섹스가 인생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아니더라며 억울해 하던 후배 여자애 생각이 났다. 어릴 땐 정말 그런 줄 알았는데 어른이 되어 유부남과 바람도 나보고 결혼도 해보고 하니 그것도 다 한때더라는 것이다. 나도 술 마시고 돌아다니며 노는 게 가장 재미있던 시절이 있었다. 그땐 술, 담배, 외박이 인생의 삼대 지표였고 심지어 술 마시는 게 좋아 '음주일기'라는 글을 따로 연재하기까지 했는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그것도 그냥 다 그러했다. 

어떤 삶이 가치 있는 인생일까. 돈을 많이 벌어 인정 받고 높은 지위로 올라가거나 사업을 확장하는 게 최대의 목표요 보람이라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남에게 폐 안 끼치고 우리끼리만 잘 살면 되지,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인생은 그렇게 몇 가지 목표나 가치로 홀딱 채워지지 않는다. 더 많은 것들이 필요하다. 가족, 친구, 일, 휴식도 필요하고 재미나 의미, 성취, 야망, 좌절도 필요하다. 심지어 썅년이나 개새끼들도 필요하다. 그렇게 온갖 잡것들이 채워지고 하나로 섞일 때 인생이 완성된다. 그래서 인생엔 불순물이 많다. 우린 모두 공평하게 불순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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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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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화장실에 가서 [해피 투데이]라는 잡지를 읽다가 들고나와 계속 읽었다. 이 책엔 매달 아내 윤혜자가 쓰는 칼럼 ‘방방곡곡 탐식유랑단’이 실리기 때문이었다. 이번달엔 마천중앙시장의 두부 전문점 <내일도두부>와 시장 입구에 있는 호떡 포장마차에 대한 글이었다. 나도 두 군데 다 같이 갔던 곳인데 특히 그 호떡집은 맛이나 역사에 있어서도 보물 같은 곳이었다(TV프로그램 ‘생활의 달인’에 나온 사람들 중에 그 집 아저씨에게서 호떡을 배운 분들이 여럿 있을 정도라고 한다).

아내의 글 말미에 프로필이 실리는데 내 얘기도 조금 섞여 있어서 읽을 때마다 웃긴다.

​필자소개 윤혜자 :
책을 비롯한 다양한 컨텐츠를 엮는 기획자로 일했다. 나이 들어 결혼, 아침을 안 먹으면 하루 일과를 시작하지 못하는 남편과 살며, 그리하여 즐거이 매일 아침밥을 지어 상을 차린다. 손수 밥을 지어먹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깨닫고 음식 공부를 하고 있다. 남편과 함께 동네 술집과 밥집을 어슬렁거리며 맛있고 즐거운 음식점을 만나면 여기저기 소문내는 일을 즐거워 한다.


같은 책에 실린 도올 김용옥 선생의 글 ‘도올곤지’를 읽으며 깔깔깔 웃었다. 자신이 제주도에서 한 강의에 많은 사람들이 감동을 했으며 <월간중앙>에 실으려 하는 글도 크게 환영 받을 것이다, 라는 식의 특유의 잘난척이 넘쳐남은 물론이고 월간중앙 한기홍 기자가 ‘선생님 글이 너무 래디컬에서' 실을 수가 없다라고 하자 ‘내가 먼저 쓰겠다고 한 글도 아니고, 자기들이 부탁해놓고 못 싣겠다고 하면, 내 피땀은 어디로 가나?그까짓 고료나 시간낭비의 문제는 용서할 수도 있지만, 문재인정부의 새시대에 나의 논리가 언론의 필터를 통과하지 못한다는 서글픔은 나의 존재의 시대적 기능이나 사명에 관해 근원적인 회의감을 불러 일으켰다’라고 투덜거리는 대목의 솔직함이 너무 너무 천진하고 귀엽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런 투덜거림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르던 닭 두 마리가 죽자 먹지 않고 향나무 밑에 묻어 준 얘기도 나오고 추석 연휴에 영화 [남한산성]을 보고 소설가 김훈에게 전화를 건 얘기도 나온다. 물론 김훈에게 맨 처음 소설 쓰기를 권한 사람이 자기였다는 자랑도 빼놓지 않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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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W9EHsn-9oto


대한민국 국가이미지 홍보영상에 인공지능이 주인공으로 등장한 건 처음 있는 일이라죠? 저희는 수십 년 후 미래의 세계에서 인공지능의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는 대한민국의 모습이 궁금했습니다. 그래서 A.I들이 인간과 전쟁을벌였다는 설정으로 이야기를 끌어갔던 겁니다.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해외문화홍보원에서 해마다 만드는 '국가이미지' 필름을 이번에 저희 회사가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경쟁PT를 통해 이 프로젝트를 따내긴 했지만 막상 제작 단계에 들어서자 고민이 많아졌습니다. 올해는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앞두고 있는 해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알리는 동시에 올림픽 홍보까지 해야한다는 부담감이 있었던 것입니다. 저희는 문체부 담당자들과 머리를 맞대고 몇 달 간 회의를 거듭한 결과 '강력한 스토리텔링'을 가져가기로 했습니다. 

가까운 미래, 인공지능(A.I)들이 인간들과 십 년 전투를 벌여 패배한 뒤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A.I '케이'가 인간에 대해 연구하면서 대한민국의 '잔치'라는 축제에 흥미를 느끼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어쨌든 저희가 꾸민 얘기에서는 인공지능이 인간들에게 처절하게 패배합니다. 화력으로는 우세했던 인공지능들이 결국 인간을 이길 수 없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어쩌면 그것은 인공지능은 가지고 있지 않은 마음이나 열정, 또는 평화에 대한 인간들의 열망 때문이었는지도 모릅니다. 


이름을 밝힐 순 없지만 모델료가 굉장히 높은 유명 한류스타(영화배우였습니다)가 저희 시나리오를 검토하고 마음에 든다며 기꺼이 출연료 없이 A.I역할을 맡아주겠다는 러브콜을 보내오기도 했지만 여러 가지 사정상 결국 포기해야 했습니다. 다행히 오디션을 거쳐 가장 신비롭고 무국적의 A.I스러운 인물을 뽑을 수 있어서 그녀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할 수 있었습니다(한국인입니다-그래도 우리나라 홍보물인데 금발의 외국인을 쓰는 건 좀 그렇죠). 어제부터 유투브에 릴리즈가 되었는데 결과가 어떨지 아직은 잘 모르겠지만, 일단은 호의적인 반응이 들려오고 있어 다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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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는 뭘 배우러 다니는 걸 좋아한다. 강연도 많이 듣고 음식이나 꽃을 배우러 다니기도 한다. 사실은 나도 아내처럼 뭔가 배우러 다니고 싶지만 회사 일만으로도 벅차 좀처럼 시간을 내지 못할 뿐이다. 세상에 시험 안 보는 공부만큼 재미 있는 건 없다. 인생을 헤아려 보아도 주로 돈 안 되는 일을 할 때가 더 재미 있었다. 일단 누가 시켜서, 또는 먹고 사느라 할 수 없이 하는 일과 내 자유의지로 하는 일은 모든 면에서 천지차이다. 매일 일에 치여 사는 샐러리맨들에겐 그래서 휴일이 필요하고 사생활이 필요한 것이다.

​​"자유의지를 가질 때만 비로소 커피 한 잔이나 럼주 한 잔도 더 맛있게 음미할 수 있을 것이었고, 담배 연기와 무더운 날 바다에서 하는 수영, 토요일마다 보는 영화나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메렝게 음악, 이 모든 게 육체와 정신에 더 좋은 느낌을 선사할 것이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 [염소의 축제]를 읽다가 눈에 번쩍 뜨여 잠시 멈추고 밑줄을 그으며 이 대목을 되새겼다. 이승우의 [가시나무 그늘]을 읽을 때도 느꼈던 ‘자유의지’의 소중함에 대한 한 구절이다. 오늘 같은 토요일 한가하게 한 잔 하는 차와 브람스의 바이올린 협주곡은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지만 사실은 너무나도 소중한 행복이다.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소설은 [새엄마 찬양] 이후 처음인데 노벨문학상을 탔던 만큼 대단한 필력과 통찰력에 유머까지 겸비하고 있다. 이런 우수한 작가가 말년에 극우파로 전락했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하고 가슴 아플 뿐이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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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사람들 중 ‘간서치의 책 이야기’라는 페이스북 페이지에서 활동하는 이들이 있다. 책을 지나치게 좋아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다. 나도 한때 이 모임의 회원이었으나 그들의 엄청난 독서량과 진지하고 성실한 태도에 질려 활동은 안 하고 가끔 눈팅만 하고 지내는 신세다. 간서치는 옛날 조선시대에 살았던 이덕무처럼 책만 읽는 바보를 이르는 말이라고 들었다. 아무튼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기꺼이 이런 바보 소리를 들으면서도 틈만 나면 책속에 파묻혀 지내기를 꿈꾼다.

여기 세계 최고의 간서치라고 소문난 할아버지가 있다. 알베르토 망구엘이라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작가다. 일찌기 서점 점원으로 일할 때 눈이 먼 보르헤스에게 책을 읽어주었다는 전설적인 이력을 가지고 있는 이 작가는 [은유가 된 독자]라는 이번 저작에서도 책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쏟아내고 있다.

‘은유가 된 독자’라는 책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책의 중요한 주제 또는 아젠다는 독서에 대한 온갖 메타포, 즉 은유들이다. 흔히들 책은 앉아서 세상을 여행하는 것이고 여행은 걸어 다니면서 읽는 책이라 했다. 여기에 인생이 끼어든다. 인생은 여행이고 독서는 인생을 경험하는 또 다른 방법이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삼담논법은 이렇게 해서 인생, 여행, 독서로 이루어진 ‘은유 삼종세트’로 완성된다.


망구엘은 기원전 7세기에 쓰여진 ‘길가메시 서사시’부터 구약성서, 아우구스티누스, 몽테뉴, 셰익스피어, 돈키호테, 플로베르, 톨스토이, 그리고 21세기의 전자책을 읽는 행위에 이르기까지 책을 쓰고 읽는다는 것의 역사와 의미에 대해 진정한 어른들만 낼 수 있는 경험과 지혜의 목소리를 들려준다.


물론 내가 '길가메시 서사시'를 읽었을 리가 만무하다. 구약성서나 아우구스티누스도 읽지 못했고 보바리 부인은 어렸을 때 삼중당문고로 겨우 읽었던 기억이 가물가물하고 오히려 플로베르가 법정에서 ‘마담 보바리는 바로 나다!’라고 외쳤다는 가십이 더 생생하다. 하지만 그러면 어떠랴. 독서의 대가가 이끄는 대로 한 발 한 발 따라 걸어가기만 해도 햄릿의 고뇌와 돈키호테의 야망, 안나 카레니나의 주체성, 오르한 파묵의 통찰 등을 차례대로 만날 수 있고 결국엔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로 분류되는 독자의 지위를 삼위일체로 한꺼번에 다 경험할 수 있는데.


나는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가 단테의 [신곡] 첫 문장에서 따왔다는 걸 알베르토 망구엘의 이 책을 읽으며 처음 깨달았다. 페터 한트케가 독일 사람이 아니라 오스트리아 극작가라는 것도 이 책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뭐 그런 건 중요한 게 아니다. 다만 프롤로그에서 '우리 인간은 세상이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간주하는 유일한 종’이라 말하던 작가는 여행자가 됐든, 상아탑의 거주자든 아니면 책벌레든 우리는 모두 ‘독서하는 피조물’이며 단어를 섭취하고 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어가 존재의 수단임을 잘 알고 있다는 결론을 전해준다. 우리가 책을 읽는 것은 거의 본능에 가까우며 생존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행위라는 소리다. 스마트폰에 둘러싸인 채 자신을 의심하면서도 꾸역꾸역 전철 안에서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에게 진정 위로가 되는 말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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