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짧은 글 짧은 여운 2018. 3. 27. 11:16


수영 수업을 마치고 샤워실에서 나와 옷을 입고 물을 한 잔 마신 뒤 탈의실을 나오다 보니 탈의실 복판에 있는 기다란 벤치 위에 많이 보던 가방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내 배낭이었다. 옷을 벗고 샤워실로 갈 때 가방을 라커에 넣는 것을 잊고 그대로 방치했던 것이다. 

오늘따라 가방 안엔 노트북과 지갑, 신분증 등 귀중품들이 모두 들어 있었다. 가방을 두고 갔었네요. 내가 가방을 들고 탈의실에서 일하는 아저씨에게 멋적게 웃으며 말했더니 "여기 그냥 놔둬도 돼요."라고 말씀하신다. 당장 가방을 열어 내용물을 확인하기가 멋적어 그냥 들고 나오다 스무 발자국쯤 지나 작은 지퍼를 열어보니 지갑이 그대로 있었다. 다행이었다. 나중에 나이가 더 들어 고속버스 대합실 같은 데서 고개를 돌리다 아내를 만나면 '아, 나 결혼했었지!' 하고 깜짝 놀랄까봐 약간 걱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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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스포일러 주의) 

내가 광화문에 있던 MBC애드컴이라는 광고대행사에  신입사원으로 일할 때 얘기다. 어느날 아침 출근을 했더니 사람들이 조간신문을 앞에 두고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는 것이었다. 이유는 어떤 남자가 조간신문 1면에 5단통광고 지면을 사서 홀딱 벗고 찍은 돌사진을 싣고 그 밑에 'oo야, 나랑 결혼해 줄래?' 라는 청혼광고를 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관련 기사를 읽어보니 둘이 같이 명동 거리를 걷다가 TV 방송 프로그램 중 전광판에 뜬 다른 커플의 청혼 이벤트를 보고 여자친구가 너무나 부러워했단다. 그래서 남자친구가 자기 아버지에게 가서 "예쁜 며느리 얻으시려면 돈을 써야 해요"라고 설득해 이백만 원인가를 빌려 그 광고를 집행했다는 것이었다. 정작 광고회사를 다니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던 우리들은 그 기발함과 실천력에 감탄했다. 물론 다  좋아하기만 한 건 아니었다. 대체로 여직원들은 어머, 좋겠다. 너무 로맨틱해! 하고 부러워했고 남직원들은 아유, 미친새끼...하고 담배를 뻑뻑 피우며 화를 내기도 했으니까. 

어떤 일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 보면 생각지도 못한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는 모양이다. 미국 남부 깡촌 미주리주에 사는, 딸이 강간살해로 죽은 뒤에도 경찰이 범인은커녕 단서조차 잡지 못해 울화가 치민 상태로 지내던 밀드레드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새벽에 한적한 마을 도로를 운전하고 지나가다가 아무도 쓰지 않는 망가진 광고판(빌보드) 세 개가 나란히 서 있는 것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는다. 세 개의 광고판에 경찰을 자극하는 카피를 한 줄씩 실어 수사를 촉구하기로 한 것이다. 그녀는 경찰서 바로 건너편에 있는 광고판 업자를 만나 광고 금액을 묻고 광고판에 써넣을 문구를 의논한다. "법적으로 쓰면 안 되는 글자가 뭐야? F*ck이나 C*nt 같은 단어는 물론 안 되겠지." 여기서부터 마틴 맥도나 감독의 유머 감각이 빛을 발한다. 빌보드를 붙이는 과정에서 백인 경찰과 흑인 인부들이 나누는 대화 속엔 미국 남부지방에 깊게 뿌리내린 차별과 불합리에 대한 야유들이 숨어 있다. 그러나 그 대사들이 너무 신랄하고 웃겨서 얼굴이 찌푸려지기보다는 오히려 즐거워진다. 그녀가 세 개의 빌보드에 나눠 써넣은 문장은 '어떻게 됐어 윌러비 서장, 아직도 체포 못했어? 우리 딸은 강간당하면서 죽어갔는데.' 대충 이런 내용이었다. 에둘러 경찰이라고 하지 않고 직접 서장의 이름을 거론했고 딸이 어떤 일을 당했는지도 분명히 적었다. 당연히 경찰들은 질색을 하고 주민들도 도를 넘은 그녀의 행동에 우려를 표명한다. 윌러비 서장은 인품이 좋아서 지역사회에서 명망도 높은 데다가 얼마 전에 췌장암에 걸려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는 불쌍한 인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녀를 만난 윌러비 서장이 "내가 암에 걸린 걸 알고도 그 광고판을 썼어요?"는 질문에 태연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다소 멍청해 보이고 버릇도 없는 경찰 딕슨에게 '고문 경찰'이라고 계속 놀리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쯤되면 영화는 딸을 죽인 범인을 찾아 나서는 방향으로 곧장 흘러가야 할 것 같지만 감독은 이런 관객들의 예상을 뒤엎는다. 대신 아내에게 폭력을 휘두르다 젊은 여자와 바람이 나 이혼을 한 밀드레드의 전남편을 불러 오기도 하고 어린 두 딸과 아내를 두고 가야 하는 윌러비 서장의 눈물 어린 마지막 섹스와 자살 과정을 정감 넘치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리고 흑인들을 괴롭히던 폭력 경찰에서 정의로운 히어로로 거듭나는 딕슨의 변화를 보여주며 이 영화가 단순히 살인사건을 다루는 게 아니라 여러 사람의 인생 자체를 태피스트리처럼 엮은 쫀쫀한 휴먼드라마임을 깨닫게 해준다.

강렬한 메시지를 담고 있지만  좋은 시나리오를 가진 대부분의 영화들이 그렇듯이 이 영화에도 기발한 아이디어들이 많이 나온다. 새벽 도로에서 손톱을 깨물며 광고판을 이용해 사건을 해결할 생각을 하는 밀드레드부터 아내와 딸들을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자살을 기획하는 윌러비, 그리고 술집에서 일부러 폭행을 유도해 범인의 DNA를 확보하는 딕슨과 불타버린 광고판을 다시 세우게 만들어주는 인부들의 마법 같은 도움까지. 그리고 이런 아이디어들을 빛내주는 프란시스 맥도먼드와 우디 해럴슨, 샘 록웰 등 일급 배우들의 연기가 있다. 

시종일관 등장인물들과 비꼬거나 받아치는 대사를 주고 받으며 웃음을 선사하던 프랜시스 맥도먼드가 음주운전을 걱정해 차를 빌려달라던 딸의 부탁을 거절하며 무심코 되받았던 막말(나 걸어가다가 강단 당할지도 몰라  - 그래, 강간이나 당하든지)이 현실이 되어버린 장면을 보여줄 땐 정말로 눈물이 나서 혼났다. 이 영화엔 전형적인 악인이 등장하지 않는다. 과장된 연기를 하는 사람도 없다. 그저 모두 자신의 입장에서 할 만한 행동을 하고 보일 만한 반응을 보여줄 뿐이다. 그래서 마지막 장면에서 '그'와 '그녀'가 범인을 어떻게 처리하든 그런 건 상관하지 않게 된다. 이미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공감하게 된 눈빛만으로도 더 이상 바랄 게 없기 때문이다. 

가끔 신기한 일이 일어난다. 이를테면 오래 전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데어 윌 비 블러드] 같은 끝내주는 작품이 같은 해에 나란히 개봉하는 기적. [쓰리 빌보드]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그런 생각을 했다. 와, 이런 끝내주는 영화를 몇 주 간격으로 계속 보게 되다니! 폴 토머스 앤더슨의 [펜텀 스레드], 스티븐 스필버그의 [더 포스트], 그리고 마틴 맥도너의 [쓰리 빌보드]까지 올해(사실은 작년) 미국영화들 정말 대박이다. 두 시간 내내 울다 웃다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고 영화가 빨리 끝나버릴까봐 두려워하다가 뛰는 가슴을 진정하며 극장 문을 나섰다. 이 영화는 작년 아카데미에서 작품상과 각본상 등 여러 부문 후보에 올랐고 결국 프랜시스 맥도먼드의 여우 주연상 수상(그녀의 수상 소감도 많은 화제를 모았다)과 샘 록웰의 남우 조연상 수상으로 작품의 위엄을 증명했다. 아이디어도 좋고 연기, 각본, 엔딩 처리까지 너무 좋다. 부디 놓치지 말고 극장에서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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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

혜자 2018. 3. 24. 14:09




며칠 전 아내가 어딘가에서 인터뷰를 하면서 성공이 뭐라고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철학의 완성'이라 대답했다는 얘기를 들었다. 다소 엉뚱한 답이었지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세상을 비라보는 태도가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하니까. 여러번 인터뷰를 했지만 이런 대답을 한 사람은 처음이라며 인터뷰어가 놀라더란다. 아무래도 결혼을 잘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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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하다 토요일

독서일기 2018. 3. 18. 13:13

'讀하다 토요일' 공지합니다  


토요일 오후에 몇몇 사람들이 모여 같이 책을 읽는 모임을 만들면 어떨까? 어느날 아내가 제게 이런 얘기를 했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시작했는데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정말로 그런 시간을 만들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래서 읽을 책 몇 권의 책을 골라 드디어 시작합니다. 이름하여 토요일 오후의 한가한 독서모임 '讀하다 토요일'. 

요즘 사람들이 책을 너무 안 읽으니 억지로라도 책을 읽게 만들자... 뭐 이런 계몽적인 생각은 전혀 없습니다.  저도 아내도 책을 좋아하긴 하지만 이런저런 일에 치이다 보니 일상에서 차분하게 앉아 '책만 읽는 시간'을 내는 게 너무 힘들어서 일단 우리를 위해 그런 시간을 내보자 생각했던 것입니다. 

대학로에 있는 동네서점 겸 카페 '책책'의 선유정 대표가 저희 취지에 동의해 선뜻 장소를 제공해 주시기로 했습니다. 선유정 대표도 편집자 출신이라 책을 정말 좋아하거든요. 책책에선 책도 팔고 예쁜 연필도 많이 팝니다. 따끈한 차를 마실 수도 있고 미니 전시회나 공연도 열리는 공간입니다.

모임 진행은 이렇습니다. 제가 먼저 그 달에 읽을 책을 페이스북 페이지 '북카페에서 수다떨기'나 제 담벼락에 공지합니다. 그럼 한 달에 한 번 정해진 토요일 오후 2시에 책책으로 와서 각자 사온 그 책을 묵독합니다(책책에도 그 달의 책을 한두 권 준비해 놓으라 부탁하겠습니다). 그리고 한 시간 정도 지난 후 서로 그 책에 대한 얘기를 자유롭게 나누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 와서 책을 다 읽으려면 시간이 모자라고 미리 사서 읽다 여기 와서 마저 읽거나 읽은 책을 다시 한 번 읽는 게 좋겠죠. 모임의 사회는 저나 아내 윤혜자가 돌아가면서 보도록 하겠습니다. 얘기를 시작하기 전 '세 줄 독후감' 같은 걸 써서 서로 발표하면서 왜 그런 독후감을 갖게 되었는지 얘기해보는 것도 재미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첫 6개월 동안은 한국 소설만 읽기로 했습니다. 이건 제가 마음대로 정한 것인데, 얼마 전 제 후배 카피라이터 두 명에게 읽을 만한 한국 소설 몇 권만 추천해 달라고 했다가 자기들은 한국 소설을 전혀 읽지 않는 '한국소설 문외한'이라는 자랑 섞인 대답을 듣고 충격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마치 제가 어렸을 때 잘 나가는 학생들이 '가요는 전혀 듣지 않고 팝송만 듣는다'고 하던 것처럼요. 저는 우리나라 소설들이 얼마나 읽을 만한 게 많은지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일단 제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작가나 작품을 선정해서 같이 읽어보자는 것입니다. 

'독하다 토요일'에선 책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지, 또는 그 책을 알고 있는지 하는 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한 달에 한번이라도 토요일 오후 몇 시간을 오로지 책에 쏟고 그 즐거움을 만끽하는 게 목적의 전부입니다. 그날 모임에 대한 후기는 제가 간단히 작성해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자, 그럼 무슨 책을 읽을지 목록을 알려 드려야겠죠. 


4월 7일의 책 :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5월 12일의 책 :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
6월 19일의 책 : 한강의 <흰> 
7월 14일의 책 : 김언수의 <뜨거운 피>
8월 11일의 책 :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 
9월 8일의 책 :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

그 외 추천하고싶은 책 - 윤대녕의 <대설주의보> / 황석영의 <손님> 


모임을 매주 두 번째 토요일에 열고 싶지만 4월달은 저희가 선약이 있어서 부득이 첫 번째 토요일에 모일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독하다 토요일'의 시작은 2018년 4월 7일 토요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회비 얘기. 제 경험상 무료는 강연이든 교육이든 흥미도 떨어지고 잘 안 가게 되더군요. 그래서 약간의 책임감과 소속감을 위해 회비를 책정했습니다. 회원 회비는 6개월에 10만 원입니다. 6개월 간 같이 모여 책을 읽고 얘기를 나누고 다음 6개월은 어떻게 운영을 할지, 무슨 책을 읽을지에 대해 다시 의논을 하겠습니다. 회비는 6개월치 일시불을 원칙으로 하며 카드결제는 안 됩니다(나중에 계좌번호를 올리겠습니다). 그 달만 참여하시고 싶은 분은 월 2만원을 내시면 됩니다. 회비는 그날의 장소 대여비와 약간의 간식 등을 마련하는 데 쓰일 것입니다. 책은 각자 구입하셔야 하구요.  

저희 부부 포함해서 예닐곱 명 정도가 모이면 적당하겠다 생각하고 있는데 사실 몇 분이 신청하실지는 아직 감이 안 잡힙니다. 혹시 아무도 없으면 저희 둘이라도 시작할까 합니다. 편성준나 윤혜자에게 페북 메시지로 참여 의사를 전해주시거나 페이스북 담벼락에 댓글로 참가 신청을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럼 나중에 저희가 연락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책을 좋아하는 많은 분들의 많은 참여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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억울해

짧은 글 짧은 여운 2018. 3. 17. 09:26

<억울해> 

아침에 일어나 고양이 순자 밥을 챙겨주고 화장실에 갔다가 돌아와 요즘 출퇴근길에만 읽던 가즈오 이시구로의 [나를 보내지 마]를 꺼내 읽고 있는데 아내가 방금 꾼 꿈 얘기를 한다. 자기가 어떤 회사에 들어갔는데(어떤 회사인지는 모른단다) 거긴 외국인들이 많았고 어떤 아랍 가족이 있었는데 그 중 남편이 죽어버렸고 나머지는 같이 어떤 어두컴컴한 방으로 끌려가서 특수 교육을 받았는데 아내는 어떻게 된 영문인지도 모르면서 한 방에 있어야 하는 처지였다. 한 여자 강사가 와서 말하길 이제부터 너희들에게 거절은 있을 수 없고 오로지 복종만 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강의는 영어와 한국말이 혼용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갑자기 그 방으로 내가 들어와 아내는 반가운 마음에 나를 침대로 끌어들이며 같이 자자고 했는데(꼬시려고 민감한 부위를 애무까지 했는데) 내가 뻣뻣하게 버티며 응하지 않는 바람에 화가 많이 났었다고 아내가 말했다. 난 대체로 아내의 꿈에 등장해 뭔가를 하지 않아서 야단을 맞는 경우가 많다. 아내를 두고 다른 곳으로 가버려서, 아내를 버리고 오늘부터 다른 여자를 만나기로 했다고 선언해서, 아내가 먼 데서 부르는데 못 알아봐서 등등. 오늘도 억울하게 야단을 맞았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아내를 깨우지 않는 건데. 내가 소설책을 읽는다고 안방 불을 켜는 바람에 아내가 꿈 도중에 깨버렸다. 나는 당신이 특수공작원이 될 수도 있었는데 내가 개입하는 바람에 무산되어 미안하게 되었다고 사과했다. 그러게 말이야, 하고 나를 한참 야단치던 아내는 남편 배고프겠다며 아침밥을 차리러 부엌으로 갔다. 순자가 아까부터 마루에 깔아놓은 양탄자 위에 길게 누워 놀아달라고 야옹거리고 있다. 좀 게을러도 되는 토요일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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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면 어렸을 때부터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고 살아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무슨 연유에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일곱 살 때까지는 '나는 학교를 가지 않겠다'고 말해서 어른들을 걱정시켰는데 막상 여덟 살이 되어 학교에 들어가더니 단박에 모범생이 되어버렸다. 당시엔 어른들이 시키는 것은 뭐든지 열심히 하거나 잘 해야 칭찬 받는 풍토였으므로 나는 어른들의 말을 잘 들으려 노력했고 공부도 꽤 열심히 했다. 그래서 놀고 싶을 때도 제대로 놀지 못했고 군것질을 하고 싶었지만 늘 용돈이 부족해서(또는 나이보다 어른스러운 아이이므로) 포기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중고등학교 때는 약간의 반항심이 있었지만 여러가지 규율과 입시에 대한 부담, 사춘기 특유의 존재론적 방황 등으로 인해 제대로 된 반항은 할 수가 없었다. 대학에 들어가서야 약간의 자유가 생겼지만 내게 주어진 시간과 술, 담배, 허무를 열심히 누리는 대신 학점이나 연애, 미래 설계가 펑크나기 일쑤였으므로 그것 역시 '자학'에 가까운 자유였다. 설상가상 군대엘 갔더니 자유라는 건 눈을 씻고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부대원 중 자야할 시간에 안 자고 버티는 놈 정도가 있었지만 그걸 자유라고 부르기엔 너무 서글프고 웃겼다. 

졸업을 하고 힘들게 광고대행사에 들어갔더니 선배들이 술을 사주며 우리는 영원한 '을'이라고 털어놓았다. 모든 걸 광고주가 시키는 대로 해야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대행사에서 나와 친구와 크리에이티브 브띠끄를 차려보기도 했고 CM프로덕션에 들어가보기도 했다. 이번엔 '병'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을'인 광고대행사가 시키는 대로 해줘야 하는 것 때문이었는데 그것은 다 사실이었다. 그래서 프리랜스 카피라이터로 독립도 해봤다. 내 위엔 아무도 없고 출퇴근 시간도 없고 일도 내가 마음대로 고를 수 있으므로 일단 자유는 넘쳐 흘렀다. 그러나 내가 하고싶은 대로 몇 번 했더니 곧 통장의 잔고가 바닥이 났다. 


세상에 자기 마음대로 하고 사는 사람이 있을까. 있다. 예전엔 왕이 있었고 지금은 기업의 회장님이나 건물주 등이 마음대로 하고 사는 사람들이다. 물론 사장이나 왕에게 물어보면 "무슨 소리야, 나도 내 맘대로 못 하는 게 얼마나 많은데?" 라고 외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보다 마음대로 하고 사는 게 월등히 많은 것만은 사실일 것이다. 그 증거로 대기업의 회장님들은 대체로 장수하는 반면 이인자들은 단명한다는 통계가 있었다. 삼성이었던가, 아무튼 연봉이 수십 억원인 부회장님이 평소 소주 한 잔 이상을 마시지 않는 게 음주 철칙이었다는데 그 이유가 '회장님이 언제 찾으실지 몰라서'였다고 한다. 너무 한심하고 슬퍼서 그 기사 내용이 오랫동안 잊혀지지 않았다. 이 정도면 영화 [넘버 쓰리]의 대사처럼 '일등이 다 해먹는 세상'이나 다름없는 것 아닌가. 

안희정 전 지사의 성폭행이 '내 마음대로 해도 된다'라는 심리에서 시작되었다는 전문가들의 진단이 나왔다.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해도 틀렸다고 말하거나 위험하다고 제지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그 상황은 반복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내가 하는 일은 다 옳은 것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처럼 누군가 반항을 하고 경찰이나 언론에 신고를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은 CEO의 인물 됨됨이가 가장 중요한 결정 요인이 되는 것인데, 안타까운 건 CEO가 되는 순간 공감능력이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심리학자들의 증언이다. 그러니까 출세하더니 사람 변했다, 라는 말은 그 사람이 원래 싸가지가 없어서가 아니라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일반적인 인간의 특질이라는것이다.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요즘도 내가 하고싶은 대로 하고 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음대로 못하고 산다고 자랑하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어쩌면 그 덕분에 요즘 세상을 좀 더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부탁하고 싶다. 문재인 대통령부터 시작해 회장님들, CEO, 건물주님들, 아주 작은 가게의 사장님들까지, 혹시라도 내가 지금 내 마음대로 하고 있는 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해 보라고. 물론 대단히 어려운 일이겠지만 다른 방법이 없어서 이렇게 부탁해 본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우월적인 지위에 서 본 적이 없어서, 라는 말씀만은 삼가하기 바란다. 당신이 고은이나 이윤택, 오달수, 안희정, 김기덕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 세상에 남자로 태어난 것만으로도 일단 우월적 위치에 서 본 것이니까. 그리고 그것이 지금 전 세계를 휩쓸고 대한민국의 정계, 학계, 법조계, 문화계를 강타하고 있는 '미투운동'의 본질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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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크 존즈 감독의 놀라운 영상미와 공간감각에 감탄합니다. 기획력도 뛰어나구요. 

이 정도면 콘텐츠 자체가 예술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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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란한 마음을 달래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노래방이나 단란주점에 가서 남자답게 술을 마시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두컴텀한 극장에 혼자 들어가 나보다 더 찌질한 인생을 그린 영화나 연극을 관람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이건 예전 한석규, 김지수 주연의 영화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을 보고 썼던 리뷰의 첫 대목이었다. 오늘 연극 [모럴 패밀리]를 보고 소주를 한 병 마시고 집에 와서 리뷰를 써볼까하고 노트북을 펼쳤더니 십여 년 전 썼던 그 대목이 고스란히 다시 떠올랐다. 

큰 언니는 술집에 나가고 고등학생인 여동생은 인터넷 방송으로 자신이 입었던 팬티를 판다. 공부를 제법 하는 남동생은 성정체성이 게이라서 너무 괴로워 가출을 할까 생각 중이다. 그리고 늘 침대에 누워 지내는 폐인 오빠는 어렸을 때 본드를 너무 많이 해서 몸도 가누질 못해 남들이 시간 날 때마다 똥을 닦아줘야 하는 존재다. 큰 언니가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남자를 데려와 소파에서 오럴 섹스를 하고 있을 때도 동생들은 무심히 들어와 말을 걸거나 훼방을 놓는다. 고등학생 여동생은 인터넷 방송으로 자신의 팬티를 경매에 붙이다가 마침 들어온 언니에게 한 마디 하라고 하고 언니는 픽 웃으며 카메라 앞에 서서 "야, 니네들 이런 거 왜 보냐? 이 병신 새끼들아."라고 욕을 한다. 카메라를 이어받은 동생은 우리 언니, 존나 이뻐서 더 나오면 안 된다. 니네들 언니 보고 딸딸이 쳐서 안 된다, 하는 멘트를 거침없이 날린다.

거실에 놓인 소파의 뒷모습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심란한 가족의 이야기는 흡사 영국에서 시작해 미드로까지 리메이크 되었던 [셰임리스]와 비슷하다. 실제로 미드에서 에미 로썸이 맡았던 역할은 오늘 본 연극의 큰 언니 연설하 배우와 많이 겹치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연극이 [셰임리스]와 가장 다른 점은 아마도 '언어'일 것이다. 물론 영어가 짧은 내가 미국 드라마의 슬랭을 다 알아 들었을 리가 만무하지만 그래도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씹'이나 '보지', '자지' 같은  날것 그대로의 언어들을 듣고 있다보면 처음엔 재미 있다가도 나중엔 오히려 슬퍼지는 경지에 이른다. 특히 동생 역을 맡은 강선영의 찰진 욕들은 성인 인터넷 방송을 할 때 빛을 발하는데 너무 잘 해서 오히려 마음이 아프다.  

더구나 이 연극은 1회에 들어올 수 있는 관객 수를 딱 50명으로 제한하고 원래 있던 무대를 더욱 축소해 스테이지와 관객이 거의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구성을 했다. 거기에 배우들의 거침 없는 노출 연기, 동성애, 근친상간 암시까지 겹치니 웬만한 사람들은 숨도 쉬기 힘들 지경이다. 그런데 그런 극단적 상황들이 계속 되다 보니 오히려 자학적 쾌감을 지나 기분이 신선해지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고나 할까.

가족은 선택할 수도 없고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는 삶의 굴레다. 오죽하면 일본의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이란 남들이 안 볼 때 어디론가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했을까. 그만큼 힘든 존재인 가족 얘기 중에서도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을 다루면서 '모럴 패밀리'라는 반어법적인 제목을 붙인 감독의 감성이 믿음직하다. 

우리에게 작품을 권한 연극배우 이승연은 '작품이 너무 세서 일반인들에겐 권하기 꺼려지지만 혜자 언니 부부 정도면 좋아할 것 같아서'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결과적으로 너무나 고마운 추천이었다. 이승연 자신은 이 연극을 보고 한 사흘 정도 빙의가 되어 헤어나질 못했다고 한다. 늘 열정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그다운 반응이요 리뷰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연극을 본 날은 3월 4일 일요일인데 4월 1일까지 대학로 드림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응답하라 1988'에서 호연을 했던 김선영 배우가 대표로 있는 <극단 나베>의 작품이고 김선영 배우의 남편 이승원 감독이 극본과 연출을 모두 맡았다. 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한 커플이나 각별히 예의를 지켜야 하는 사돈지간만 아니라면 누구랑 같이 봐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재미있는 연극이라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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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더 포스트]를 보았다. 1971년 뉴욕 타임즈의 펜타곤 문서 특종 보도를 통해 미국 정부들이 숨겨왔던 월남전의 진실이 밝혀지는 이야기다.

워싱턴 포스트라는 신문사의 사주 캐서린 그레이엄 역을 맡은 메릴 스트립과 벤 브래들리 편집장 역의 톰 행크스의 연기가 뛰어나고 스필버그의 연출력도 너무나 원숙하다.

영화 중 가장 박진감 있는 장면은 닉슨 정부의 금지 명령에도 불구하고 캐서린이 보도를 결심한 뒤 긴박하게 식자를 만들고 윤전기가 돌아가고 컨베이어 벨트에서 갓 나온 신문을 꺼내 들여다 보고 끈에 묶인 신문 뭉치들이 길에 뿌려지는 일련의 장면들이다. 마치 하루키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느끼는 쾌감과 비슷하다. 어제 [팬텀 스레드] 무비토크를 딘행하던 영화평론가 이동진은 이 영화의 윤전기 장면들을 잠깐 언급하며 '어쩌면 감독들은 이런 장면을 찍기 위해서 영화를 만드는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했다. 동감한다. 아무 것도 아닌 것 같은데 그런 장면이 길게 이어지는 걸 지켜보고 있으면 글이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기이한 감동이 느껴지니까.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대법원 판결문을 관객에게 전하는 방법이었다. 카메라는 대법원을 비추는 대신 시끄러운 신문사 내부로 간다. 한 통의 전화를 받은 여기자가 "모두 조용히 하세요!" 라고 외친 순간 찬물을 끼얹은 듯 고요해지는 신문사. 기자는 전화를 통해 듣는 판결문을 한 문장 한 문장 큰 소리로 따라 읊는다. 관객이 온몸으로 집중해 듣지 않을 수 없는 장면이고 마지막 문장 '언론이 섬겨야 할 것은 정부가 아니라 국민이다'라는 말을 하며 기자가 울먹일 땐 나도 가슴이 뭉클해졌다.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가 [스포트라이트]의 시나리오도 쓴 조시 싱어라는 사실은 영화가 끝난 뒤 큐레이터의 설명을 통해 알게 되었다. 아내의 친구가 극찬을 하며 이 영화 꼭 보라고 해서 보게 되었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그녀에게 고맙다고 다시 한 번 인사를 하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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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기 나이트]를 처음 봤을 때 사람들은 생각했을 것이다. 야, 세상에 마틴 스콜세지를 찜쪄먹는 신인 감독이 나타나다니. [펀치 드렁크 러브]를 보고 나서는 이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야, 폴 토머스 앤더슨은 쉬어가는 영화도 이렇게 멋들어지게 만드는구나. 그리고 [마스터]나 [팬텀 스레드]를 보고나면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제발 폴 감독도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님만큼만 장수하시기를.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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