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랍게도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삶은 '평범하게 사는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 평범함 속에는 어떤 조건들이 숨어 있는 걸까? 대충 이런 것들 아닐까. 엄청난 연봉은 아니더라도 남들에게 인정받을 만한 직장에 다니고,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아무 때나 이주일 정도 해외여행을 떠나고, 돈과는 상관 없는 나만의 취미생활을 영위하며, 미래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 없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하나 하나 열거하다 보니 헛웃음이 나온다. 이건 평범보다는 차라리 특별한 삶쪽에 가까운 게 아닌가. 적어도 신자유주의 시대의 폭풍을 온몸으로 맞은 뒤 한반도 남한에서 허덕허덕 살아가고 있는 이삼십 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영화 [버닝]은 무라키미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를 원작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1990년대에 이 작품을 읽은 나는 아침에 조깅을 하다가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는 주지 않고 오로지 헛간만 조심스럽게 골라 태우는 등장 인물의 무용한 행위가 영화에서 어떤 의미로 작용했을지 몹시 궁금했다(후에 전쟁영화의 레퍼런스급으로 등극한 스필버그의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보기 전 읽은 시놉도 '2차대전 중 참전용사로 네 명의 아들을 잃은 집의 마지막 아들 라이언 일병을 구하기 위한 군인들의 노력'이 전부였는데 그것만으로는 도저히 영화의 분위기를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감독이 이창동이라는 말에 꽤 독한 영화가 나오겠구나, 예상을 했고 그 예감은 빗나가지 않았다.  

유통회사에서 '알바'를 뛰고 있는 소설가 지망생 종수는 일을 하다 행사장에서 춤을 추고 있던 어렸을 적 동네 친구이자 동창인 해미를 만나 가까워진다. 그녀는 취미로 팬터마임을 하기도 하고 고양이 '보일'이를 기르기도 하는데 어느날 종수에게 고양이를 맡기고 아프리카 여행을 훌쩍 떠났다가 벤이라는 돈 많은 남자와 함께 돌아온다. 벤은 특별히 열심히 일을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스포츠카를 몰고 방배동의 고급 빌라에서 살고 있는 잘 생긴 싱글이다. 종수는 벤이 마치 피츠제럴드의 소설 속 주인공 개츠비 같다는 생각을 하고 벤은 그런 종수와 대마초를 나눠 피우며 자기는 가끔 들판에 널려 있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습성이 있다고 고백한다. 불이 나도 대부분 아쉬워하지도 않고 큰 범죄가 되지도 않는 비닐하우스 태우기. 종수는 혹시 자기가 비닐하우스 같은 하찮은 존재는 아닐까 하는 두려움에 본능적으로 몸을 떤다. 이들은 모두 저녁 노을보다는 아침 햇살이 더 어울리는 나이지만 그들이 모이는 곳엔 늘 석양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단어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일 것이다. 해미가 아프라카에 가서 들었다는 얘기.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은 리틀 헝거이고 삶의 의미를 찾아 헤매는 사람은 그레이트 헝거라는 그럴듯한 메타포. 그레이트 헝거는커녕 리틀 헝거라도 한 번 폼나게 해보고 싶지만 매 순간 가진 것 없이 뜨겁기만 한 젊은 육체를 버거워 해야하는 해미는 아프리카에서 시시각각 색깔이 변해 가는 노을을 바라보면서 "죽을 용기는 없고 그냥 저것들처럼 훌쩍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했다며 술집에서 운다. 

평생 아쉽거나 슬픈 일이라고는 당해본 적이 없어서 눈물을 흘려보지도 못한 벤은 그런 청승을 떠는 종수와 해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모든 일에 심드렁하다. 여자든 돈이든 원하기만 하면 바로 생기는 데다가 종수처럼 분노조절이 안 돼서 폭력혐의로 재판을 받는 아버지가 있거나 해미처럼 카드빚 다 갚기 전에 집에 들어올 생각 말라 야멸차게 내치는 가족도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끔 비닐하우스를 태우는데, 아다시피 그것도 그리 큰 재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그는 '재밌네'라는 말을 남발한다.  파주에 사는 종수 집으로 갔을 때 마을에 울려퍼지는 소음이 대남방송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도 그는 무심코"재밌네요"라고 말한다. 사실은 뭐든 게 재미 없어서 자신의 여자들이 파티장 친구들 앞에서 신나게 떠들 때도 하품을 하다가 매번 종수에게 들키면서도. 

종수 역을 맡은 유아인은 영민하지만 '세상이 거대한 수수께기 같아서' 소설을 쓰지 못하고 괴로워하는 청년 역할을 너무나 잘 소화해 내고 있다. 판토마임으로 없는 귤을 까먹고 노을 앞에서 옷을 훌훌 벗은 채 반나로 춤을 추는 전종서도 해미 역에 딱이다. 그러나 이 영화 최고의 캐스팅은 모든 것을 다 가졌으나 권태롭고 그러면서도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은 벤을 연기한 스티브 연 아니었을까. 이창동 감독의 연출력은 어느 하나 뛰어나지 않은 점이 없지만 그 중에서도 벤을 악역으로 설정하지 않은 점이 가장 훌륭하다고 생각한다. 분명 종수에게는 넘을 수 없는 거대한 벽인데 정작 본인은 늘 침착하다못해 천진하기끼지 하다. 도대체 싸움이 되지 않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적보다 더 무서운 적은 아마 이처럼 무심한 존재일 것이다. 마지막에 종수가 벤을 칼로 찔렀을 때도 그는 아마 "재밌네"라고 중얼거리며 죽어갔을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를 보고 그래도 희망은 있다, 거나 어떻게든 살아야 하지 않겠니? 같은 가짜 위로의 말은 당분간 삼가해 주시기 바란다. 비극의 주인공을 꾸며내려고 해도 '과잉 설정'이라는 소릴 듣게 되는 상황이 바로 하루에 햇빛이 딱 한 번 드는(그것도 남산 타워에 반사된) 해미의 방일 것인데 어쩌면 그 또래들에게 이 영화의 배경은 2018년 대한민국 전체로 확장되어도 크게 무리는 없을 것이다. 

 예전에 에스컬레이터에서 에티켓을 무시하고 걷거나 뛰어다니는 승객들 대부분이 젊은이들이라는 어른들의 질책에 '나도 언젠가 에스컬레이터에서 뛰지 않고 그냥 서서 가는 입장이 되었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대학생 알바생의 가슴 시린 인터뷰를 읽은 적이 있다. 이창동 감독은 이 영화에서 바로 그 젊은이의 분노를 담아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생각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시나리오 작가 오정미 각본가에 의하면 이 영화는 시나리오 작업 단계에서 지금의 제목 대신 '분노 프로젝트'라고 불렸다고 한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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