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자루

사진일기 2018. 1. 31. 00:09



하루 종일 눈이 내렸고 나는 일찍 집에 가서 눈을 치울 수 없는 상황이었다. 밤에라도 가서 눈을 쓸어야 하지만 집에 있는 빗자루는 자루가 빠져서 쓸 수 없는 상황. 끝나고 나가면 철물점들이 모두 문을 닫으므로 저녁 7시 회의를 앞두고 회사 앞 철물점으로 가서 플라스틱 빗자루를 샀다. 플라스틱 빗자루 한 개에 6천 원이라는 것도 오늘에야 알았다. 

회의를 마치고 아홉 시 경에 빗자루를 들고 버스를 탔다. 버스 승객들이 애써 나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좀 이상하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나는 오늘 집으로 가서 눈을 치워야 하는데. 빗자루를 타고 날아갈 수도 없는 일이고. 


전철로 갈아타고 아내에게 카톡 메신저를 했더니 자기도 지금 광화문에서 집으로 오는 버스 안이라고 했다. 전철역에서 아내를 조금 기다렸다가 만나 같이 골목길을 올라왔다. 거의 다 올라와서 아내가 잠깐 서 보라고 하더니 기념사진을 찍어줬다. 집으로 올라와 옆집 총각과 함께 집안팍의 눈을 쓸고 치웠다. 털모자를 쓰고 한참 작업을 했더니 영하의 날씨인데도 땀이 나서 머리가 젖고 온몸이 후끈후끈했다. 오늘밤에라도 이렇게 눈을 치워놓지 않으면 내일은 눈이 얼어 빙판이 된 언덕과 골목길을 다녀야 한다. 아내 말대로 겨울의 산꼭대기 단독주택 생활이 '쫄기쫄깃'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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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수의 [뜨거운 피]를 읽고 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작가 김언수가 '구암'이라는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희수라는 건달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는데, 우선 놀라운 것은 쫀득쫀득한 대화들이 장난 아니게 재미 있다는 것이다. 원래 건달들이 주먹보다는 입으로 먹고 산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얘기이긴 하지만 여기 나오는 희수나 만리장 호텔 사장 손영감 등 주요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는 반말과 존대를 자연스럽게 오가는 부산 사투리의 유연함에 힘입어 한 마디 한 마디가 퐁당퐁당 튀어다니는 느낌이다. 장르가 느와르 소설이기에 범죄 얘기가 영화차럼 흥미롭게 펼쳐지고 기기묘묘한 불법과 사기, 도박 시퀀스들이 흘러넘친다. 나이 마흔이 되어 집 한 칸 없이 호텔방을 전전하는 희수의 처지에선 짙은 우수도 흐른다. 

김언수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전쟁 때 내려온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판자촌에서 자랐는데, 거기 섞여 살던 건달, 창녀, 사기꾼, 살인자 들의 모습이 그대로 소설 속 구암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책 뒤에 붙어있는 '작가의 말' 중 일부를 읽어보자(난 소설을 읽기 전에 작가의 말부터 읽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비밀은 없고, 마음은 안타깝고, 피는 뜨겁다. 그래서 그 동네 술자리에선 싸움이 벌어지고 술판이 엎어지는 일이 흔했다. 죄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백수에, 건달에, 루저 주제에 서로에게 훈장질을 어찌나 해대는지, 사실 술자리가 엎어지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한 남자가 점잖게 충고를 한다. "니가 일을 그딴 식으로 처리하니 망조가 드는 거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니 내 말 들어라." 그러면 앞의 남자가 발끈한다. "너나 잘해라. 이 새끼야. 마누라한테 처맞고 다니는 주제에 어따 대고 훈장질이고." 그러면 어김없이 술판이 뒤집어지고 소주병이 날아다니고 주먹질이 이어진다. 하지만 하루만 지나면 다시 또 술을 마시며 "어제는 미안했다." "미안은 무슨. 우리가 뭐 남이가." 이 난리를 치는 동네 말이다.  

출퇴근 시간에만 조금씩 아껴서 읽고 있는데 마침 김동식의 [회색인간]을 비롯한 소설집 세 권도 도착해서 걱정이다. 뭐부터 읽어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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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창선 씨에게 

유창선 씨, 안녕하십니까? 유창선 씨가 쓴 책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를 읽고 문득 편지글로 독후감을 써보고 싶어졌습니다. 당장 저자와 만날 수는 없지만 편지글이라면 함께 앉아서 얘기하는 기분이 들지 않을까 해서요. 그런데 우리나라 말이나 글은 종적인 인간관계 덕분인지 호칭이 꽤나 까다롭습니다. 처음 말을 거는 경우엔 더 조심스럽지요. 약간 고민을 해보다가 그래도 요즘 많이 쓰는 '님'보다는 '씨'가 더 꾸밈이 없고 무심한 것 같아서 그냥 '유창선 씨'라고 부르기로, 제멋대로 정해 버렸습니다. 괜찮으시죠? 


세상은 그대로인데 변덕스러운 것은 나의 마음이다. 지난 밤 그렇게 절망스러웠던 세상의 색깔이 다음 날 아침이면 환해 보이는 것이 우리의 마음이다.

유창선 씨가 사는 게 힘들고 외로울 때 읽었다는 니체에 대한 글 중 출근길 지하철에서 읽다가 팍 꽂힌 대목이 바로 이 부분이었습니다. 세상은 잔인하지도 따뜻하지도 않고 그저 늘 냉정한 자세를 유지하고 있을 뿐이라는 평소의 생각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고 앞으로 사는 게 힘들 때마다 나도 이 구절을 다시 한 번 떠올려야겠다 생각하게 된 것인데, 이는 시사평론가로 활동하다가 이명박 박근혜 정권 때 방송 일이 다 끊기자 정권에 줄을 서거나 반대편에 서는 대신 동네 독서실에 틀어박혀서 책을 읽을 수밖에 없었던 유창선 씨의 이야기가 너무 마음에 와닿았기 때문이었겠죠. 

근대의 탄생과 함께 신으로부터 개인을 되찾아왔다는 우리들이지만 아이러니컬하게도 현대인들은 일과 일상에 매몰되어 또다시 '나'를 잃어버린 삶을 살고 있습니다. 혼자 있을 시간, 즉 가만히 앉아 자신을 물끄러미 들여다 볼 시간을 좀처럼 가질 수 없게 된 것이죠. 그래서 늘 버릇처럼 '정신이 없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삽니다. 카피라이터로 시작해 TV 광고 만드는 일을 이십 년 넘게 하고 있 는 저도 그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합니다. 허구헌날 남의  상품이나 브랜드를 어떻게 하면 빛나게 할 수 있을까 궁리하느라 정작 자신의 인생은 챙기지 못하는 악순환을 반복하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카피라이터는 배우 이나영의 입을 빌어 '내 생각이라는 녀석은 잘 지내고 있는지 커피를 마시며 생각해 봅니다'라는 카피를 쓰기도 한 것이겠죠. 

광고 일을 하다 보면 많은 사람들이 '정말 내가 원하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광고주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물건이 많이 팔리거나 브랜드의 가치를 높이는 광고를 만들어 줄 것을 원하지만 그게 어떤 각도로, 어떤 포인트로 제작되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이는 광고뿐 아니라 인생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라 생각됩니다.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해야 자신이 행복해지는지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어느 순간 일상을 멈추고 자신을 들여다 볼 계기가 필요한 것입니다. 유창선 씨가 동네 독서실로 들어가면서 비로소 진짜 내가 하고싶은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된 것처럼 말이죠. 

우리는 생물학적으로 한 번밖에 살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의 결단에 따라서는 여러 번의 삶을 살 수 있다. 지금 살고 있는 삶이 나의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때, 새로운 삶을 위한 결단을 내린다면 우리는 또 한 번의 삶을 살 수 있다. 

이 책은  '책을 읽는다는 것은 본질적으로 고독한 행위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근무하던 곳에 사표를 내고 나오며 '돌아갈 다리를 내 손으로 끊어버린 셈'이라 생각했던 유창선 씨. 저도 사표를 여러 번 써보았기 때문에 그게 어떤 심정이었을지 약간은 이해가 됩니다만 다른 건 몰라도 당시의 결심은 '머리'가 아니라 '마음'이 했을 것이라는 것만은 확신합니다. 마음이 온전히 내 것이고 나를 채우는 전부라면 정신은 그저 테크니컬하게 사용하는 무형의 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니까요. 마음이 시킨는 대로 사는 것, 결코 쉽지 않습니다.

진보적인 정치평론가였던 유창선 씨는 양심이 시키는 대로 세상을 버리고 책을 통해 더 넓은 세상으로 깊이 들어가는 길을 택했죠. 그리고 그 결심은 '나의 고민은 이천몇백 년 전 소크라테스의 고민과 다를 바가 없다'는 깨달음을 얻으면서 추진력을 얻은 것 같습니다. 플라톤이 쓴 [소크라테스의 변명]은 그대로 당시 유창선의 처지를 설명하는 우화이기도 했고 유창선을 대신해 선배 철학자가 목숨 걸고 먼저 써 놓은 '양심선언'이이기도 했으니까요.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을 읽으며 '나답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고  카프카가 쓴 소설 [변신] 속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에 자신의 모습을 투영해 보면서 현대인의 태생적인 불안을 실감하기도 했을 것입니다. 백이 숙제의 신화를 해체했던 루쉰의 글은 또 어떤가요. 정치를 비롯한 인간의 삶은 그것 자체가 욕망의 덩어리일진대, 지고지선한 얼굴을 한 영웅의 모습은 존재할 수 없다는 그의 통찰은 빅토르 위고가 쓴 [파리의 노트르담]에서 보여준 절대악도 절대선도 없다는 깨달음과 상통하는 이야기일 겁니다. 

오독일 수도 있겠지만 책의 목차를 다시 더듬으며 유창선 씨가 책에서 만난 사람들과 나누었던 대화들을 제 마음대로 상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왜 제목이 '삶은 사랑이며 싸움이다'였는지 다시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삶을 살려면 부단히 싸워야 한다는 유창선 씨의 말에 공감하기에 일단 책에서 언급되었던 책들을 찾아 꼼꼼히 읽어야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독서에 관한 책을 읽는 것이 예쁜 여자에 대한 동경만 채우는 일이라면 그 텍스트를 찾아 읽는 일은 직접 그녀를 만나 손을 잡고 살결을 만지고 입김을 불어넣어 결국 내 애인으로 만드는 일이니까요. 

자신의 결단에 따라 누구나 여러 번을 살 수 있다는 유창선 씨의 의견에 동의합니다. 제 생각에 당신은 두 번째 인생을 멋지게 살고 계신 것 같습니다. 요즘은 문화계도 허지웅처럼 얄쌍하거나 김어준처럼 지랄스럽거나 아무튼 좀 튀어야 하는데 유창선 씨는 너무 고지식한 아저씨처럼 보이는 게 아닐까 좀 걱정을 했습니다. 하지만 책을 깊게 읽고 넓게 생각함으로써 얻은 정신의 수려함이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이 책의 부제가 '존엄하게 살기 위한 인문학 강독회'인 것처럼 존엄하게 살고 싶은 눈 밝은 독자들이라면 유창선 씨의 숨은 가치를 단박에 알아볼 테니까요. 너무 일이 바빠 사 놓고도 읽지 않을 게 뻔해 전작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를 아직 구입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다음 주쯤엔 사서 읽도록 하겠습니다.


요 며칠 날씨가 미친듯이 춥고 미세먼지도 많았습니다. 건강 유의하시고 더 좋은 글 많이 써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이만 총총.

독자 편성준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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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778350.html 


생은 하나의 문을 닫으면 다른 문이 열린다. 매일 머리 아프게 걱정하며 사는 것보다는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는 게 낫다. 자신이 싫어하는 상황에 본인을 둘 필요가 없다. 인생의 한 부분이 끝나버렸다고 해서 (전체가) 다 끝난 건 아니다. 나는 영화 몇 편이 될 정도의 재밌는 삶을 살았다. 그런 삶이 ‘좋은 인생’이다. 늘 재밌는 일이 생겨 인생이 불안하지 않다.


일 년 전 오늘 아내가 소개해줘 읽고 공유했던 요리사 스스무 요나구니의 인터뷰. 머리가 복잡했던 당시에 많은 용기와 위로를 받았는데 다시 읽어봐도 여전히 좋다. 좋은 위스키처럼 킵해 놓고 가끔 꺼내 음미해볼 만하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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