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미국 작가가 쓴 것 같은 프랑스 소설을 한 권 읽었다. 레일라 슬리마니의 두 번째 장편 소설 [달콤한 노래]다. 물론 이 작품은 프랑스 최고 권위의 문학상인 콩쿠르상을 받은 작품인 만큼 당연히 정통 프랑스 소설이 틀림 없지만 '아기가 죽었다. 단 몇 초 만에. 고통은 없었다고 의사가 분명하게 말했다...'로 시작하는 첫 문장부터 소설이 끝나는 장면의 "얘들아, 이리 와. 목욕할 거야."라는 대사에 이르기까지 이전에 똑 같은 상을 탔던 선배 작가 에밀 아자르나 파트릭 모디아노의 몽환적인 글들에 비하면 한결 선명하고 단호한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음악 비즈니스에서 일하는 폴과 법조계에서 새롭게 두각을 나타내고 싶어하던 미리암이 등 두 젊은 중산층 부부가 아이들을 돌봐줄 보모를 구하는 에피소드로 시작해서 너무나 일 잘 하고 나무랄 데 없었던 보모 루이즈가 어느날 갑자기 돌변해 두 아이를 살해한 뒤 자신도 자살을 기도한 사건을 다룬 짧은 소설이다. 레일라 슬리마니는 뉴욕에서 실제로 벌어진 사건을 파리로 가져와 새로운 이야기로 만들었다고 한다. 내가 이렇게 소설의 내용을 거침없이 밝힐 수 있는 이유는 그 이야기가 첫 챕터에 모두 나오기 때문이다. 살인이 벌어지긴 하지만 함정이나 서스펜스가 없는 이야기.  

그렇다면 이건 무슨 소설일까. 소설가에겐 어떤 스토리를 던지고 그 시퀀스들을 흥미진진하게 이끌어 가는 것도 주요하지만 등장인물들에게 왜 그런 스토리가 생겨나게 되었을까를 집요하게 추적하는 것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리고 문학성이 높거나 완성도가 뛰어난 작품일수록 등장인물에 대한 묘사나 전후 설명이 더 밀도 높고 입체적으로 이루어진다. 아기가 죽었다는 사실만 밝히고 제대로 된 살해 방법조차 언급되지 않는 첫 챕터를 단숨에 읽은 후 나는 레일라 슬리마니의 소설 [달콤한 노래]는 명백하게 후자에 해당하는 작품임을 직감했다.

누가 죽였느냐,가 초반에 이렇게 밝혀진다면 이제 남은 건 왜 죽였느냐 뿐이다. 그런데 이 소설을 끝까지 읽고 나서도 왜 루이즈가 아이들을 죽이게 되었는지 직접적인 동기는 쉽사리 알 수가 없다. 다만 이 집으로 들어와 처음에는 요정이라는 찬사까지 받던 루이즈라는 여자가 어느 순간부터 폴과 미리엄의 경계를 받는 처지가 되고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일련의 에피소드들을 하나 하나  읽어나가다보면 마지막엔 그녀의 심리상태가 가 얼마나 절박한 상황에 이르렀는지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물론 이런 팩트들은 레일라 슬리마니라는 뛰어난 작가에 의해 마치 가장 잘 아는 사람에게 그 사람 얘기를 시시콜콜 듣는 것처럼 내밀한 부분까지 효과적으로 전달된다. 이는 루이즈에 대해서만이 아니다. 노동계층인 루이즈에게 공정하게 대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하는, 선량한 부부이면서 동시에 사회에서 인정받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교양 있는 직장인인 폴과 미리암을 묘사한 대목을 잠깐 읽어보자.

삶은 이런전런 책무와 완수해야 할 계약, 잊으면 안 될 약속의 연속이 되었다. 미리암과 폴은 일로 정신이 없다. 그들은 그렇게 일에 치인다는 것이 곧 성공을 알리는 징표이기라도 한 듯, 끊임없이 정신이 없다는 말을 한다. 그들의 삶은 용량을 초과해서, 남은 자리는 겨우 잠을 자기 위한 것일 뿐, 무언가를 응시할 자리는 전혀 없다.

살고 있는 도시만 다를 뿐 성공을 바라보며 일에 치여 허덕이는 것은 우리들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아이들이 생기기 전 폴이 언젠가 미리엄에게 했다는 "우리 여행도 많이 하고, 아이는 팔 밑에 끼고 다니자. 당신은 대단한 변호사가 될 거고, 나는 잘나가는 아티스트들을 프로듀싱할 거야. 아무것도 달라질 건 없어"라는 말은 오래 전 읽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만화 [마스터 키튼]의 한 에피소드 중 "난 서른다섯 살에 중역, 마흔엔 사장이 될 거야. 그럼 은퇴를 하고 세계 여행을 떠나자. 당신은 사교계에 데뷔를 하고 난 그레이엄 그린 같은 소설가가 될 거야...당신이 청혼하면서 내게 한 말이야." 라는 어느 주인공 여자의 대사로 겹쳐진다. 어느 것 하나 슬픔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현대인들의 자화상이다. 

그러나 아무리 힘들어도 기댈 언덕이 있었던 폴이나 미리암과 달리 루이즈에겐 아무 것도 없었다. 난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 폴 가족이 근교에 있는 친구 농장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시내에서 루이즈를 목격했을 때다. 루이즈는 그들을 보지 못하고 쇼윈도 사이를 허정허정 걸어다니고 있었는데 이는 미리암이 자기 집에 있지 않은 상태의 루이즈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미리암이 차 안에서 루이즈를 멍하니 쳐다보며 '이야기를 착각하고 낯선 세상에 와 있는, 영원히 떠돌아야 할 운명을 선고받은 인물 같아 보인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어린 아들이 "루이즈 아줌마 어디 가는 거야?"라고 묻고 미리암은 "집에 가는 거지. 자기 집으로." 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루이즈는 그때 이미 세든 집에서도 쫓겨날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가슴이 미어지는 씬이다. 

루이즈가 원래는 착한 여자였는지 악한 유전자를 물려받은 인간이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우리나라에 왔던 작가 레일라 슬리마니는 "나는 살인에 대해 설명하기보다는 모욕의 순간들을 자세히 묘사하고 싶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어디나 모욕이 있고 모순과 소외가 존재한다. 그리고 뛰어난 문학적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 프랑스의 젊은 소설가는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사건을 수사하던 경감의 현장검증을 앞두고 끝나는 이 소설은 미야베 미유키의 [화차] 마지막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이건 단지 보모의 살인사건으로 끝나지 않는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라는 커다란 질문부터 시작해 관계의 문제, 내가 속한 세상에서 밀려나는 것에 대한 공포,영원히 서로를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다는 실존적 절망...그래서 이 이야기는 파리에 사는 루이즈나 미리암만의 문제가 아니라 현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의 이야기로 확장된다. 

뉴욕에서 실제로 아이들을 살해했던 보모의 범행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나는 모른다. 어쩌면 작가도 몰랐을 것이다. 사실에 대한 단서가 적을수록 '돌아갈 곳 없는 외로운 사람의 절망적 선택'이라는 작가의 문학적 상상력은 더 큰 힘을 얻는다. 분명한 것 한 가지는 뛰어난 소설가들은 아주 작은 기사 한 줄만 읽고도 훌륭한 소설을 써낸다는 사실이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신문 귀퉁이 1단 기사에서 전당포 노파 살해사건을 접하고 구원과 심판에 대한 걸작 [죄와 벌]을 썼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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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본 [블랙 팬서]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주절주절 쓰다가 지겨워서 다 지워버렸다. 말이 안 되는 걸 말 되게 하는 게 마블이나 DC코믹스의 큰 특기이긴 하지만 이번 영화는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손발이 오그라들 지경이다. 인종 문제나 사회적 문제를 다뤘다는 점에서 차별화를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난 그것도 블랙 피플들이이나 제3세계 팬들을 위한 '만들어진 정치적 올바름' 아니었을까 하는 의심이 든다. 

과학기술이 아무리 발달해도 늘 주인공의 혈통을 따지는 후진 세계관은 어쩔 도리가 없다. 이건 [스퍼맨] 때부터 이어지는 히어로물의 한계인 것 같다. 그리고 첨단 무기를 쓰다가도 결국엔 늘 주인공들끼리 칼싸움이나 육박전을 벌이는 전통도 볼 때마다 웃긴다. 이래저래 난 히어로물에선 그닥 재미를 보지 못했다. 다들 열광하는 [스타워즈] 시리즈의 서부영화 세계관도 별로고 수트 갈아 입었다고 목소리가 달라지는 [배트맨] 시리즈도 어이 없어하는 편이다. 그나마 안티 히어로인 주인공의 농담이 쉴새 없이 쏟아지는 [데드풀]이 그 중 제일 재미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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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래비스를 듣는 토요일 아침>  

또다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게으른 토요일 아침이다. 다른 아침도 게으를  수 있는데 왜 토요일에 게으른 것만이 진정 '즐거운 게으름'처럼 느껴지는지 모르겠다. 아침에 일어나 브릿팝 밴드 트래비스(Travis)의 [The Boy With No Name] 앨범을 틀었다. 빔 벤더스의 영화 [파리 텍사스]의 주인공 트래비스를 따서 밴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하덕규가 책을 많이 읽던 시절 서영은의 단편 소설에 감명 받아 '시인과 촌장'이라는 밴드 이름을 만든 것과 같은 방식이다. 그러고 보니 [택시 드라이버]의 주인공 이름도 트래비스다.

나는 어쩐 일인지 군대에 있을 때 내무반에 굴러다니던 [택시 드라이버]라는 해적판 소설책에 푹 빠져 며칠을 보낸 적이 있다. 겉장에 분명 로버트 드 니로의 사진과 함께 폴 슈레이더가 썼다고 나와 있었으나 지금 생각해보면 폴 슈레이더의 시나리오를 대충 소설로 개작한 게 틀림 없다. 그때는 저작권 개념이 전혀 없던 시절이었으니까. 아무튼 군대 가기 전 겉멋이 들어 비디오로 빌려 보았지만 전혀 이해를 하지 못했던 마틴 스콜세지의 그 어려운 영화는 원작자 폴 슈레이더의 친절한 글에 의해 뒤늦게 공항동의 한 공병대 내무반에서 비로소 나의 마음 속으로 들어왔다. 영화를 볼 때 너무나 어렸던 나는 로보트 드 니로가 시빌 셰퍼드와 데이트를 한다면서 왜 포르노극장으로 그녀를 데려간 건지 전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소설을 읽고 나니 비로소 바보 같은 트래비스의 뻘짓이 너무나 쉽게 이해되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영상보다는 글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라고 하면 또 거짓말이고. 아내가 배가 고프다고 화를 내고 있으니 빨리 아침을 먹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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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제일 싫어하는 말이 뭔지 아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 참 X 같은 말이지. 야, 사실 죄가 무슨 죄가 있냐. 그 죄를 짓는 그 개새끼가 나쁜 새끼지... " 

어젯밤 늦게 한 케이블 TV 방송국에선 영화 [넘버 쓰리]를 틀어주고 있었다. 시나리오 작가 출신 송능한 감독이 1990년대 중반에 만든 이 영화엔 주옥 같은 명대사들이 쉴 새 없이 쏟아지는데 그 중에 하나가 바로 배우 최민식의 입을 통해 전달된 마동팔 검사의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의 문제다. 

서지현 검사의 성추행 피해 사실 고발로 시작된 대한민국 전반에 걸친 성폭력 문제는 최영미 시인의 시 '괴물'이 뒤늦게 조명 받음으로써 문화계의 '미투 운동(#metoo)'으로 확산되었다. 그의 시에 등장한 괴물이 원로 시인 고은이라는 건 이제 세상이 다 아는 사실이다. 논란의 장본인도 마지못해 잘못을 인정하는 듯한 발언을 하긴 했다. 그의 유감 표명에 진정성이 있냐 없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본다. 문제는 비겁한 공범의식을 시대의식으로 포장하며 그를 감싸려 들거나 한켠에서 일어난 작은 일 가지고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지는 말자며 논란의 핵심을 흐리는 동료 문인들이나 문화언론계 인사들이다. 심지어 최영미가 '피해자 코스프레'를 남발하고 있다고 말한 동료 시인도 있다. 

"너무 벗겨서 드러내기보다는 알면서도 모른 척 지나가는 그런 관대함이랄까, 그런 것도 좀 있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 시시콜콜 다 드러내고 폭로하고 비난하면 세상이 좀 살벌해지고 여유가 없어지는 것 같다. 우리가 이렇게 일거수일투족 조심하다 보면 과연 뭘 할 수 있을까 싶다.”  

그리고 위 인용문은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예술가가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리 시시콜콜 따지려 드냐는 원로 평론가 김병익의 어이상실 중앙일보 인터뷰 내용 중 일부다. 좋게 얘기해서 행적은 단죄하되 시인의 예술까지 매도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논지다. 여기서 잠깐 짚고 넘어가 보자. 누가 이제부터 고은의 시를 싫어하라고 하기라도 했나? 갑자기 고은의 시가 품질 나쁜 시로 둔갑을 하기라도 했나? 성추문 논란 이전이나 이후나 그의 시들을 좋아하든 말든 그건 전적으로 개인의 몫이다. 다만 이제 불행히도 그 사실이 밝혀졌으므로 우리에겐 그의 시들을 '색안경 끼고 볼 권리'가 생겼다고 얘기하는 것 뿐이다. 이게 맥락이다. 그건 우리만이 아니라 스웨덴 한림원의 입장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성추행범에게 노벨문학상을 준다는 건 작품이 아무리 멋지고 의미가 있어도 곤란한 일 아닌가. 시는 변하지 않았지만 시가 탄생한 배경이나 집안은 명백하게 변한 것이다.  

서정주가 친일시나 전두환 찬양시를 썼음이 밝혀졌을 때 많은 사람들은 똑같은 소리를 했다. 시인의 행적은 밉지만 모국어를 빛낸 그의 찬란한 업적까지 저버리지는 말자고. 정말 그런가? 한 번 거꾸로 생각해볼 순 없을까. 그렇게 기회주의적인 사람이 어떻게 그런 아름다운 시들를 쓸 수 있는 걸까. 한 번 정신의학적으로 연구해 봐야 하는 것 아닌가. 예술의 본질은 무엇인가. 한 손으로는 성추행을 하면서 다른 손으로는 명작을 써낼 수 있는 게 예술이라면 '예술의 진정성' 같은 건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거나 이미 소멸된 것이란 말인가. 

'행적은 단죄하되 시인의 예술까지 매도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논지를 계속 펼치고 있는 사람들의 말을 번역해 보면 '과정이 구리더라도 결과물만 좋으면 인생의 승자가 될 수 있다'는 깡패논리와 다름 아니다. 그런 생각을 가진 자들이 계속 자기 자식들이나 후배들에게 그렇게 가르치고 있는 동안엔 언제라도 제2, 제3의 고은과 이윤택이 계속 생겨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를 바로잡는 방법은 지금이라도 그 더러운 손모가지들을 댕겅댕겅 잘라서(실제로 자르라는 얘기는 아니다) 더 이상 거짓된 작품을 생산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며 그를 지켜본 사람들이 '한 번이라도 성추행을 범하면 나도 저 꼴을 당하게 되겠구나'하는 경각심을 심어주는 것이다. 물론 그러고 나서도 서정주나 고은이나 이윤택의 작품이 여전히 좋다는 멘탈의 소유자들은 그냥 포기하자. 어떤 생각을 하건 뭘 좋아하건 그건 전적으로 그들의 자유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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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사다 먹고싶기도 하고 새 책을 사서 읽고 싶기도 한 토요일 오후. 밖에 나가 간식과 책을 사올까 하려다 전에 사놓고 시간 없어서 못 읽고 있던 나쓰메 소세키 전집을 꺼내 읽으라는 아내의 충고를 받아들이기 하고 [갱부]를 꺼내 읽기 시작. 

읽기 전 책 뒤에 붙어있는 장정일의 해설에 따르면 이 소설은 소세키 소설의 일반적 특징인 비교 문명론자의 시각이나 문제의식이 돌출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막상 본문을 펼쳐보면 처음부터 마음이 만들어내는 세상의 변화나 뭐라고 딱 규정하기 힘든 인간이라는 존재의 복잡성에 대한 묘사 등 지식인적인 묘사와 고찰들로 가득하다. 열아홉 살짜리 가출소년인 주인공이 길에서 만난 허름한 사내와 만주를 놓고 신경전을 벌이는 모습에선 소세키 특유의 유머도 등장한다. 

다시 소세키와의 만남이다. 반가운 마음에 계속 읽고 싶지만 토요일 저녁에 계속 책만 읽고 있기도 그렇고. 옆집 총각에게 간단히 한 잔 하자고 했더니 냉큼 좋다는 콜이 왔다. 얏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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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 일곱 시에 CGV압구정에 가서 7시 45분 [올 더 머니] 입장권을 한 장 샀다. 오늘 오후에 CGV 노블레스 회원으로 신규 가입을 한 나는 표를 사면서 혹시 오늘부터 할인을 받을 수 있는지 물어보았다. 매표소엔 마침 직원과 수습사원 두 명이 근무 중이었다. 둘 다 젊은 여성이었다. 

성준) 저, 오늘 실버회원 가입했는데요.
여1)  네? 실버...? 
여2) 노블레스 얘기하는 거야...(귓속말로) 
성준) 실버나 노블레스나(속으로).

성준) 오늘부터 할인이 되나 해서요.
여2)  아, 그게 오늘 오후 늦게 저희에게
         도착하게 되어 있는데 아직 안 왔네요. 
성준) 오후 늦게라니...
          지금도 상당히 늦은 오후인 거 같은데.
          얼마나 더 늦어야 되는 거예요? 

여2)  그러게요. 하하. 
성준) 그냥 주세요. 

여2)  네, 만천 원. 7시 45분 한 분, 맞으시죠? 
성준) 네. 그럼 CJ 원카드 적립은 되죠? 
여2)  네, 휴대폰으로 보여주세요...
         아, 손님 로그인을 해주셔야.
성준) 아, 제기랄. 로그인...
         비밀번호를 바꿨는데 생각이 안 나요. 

리들리 스콧 감독의 [올 더 머니]를 봤다. 원제를 보니 'All the money in the world'였다. [러브 액추얼리]도 아마 'Love actually is all around'였을 것이다. 우리나라로 들어오면서 제목 싹뚝 잘라먹는 전통은 유구하다.

암튼, 폴 게티라는 사상 초유의 이탈리아 석유 재벌의 손자가 납치되고 범인들이 몸값으로 무려 천칠백만 달러를 요구했다는 게 이야기의 구심점이다. 그것도 70년도 초에. 그런데 이 노인네가 랜섬 지불을 거절한 것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쓴 소설이 있고 그걸 각색한 걸 리들리 스콧이 영화로 만든 것이다. 

난 뭔가 긴박하고 스마트한 납치극을 상상했던 모양이다. 더구나 배경이 1970년대인 줄도 모르고 갔었다. 물론 크리스토퍼 플러머나 미셸 윌리엄스의 연기는 훌륭했고 두 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이끌어가는 스콧 감독의 연출도 유장했다. 그런데도 전체적으로는 뭔가 허전했다. 내가 부자의 삶을 동경하지 않아서인가. 부자들의 내면적 갈등이나 고통에 좀처럼 동화되지 못했고, 범인들의 애절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납치범들에게 귀를 잘린 폴 게티 3세에게 마구 감정이입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차라리 전직 CIA요원인 마크 윌버그가 아랍의 왕족들과 협상을 벌이는 자리에서 그들끼리 주고받는 아랍어를 알아듣고 "복수형으로 해주십시오, 폐하."라고 문법을 지적하거나 자신을 비난하는 미셸 윌리엄스에게 'CIA에서 무기를 가지고 다니는 것은 하수들이나 하는 일이고 나는 물건이나 사람을 파는 협상을 주로 했다'라고 말하는 재치 있는 대사들이 더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이 영화는 작품 외적으로 더 화제가 된 영화이기도 하다. 원래 폴 게티 역으로 캐빈 스페이시가 캐스팅되어 영화를 다 완성했으나 뒤늦게 그의 성추행 논란이 터지면서 주연배우를 크리스토퍼 플러머로 바꿔 재촬영을 한 것이다. 2주만에 다시 재촬영을 끝냈다고 하는데 노 개런티로 다시 촬영장에 간 미셸 윌리엄스 등에 비해 마크 윌버그만 재출연료를 비싸게 요구해 구설에 오르게도 했다 한다. 그러나 클리스토퍼 플러머의 연기력이나 발성 등이 하도 훌륭해서 다시 찍었다는 게 믿기지 않은 정도다(원래 감독은 처음부터 이 배우의 캐스팅을 원했으나 제작자들이 더 유명한 배우를 원해 케빈 스페이시가 낙점되었다는 소리도 있다). 

전 세계 최고의 부자, 납치와 몸값 요구 등등은 매우 선정적인 소재다. 영화 말고도 대니 보일이 TV드라마로 이 이야기를 또 찍고 있다고 하니. 그러나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게 없다는 건 이런 경우에도 해당되는 건지도 모르겠다.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신경전, 그리고 전직 CIA요원의 정의 추구하기에 힘을 쏟다 보니 모티브였던 납치는 느슨해져버리고 범인들은 당위성이나 스마트함이 부족해 균형이 깨져버렸다. 실화를 뒤집을 수 없어서이겠지만 마지막에 납치된 손자를 구출하는 시퀀스는 지루하고 요령부득이라 헛웃음이 나올 정도의 해프닝에 가깝다. 

그래서 '세상을 다 가지게 된 자가 들여다보게 될 심연'이나 '납치 스릴러를 빙자한 흥미진진 슈퍼리치 해부도감'이라는 씨네21 평론가들의 그럴듯한 한 줄 평에 동의가 되지 않는다. 잘 만들었지만 개인적으로는 큰 울림이 없는 영화. 나의 소감은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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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지갑

독서일기 2018. 2. 9. 14:29


일을 하다가 막히면 책꽂이에서 아무 책이나 꺼내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는 습관이 있다. 

오늘은 [이 정도는 알아야 하는 최소한의 인문학]이라는 책이다. 이 책의 네 번째 챕터엔 공동체에 대한 이야기들이 쓰여 있다.  '사람은 서로 신뢰하고 존중할 때 행복하다'는 글에 이끌려 본문을 펼쳐보다가 예전에 어디선가 흥미롭게 읽었던 실험 이야기가 다시 언급되어 있길래 읽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가 길거리에서 지갑을 잃어버렸을 때 되찾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라는 질문을 가지고 실험을 했다. 50 달러가량의 돈을 지갑에 넣고 이름을 표시한 1,100개의 지갑을 전 세계 도시 곳곳에 떨어뜨려 놓았다. 지갑이 가장 많이 돌아온 도시는 어디였을까? 

놀랍게도 인구 13만 명이 사는 덴마크 올보르에서는 지갑 100%가 회수되었고 지갑 속 돈도 그대로였다고 한다. 이로써 덴마크는 세계에서 신뢰도가 가장 높은 나라임이 증명된 것이다. 멕시코나 중국, 이탈리아, 러시아에서는 지갑이 돌아오는 확률이 굉장이 낮았다고 한다. 

사회 시스템이 잘 되어 있어서 사람들이 악에 바치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는 나라일수록 행복감도 클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이런 실험을 하면 과연 몇 개의 지갑이 되돌아올 수 있을까 생각해 보았다. 지갑을 자주 흘리는 나로서는 여러 번 해 본 실험이다(비록 원해서는 아니었지만). 한숨이 나온다. 슬프다. 일이나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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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심

짧은 글 짧은 여운 2018. 2. 8. 13:28

세상에 잘난 놈들 

다 죽어버려라, 

소리치고 싶다가도 

막상 다 죽어버리고 

나만 남으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입을 다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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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아홉 시부터 극장에서 팝콘을 먹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신경을 가진 사람들일까, 하는 헛된 생각을 하며 영회 [신과함께-죄와벌]을 일요일 조조로 보았다. 이미 천사백만 명이 보았고 일요일인데다 상영 시간이 일러서인지 극장 안은 한산했다.

김용화의 영화는 [미녀는 괴로워] 때도 그랬지만 영화라기보다는 잘 짜여진 한 편의 게임이나 쇼프로를 보는 느낌이다. 아이언맨을 감독한 존 패브로가 출연까지 한 영화 [어메리칸 셰프]나 마크 러팔로가 나오던 [비긴 어게인]을 볼 때도 이건 영화라기보다는 하나의 흥미로운 콘텐츠에 가깝다고 생각했는데 이 영화는 그것들과는 또다른 의미에서 전통적인 영화를 벗어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드라마가 선명한 주호민 원작 웹툰의 틀을 가져오고 강림, 해원맥, 덕춘 같은 캐릭터들이 적재적소에서 버티고 있는 상황이라 이야기가 딴 방향으로 새거나 하는 헛짓거리는 없다. 확고한 프레임에 이야기의 핵인 소방관 자홍의 눈물겨운 사연이 펼쳐진다. 이승과 지옥을 넘나드는 스펙터클한 풍경은 엄청난 CG를 통해 시각적 쾌감을 극대화해준다. 저승 차사들은 삶과 죽음을 초월한 존재들이기에 시종일관 경쾌한 농담과 투덜거림을 섞어가며 게임의 규칙을 설명하고 차태현이 분한 자홍은 유일하게 현실적인 캐릭터를 맡아 관객들에게 교훈적인 신파 메시지를 끌고 가는데 여긴엔 몇 번의 반전이 숨어 있어 흥미를 더한다.

다만 염라대왕을 비롯한 그 많은 지옥 관련 종사자들이 일개 소방관 자홍의 사연에 이토록 휘둘린다는 건 거의 모든 SF들이 가지고 있는 '패럴렐 월드'의 한계임과 동시에 한 편의 에피소드를 이끌어 가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란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난 아직도 개인적으론 이 평행우주론이 납득이 가지 않는다. 인과를 얼버무리기에 너무 편리한 선택이라서 그렇다. 그래서 [인터스텔라]를 볼 때도 주인공들이 온 우주의 시공간을 돌고 돌아 마지막에 거실 책꽂이로 다시 돌아오는 장면에서 그렇게 허탈해 했던 모양이다.

암튼 김용화는 감독이라기보다는 엔터테이너에 가깝고 일종의 사업가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러므로 이 영화도 하정우 등 주요 등장인물들의 건강이 허락하는 한 헐리우드 뺨치는 프랜차이즈로 거듭 커나갈 수 있을 것이다. 이사카 코타로의 '사신 치바' 시리즈에서도 보았듯이 지옥이나 저승사자 이야기 등은 언제나 사람들의 흥미를 유발하니까. 막판 쿠키 영상 비슷한 꼭지에서 성주신으로 등장한 마동석을 보고 기분이 좋아졌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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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 중 어느 때가 가장 좋으냐고 묻는다면 나는 주저하지 않고 토요일 아침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주중의 아침은 일어나자마자 라디오 켜고 화장실 가고 씻고 밥 먹고 출근하느라 다람쥐처럼 바쁘지만 토요일 아침에 우리 부부는 그야말로 한껏 게으름을 피우며 이불 속에서 한참을 시시덕거리기 때문이다.

잘 잤냐는 아침인사부터 시작해 고양이 순자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오늘은 영화를 한 편 보든지 서촌이나 홍대로 가든지 아무튼 뭘 하며 놀아볼까 하는 사소한 계획들을 세우기도 한다. 우리 둘은 모두 '토요식충단' 창단멤버들이라 토요일엔 근사한 외식을 꿈꾸는 경우가 많은데 요 몇 주는 내가 주말에도 계속 회사를 나가는 바람에 모임이 이루어지기 쉽지 않았던 것이다. 사실은 오늘도 오후에는 회사를 나가야 한다(아내는 내가 어제 '일요일 저녁 회의가 토요일 저녁 아홉 시로 변경되었다'라고 하자 도대체 그 회의를 소집한 사람이 제정신이냐고 물었다. 그 회의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는지 알면 아마 놀라 자빠질 것이다). 

내가 토요일 아침을 유난히 좋아하는 이유는 '방해 요소'가 없는 시간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보통 금요일에 술을 마시고 잠들면 늦게까지 잘 것 같지만 의외로 토요일 새벽에 깨는 경우가 많다. 그러면 나는 다시 잠드는 대신 기쁜 마음으로 거실로 나가 차를 끓이고 책을 읽는다. 아내는 고른 숨소리를 내며 쌔근쌔근 자고 있고 온 세상은 아직 고요하다. 식탁에 의자를 바짝 붙여놓고 스툴 위에 발을 올려놓은 채 책을 읽는 시간은 그 무엇보다 충만하고 소중하다. 나는 이런 시간에 전에 읽었던 하루키나 윤대녕이나 정미경의 옛 단편, 테드 창이나 배명훈의 SF단편, 또는 장석주 시인의 에세이 등을 다시 뽑아 읽는 경우가 많다. 그러니까 이 시간의 독서는 정보 수집이나 지식 충전이 아니라 순전히 즐기는 시간인 것이다. 이렇게 책을 읽다가 졸리면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가 자면 그만이다. 

가끔은 밖으로 나가 집 주변을 산책하거나 옥상에 올라가기도 한다. 옆집 총각 말고는 우리집 위로 아무도 살지 않는 산꼭대기라 맑은 공기와 하늘은 온전히 나의 차지다. 이럴 땐 성북동으로 이사오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울러 평일엔 일에 쫓겨 이렇게 좋은 환경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즐기지 못하는 것에 대한 반성도 하게 된다.  

아내가 밥을 짓는 동안 이 짧은 글을 썼다. 자판을 두드리고 있으니려니 압력솥이 치익~소리를 내며 밥이 다 되었음을 알려왔다. 김치찜에 가까운 김치찌개에 하얀 쌀밥을 비벼 먹고 내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아내가 차를 준비했다. 차를 마시며 '무한도전 스페셜'을 시청한다. 사소하고 게으른 아침이다. 비록 오후에는 회사에 가서 일을 해야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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