은 점심을 먹어야 했다...

내 얘기를 다 들은 아내가 한숨을 내쉬며 측은한 눈길로 내 얼굴을 쳐다봤다. 남편이 남들보다 어려운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정도인 줄은 몰랐던 모양이다. 그래도 이런 얘기를 스스럼없이 할 수 있는 아내가 곁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도 없이 달밤에 대나무숲에 가서 혼자 이런 얘길 두런두런 주절이고 있으면 그 인생이 얼마나 서글프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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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가끔 감방 같은 데 들어가서 책만 읽었으면 하는 얘기를 하는 분들이 있죠. 호텔에 가서 밤새도록 책만 읽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책 읽는 펜션이 생겼다는 얘기를 들은 것 같은데. 아무튼 우리나라에도 이런 생각이 유행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럼 책 읽는 사람도 많아지고 책도 많이 팔리겠죠?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8071546011&code=970100




[김진우의 도쿄 리포트]24시 책 아파트·책 호텔…일본, 이색 독서 공간 ‘속속’


Posted by 망망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누군가 생을 달리 하셨을 때 우리가 위로를 전하며 흔히 하는 표현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가는 곳을  명부(冥府)라고 하므로 명복(冥福)을 빈다는 말은 고인이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으로부터 심판을 잘 받고 복을 누리기를 바란다는 뜻이라 합니다. 참으로 상투적인 말이지요. 그러나 막상 이 표현 말고 다른 말로 같은 뜻을 전하기도 참 힘든 게 사실입니다. 얼마 전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이라는 책을 낸 김민정 시인이 오늘 올린 황현산 선생님의 부음 포스팅에 저도 명복을 빈다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이전의 책 [밤이 선생이다]부터 황 선생을 곁에서 모시고 흠모했던 김 시인의 슬픔이 그 누구보다 클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사소한 부탁] 중 <날카로운 근하신년>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근하신년이라는 네 글자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나 '해피 뉴 이어'에 밀려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 것 같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칼럼은 이런 상투적인 말도 처음에는 굉장히 날카로운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때로 누군가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끼치던 언어였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실제로  젊은시절 불운했던 어느 친구의 얘기를 들려줍니다.  고향에 노모를 두고 서울로 올라가던 그 친구는 고속버스 안에서 안내원이 해주는 "손님 여러분의 행운과 가정의 평화를 빈다"는 인삿말을 그날따라 유심히 들었다고 합니다. 의례적인 인사가 문득 가슴을 파고 든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길로 월부 책 장사를 시작해 지금은 조그만 건물을 소유할 정도로 성공을 했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그때 고속버스 안내원의 말을 귀담아 들은 덕분에 자신에게 행운이 찾아온 것이라고 믿고 있답니다. 

어쩌면 모든 상투적인 말이 다 비장한 말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늘 염원하면서도 내내 이루어지지 않았던 희망을 그 상투적인 말이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끌어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이 상투적인 말이 되도록 놓아둔 것은 늘 보던 것 외에 다른 것을 보려 하지 않는, 다른 것을 볼까봐 오히려 겁을 먹는 우리들의 나태함일 것이 분명하다. 말은 제 힘을 다해 우리를 응원하는데, 우리가 먼저 포기해버린 탓일 것이 분명하다. 상투적인 말들도 처음에는 그 날카로운 힘이 우리의 오장에 파고들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말이 나를 넘어뜨리고 내 안일을 뒤흔들 것이 두려워 우리가 철갑을 입을 때 말도 상투성의 철갑을 입기 시작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시인들이 말의 껍질을 두들겨 그 안에서 비장한 핵심을 뽑아내려고 사시사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상투적인 말들이 갖는 의미를 헤아리다가 '말의 껍질을 두들겨 그 안에서 비장한 핵심을 뽑아내려고 사시사철 애쓰고 있는' 시인들에게로까지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가는 황현산 선생의 따뜻한 사유의 힘이 그립습니다. 그리하여 저도 할 수 없이 상투적인 말을 하나 더 보태겠습니다. 황현산 선생님, 부디 안녕히 가십시오. 오늘 저희는 또 하나의 반짝이는 별을 잃었습니다.  

  

Posted by 망망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