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늦게 재개봉한 [프로리다 프로젝트]를 명동CGV 씨네라이브러리에서 관람했다. 사실 이렇게 슬픈 영화인지는 모르고 봤다. 위악을 떨던 꼬마애 무니가 마지막에 친구 앞에서 울 때는 나도 눈물이 나서 혼났다. 미혼모 핼리와 그의 딸 무니, 그러고 모텔 지배인 바비 역을 맡았던 윌리엄 데포까지 모두 최고의 연기를 보여준다.

영화를 보고 나서 스마트폰으로 찾아보니 '플로리다 프로젝트'는 예전에 디즈니랜드를 건설할 때 사업명이었고 지금은 집이 없는 사람들에게 보조금을 지원하는 사업의 이름이라고도 한다.

영화 마지막에 가족과 헤어지는 장면은 올해 본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어떤 가족]을 떠올리게 한다. 두 영화 다 '사는 건 왜 이렇게 힘이 들까'라며 한숨을 내쉬게 되는 작품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이렇게 심란한 영화를 굳이 극장에 와서 돈까지 내고 보는걸까.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했던 '비극이 주는 카타르시스'가 아마 이런 거 아닐까 생각하며 밖으로 나왔더니 하늘은 파랗고 햇볕 쨍쨍한 목요일 오후가 거짓말처럼 펼쳐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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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의 말>

최근 학계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꽃들이 언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진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꽃들의 말을 번역하는 '꽃말번역기 - 스피킹플라워스'까지 함께 개발했는데 이미 완성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꽃들이 전한 말들이 화제가 되고 있다. 아직 공식적인 발표는 아니지만 유비통신에 따르면 수선화는 "내가 언제 고결과 자만을 얘기했다고 그러냐? 억울하다"라는 심정을 토로했고 국화는 "시대에 뒤떨어지게 정조, 순결이 웬말이냐"며 엄중 항의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개나리는 "내가 희망을 얘기한 것은 맞다"라며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을 밝혔는데 옆에서 듣고있던 백합이 "나는 순결이라는 단어 속에 들어있는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를 극히 혐오한다. 내 꽃말이 순결이란다. 꽃말협회를 상대로 고소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이 소동을 전해들은 해당화가 "이기고 지는 일은 다 허무한 것인데 이제 피고 지는 것만 알던 꽃들까지 인간에게 물들어 이기고 지는 것을 논한다"며 개탄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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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꼴라가 있는 풍경

혜자 2018. 9. 24. 11:54



마당에 나와 빨래를 널고 있는데 아내가 따라 나와 날씨가 너무 좋다고 소리를 지르더니 텃밭에 있는 루꼴라를 딴다. 햇볕은 쨍하고 바람은 시원하다. 소행성으로 이사오길 참 잘했다. 이 여자와 결혼하길 참 잘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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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미 감독의 [잘돼가? 무엇이든]을 어제 오늘 휘리릭 다 읽었다. 이 에세이는 문화웹진 <채널예스>에 연재했던 글과 <씨네21>에 기고했던 글, 그리고 10여 년 전부터 현재까지 썼던 짤막한 일기 등을 발췌해서 꾸민 책이다.

제목인 '잘돼가? 무엇이든'은 이경미 감독이 처음 만든 단편영화의 제목이기도 하다. 이경미 감독이 졸업을 하고 '성공 신화를 이룬 거대 중소기업'에 다니던 시절의 얘기를 각색해서 만든 단편인데 각종 영화제에서 수상을 하는 등 대단한 히트를 기록했었다. 아마 이 작품 때문에 박찬욱 감독과 공동작업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영화 감독이니까 당연히 영화 얘기가 많이 나오는데 첫 챕터의 제목이 '실연당하는 게 끔찍할까, 시나리오 쓰는 게 더 끔찍할까?'일 정도로 영화 만드는 고충은 사사건건 크다.  그런데 이경미 감독 글의 미덕은 자신의 이야기를 재료로 자조적인 유머를 잘 만들어 낸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소심하거나 이기적인 성격이 많이 드러나고 연애나 사회생활, 영화, 친구 관계 등 각종 분야에서 발생했던 다양한 실패담들이 자주 등장한다.

우선 아름답고 총명한 여성 감독이 쓴 글답지 않게 똥이나 변비 같은 더러운 얘기가 많이 나오고 고학력 지식인의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점이나 운세를 보는 장면도 자주 나온다.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가 이 책의 주제인 모양인데 [미쓰 홍당무]와 [비밀은 없다]를 만들면서 있었던 여러 가지 얘기들과 [비밀은 없다]를 개봉하고 나서 그 영화 때문에 만난 백인 남성과 결혼을 하게 되는('백인 포비아'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야기까지 읽고 나면 '인생은 알 수가 없다' 쪽으로 조금 괘도를 수정하는 듯도 하다.

아무튼 찌질한 듯하면서도 공감대를 자아내는 글들은 매우 경쾌하면서도 솔직한 면이 있어 어느덧 이경미 감독이라는 캐릭터와 동질감을 느끼게 되는데, 특히 창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계속해서 꾼 꿈들을 일기로 기록한다든지 대작가의 글을 읽고 절망하는 대목 등이 특히 공감감다.

창작을 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자산은,
습작이 아니라 어떻게 살아왔는가 하는 작가의 삶아다. (박완서)

아이 씨, 어떡하지.

2005. 05.12


뒷부분엔 평소 기도를 열심히 하면서 틈만 나면 딸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엄마 얘기, KBS <동물의 세계>에서 "짝짓기를 합니다" 같은 나레이션을 했던 유명한 성우인 아빠 얘기, 언니와 심하게 싸우지만 결국 이 책의 일러스트를 맡아주었던 여동생 얘기 등도 재미있게 펼쳐진다. 

책이 많이 팔렸다는 얘기를 들었다. 아무도 솔직하고 유머러스한 글솜씨에 잘난 척하지 않는 마이너한 감성이 독자들을 끌어들였으리라. 책도 예쁘게 나왔다. 추천한다. 서점 가판대에 누워서 '괜찮아, 그냥 너 생긴 대로 살아' 라거나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 했는데 안 그래서 차암 다행이야'라고 외치는 설탕물 같은 에세이들보다 열 배는 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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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에 올렸던 건데
오랜만에 여기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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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vcf.co.kr/YCf/V.asp?Code=A000356796


저희 회사가 찍은 첨단 블랙박스 '아이나비 커넥티드' 광고가 온에어되었습니다. 

아이디어 내고 카피 쓸 땐 열심히 했는데 정작 강소라 씨 촬영할 땐 바빠서 촬영장에 못 갔네요. 그러나 메시지도 분명하게 전달되고 전체적으로 광고가 깔끔하게 잘 나와서 기쁩니다. 

주차장에서 누가 접촉사고를 내면 다른 곳에 있는 차 주인에게 스마트폰으로 실시간 정보가 전달되는 첨단 제품입니다. 저도 차를 사게되면 이거 달아야겠는데요? 제품력 좋으니까 많이 알려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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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이 영화 [카메라를 멈추면 안 돼]를 보고 재밌으니 한 번 보시라고만 했는데 오늘 아침 출근하면서 다시 생각해 보니 그러고 끝나면 안 될 것 같아 매우 간단하게라도 리뷰를 써보기로 했습니다. 그런니까 이건 영화를 한 명이라도 더 보셨으면 하는 마음에서 쓰는 '낚시성' 글입니다. 

왜 이렇게 흥분하냐 하면 이 영화는 우리가 예고편을 보면서 가졌던 나쁜 기대들을 배반하는 영화이기 때문입니다. 무슨 나쁜 기대냐. 제목에서 풍기는 아마추어 같은 느낌, 성의만 넘치는 독립영화일 것 같은 느낌, 카메라 한 대 가지고 조지는 어설픈 일인칭 시점일 것 같은 느낌. 네, 맞습니다. 이 영화는 일본 돈 300만 엔의 터무니 없는 제작비로 완성된 인디영화 맞습니다. 그러나 100석 규모의 극장에서 상영을 시작했지만 점점 입소문이 커져 결국 각종 국제영화대회의 상들을 휩쓴 최고의 코미디 영화입니다. 

영화는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전반부는 2차세계대전 때 군수공장으로 쓰였던 건물 안에서 좀비 영화를 찍던 감독과 배우 스태프들이 진짜 좀비를 만나 고생하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37분의 원컷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까지 올라가고 나면 이 영화를 찍기 전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발단은 방송국에서 좀비물을 찍는 영화인들의 고군분투를 생방송으로, 그것도 원컷으로 보여준다는 기획안입니다. 기획안부터 워낙 황당하다보니 아무도 안 할 것 같아 뭐든지 대충대충 찍는 것으로 우명한 어느 퇴물 감독에게 기회가 돌아간 거죠. 

처음엔 말도 안 되는 기획이라며 이 감독 역시 거절을 하지만 자신처럼 영화 일을 시작한 딸이 이 좀비 영화에 출연하기로 한 아이돌 가수를 너무 좋아한다는 것을 알고는 승락을 합니다. 그러면서 우여곡절 끝에 감독과 배우 출신인 감독의 부인까지 영화에 출연하게 됩니다. 영화를 찍는 장면들이 보여지면서 왜 1부의 장면들이 진지하면서도 약간 어설픈 구석들이 있었는지 밝혀지는데, 이 복선과 전복의 아이디어들이 정말 기가 막힙니다. 

생방송 좀비 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스태프들의 야단법석 코미디를 그린 영화. 한 마디로 정리하면 이렇게 될 수 있겠습니다만 이 영화엔 그런 웃음 포인트 말고도 찡한 감동과 페이소스까지 있는 멋진 작품입니다. 그러니까 뒤늦게 전 세계의 극찬을 받고 다시 개봉이 된 것이겠죠. 우리나라에서도 부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화제가 되었다가 다시 개봉이 된 케이스랍니다. 상영하는 극장이 많지 않으니 성의를 갖고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안 보면 손해인 영화니까요. 맨 마지막에 지미집이 망가져 고공촬영을 못하게 되었을 때 이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눈여겨 보시기 바랍니다. 아, 그리고 호신술에 대한 복선도...음, 입이 간지러워 못견디겠습니다. 그냥 , 얼른 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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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인간을 살인병기로까지 만들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 '복수'라는 단어만큼 강력한 성취동기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래된 전설은 물론 수많은 소설이나 영화가 앞다투어 복수극이라는 테마를 즐겨 사용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의 부모 형제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복수에 평생을 바치는 것도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연극 <조씨고아 - 복수의 씨앗>은 그런 의문을 테마로 만들어진 연극이다.

중국 진나라때 조정의 충신인 조순은 정적이자 간신인 도안고의 계략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자신은 물론 일가 300명이 멸족되는 대재앙을 겪는다. 조순에게 사랑 받았던 시골 의원 정영은 마흔 다섯 살에 늦게 자식을 하나 얻었는데 낳은지 한 달이 지난 그 자식을 대신 죽게 함으로써(도안고가 바닥에 세 번 패대기를 쳐서 죽었다고 한다)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인 조씨고아를 살린다. 그리고 간신 도안고 밑으로 들어가 조씨고아를 도안고의 양아들이 되게 한다. 스무 살이 되면 조씨고아에게 복수를 하게 하려는 일념으로.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버린다. 그리고 이십 년 후 정영과 조씨고아는 드디어 도안고에게 복수를 하는 데 성공한다. 황석영의 역작 [손님]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가족을 도륙하는 이 비극의 끝엔 무엇이 남을까.

이 연극은 13세기에 살았던 기군상이 사마천의 <사기>에 있던 기록을 토대로 쓴 희곡이 원작이다. 이를 현재 가장 잘 나가는 연출가인 고선웅이 각색해 재작년 처음 무대에 올렸는데 어느새 '명불허전'이라는 평을 들으며 전회매진을 기록하는 작품이 된 것이다. 그제 내가 명동예술극장에 가서 본 [조씨고아 - 복수의 씨앗]은 본토인 중국 베이징 공연을 거쳐 국내에서 세 번째로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이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군신을 위해 초개 같이 목숨을 버리거나 적장으로 들어가 신분을 숨기고 오랜 세월을 견디다가 복수를 감행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인이 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런 설정은 많았으니까. 그러나 그건 개념적으로 따졌을 때 얘기고 실제로 숨 쉬고 밥 먹고 소리 지르며 살아가는 인간군상들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게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연극이 상연되는 지금은 진나라나 원나라 시대와는 가치관이 다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에서도 정영의 아내는 "당신이 한 약속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그런다고 제 자식을 죽여?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라고 남편에게 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영은 조순의 아들이자 부마인 조삭과 공주의 눈물어린 부탁을 저버리지 못한다. 간단치 않은 캐릭터를 앞에 두고 연출가의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이 작품을 21세기에 한국에서 상연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가 선택한 것은 '존재론적 질문과 유희정신의 조화'였던 것 같다. 군신을 위한 복수극이라는 테마를 다루고 있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은 유머코드로 무장하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심각함과 유머가 공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간신인 도안고나 시골 의원 정영은 물론 하물며 복수를 부탁하는 공주의 대사와 몸짓에도 경쾌한 유머가 스며있어서 관객들이 1, 2부로 나뉘어진 150분 동안 여러 번의 감정적 이완을 느끼며 연극을 즐길 수 있다. 이건 훌륭한 각본과 연기가 뒷받침 되어야만 가능한 일인데 이 연극은 그것을 해내고 있다. 극의 중심이자 복잡한 주제의식을 실어나르는 정영 역의 하성광은 그 중에서도 눈이 부신다. 장엄할 때는 장엄하게, 소심할 때는 소심하게 천의무봉의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특히 높은 목소리로 길게 이어지는 그의 탁월한 대사 능력은 놀랍다. 가만히 듣고 있다보면 연극대사가 아니라 랩처럼 리듬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극에서 누군가 죽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나 부채를 펼치는 묵자라는 캐릭터는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처럼 감초 역할을 적절히 수행한다.

도안고 역을 했던 장두이는 초반에 좀 대사를 불분명하게 처리해 눈쌀을 찌푸리게 했으나 이내 컨디션을 회복하고 극의 중심 역할을 해낸다. 그 밖에도 공손저구 역의 정진각, 조순 역의 유순웅, 정영의 아내 역을 맡은 이지현, 공주 역의 정새별 등도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그게 딱 맞는 열연을 펼친다. 대사 처리에서 가장 미숙한 사람은 조씨고아 역을 맡은 이형훈이었는데 이는 맡은 역할이 열혈청춘인 스무 살의 젊은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리 흠이 되진 않았다.

무대는 아주 미니멀하하게 꾸며져 흡사 부조리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아내는 예전에 LG아트센터에서 보았던 피터 브룩의 <마술피리>가 떠오른다고 했다). 고선웅은 천정이 높은 명동예술극장의 장점을 살려 소도구들에 줄을 매달아 천정에서 내려오게 하거나 올리는 무대연출을 선보인다. 두 겹으로 되어 있는 커튼은 공간의 폭을 더욱 넓게 만들어 몇 사람만 등장하는데도 당장 옛 중국 대륙과 왕실의 스케일이 느껴지게 만든다.

연극을 보기 전 프로그램을 한 권 샀다. 연출가 인터뷰가 실려 있었는데 인터뷰어 김민정이 원작인 기군상의 [조씨고아]와 고선웅 각색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내가 아무리 뛰고 날아봤자다. [조씨고아 - 복수의 씨앗]은 결국 기군상 작가의 손바닥 안에 있다."라고 하는 대답이 믿음직스러웠다. 그의 말대로 이 작품은 원작의 문제의식을 가볍게 뒤집거나 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에 복수에 성공하고 그 복수극 때문에 죽은 사람들과 정영이 마주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의 아내를 비롯한 죽은 자들이 그를 아는척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침으로써 복수의 허망함을 전할 뿐이다. 그렇다고 복수를 하지 말았어야 할까. 그건 쉽게 대답할 문제가 아니다. 연극은 즉답을 회피함으로써 우리에게 '살아가는 원동력'에 대한 커다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고선웅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과 패릴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아 누구보다 바쁜 일정을 보냈던 스타 연출가다. 5·18광주민주항쟁을 다룬 ‘푸르른 날에’를 연출한 것 때문에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가 문체부 차관이 당시 초연인 이 작품을 보고 리스트 삭제를 부탁했다 해서 유명세를 치룬 적도 있다. 1부를 보고 인터미션에 잠깐 밖으로 나오다가 우리 좌석 맨 뒷열에 앉아 있는 배우 이혜영을 보았다. 얼마 전 이 극장에서 그가 주연했던 [메디아]를 보았기에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좋은 연극을 보았다. 저녁을 먹으며 아내가 십만 원을 내고 국립극단 회원으로 가입하면 할인 혜택도 많고 또 일 년 간 국립극단에서 올리는 작품만 제대로 찾아 보아도 좋은 연극을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길래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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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것도 아닌 인생이

              
                              마광수



별것도 아닌 인생이
이렇게 힘들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사랑이
이렇게 사람을 괴롭힐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결혼이
이렇게 스트레스를 줄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이혼이
이렇게 복잡할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시가
이렇게 수다스러울 수가 없네

별것도 아닌 똥이
이렇게 안 나올 수가 없네 



어제 글 쓰는 친구 우근이가 마광수 교수 1주기를 기념해 올린 글을 보고 예전에 스크랩 해놨던 그의 시를 다시 꺼내 읽어보았다. 마광수 교수는 연세대에 가서 연극반 지도교수를 하기 전에 홍익대 뚜라미 지도교수이이기도 했다. 당시로는 드물게 스물여덟 살에 교수에 임용된 천재였다는데 마침 우리 써클인 창작곡동호회 '뚜라미'의 지도교수를 맡은 것이었다. 뚜라미 10주년 때 동아리 임원이었던 나는 마광수 교수를 모셔와 같이 생일 파티를 했는데 그때 교수님이 재미 있는 후일담을 들려주며 우리를 웃겼다. 

"학교 써클 지도교수를 하라는데, 블랙테트라와 뚜라미 둘 중 하나를 하라는 거예요. 근데 블랙테트라엔 여자가 없잖아요."

사람들은 대부분 그가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라는 에세이나 [즐거운 사라]라는 소설을 써서 옥고를 치뤘던, 야한 것만 좋아하는 이상한 교수 정도로 생각하지만 사실 그는 윤동주 시 연구에 독보적인 존재였고 시와 그림에도 조예가 깊은 문인이었다. 

오늘 아침 그의 시 '별것도 아닌 인생이'를 다시 읽어보니 그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게 살았는지가 새삼 느껴진다. 기회가 되면 당시 책 출판 문제로 그와 함께 어이없는 옥고를 치뤘던 장석주 시인에게 고인에 대한 작은 이야기라도 한 토막 듣고 싶어진다. 물론 그런 기회가 쉽게 오진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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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 오학년 때 담임 선생은 참 말씀을 재밌게 하는 분이셨다. 한 번은 수업시간에 '이태리타올'에 대한 얘기를 해주셨다. 언젠가 우리나라에서 '깔깔이 치마'가 대유행을 한 적이 있었단다. 그런데 누군가 뒤늦게 깔깔이 천을 잔뜩 수입해 놨는데 다음 해 여름엔 유행이 지나는 바람에 더 이상 깔깔이치마를 찾는 사람이 없더라는 것이다. 판단 착오로 많은 빚을 지게 된 사업가는 자살을 결심했단다. 집에서 목을 매려다가 죽기 전에 목욕이나 하고 깨끗하게 죽자, 라는 생각이 들어 목욕탕에 들어갔는데 마침 깔깔이 천이 눈에 띄길래 아무 생각 없이 살갗에 갖다 대보니 때가 국수처럼 밀리더라는 것이다. 그는 무릎을 쳤다. 그래, 이거다! 그렇게 해서 이태리타올이 탄생하게 되었다는 것인데. 

물론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 나와 내 친구들은 정말로 넋을 잃고 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구라나 스토리텔링이란 이런 것이다. 극적인 구조를 기반으로 반전이 있고 적당한 교훈까지 가지고 있는 흥미로운 이야기. 이런 이야기를 만들어야 하는데. 아니, 만드는 게 아니라 찾아야 한다. 우리 안에 이미 수많은 이야기들이 들어있고 우리 곁에도 사연들은 널려 있다. 우리가 아직 그걸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그렇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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