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느 가족]은 이런저런 사연을 가지고 모여 사는 유사가족 이야기다. 영화에서 구성원들은 할머니의 연금과 가족들의 좀도둑질, 성인업소 알바 등으로 연명하는데 이는 그리 그리 중요하지 않다. 그보다 고레에다 감독은 과연 혈연으로 엮이거나 정식 결혼을 통해 공인받은 가족만이 행복을 담보하는가 묻고 있다. 그래서 친부모에게 폭행을 당하던 유리를 데려다 키운 사람들은 유괴범이 되고 정말 마음으로 아꼈던 할머니가 죽자 신고하지 않고 집 안에 파묻었다는 이유만으로 유기죄를 받게 되는 걸 냉정하게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는 각본이나 연출도 좋지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연기력을 선보이는 배우들을 보는 맛이 각별하다. 그의 영화에 단골로 출연하는 키키 키린이나 릴리 프랭키는 물론이고 [백엔의 사랑]으로 일본 열도를 들었다놨던 명배우 안도 사쿠라의 연기가 그야말로 빛을 발한다.


일요일 조조로 영화를 보고 나왔다. 어린 여동생 유리를 데리고 물건을 훔치던 소년 쇼타에게 '여동생에겐 시키지 마'라며 가게의 물건을 그냥 내주던 문방구 할아버지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피가 섞이든 아니든 사람을 진심으로 대하려는 태도는 결국 이런 '어른스러움'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좋은 작품은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경우가 많다. 이 영화도 그렇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중 바로 전 작품인 [세번째 살인]이 유일하게 싫었는데 이 영화는 다시 좋았다.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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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IP-TV로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을 보았다. 제목부터가 멋지다. 워낙 좋다는 소문을 많이 들어서 진작부터 보고싶기는 했지만 바빠서 극장에서는 놓치고 말았다. 아름다운 이탈리아의 여름을 보는 것만을도 좋은데다가('관객들으르 햇살에 취하게 만들자' 라는 게 감독의 의도였다고 한다) 주연을 맡은 티모시 샬라메와 아미 해머의 매력과 연기도 매우 뛰어나다. 나는 퀴어영화는 슬퍼서 좀 망설이는 편이다. 토드 헤인즈의 [캐롤] 때도 느꼈는데 동성이라서 더 애절한 그들의 사랑은 늘 아슬아슬하고 불행의 씨앗을 품고 있다. 다행히 이 영화에서는 어린 엘리오의 부모가 올리버와의 사랑을 용인하고 위로까지 해주는 편이어서 그나마 견디기가 쉬웠다. 

영화를 보면서 역시 여름은 '청춘'에게 어울리는 계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감각적이고 안정된 연출력 덕분에 1983년 이탈리아의 여름 풍경과 과즙 같은 공기의 느낌까지 두 시간 내내 아름답게 펼쳐진다. 어젯밤 과음으로 오전 내내 누워있던 아내가 무슨 영화 보냐고 묻길래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고 했더니 그런 걸 왜 당신 혼자 보냐고 화를 냈다. 영화가 끝나고 검색을 해보니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전에 [아이 엠 러브]를 만들기도 했단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비슷한 정서가 많은 영화다. 더 놀라운 것은 제임스 아이보리 감독이 시나리오 각색을 했다는 점이다. 이런 청춘영화를 89세 노인이 쓰다니. 대단한 할아버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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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저녁에 예약해 놓은 조조영화 [시카리오: 데이 오브 솔다도]를 보러 토요일 아침에 CGV용산아이파크몰에 갔다. 밤늦게 찾아온 후배와 늦은 시간까지 술을 마셨으므로 컨디션이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영화 볼 시간을 내기 힘드니 숙취에 시달리거나 아침을 굶는 것 정도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매장이 워낙 넓어서 여긴 올 때마다 길을 헤맨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쇼핑몰 사이를 헤매다 겨우 극장을 찾아내 들어가니 내 자리가 있는 열엔 60대 할머니 여섯분이 쫘악 앉아계셨다. 내가 나의 좌석을 바라보며 혼잣말을 중얼거리자 한 할머니가 "여기 맞아요, 자리"라고 말씀하셨다. 물론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일어설 생각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 다 일행이세요? 그럼 제가 저쪽에 앉을게요, 라고 줄 끝을 가리키자 다들 그게 좋을 것 같다며 맞장구를 쳤다. 자리야 얼마든지 양보해 줄 수 있지만 이 분들은 도대체 이 영화가 어떤 건지는 알고 오신건가, 하는 걱정부터 들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어둡고 심각하고 잔인하게 사람 많이 죽어나가는 영화인데. 오래 전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를 볼 때 만났던 할머니 두 분이 떠올랐다. 영화 초반 얼치기 킬러가 이발소에서 면도칼로 손님의 목을 그어 살해하는 씬에서 걱정을 했었으나 중반쯤 보니 영화 도중 여유있게 휴대폰을 꺼내 메시지를 확인하시던 그 할머니. 

아무튼 영화가 시작되었다. 전편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의 기억이 너무 좋아서 기대감이 컸다. 여전히 묵직하고 사실적인 진행, 강렬한 총격씬, 배우들의 존재감 등 어떤 것 하나 빠지는 게 없는 영화였다. 특히 투탑인 베니치오 델 토로와 조슈 브롤린의 연기와 카리스마는 끝장 그 자체다. 시나리오도 역시 좋았는데 영화가 끝나고 확인해보니 1편 '암살자들의 도시'도 썼던 요즘 정말 잘 나가는 각본가 테일러 셰리던의 작품이었다. 그는 작년 개봉했던 [로스트 인 더스트]의 각본도 썼다고 한다. 배우 출신인데 이렇게 잘 쓰다니 정말 놀랍다. 한 십 년 전 날고 기던 배우 출신 각본가 아론 소킨이 생각났다. 정치드라마 [웨스트 윙] 등 미니시리즈 각본을 많이 썼던 그가 아주 수다스러운 편이었다면 테일러 셰리던은 꼭 필요한 대사만 하는 하드보일드 스타일이며서 구조를 잘 짜는 작가다. 이번엔 전작에서 신참 여성 요원 케이트 역으로 강한 인상을 남겼던 엘밀리 블런트가 빠져서 너무 아쉬웠지만 그건 1편에 비해 그렇다는 얘기지 작품 자체만 놓고 본다면 너무 큰 욕심이라 할 수도 있겠다. 스테파노 솔리마 감독도 뚝심있게 이야기를 잘 이끌어 간다. 그러나 전편의 드니 빌뇌브 감독이 그리워지는 것도 사실이다. 총격전 등 액션은 한층 강화되었으니 눈호강, 귀호강이야 더할나위 없이 했지만 절절했던 등장인물들의 사연이 1편에서처럼 새롭지 않으니 너무 매끈하고 정석적으로 흘러간다는 일말의 아쉬움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맨 마지막에 죽을 뻔하다가 살아 돌아온 베니치오 델 토로가 자신의 머리에 총을 쐈던 어린 아이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이 닫히는 장면 이후 뿌듯한 마음으로 엔딩 크레딧을 바라보다가 옆좌석을 살펴보니 할머니들은 어느새 모두 사라지고 없었다. 오늘 그 분들은 이 영화에 대해 뭐라 영화평을 남기셨을까. 3편의 제작이 확정되었고 그 작품에선 드니 빌뇌브 감독이 다시 복귀할지도 모르다던데 그 때도 극장에서 나와 우연히 마주칠 수 있을까. 모두 젊고 건강한 편이셔서 충분히 시리즈 세 번째 작품도 보러 오실 수 있을 것 같긴 한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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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빼어난 산문집 [자전거 여행]이 100쇄를 넘긴 것은 작가가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마추쳤던 만경평야나 문경새재 등 한반도의 아름다운 풍경들과 거기에 스민 깊은 사유 뿐만이 아니라 언덕길에서 자전거 페달을 밟듯 온몸으로 밀고나가는 단호하고도 치밀한 문장들이 큰 몫을 했을 것이다. 그는 아직도 컴퓨터 대신 종이 위에 연필로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쓰는 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아닐로그형 작가'인데 이는 우연히도 이반 일리치가 설파하는 자전거의 효용과 꼭 닮았다. 

(작가의 이름을 대하면 왠지 솔제니친이 쓴 소설의 주인공 '이반 데니소비치'가 생각나지만 전혀 상관 없고)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나 신학과 철학, 역사학 등을 공부하고 한때 사제이기도 했었던 이반 일리치는 다른 무엇보다도 인간이 발명한 교통수단들의 속도를 통해 우리 삶이 어떻게 왜곡되는지,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가장 인간적인지를 통찰한다. 

인간의 자아성은 생활공간 및 생활시간을 덧붙일 때 비로소 완성된다. 그리고 그것들은 인간이 이동하는 보폭에 의해 통합된다. 만일 이 관계가 인간 자신의 이동능력이 아니라 수송수단의 속도에 의해 결정되면, 인간은 공간의 설계자로서의 지위를 잃고 단순한 통근자의 위치로 전락하고 만다.

근대 이후 도시인들은 늘 시간이 없고 바쁘다고 아우성을 치며 살고 있다. 문명과 기술이 발달할수록 생활은 편리해지는데도 삶의 여유는 더 없어지는 아이러니는 왜 일어나는걸까. 그는 교통수단의 속도가 어떤 임계점을 넘어서면 그 절약된 시간을 누군가 독차지하게 되는 '시간 횡령'이 일어난다고 간파한다. 즉, 인간의 이동 속도가 자전거를 넘어서면서부터 불공정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의 원제도 'Energy and equity(시간과 공정성)'이다. 우리가 매일 타는 승용차, 지하철, 버스 등은 우리를 멀리 있는 회사나 일터로 실어나른다. 필요하다면 누군가는 비행기를 타고서라도 멀리 간다. 그런데 이러다 보니 기차나 버스를 타는 사람보다 비행기를 타는 사람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인식이 생겨난다. 속도의 차이가 결국 시간의 가치에서도 차별성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는 말한다. "당신이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지 말해달라. 그러면 당신이 누구인지 가르쳐주겠다."

우리는 지금 만 원 정도면 점심 한끼를 가쁜히 해결할 수 있지만 조지 소로스와 점심을 먹으려면 백만 달러를 내야 한다. 물론 이건 호사가들의 '돈지랄'에 불과하다는 생각이지만 어쨌든 우리의 시간보다 그의 시간이 훨씬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뜻이 되겠다. 이반 일리치는 자전거를 탄 사람은 보행자보다 3~4배 더 빨리 갈 수 있는데 그 과정에서 사용하는 에너지는 5분의 1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그는 왜 이렇게 자꾸 자전거 얘기를 꺼내는 걸까. 설마 그가 우리에게 자전거를 팔아먹으려고 이런 소리를 하는 건 아닐 텐데. 

자전거는 인간을 더 빠른 속도로 이동시키면서도 공간이나 에너지나 시간을 특별히 더 많이 빼앗지도 않는다. 자전거 이용자는 거리 당 이동시간을 적게 쓰면서도 연간 이동거리를 늘릴 수 있다. 타인의 일정이나 에너지 또는 공간을 부당하게 침해하지 않으면서도 기술 도약이 주는 혜택을 누릴 수 있다. 동료들의 이동을 방해하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대로 자기 이동의 주인이 될 수 있다.

스티브 잡스 이후 인문학 바람이 전세계를 휩쓸고 있는데 우리가 뒤늦게라도 인문학에 관심을 갖고 공부를 하는 것은 인문학자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인생의 본질이 무엇인지 깨닫고 올바른 방향을 설정하기 위해서이다. 마찬가지로  이반 일리치가 자전거를 예찬하는 것도 전 세계인이 다 자동차를 버리고 자전거에 올인하자는 얘기가 아니다. '행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라는 책 제목은 칠레 아옌데 정부 법무부차관보의 말 '사회주의는 자전거를 타고서만 올 수 있다'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에게 자전거는 'ideal'한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상징일 뿐이다. 자전거를 이용한다는 것은  기계 문명에 몸을 던진 현대인들이 스스로를 돌아보고 제어를 시도한다는 뜻이니까. 그런 대안을 생각해본 사람과 안 해본 사람의 태도는 분명 다를 것이라고 이반 일리치는 믿는 것이다. 

말하자면 '자전거로 인문학하기'라고나 할까. 이는 책 맨 뒤에 '<이반 일리치 전집>을 펴내며'라는 글에 있는(안희곤 대표가 쓴 것으로 짐작되는) "이성으로는 비관하되 의지로 낙관하라'는 안토니오 그람시의 말대로"라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해설 빼고 본문만 치면 100페이지 정도밖에 안 되는 이 책이 말하려는 건 우리 모두 자전거를 타자는 게 아니라 보다 바람직한 대안을 가슴에 품고 살자는 얘기로 읽힌다. 1974년도에 이런 인사이트풀한 생각을 발표했다는 게 얼른 믿어지지 않을 정도다. 하룻밤 사이에 읽을 수 있는 아름다운 이상주의자의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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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대학교 다닐 때 우리 동네엔 특이한 담배 가게가 하나 있었다. 할아버지 한 분이 밤새도록 무릎 위에 담요를 덮고 앉아 조그만 유리창을 통해 담배를 팔던 곳이었다. 구파발 시장 입구에 있던 그 가게는 열두 시가 넘으면 불이 꺼지고 터미널 티켓 창구처럼 조그만 구멍이 뚫려 있는 유리창 앞엔 삐뚤삐뚤한 필체로 '절대 두드리지 마시오'라는 빨간색 안내문이 적혀  있었다. 한밤중에 갑자기 담배가 필요하거나 늦게 귀가하는데 담배가 떨어졌을 때면 유리창 앞에 가서 "할아버지" 또는 "저기요~"라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면 정확히 1초 뒤에 '똑'하고 작은 스탠드 불이 켜졌고 정확히 원하는 담배와 거스름돈을 받을 수 있었다. 만약 할아버지가 써놓은 안내문을 무시하고 아주 약하게라도 유리창을 두드리게 되면 불을 켠 할아버지에게 눈이 멀었냐는둥 온갖 욕을 먹어야했고 그 날 담배는 절대로 살 수 없었다. 나름 고집이 있는 할아버지였는데. 지금은 아마 돌아가셨을 것이다.  

'세븐일레븐'이라는 24시간 편의점이 처음 생겼을 때 내 친구 동생은 "오빠, 우리 이제 새벽에도 집에서 술 마실 수 있어!"라고 감격스러워 했다지만  내가 처음 그 곳에 들어가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한밤중에도 대낮같이 밝은 형광등의 불빛이었다. 거기엔 '도대체 이 늦은 밤에 어떤 미친 새끼가 뭘 사러 온 거야?' 따위의 불평이나 신경질이 없었다. 새벽 두시에 가도 떳떳한 동네 가게.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모든 상품은 깔끔하게 진열되어 있고 한쪽 테이블에서는 간단하게 컵라면이나 커피 등을 먹을 수도 있었다. 어렸을 때 동네마다 있던 구멍가게와는 차원이 다른 삶이 펼쳐지는 순간이었고, 그 내용의 한 축은 한밤중이 되어도 자지 않고 일을 하거나 술을 마시는 게 당연한 디스토피아의 시작이기도 했다.

내년도 최저임금이 올해보다 10.9% 오른 시간당 8,350원으로 결정되었다고 한다. 요 며칠 사이 편의점주들의 반발이 거셌던 것이, 알바생들 시급을 만 원까지 올려주면 점주들은 남는 게 없으니 차라리 편의점 문을 닫겠다는 입장까지 나왔던 것이다. 대한민국의 편의점주들이 유난히 나쁜 사람들이라 이러는 건가. 아니다. 세상에 그냥 나쁜 사람은 없다. 서로의 이해관계가 나쁜 사람과 억울한 사람을 만들어낼 뿐이다. 저녁 뉴스에서도 아침 시사프로그램에서도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는데, 정리해 보면 핵심은 '갑의 횡포'에 있다. 여기서 갑이란 프랜차이즈 본사와 건물주를 말한다. 편의점 사업을 하는 대기업들이 워낙 많은 돈을 가져가니 남은 돈으로 점주와 알바가 나눠가지려면 갈등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거기다가 건물주들이 갑자기 월세를 올리기라도 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만다. 그런데 이들과 싸워서 이겼다는 사람을 아직 나는 보지 못했다. 오죽하면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고 했을까. 

"문제는 몇백 원 오른 알바 시급이 아니라 높은 임대료나 프랜차이즈 본사에 내는 비용이다. 이건 ‘갑’을 제쳐놓고 ‘을’이 ‘을’에게 화를 내는 식이다" 

을과 을의 싸움에 대해 어느 신문 인터뷰에서 읽은 기사 내용 일부다. 배가 부르지만 늘 배고프다고 하는 갑들은 팔짱 끼고 구경만 하는데 죄 없고 힘 없는 을들끼리 멱살 잡고 싸우는 모습이란 얼마나 비참하고도 슬픈가. 문재인 대통령은 오늘 오전 “최저임금위원회의 결정으로 2020년까지 최저임금 1만원 목표는 사실상 어려워졌다. 결과적으로 대선 공약을 지키지 못하게 된 것을 사과드린다”고 말했다고 한다. 문 대통령의 사과에서도 알 수 있듯 당장 1만 원으로 올릴 수는 없다는 게 현실이다. 그렇다고 계속 알바생들만 조질 수도 없는 일이다. 보다 큰 호흡과 안목으로 정책을 정비해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그리고 대한민국의 대기업이나 건물주들은 일제시대에 친일파 말고도 지주나 돈 많은 부자들이 왜 그렇게 민중들의 미움을 받았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기 바란다.  아무리 유발 하라라가 [호모 루덴스]에서 얘기했듯이 "자본주의에서는 그만 하면 됐으니 멈추라고 하는 법이 없다"고 하지만 당신들 정말 너무 하는 거 아닌가. 당신 옆에서 어떤 사람들은 단 돈 몇 백, 몇 천만 원에도 자살을 하는데.  

오늘도 우리는 편의점에 간다. 밝고 반듯반듯한 진열대가 있고 누구나 선량한 시민들로서의 권리를 똑같이 누릴 수 있는 편의점. 어쩌면 우리는 모두 작년에 무라타 사야카가 쓴 소설처럼 '편의점 인간'인지도 모르겠다. 그 옛날 구멍가게가 가지고 있던 촌스러움과 따뜻함을 포기한 대신 메마르고 익명성 넘치는 자유만 쓸 데 없이 만끽하게 된 슬픈 인간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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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마녀를 본 날>

일요일 한낮에 햇볕이 내려쬐는 날씨를 무릅쓰고 요즘 흥행작인 <마녀>를 보러 갔다. 사실은 박훈정 감독의 <신세계> 팬이라 간 것이었다. 제목이 '마녀'라 당연히 느와르 영화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의외로 뮤턴트 히어로물이었었다. 작가가 개인적으로 좋아하던 일본 애니메이션을 각색해서 요즘 영화로 다시 만든 느낌이었다. <악마를 보았다>나 <부당거래> 시나리오를 썼던 박훈정인데 도 불구하고 영화 앞부분이 지루하고 유머코드 역시 애매했다. 이 인간이 미쳤나. 여주인공이나 그의 친구 연기도 아쉬웠고 그리고 특히 베테랑 조민수의 연기가 별로였다.

내 옆엔 혼자 온 주제에 영화 상영 내내 커다란 팝콘통을 뒤지며 음료수 두 통을 먹고 마시는 미친놈이 있었다. 괴력을 가진 영화 인물들이 잠깐 스크린을 찢고 나와 그놈을 죽여줬으면 하는 바람을 가졌으나 오늘따라 스크린과 객석의 구분이 유별하였다. 영화는 별로였고 날씨는 뜨거웠다. 집으로 돌아와 동네 성북동의 단골식당 '디미방'에 가서 닭도리탕을 시키고 다음주 고로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어떤 가족]이나 보자고 아내와 합의를 하며 송명섭막걸리와 한라산을 나눠 마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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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아내와 뉴스를 보다가 일기예보를 전해주는 기상 캐스터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꼭 저렇게 젊고 날씬한 여자가 나와서 날씨를 전해줘야 온도 습도가 시청자들 귀에 착착 감기는 걸까. 원래 짧았던 치마를 더 접어서 위로 올렸네. 핀바리 했네, 핀바리(쓰면 안 되는 속어지만). 

우리 주변엔 오랜 관행으로 그냥 굳어버린 것들이 너무 많다. 저녁 뉴스의 남성 메인 앵커 옆 젊은 여자 앵커나 아나운서도 마찬가지다. 하긴 나 어렸을 땐 반장은 무조건 남자, 부반장은 여자였다. 그땐 여자 반장보다 신기한 게 남자 부반장이었다. 그리고 여자 반장도 손꼽을 정도로 없었다. 예순 살인 손석희 앵커 옆에 쉰아홉 살의 여성 앵커가 나란히 앉아 나란히 뉴스를 진행하는 신선한 광경을 보게 되는 건 아직 꿈인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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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극장은 장소 이전에 그 자체가 추억이요 고유의 작품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는 '명동 엘칸토예술극장'과 '삼일로 창고극장'이 그런 경우인 것 같다. 아직 감수성이 여물기 전인 십대 후반에 처음 연극을 봤던 곳이 바로 이 극장들이었으니까. 나는 여기서 추송웅이 번역, 연출, 연기 등 거의 모든 것을 도맡아 했던 화제의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을 보았다. 당연히 초연은 아니었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 앵콜공연을 할 때 보았던 것 같다. 창고극장은 운영 상의 문제로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나중에 '떼아뜨르 추'라는 이름으로 바뀌기도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런 명동의 추억들 말고 더 추가하자면 송승환이 출연했던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을 보았던 광화문의 '마당세실극장'과 운석화 윤소정의 [신의 아그네스]를 보았던 명륜동의 '실험극장' 정도였을까.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을 해석한 작품들이 재개관 기념극으로 새로 올라간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전화 예매를 했다(인터넷으로 예매하려다가 이런저런 난관에 부딪혀 결국전화를 했다). 내가 표값 4만 원을 카드로 계산하겠다고 하자 담장자가 놀라서 물었다. 무슨 통신할인이나 하다못해 배우할인이라도 없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4만 원 을 계산할 테니 예약을 해달다고 했다. 제 값을 안 내고 보는 게 추세이다 보니 이런  해프닝이 생기는 것  같아 씁쓸했다. 

우리가 예매한 작품은 [빨간 피터들] <추ing_낯선 자>라는 작품이었다. 신유정 연출에 하준호 배우가 출연하는 모노드라마였다. 40 여 분 정도의 짧은 작품이라고 했는데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무대와 객석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바닥에 놓인 스툴에 관객들이 앉아 있으면 되는 시스템이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 연극은 무대와 객석이 따로 구별되어 있지 않으니 적당한 의자를 골라 앉으시면 되고 조금 있다가 배우가 나와 연기를 하다가 관객 가까이 가더라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말라'는 안내멘트였다. 우리는 웃으며 배우를 기다렸다. 연극영화과를 다니는 듯한 젊은 관객들이 많았다. 

불이 꺼지고 어디선가 배우가 나타났다. 바지를 입고 웃통을 벗은 원숭이 분장이었는데 코를 뒤집어 원숭이처럼 꾸미고 가슴과 등에 털을 달아서 언뜻 보면 진짜 원숭이 비슷하기도 했다. 말을 전혀 하지 않고 원숭이처럼 '기긱', '우우~' 소리만 내는 무언극이었다. 잠시 후 천정에서 땅콩이 후두둑 떨어지고 배우는 그 땅콩을 집어던지며 관객들과 이야기거리를 만들어갔다. 우리는 흡사 진짜 원숭이를 본 것처럼 놀라워했고 수 많은 사람들 틈에서 혼자 원숭이 역을 잘 해내고 있는 배우를 보며 감탄했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순간순간 달라지는 연기이기에 배우 관객 모두 빠른 순발력이 필요했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에 서로 신기해 하거나 뿌듯해했다. 순간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혼란스러웠다. 원숭이 역을 하고 있는 배우를 진짜 원숭이로 여겨야 하나, 아니면 원숭이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배우로 봐야 하나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원작자인 카프카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고 왕년의 각색자인 추송웅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으며 새롭게 추송웅과 카프카의 작업을 재해석한 연출가 신유정과 배우 하준호가 원하는 바이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부가 끝나고 암전 후 웃도리를 차려 입은 하준호가 나와 2부를 시작하면서 극은 새로운 활기를 띄었다. 하준호는 잘 나가지 못하는 연극배우 역할을 했는데 끊임없이 울리는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는 중간중간 관객들을 툭툭 건들면서 자신의 위치와 생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배우로서의 애환이나 개인적인 역사를 드러내던 배우는 돌연 다시 원숭이가 되어 무대 위를 훨훨 날아다니다가 끝을 맺었다. 배우가 끝내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하고 다시 원숭이로 돌아간 것 같아 슬펐다. 

그런데 왜 원숭이일까. 

설마 이 기회에 원숭이의 생각이나 삶을 들여다보자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것에 늘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인간과 닮은 '원숭이 메타포'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영화 [혹성탈출]도 마찬가지다. 원숭이의 눈을 통해 들여다 볼때 인간의 모습은 더 적나라하게 보이지 않던가. 그래서 '빨간 피터'라는 원숭이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고 추송웅의 작업을 재해석한 일련의 작품들도 2018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나름의 의의를 갖는 것이라 생각한다. 40여 분의 짧은 러닝타임이었지만 느낀 바가 많았고 신선한 자극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좋은 연극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연극이라고 해야할지 퍼포먼스라고 해야할지 약간 헷갈리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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