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먼드 카버

독서일기 2017. 4. 30. 14:18


오늘의 반성. 레이먼드 카버의 말.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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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FZFvg9htS2Q


일본 니신(Nissin)의 Cup Noodle은 광고를 잘 만든다. 이미 깐느광고제에서도 그랑프리를 여러 번 탔다. 고작 컵라면 광고인데 뭘 그렇게 잘 만들까. 어떻게 만들었길래 상을 탈까. 


코미디 요소 가득한 좌충우돌 에피소드들 속에 "hungry?'라는 카피 한 줄만 등장하는 '헝그리 시리즈'는 원시시대를 다루고 있다. 말도 안 된다. 원시시대에 컵라면이 있다니. 그러나 또 다 말이 된다. 원시시대나 지금이나 먹고 사는 문제는 기본적으로 똑같기 때문이다. 

어제 다시 본 ‘Survive’편도 마찬가지다. 한국이나 일본이나 세계화 물결에 휩쓸려 모두들 영어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니다. 그런데 사내에서 영어를 공용어로 쓴다고 하질 않나, 외국인 상사가 부임을 하질 않나 직장 생활도 고달퍼지기만 한다. 니신의 광고기획사는 이를 막부시대의 전투 상황으로 치환했다. 무기는 영어. 정말 우리가 들어도 절로 웃음이 나오는 “How are you”, “Fine, Thank you.And you?” 수준의 영어로 무슨 공격이 되겠는가. 외국인 상사의 “Pardon?” 한 마디에 전선은 무너진다. 여기서 '배고프면 싸울 수 없으니 먹고 하자'며 컵라면을 슬쩍 끼워넣는다. 

J, Walter Tompson은 “상품의 진실과 인생의 진실을 잘 합치하는 데서 광고의 힘이 발휘된다”라고 했다.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인 스트레스, 두려움이 컵라면과 만나는 이 뛰어난 장면들을 보라. 오래 전에 본 광고이긴 하지만 어제 아침 나는 약간 울컥했다. 특히 마지막 0.5초쯤 다리를 벌리고 소리를 지르며 적진으로 뛰어드는 병사의 모습에서. 그건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 숨어 있는 애처로움 아닌가. 살아가기 힘든 이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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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가 이사를 하게 되면서 개인 짐을 싸다가 예전에 쓰던 몰스킨 수첩을 찾았다. 내 이름이 인쇄된 수첩을 가지고 있었다니. 불과 몇 년 전 일인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수첩을 열어보고 깜짝 놀랐다. 책을 읽거나 인터넷을 하다가 찾은 글귀나 명언, 자료 등이 여기저기 깨알 같이 손글씨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나도 그때는 뭔가 되게 열심이었구나. 내 수첩을 보고 반성을 하게 되다니. 수첩을 버릴 수가 없었다. 이 몰스킨은 당분간 나의 '알리바이'를 위해 보관하자 마음 먹었다. 


그리고 새 노트를 하나 사야겠다,라고 마음먹었더니 여기저기서 한 번도 안 쓴 새 노트들이 쏟아져 나왔다. 쓴웃음이 나왔다. 중요한 건 노트가 아니라 마음이었던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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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인 오늘 낮, 뒤늦게 [밤의 해변에서 혼자]를 보러 갔다. 극장은 아리랑시네센터. 2000년대 초반 정릉에서 혼자 살 때 갔던 것 말고는 십수 년만에 가보는 극장이다. 구민회관입구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누가"형!" 하고 부르길래 쳐다보니 같은 동네 사는 배우 박호산이다. 작품 연습하러 가는 길이라고 한다. 요즘 좀 뜸했는데 밖에서 우연히 마주치니 반가웠다.


버스를 탔더니 어떤 아저씨가 옆에 앉자마자 내 넓적다리를 꽉 잡는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손짓을 이상하게 하고 소리고 자꾸 지르는 폼이 뭔가 몸이 불편한 분 같았다. 이런 분은 혼자 버스에 타면 안 되는데, 라는 생각을 하며 앉아 있다가 아리랑시네센터 정류장이 가까워져 내리려고 좀 비켜달라고 했더니 얼른 다리를 접어준다. 알고보니 선량한 사람이었다.

극장에서 표를 사고 나와 먹을 걸 파는 집을 찾아 헤매다가 웬 화덕피자집에서 칠천 원짜리 스파게티를 시켰는데, 끔찍했다. 스파게티를 내주고 남자 직원들끼리 점심을 먹고 있길래 혹시 피클은 안 주냐고 물었더니 냉장고에서 포장 피클을 하나 꺼내 주며 '200원인데 그냥 주겠다'고 한다. 돈 드릴게요, 라고 했더니 괜찮단다. 한숨이 나왔다.


극장에 올라가 표를 내보이는데 키가 작고 안경을 쓰고 목소리가 높은 남자 직원이 나를 쳐다보고 웃으며 "어떻게 저 있을 때만 오시나 봐요?!" 라고 인사를 한다. 저 여기 처음 오는데요, 라고 말이 헛나왔는데도 그 남자는 여전히 친한 사람 대하듯 싱글벙글이다.

극장에 들어가니 내 자리 뒤에 앉은 어떤 아저씨가 양말을 벗고 내 왼쪽 팔걸이에 발을 올려놓고 있었다. 발을 내려달라고 정중하게 말하고 자리에 앉았다. 두 줄 앞 좌석엔 할머니 두 분이 앉아 박근혜에 대해 큰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계셨다. 홍상수 영화를 보기엔 지나치게 고령이신 것 같아 마음이 조금 불편했다.

영화가 끝나고 불이 켜지자 뒤에 있던 그 남자 직원이 날 보고 또 인사를 했다. 영화를 같이 본 모양이었다. 엇 뜨거라 하고 얼른 밖으로 나왔다. 완전히 밖으로 나가려다가 아냐, 간단하게 영화 리뷰나 써야지 하고 극장 안에 있는 커피숍에서 아메리카노 한 잔을 사서 계단을 올라갔더니 그 남자 직원이 "뭐 두고 가셨어요?" 라고 반갑게 묻길래 그대로 다시 내려왔다. 이상한 날이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야겠다. 영화 리뷰는 다음에 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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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의 영화들

영화일기 2017. 4. 20. 10:43


며칠 전, 작년에 극장에서 봤던 영화들의 제목을 인터넷으로 대충 찾아 봤다(아, <헤이트풀8>은 IP TV로 봤구나).

아가씨
곡성
부산행
밀정
내부자들
마스터
최악의 하루
더 킹
럭키
에브리바디 원츠 썸!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본 투 비 블루
바닷마을 다이어리
헤이트풀 8
캐롤
데드풀
빅쇼트
우리들
동주
4등
당신자신과 당신의것
태풍이 지나가고
카페 소사이어티
너의 이름은
녹터널 애니멀스
라라랜드

그리고 보고깊었는데 못 본 영화들.

더스트
신비한 동물사전
닥터 스트레인지
나, 다니엘 블레이크
비치 온 더 비치
로스트 인 더스트

좋았던 영화는 아가씨, 곡성, 내부자들, 마스터, 최악의 하루, 캐롤, 설리 허드슨강의 기적, 바닷마을 다이어리, 동주, 태풍이 지나가고, 헤이트풀8, 라라랜드

제일 좋았던 영화는 내부자들. 하나 더 하자면 캐롤.

싫었던 영화는 너의 이름은, 녹터널 애니멀스, 더 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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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음이 어지럽거나 뭔가 머릿속이 정리가 잘 안 되는 느낌이 들 때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편들을 다시 꺼내 읽는 버릇이 있다. 오늘도 그런 이유로 하루키의 [도쿄 기담집] 중 <시나가와 원숭이>를 먼저 읽고 다음 작품으로 <어디에서든 그것이 발견될 것 같은 장소에서>를 골랐다. 신기한 것은 읽은 내용이 전혀 기억나지 않는데 군데군데 내가 볼펜으로 밑줄을 쳐놓은 문장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 단편은 메릴린치에서 증권 거래인을 하다가 갑자기 아파트 계단 사이에서 맨몸으로 사라져버린 남편을 찾으러 온 여자의 사연을 듣게 된 탐정의 얘기다. 그런데 책을 읽어나가다 보니 얼마 전에 읽은 [달과 6펜스]를 연상시키는 대목이 나왔다. 

그러고 보니 폴 고갱도 주식 중개인이었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진지하게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어느 날 부인과 아이들을 남겨둔 채 혼자서 타히티로 떠나 버렸다. 어쩌면...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나 설사 고갱이라고 하더라도, 지갑을 두고 떠나지는 않았을 테고, 만약 그 시절에 아메리칸 익스프레스 카드가 있었다면, 그것도 잊지 않고 가져갔을 것이다. 어쨌든 타히티까지 가야 하니까.

여기까지 읽고 나서 나는 에버노트에 끄적여놨던 [달과 6펜스] 독후감의 초안을 다시 꺼냈다. 책을 읽은 다음날 급하게 메모를 조금 했다가 일이 바빠져서 중단한 상태 그대로였다. 그래, 오늘은 이 책의 독후감을 마져 써보자, 라는 생각이 들었다.   


20세기 초반의 영국 런던. 성실한 가장이자 증권 브로커였던 평범한 남자가 갑자기 집을 나간다. 그런데 그 이유가 여자나 노름에 미쳐서가 아니라 엉뚱하게도 화가가 되고 싶어서란다. 너무나도 유명한 서머싯 몸의 소설 [달과 6펜스]의 도입부다. 나는 이 소설을 고등학교 때 삼중당문고라는 작은 문고판으로 읽었다(신기하게 아직도 내 책꽂이에 그 문고본이 꽂혀 있다). 어린 나이에 읽기에는 조금 버거운 내용이었는데 당시에도 주인공 찰스 스트릭랜드의 일탈은 꽤나 매력적이었고 그게 화가 폴 고갱의 일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이야기라는 대목에 더 기억에 남았던 것 같다. 그리고 많은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 [달과 6펜스]를 마흔 살쯤 다시 읽어보면 새로운 게 보일 것이라고 쓴 글을 읽었다. 마음이 혹했다. 다시 읽어서 새롭지 않은 소설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그래도 서울 변두리에 살던 어느 고등학생의 겨울을 흔들어 놓았던 찰스 스트릭랜드의 이야기라면 다시 한 번 만날 만 하지, 라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이 이야기는 소설이 아니라 회고록의 형식으로 진행된다. 스스로가 성공한 극작가이기도 했던 서머싯 몸은 화자를 런던에서이제 막  필명을 얻기 시작한 풋내기 극작가로 정하고 그가 만나게 된 찰스 스트릭랜드의 첫인상으로부터 시작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는 아무런 느낌이 없는 평범하고 덩치가 큰 남자였다, 로 요약된다. 주인공이라고 멋지거나 특이하거나 굳은 신념이 있거나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작가는 시작부터 사람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영웅담을 경계해야 한다 말하며 자신만의 '현대적인' 캐릭터 작법을 펼친다. 즉, 신화나 옛날 이야기에 나오던 멋진 주인공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만으로도 얼마든지 멋진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음을 증명해 보인 것이다. 1919년에 발표된 소설임을 생각하면 놀랍도록 모던하고 스마트했던 작가다. 훗날 영국 첩보국의 비밀 스파이로도 활동한 것으로 밝혀졌던 서머싯 몸은 작가이면서 동시에 멋진 카피라이터이기도 했다. 자신의 소설을 팔기 위해 백만장자 미망인의 이름으로 '서머싯 몸의 신작 장편에 등장하는 주인공 남자와 닮은 남편감 구함'이라는 가짜 신문광고를 냈던 것이다. 그 꼼수 덕에 그의 소설이 날개 돋힌듯 팔렸음은 물론이다. 

이야기가 조금 옆길로 샜다. 아무튼 그렇다면 이 평범하던 남자 찰스 스트릭랜드는 어떻게 해서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되었을까? 서머싯 몸은 그 이유를 알고 싶어 고갱의 일화를 찾아 타히티로 여행을 갔었다고 한다. 그러나 타히티에 찾아 간다고 고갱의 일생이 일목요연하게 짠, 하고 펼쳐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작가는 판단하기보다 알고자 하는 데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달과 6펜스>에 나오는 서머싯 몸의 이 문장은 소설가라는 직종이 학자나 기자와는 어떻게 다른지를 정확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여기 어떤 남편이 이유 없이 가출한 사건이 있다고 치자. 기자는 육하원칙에 따라 그 사건에 대한 기사를 쓸 수 있을 것이다. 그가 쓴 짧은 기사는 그것만으로 명쾌하게 사건의 개요를 말해 준다. 필요하다면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나게 되었는지에 대해 심리학자의 의견을 덧붙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뿐이다. 몇 줄의 기사만으로는 그 사건의 주인공들이 어떤 인생을 살아오다가 어떤 순간에 그런 일을 벌이게 되었는지,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예술사에 어떤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지 알 도리가 없다. 그리고 그런 일은 잘 설명되지도 않는다. 인간은 논리적으로만 행동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사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소설가의 몫이다. 소설가는 단 몇 줄로 요약될 수도 있는 사건 속으로 뚜벅뚜벅 걸어 들어가 이야기의 뼈대를 다시 맞추고 살을 붙여 입체적인 작품으로 만든다. 그래서 우리에겐 서머싯 몸 같은 입심 좋은 소설가가 필요한 것이다. 작가는 찰스 스트릭랜드의 부인을 옆에서 지켜보는 젊은 극작가를 등장시켜 주인공이 떠난 파리에 가서 그를 만나게 한다. 그런데 막상 만나본 그는 예술가로서 성공하려는 야심에 사로잡혀 있지도 않고 딱히 돈이나 편안함을 바라는 것도 아닌 것 같았다. 열심히 그림을 그리지만 남의 평판에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저 '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지 않소. 그리지 않고는 못 배기겠단 말이오. 물에 빠진 사람에게 헤엄을 잘 치고고 못 치고가 문제겠소? 우선 헤어나오는 게 중요하지. 그렇지 않으면 뼈져 죽어요.' 라고 뇌까리며 그림에 대한 본능적인 욕망만을 표출할 뿐이다.

"그 사람 정말 천재일세. 확실해. 지금부터 백 년 후에 말일세. 사람들이 자네나 나를 조금이라도 기억해 준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찰스 스트릭랜드와 알고 지낸 덕분일걸세." 

지금이라도 누군가에게 팬심을 나타내고 싶을 때 써먹으면 정말 좋을 것 같은 이 문장은 파리에서 찰스의 천재성을 발견하고 감탄하던 더크 스트로브의 말이다. 그러나 찰스는 자신을 극진하게 대접하는 더크에게 내내 시쿤둥할 뿐 아니라 나중에 찰스에게 반해 남편을 버리고 자신에게로 달려 온 블란치 스트로브에게도 매몰차게 굴어 결국 자살에 이르도록 만든다. 그런데도 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찰스는 자신의 생활이나 행복에 대해서도 철저히 무관심했다. 어느 정도냐 하면 의자에 앉을 때도 편한 의자에 앉는 법이 없었다. 어떻게 이런 인간이 생겨났을까. 

위에서도 한 번 얘기했듯이 작가는 판단하기보다 알고자 하는 데 더 관심이 많은 사람이다. 서미싯 몸은 이런 이상한 사내의 삶을 파고들어 역설적으로 보편적 인간들의 특질에 대해 알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소설을 빌어 '한 인간이 얼마나 다양한 특질로 형성되는지 아직 모르고 있었'다고 고백하고 '이제는 한 인간의 마음안에도 좀스러움과 위엄스러움, 악의와 선의, 증오와 사랑이 나란히 자리잡고 있음을 너무도 잘 안다'라고 털어놓는다. 그렇다. 사람은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그런 인간의 모순과 순리를 잘 나타내기 위해 작가는 찰스 스트릭랜드처럼 인생의 굴곡이 뚜렷한 캐릭터를 주인공으로 삼은 것이다. 

'달과 6펜스'란 제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여기저기서 마르고 닳도록 다루어 새삼 얘기하기에도 입이 아프니 생략하기로 하자. 다만 덧붙이자면 이 소설은 찰스의 인생을 따라가는 것도 재미 있고 그의 그림에 대한 묘사를 읽는 것만으로도 눈부시지만 그것 말고도 사랑이라든지 사람, 소설 작법 또는  하다 못해 인상파 화가들에 대해서까지 서머싯 몸이라는 작가가 지뢰처럼 여기저기 심어놓은 영리하고도 능숙한 달변들을 찾아보는 즐거움도 크다는 것을 일러주고 싶다.  마지막으로 예를 하나만 더 들어보면 소설 쓰는 일과 소설가의 자세에 대한 서머싯 몸의 독설은 이런 식이다.

"세상에 쏟아져 나오는 무수한 책들, 책들이 출판될 때 저자들이 갖는 밝은 희망,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을 생각하다 보면 그것이야말로 유익한 수양이 된다. 어떤 책이 대중의 주목을 받게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성공을 거두었다고 해봐야 한철의 성공에 지나지 않는다. 어쩌다가 책을 산 독자에게 그저 몇 시간의 휴식을 제공하기 위해, 또는 여행의 무료함을 달래주기 위해 저자가 얼마나 애를 썼으며, 얼마나 쓰라린 체험을 하였고,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아무도 모른다. 서평을 통해 판단해 보건데, 이들 책 가운데는 심혈을 기울여 쓴 좋은 책들이 많다. 구상에 고심한 책도 많다. 심지어는 평생의 노고를 바친 책들도 있다. 내가 여기에서 얻는 가르침은 작가란 글쓰는 즐거움과 생각의 짐을 벗어버리는 데서 보람을 찾아야 할 뿐, 다른 것에는 무관심하여야 하며, 칭찬이나 비난, 성공이나 실패에는 아랑곳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현대의 소설가 지망생들이 읽으면 한숨을 내쉬며 절망할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정작 서머싯 몸은 글로 돈을 아주 많이 벌어 대저택에서 살다가 1965년 91세로 영면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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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씨가 지워져서, 또 잃어버려서 팔찌 없이 지내다가 세월호가 인양되는 뉴스를 보고서야 반성하는 마음으로 다시 주문했던 팔찌. 아내와 나눠 끼려고 네 개를 주문했더니 이렇게 웃는 모습으로 도착했다. 미안하다 얘들아. 잊지 않을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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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말 중에 '간이 부었냐'는 표현이 있죠. 겁을 상실했냐는 놀림성 질문입니다. 


여기 그런 표현과 딱 맞는 광고가 있습니다. 콘돔 광고입니다. 원자력 사고 현장에서 보호 장구 없이 일을 한다거나 시가전에서 혼자 빨개벗고 있다거나, 유조선 화재사고에서 방화복 없이 일을 하는 것이나 모두 정신 나간 짓이겠죠. 콘돔 없이 섹스 하는 게 이런 것과 똑같은 행위라는 얘기를 직설화법으로 풀어놨습니다. 그리고 패키지엔 '너 자신을 보호하라(D'ONT BE STUPID : Protect yourself)는 경고가 크게 쓰여 있구요. 외국의 콘돔 광고들은 재미있는 게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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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북동으로 이사를 와서 생긴 변화 중 하나가 고양이에게 먹이를 주는 일이었다. 아파트에서는 없던 우리만의 뒷마당이 생겼고 거기엔 동네 길고양이들이 이따금씩 출몰했다. 단독주택이긴 했지만 내부는 단칸방처럼 좁디좁은 집이고 또 우리 부부는 고양이나 개를 기르는 일을 두려워하고 있었으므로 지나가는 고양이라도 우리에겐 반가운 손님이었다. 아내가 어느날 고양이 사료를 사오더니 뒷마당에서 옥상으로 올라가는 계단 밑에 사료와 물을 놓아 두기 시작했다. 그릇은 이가 빠지긴 했지만 노란색 루꾸르제 대접이었다. 그러자 길고양이들이 와서 먹이를 챙겨 먹었다. 계단 밑에 스티로폴 상자에 담요를 깔아두기도 했지만 거기 와서 잠을 자는 고양이는 없었다. 

길고양이들의 겨울나기는 혹독하기로 유명하다. 길에서 아무 거나 먹고 돌아다니는 것은 물론 시동이 꺼진지 얼만 안 되는 자동차 엔진 밑에서 잠을 자다가 아침에 변을 당하는 일도 허다하다. 병원에 데려가주는 주인이 없으니 병에 걸리면 저절로 낫기를 기다리거나 앓다가 그대로 죽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길고양이들의 수명은 아주 짧다고 한다. 

아내는 고양이들의 이름을 제멋대로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처음 와서 사료를 먹던 고양이 두 마리를 양일이, 양이라고 불렀다. 어미와 새끼로 보이는 녀석이들이었는데 새끼가 먹이를 먹을 동안 어미는 조금 떨어져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제 새끼가 배불리 먹이를 먹고 나면 비로소 자기도 와서 먹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양일이 양이 사이로 양삼이가 나타나기도 했고 나중에 양사까지 나타나 먹이를 두고 서로 으르렁거렸다. 우리는 큰 덩치로 기존의 고양이들을 윽박지르고 먹이를 독차지하는 양삼이를 미워했다. 게다가 어느날인가부터 양일이와 양이가 차례차례 보이지 않게 되자 그 미움은 더 커졌다. 양삼이는 덩치가 크고 검은 색깔 털을 가진 고양이었다.

그러나 어쩌랴. 양삼이도 양사도 결국은 오갈 데 없는 길고양이 신세인 것을. 그래, 너라도 많이 먹어라. 아내는 양삼이, 양사, 그리고 양오까지 누구든지 오기만 하면 아낌 없이 사료를 퍼주었다. 양오는 한쪽 귀가 조금 잘린 놈이었다. 나는 고양이들끼리 싸우다가 그랬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내는 어딘가 잡혀가서 중성화를 당하고 다시 풀려났을 것이라는 해석을 내놓았다. 그렇게 번갈아 먹이를 나누어 먹다가 어느날인가엔 결국 모두 사라지고 양오 하나만 남게 되었다. 

양오는 도대체 두려움이나 부끄러움이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보면 베란다 위에 앉아서 우리를 힐난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며 "이제야 일어나는 거야? 이 게으른 것들. 어서 먹이를 줘."라고 하는 듯한 얼굴을 한 채 발걸음을 계단쪽으로 향했다. 어떤 날은 저녁때도 찾아와 먹이를 요구했다. 아내는 기가 막힌다고 하면서도 그때마다 양오에게 먹이를 주었다. 

그런데 이틀 전부터 양오가 보이지 않았다. 아내는 우울한 목소리를 “여보, 양오가 안 보여.” 하며 걱정을 했다. 아침마다 마당으로 나가면 늘 우리를 쳐다보던 놈이 안 보이니까 그렇게 섭섭할 수가 없었다. 산꼭대기에 있는 작은 집에 사는 두 사람에겐 길고양이 한 마리의 존재가 생각보다 컸던 것이다. 


그런데 만우절인 오늘 아침에 일어나 밖에 나가보니 거짓말처럼 양오가 돌아와 있었다. 없어진지 사흘 만이었다. 다행이다. 어딜 갔다 이제 온 거야. 물어도 대답이 없다. 그저 어서 밥을 달라고 우리를 노려볼 뿐이다. 아, 이런 놈에게 계속 밥을 줘야하는 건가. 생각해 보면 우리도 참 불쌍하다. 그래도 잘 돌와왔어. 웰컴백이다, 양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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