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수동 구두골목 이야기 [드림핸드메이드]에서 명품 수제화를 만나다

 

 

발렌타인데이 하루 전날인 2 13, 여친과 저는 혼인신고를 하기 위해 성동구청을 향해 길을 나섰습니다. 결혼식은 5월 예정이지만 최근에 제가 갑자기 회사를 그만두는 바람에 의료보험 처리 등등 혼인신고를 먼저 해야 할 이유가 몇 가지 생겼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왕이면 기억하기 쉽게 2 14일에 신고를 하자고 약속을 해놨었는데 마침 여친이 몸살이 나 회사를 하루 쉬는 바람에 그냥 앞당겨 다녀오기로 한 것이었죠.

 

저희 아파트에서 성동구청에 가려면 성수역까지 걸어가 왕십리역으로 가는 게 가장 빠른 길입니다. 우리들은 평소처럼 쉬엄쉬엄 걸어 15분 걸리는 성수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뚝도시장을 지나 성수동 구두골목으로 들어서자 갑자기 지붕이 낮고 아담한 일 층짜리 수제화 가게가 하나 나타나는 것이었습니다. 평소엔 관심이 없어 반대편 길로만 다녔는데 그날은 웬일로 그랬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친이 눈을 반짝이며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진열되어 있는 구두들을 둘러 보았습니다. 이런저런 많은 구두들이 있었지만 그녀의 눈은 벌써 어떤 구두 한 켤레에 고정되어 있었습니다. 쇼윈도에 진열되어 있는 캐주얼화로 보통 구두처럼 브라운이나 블랙 대신 잘 쓰지 않는 피코크 그린컬러를 쓴 것부터가 범상치 않아 보였습니다.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쳤습니다. 그래, 저 구두야.이심전심이랄까. 평소에 양복을 거의 입지 않아 제대로 된 구두를 장만할 기회도 없었고 그럴 필요도 거의 느끼지 못하고 살아온 저였습니다. 게다가 발이 아주 작은 편이라 구두를 살 때마다 늘 마음에 드는 구두 대신 사이즈에 맞춰 구두를 고르곤 했습니다(아버지, 어머니, 형까지발 작은 건 집안 내력입니다). 245mm 남자구두는 그리 흔하지 않은 편이니까요. 그러다가 어느날 문득 성수동에서 마음에 쏙 드는 구두를 하나 만난 것입니다.

 

 

 

 

사장님, 이거 얼마에요? 우리의 질문에 사장님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신어서 맞으면 삼십만 원, 새로 만들면 사십만 원이라고 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뭐 이런 노란 고무줄 같은 가격대가 다 있어? 아마 새로 만들려면 시간도 오래 걸리고 새로운 노력과 품이 더 드니까 그런 모양입니다. , 그래요? 저는 245인데. 발이 작아서 여기 있는 건 안 맞을 거예요. 그랬더니 사장님 왈 저게 245예요.” 그러시는 게 아닙니까. 에이, 설마.

 

약간 떨리는 마음으로 쇼윈도에 있던 구두를 꺼내 신어보니 정말 요술처럼 제 발이 구두 속으로 쏙 들어가 노는 것이었습니다. 물건마다 주인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말이 있죠. 아마 이 구두가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합니다.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이런 건 현찰박치기를 해야 맛이 나죠. 저는 당장 길 건너 은행으로 달려가서 빳빳한 5만 원 권으로 현금 삼십만 원을 인출해 사장님께 드렸습니다. 어린아이들처럼 좋아하는 저희들을 바라보는 사장님의 표정에도 내가 만든 구두가 오늘 주인을 제대로 찾아가는구나하는 흐뭇함이 배어 있었습니다.

 

구두는 처음 신는 것인데도 아주 부드럽고 편했습니다. 새 구두로 갈아 신고, 헌 운동화를 종이가방에 넣은 뒤 비로소 정신을 차리고 가게를 둘러보니 매장 안에 있는 구두는 거의 다 남성용이었습니다. 여자 구두는 안 만드세요? 라고 물었더니 싸우기 싫어서요.”라는 명쾌한 답이 돌아왔습니다. 여성 고객들은 하나같이 까다로워서 이젠 상대하기 지치셨다는 겁니다. 어딜 가나 정여사 같은 분들이 여전히 맹활약 중이신 모양입니다.

 

 

성수동 구두 거리 [드림핸드메이드] 유홍식 대표.

 

그는 우리나라 수제화 역사의 산 증인이었습니다. 1960년도부터 구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아직도 손수 구두를 제작한다고 하니 그 열정과 집념이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힐끗 보니 사장님의 손은 그 동안의 역사를 증명해주듯 아주 거칠고 상처가 많았습니다. 한마디로 장인의 손이죠. 제가 산 구두도 사장님께서 손수 한땀한땀 바느질해서 만든 세상에 단 한 켤레밖에 없는 구두라고 자랑스럽게 말씀해 주시네요. 구두 수명이 다 될 때까지 A/S를 해줄 테니 언제든지 오라는 말도 믿음직스러운 대목이었습니다.

 

작년 8월 저희가 아무런 연고도 없으면서 괜히 이사 온 성수동은 수제화산업 중심지로 서울시에서 집중 육성하고 있는 곳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우연히 찾아간 수제화점 [드림핸드메이드]는 이 시점에서 성수동 수제화의 중흥을 상징하는 핸드메이드의 메카였던 것입니다.

 

 

사실 나는 구두 더 팔아먹으려고 A/S 해주는 거예요. 구두 고치러 와서 새 구두 또 사가는 경우가 꽤 많거든. 하하.”

 

 

보통 50~60만 원부터 시작한다는 고가 수제화를 A/S 받으러 와서 또 새 구두를 사간다는 유홍식 대표의 이 솔직한 이야기에는 핸드메이드의 우수한 품질과  명품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 담겨 있었습니다.

 

 

 

전 잘 차려 입은 양복에 구두까지 잘 갖춰 신은 남자의 모습을 참 좋아합니다. 캐주얼한 청바지에 징 박힌 구두를 맞춰 신은 모습도 좋아하죠. 좋은 구두는 발뿐만 아니라 마음까지 편안하고 자신 있게 만들어 줍니다. 그건 유명 브랜드를 달고 나온 기성 제품보다는 장인의 손길에서 탄생한 온리원제품일 때 더 하겠지요.

 

운수가 좋은 날이었습니다. 구청 가는 단 몇 시간 만에 명품 구두도 얻고 또 명품 아내도 얻었으니까요. 아무래도 이 구두는 당분간 제가 가장 애정하는신발이 될 거 같습니다. 그런데 결혼식장에 신랑이 피코크 그린컬러 구두를 신고 입장해도 괜찮을까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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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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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를 그만두면 월요병이 없을 거라 생각하시죠? 그러나 세상 일이 어디 그리 만만한가요? 저는 내일 출근을 안 해도 제 여친은 여전히 출근을 하죠. 그러니 제가 놀든 말든 여친의 월요병은 그대로란 말입니다. 아니, 어쩌면 저 때문에 더 커졌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니 일요일 저녁인 지금 한숨을 폭폭 내쉬고 있는 여친 옆에서 눈치 없이 개콘을 틀어놓고 희희낙낙할 순 없는 노릇이죠.

사실, 월요병은 백수들한테도 있습니다. 경험상 그렇습니다. 오래 전 회사를 그만 두었을 때 저는 월요병을 극복해볼 요량으로 ‘월조회’라는 모임을 만든 적도 있었습니다. 월요일 아침에 조조영화를 보는 사람들의 모임이었는데, 당연히 회원은 저 하나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월요일 아침마다 조조를 보는 쾌감을 누려도 월요병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죠. 전쟁통에 손가락을 잃은 병사가 가끔 없어진 손가락에서 가려움증을 느낀다는 걸 어디선 가 읽은 기억이 나는데, 월요병이란 놈도 그것과 비슷한 모양입니다. 우린 이미 ‘월화수목금토일’이라는 시스템에 인이 박혀버린 것입니다. 억울했습니다. 예전엔 월요일을 만든 놈을 죽이고 싶다고 생각했었는데 생각해보니 인류에게 일요일이 생긴 이후로 늘 월요병은 존재했을 거 같더군요.

그러니 너무 심란해 하지 마십시오. 백수라고 월요일이 무섭지 않은 건 아닙니다. 세상에 공평하게 다 행복한 일은 드물지만 공평하게 다 거지같은 일은 가끔 있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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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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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심을 먹고 나면 의례 혼자 짧은 산책을 나가곤 합니다.

예전엔 일행들이랑 식당 문을 나서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혼자 빠지는 경우가 많았지만 요즘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니까 사무실에서 점심을 먹고 양치까지 한 뒤에 천천히 길을 나섭니다. 산책이라고 해 봤자 사무실 근처를 이십여 분 동안 느리게 한 바퀴 도는 것뿐이지만, 그래도 제겐 이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하고 평화롭습니다.

산책은 그야말로 목적이 없는 행위이니까요. 빨리 걸을 필요도 없고 또 어디까지 꼭 갔다 와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마음을 비우고 걸을 뿐입니다. 요즘처럼 바쁘고 효율성이 중요한 세상엔 이 무슨 한가한 소리냐. 시간을 아껴 정신 없이 일해도 모자랄 판에. 그러나 생각해 보십시오.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는다고 억지로 나선 길이 어디 진정한 산책이겠습니까. 밥 먹고 5분도 안 돼 책상에 앉아 일을 하면 능률이 올라가겠습니까. 사람은 기계가 아닙니다. 설사 기계라고 해도 가끔은 엔진을 끄고 기름을 쳐야 합니다만.

저는 걷는 걸 참 좋아합니다. 마음이 답답해도 걷고 생각이 어지러워도 걷습니다. 몇 년 전 25년 간 피우던 줄담배를 단박에 끊을 때도 흡연욕구가 일 날 때마다 일어나 걸었습니다. 어느 정도였나 하면 새벽 세 시에 일어나서도 밖으로 나가 30분씩 한 시간씩 무작정 걸어 다녔습니다.

매일 봐서 하나도 새로울 게 없는 골목길. 봄이면 꽃 피고 가을이면 낙엽 떨어지는 보도블럭 위.  그러나 그 길을 걷다 보면 머릿속은 단순해지고 길은 어느새 내 생각을 따라 움직이는 하얀 백지가 됩니다. 그 백지에 점 하나 찍어 돌아오는 경우도 있고 단어나 문장 하나 써 오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은 그냥 백지 상태죠. 당연합니다. 산책은 그런 거니까. 아르키메데스도 목욕탕에 들어갈 때마다 유레카를 외친 건 아니었잖아요.

바쁠수록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요즘 들어 하는 생각입니다만 속담은 진리와 가장 맞닿아있는 멘션이 아닌가 합니다. 마음이 무거울수록 천천히 그러나 가볍게 걸으십시오. 보도블럭 하나하나의 무의미가 마음을 어루만지고 지나가야 새로운 게 보입니다. 바쁠수록 돌아가십시오. 그래야 비로소 사람이 보입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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