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제 사다리를 놓고 올라가 티셔츠를 걷어 올린 뒤 제 가슴을 감시카메라 앞에 들이대는 소녀가 있다. 이게 무슨 또라이 같은 짓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오른쪽에 핑크색으로 꽥 채운 카피가 보인다. 'SMART MAY HAVE THE BRAINS, BUT STUPID HAS THE BALLS.' 똑똑한 사람들은 두뇌를 가지고 있지만 멍청한 애들은 배짱이 있다는 뜻이다. 가뜩이나 그림도 도발적인데 카피에서 배짱을 뜻하는 속어 'Balls'를 여자 아이 사진에 붙인 건 더 짓꿏은 대목이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를 보면 BE STUPID, 즉 멍청해지라는 브랜드 슬로건이 보인다. 청바지의 품질이나 만듦새보다는 그 옷에 들어 있는 반항정신을 전파하는 데 힘쓰는 이탈리아의 패션 브랜드 디젤(DIESEL)의 광고 캠페인이다.

광고회사에서 카피를 쓰고 아이디어를 내는 동안 정말 많은 광고들을 봐왔겠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거 딱 하나만 꼽아보라고 하면 나는 국내외를 통틀어 이 캠페인이다. 다들 스마트를 외치는 시대에 도리어 멍청해지자고 외치는 청개구리들이라니. 이 광고를 처음 보는 순간 나는 허먼 멜빌의 <필경사 바틀비>를 떠올렸다. 뉴욕 월가에서 필경사로 일하다가 어느 날부턴가 모든 업무를 거부하고 "안 하는 편을 택하겠습니다(I would prefer not to)."라는 말만 앵무새처럼 반복하던 어이없는 남자. 영문과를 다니는 동안 전공과목에 별 흥미를 느끼지 멋했던 나도 이 소설을 공부할 때만큼은 너무나 재밌고 가슴이 찡했던 기억이 새롭다. 그때 우리를 가르쳤던 채수환 교수님은 정말 이 소설의 광팬이라서 한 학기 내내 바틀비 얘기만 했다. 히피들도 바틀비의 추종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비록 주어지는 음식조차 거부하고 외롭게 죽어갔지만 수동적인 반항아 바틀비는 지금도 아웃사이더들의 가슴속에 살아서 커다란 울림을 주고 있으니까.

생각해 보면 나도 회사를 그만두지 않고 계속 다니는 게 백 번 현명한 일이었다. 회사를 다니면서 대학원도 다니고 경력 관리도 좀 더 신경 써서 남들처럼 승진을 꿈꾸거나 야심 차게 독립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에게 성공이란 '인정받는 광고인'이 되는 것인가 여러 차례 자문해 보았지만 그때마다 내 속에선 그렇지 않다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마음이 시키지 않는 일을 계속하며 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두렵지만 다른 길을 택했다. 부부가 둘 다 회사를 그만두고 놀면서 한옥이나 고치고 있는 모습이 사람들에게 무모하고 어리석게 비칠까 봐 겁이 났고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아직은 모른다. 요기 베라의 그 유명한 말처럼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지금 밖에는 엄청난 장맛비가 내리고 있다. 코로나 19 때문에 누구나 상상하지  못하던 어려움을 똑같이 겪는 시대가 되었다. 어차피 세상은 달라질 것이다. 그러니 조금 더 이런저런  궁리를 해보며 즐겁게 버텨볼 생각이다. 아내와 나는 이미 스마트를 끄고 '스튜피드' 스위치를 올린 사람들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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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요즘 아프다. 중이염에 이어 감기까지 낫질 않아서 며칠째 고생이다. 어제도 낮 공연을 본 뒤 이른 저녁을 함께 먹고 들어와 자리에 누운 아내가 여덟 시도 안 돼 그냥 잠이 들었길래 쓰고 있던 안경을 벗겨주고 불을 껐다. 아내가 잠든 걸 확인하고 혼자 서재에서 책을 좀 읽다가 열 시쯤 나도 잠이 들었는데 새벽 두 시에 오줌이 마려워서 깼다. 아내는 이미 깨서 깜깜한 데 누워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자리에 누운 내게 아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나랑 놀자." 

불을 켜고 TV를 켰다.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손예진 현빈 주연의 드라마 재방송 1회가 끝나가고 있었다. 음, 이 정도면 술 마시며 욕하기 좋은 드라마인 것 같은데. 술 좀 사올게. 나는 갑자기 기운이 뻗쳐서 옷을 되는 대로 꿰입고 왕복 20분 거리인 세븐일레븐으로 달려갔다. 술 코너에 가서 조니워커와 화요를 쳐다보다가 일단 훈제닭다리와 즉석오뎅을 안주로 사서 카운터에 올려놓고 다시 술 코너의 조니워커 레드와 화요 사이에서 고민을 했다. 결국 두 병을 다 샀다. 술병을 카운터로 가져가자 "결정 하셨어요?"라고 물으며 편의점 사장님이 웃으셨다. 새벽에 별별 손님들이 다 오겠지, 라는 생각이 들어 "네."하고 짧게만 대답하고 얼른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다시 집으로 올라오니 아내는 시금치와 방울토마토, 굴을 함께 볶은 안주를 해놓고 있었고  TV에서는 손예진이 북한 어딘가 산에서 낙하산줄에 매달려 무전기로 투덜대고 있었으며 밑에선 현빈이 권총을 들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드라마군. 나는 "조니워커와 화요 둘 다 마시고 싶어서 할 수 없이 두 병을 다 사왔어." 라는 한심한 변명을 지나가는 말처럼 흘리며 비닐봉투를 열었다. 아, 남북한을 소재로 한 로맨틱 코미디로구나, 하면서 휴대폰으로 작가 이름을 찾아보니 [별에서 온 그대]를 쓴 박지은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손예진의 연기를 싫어하는 우리는 괜히 드라마 욕을 마구 하면서 술을 마셨다. 아내는 반 잔씩 따르고 나는 한 잔씩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한꺼번에 마셔보니 조니워커 레드보다 화요가 더 나았다. 술을 마시고 싶어 마신 게 아니었다. 드라마 욕을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일요일 밤이 무서워서 그런 것이었다. 우린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엔 이토록 심란해하진 않는다. 아무래도 아내와 나는 조삼모사형 인간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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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행복을 간절히 원한다.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행복하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사람은 없다. 아니, 아직 못 봤다. 남부러울 것 없는 엘리트가 끊임없이 바람을 피우는 것도 보았고 SNS에 시크한 척 멋진 일상을 올리거나 몇 달 간의 해외여행을 거의 실시간으로 중계함으로써 많은 이들에게 부러움을 사는 엄친아도 알고 보면 그 자랑이 허세로 밝혀지기도 한다. 나는 궁금했다. 행복은 돈이나 명예가 아니라는데. 알고 보면 행복이야말로 소박한 일상에 있다던데. 그래서 파랑새라고 하지 않던가. 실컷 바깥에서 찾아 헤매다 지쳐 들어온 주인공이 집에서 발견한 파랑새. 그런데 그런 동서고금의 이야기들을 다 알고 있으면서도 왜 사람들은 좀처럼 행복해지지 못하는 것일까.

결혼 초기부터 4년 간 살았던 전세 아파트를 떠나 성북동 꼭대기에 있는 아주 작은 집으로 들어오면서 드디어 나는 행복한 삶에 접어들게 되었다...라고 하면 거짓말이고, 적어도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에 대해서는 좀 알게 된 것 같다. 내가 생각하기에 행복해지려면 세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사람, 공간, 그리고 시간. 즉, 나를 이해해주고 무조건 응원하는 사람과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는 공간에서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때 행복은 시작된다. 물론 이건 완성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다.


아내와 나는 아파트를 떠나 단독주택으로 이사를 하기로 마음먹은 뒤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일단 우리가 가진 돈이 턱없이 부족했고 은행은 아파트가 아닌 단독주택에 대해서는 몇 배나 까다로운 대출조건을 내세웠다. 워낙 주택금융에 대해 잘 모르기도 했지만 요즘 사람들이 대부분 아파트에 살다 보니 아파트 이외의 집 거래는 '기울어진 운동장'처럼 출발부터 차별이 주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무리 막막해도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는 법이다. 우여곡절 끝에 우리는 성북동 언덕 꼭대기 골목 끝에 있는 작은 집을 하나 발견했고 친한 친구들의 금전적 도움으로 며칠 만에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집주인마저 너그러운 분을 만나 이사 전에 두 달간 낡은 집을 수리해서 들어올 수 있는 특전도 받았다. 대출금을 매우 많이 끼긴 했지만 뒷마당까지 있는 어엿한 단독주택의 소유자가 된 것이었다.

이사를 한지 며칠 지나지 않아 아내는 내게 집 이름을 하나 지어보라고 했다. 광고회사에서 평생 남의 회사 걱정이나 하고 살았으니 이젠 자신을 위해서도 뭔가 아이디어를 내보라는 것이었다. 며칠을 고민하다가 성북동소행성이라는 이름을 생각해냈다. '작지만 행복한 별'이라는 뜻이었다. 물론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당장 행복해질 리는 없겠지만 그래도 삶의 방향성이 좀 분명해지는 것 같아서 기뻤다.

우선 아침이 달라졌다. 전에는 거리를 통과하는 차 소리나 두런거리는 이웃 사람들이 내는 생활소음에 잠을 깼다면 성북동에서는 요란한 새소리와 함께 날이 밝았다. 비록 전철역에서 걸어 올라오려면(아내와 나는 차가 없다) 땀을 뻘뻘 흘려야 하는 언덕 꼭대기에 살지만 그 덕분에 차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는 장점을 가지게 되었다. 새소리, 바람소리처럼 자연이 만들어내는 소리는 아무리 들어도 스트레스가 없었다. 가끔 아내가 "저놈의 새가 미쳤나. 왜 새벽부터 울어대고 난리야?"라고 투덜대는 경우는 있지만 그게 진짜 화를 내는 게 아니라 뿌듯해하는 마음의 굴곡된 표현이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회사가 끝나면 대부분은 곧장 집으로 왔다. 집에서 아내와 보내는 시간이 밖에서 직장 동료나 친구들과 놀거나 술 마시는 시간보다 좋았다. 사람들이 보고 싶으면 집으로 초대를 했다. 집은 작지만 옥상에 올라가면 가깝게는 광화문빌딩부터 멀게는 남산타워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야경이 펼쳐졌다. 자주 열지는 못하지만 옥상파티는 어느덧 성북동소행성의 '계절 인기 품목'이 되었다. 그러나 가장 좋은 건 집에서 한적하게 음악을 켜놓고 책을 읽거나 작은 볼륨으로 TV를 틀어놓고 아내와 같이 술을 마시는 시간이었다. 그중에서도 새벽에 혼자 일어나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시간을 갖는 건 내가 가진 행복의 크기를 늘리는 일이었다.

그런 내가 어느 날 오후에 아내에게 전화를 해서 "아무래도 회사를 그만두어야겠어."라고 말했다. 물론 아무런 대책 없이 한 소리였고 그녀도 그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내는 "그래. 잘 생각했어. 당신이 오죽하면 이러겠어. 당신 회사 오래 다녔잖아."라고 말해주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 같았다. 아내와 통화를 끝낸 후 나는 정식으로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밝혔고 사람들은 회사를 그만 두면 당장 뭘 할 거냐고 물었다. 그때마다 나는 "아직 나도 잘 모르겠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대답해서 사람들을 허탈하게 만들었다. 아마도 '저 자식, 참 속 편한 소리 하고 있네.'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니면 바보라고 생각했거나. 바보면 어떻고 아니면 어떤가. 어차피 그들이 내 인생 대신 살아줄 것도 아닌데.

그리고 다행히 우리 집엔 바보가 또 하나 있다. 혼자서 바보라면 외롭겠지만 같이 사는 집에 바보가 하나 더 있으면 무서운 게 별로 없다. 더구나 그 바보는 이 세상에서 나를 가장 잘 이해해주고 내 이야기에 무조건 동의하는 사람이니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이 없는 건 아니다. 그래도 뭔가 바보 같지만 신나는 일을 해보고 싶다. 세상에는 아직 사람들이 모르는 두 개의 소행성이 있다. 생떽쥐베리가 발견한 소행성 B612 엔 어린 왕자가 살고 서울에 있는 성북동소행성엔 대책 없이 즐거운 바보 커플이 산다는 점이 조금 다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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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마지막 퇴근하는 저의 뒷모습을 도촬했습니다. 

 


첫 차는 아반떼였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광고대행사를 다니던 시절에 만기가 된 작은 적금을  찾아 그 차를 샀다. 이유는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서'였지만 차를 꾸미는 데에 도통 관심이 없고 카오디오도 시쿤둥한데다가 길눈도 엄청 어두운 나는 출퇴근 이외의 용도로 차를 쓰는 일이 드물었고 술을 좋아하는 바람에 차는 늘 주차장에 혼자 서 있는 일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데이트할 때 차가 필수라고 하는데 나는 유독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여자애들만 좋아해서 그런지 도통 내 차에 여자를 태워본 기억이 없다. 나만의 공간은커녕 아침에 일어나면 '가만, 내가 어젯밤에 차를 어디다 뒀더라?'라고 기억을 떠올리기 바쁘기에 결국 2년 만에 차를 팔아버리고 다시 뚜벅이가 되었다.

대행사를 그만두고 작은 크리에이티브 브띠끄에 다니던 시절, 차를 몹시 좋아해서 별명이 '차돌이'인 친구가 차를 바꾸면서 자신이 타던 차를 나에게 넘겼는데 차종은 랜드로버 프리랜더였다. 졸지에 남들이 타고 싶어한다는 외제차를 갖게 된 것이다. 당시에 네비게이션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던 시기였는데 내 차엔 무슨 전자장치가 숨어있는 바람에 수신 방해를 심하게 받았다. 길치에 가까운 방향감각을 타고난 나는 결정적일 때마다 내비게이션 작동이 멈추는 바람에 길바닥에서 곤욕을 치르곤 했다. 차를 정비하는 것도 서툴러서 이전에 내 차를 타던 친구가 가끔 찾아와 혀를 끌끌 차며 정비소에 데려다주곤 했다. 결국 그 친구와 함께 운영하던 사무실을 접으며 차를 팔아버리고 나는 다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자동차 없이 지냈다. 뒤늦게 만난 아내도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고 또 걷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우리 집에 자가용 없는 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운전을 전혀 하지 않는 건 좀 아쉽다고 말했다. 나는 운전을 쉰지 십 년이 훨씬 넘었고 이전에도 남의 차는 거의 운전하지 않았으므로 렌트카를 덥썩 빌려 운전하는 게 왠지 생소하고 겁이 났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 시내 주행 연수를 나흘 정도 받아보았다. 생각보다 운전이 어렵지 않았고 예전에 운전하던 감각도 되살아났다. 자신감이 붙은 나는 아내가 없던 어느 주말, 쏘카를 불러서 빨랫감을 싣고 아리랑씨네센터 맞은편에 있는 빨래방으로 가서 빨래를 했다. 평소엔 버스를 타고 가던 곳이었는데 빨래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이럴 땐 정말 차가 있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쏘카를 이용하게 된 시기와 회사를 그만두게 된 시기가 우연히 겹쳤다.

나는 사회 생할을 시작할 때부터 카피라이터로 일했고 지금까지 계속 광고회사에만 다녔다. 작은 사무실도 운영해 보았고 프리랜서로도 일해 봤다. 광고는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를 쉽고 흥미롭게 표현해서 소비자들에게 전달하는 게 관건인데 결과물을 보면 쉬워보여도 막상 과정은 늘 어렵고 막막했다. 게다가 나는 성격상 일을 맡으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는 편이다. 당연히 다른 개인적인 일엔 소홀할 수밖에 없고 저녁에 초주검이 되어 귀가하면 날카로워진 신경을 다스리느라 혼자라도 술을 마시고 잠드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아내는 안주 없이는 술을 못 마시는 나의 음주습관 덕분에 자신의 몸무게도 십 킬로그램이나 늘었다고 투덜댔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는 '많이 벌었으니 이제 그만 하면 됐다'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업계는 늘 위기였고 다니는 회사마다 사정이 안 좋았다. 갑을관계가 분명한 업계의 속성 때문에 불합리한 일도 많았다.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야 하는 스트레스, 촉박한 스케줄, 원래 의도대로 나오지 않는 결과물 등 괴로운 일이 많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점점 자존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힘든 건 그 동안의 공력이 있어 그런대로 참을 만 했지만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들은 켜켜이 쌓여 그대로 마음 속 상처가 되었다. 전혀 행복하지 않았고 이대로 계속 회사를 다니면 계속 불행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 달 전 회사를 그만 두겠다고 결심했다. 아내에게 제일 먼저 말했더니 '당신이 오죽했으면 이러겠어'라며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자신도 속으로는 무척 걱정이 되겠지만 나한테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고 했다. 마지막 출근을 하는 날 나의 뒷모습이 유난히 가벼워 보인다며 도촬을 하기도 했다. 마지막 출근을 하는 날 나의 뒷모습이 유난히 가벼워 보인다며 도촬을 하기도 했다.  사진에 얽힌 사연을 써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려도 되느냐고 묻길래 아직은  된다고 했다. 공식적으로 얘기를 하지 않은 상태라 대행사나 광고주 분들이 알면  되기 때문이었다. 퇴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는 법이라고 했다. 손에 쥔 공을 놓아야 더 큰 공을 잡을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어쩌면 비슷한 시기에 다시 시작하게 된 운전과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퇴직을 선언한 후 어느 일요일, 쏘카를 빌려 논현동에 있는 회사로 가서 개인짐을 챙겨오면서 '남이 운전하는 차만 타다가 내가 운전하는 게 이렇게 다르구나' 라는 걸 새삼 느꼈다. 앞으로의 삶도 그럴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이 나는 즐겁고 뿌듯했다. 비록 작은 차라도 내가 운전하는 삶이 시작되는 것이니까. 아내를 태우고 쏘카를 반납하러 가는 길에 내가 그 동안 운전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운전이 워낙 미숙하다 보니 나 혼자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 죽으면 몰라도 같이 타고 가다가 당신까지 죽게 만들까봐 무서워서...그 소리를 듣던 아내는 '혼자 죽는 게 걱정이지 둘이 같이 죽는 건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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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는 5월에 만나 이 년 후 5월에 결혼식을 했고 또 내 생일도 5월에 있는데 이들이 나란히 이어져 있는 까닭에 해마다 오월이면 함께 여행을 한다. 어떤 때는 제주도를 가기도 하고 태국처럼 가까운 해외로 나가기도 했다. 작년엔  일본 교토와 오사카에 갔었고 이번엔 부산에서 일주일을 보내기로 했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어디 가서 무엇을 꼭 보거나 먹어야지 하는 뚜렷한 목적은 없다. 그저 서울이 아닌 곳에서 두 사람이 온전히 24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토요일 정오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KTX를 탄 우리들은 열차 안에서 더 이상 커피나 간식을 팔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바람에 부산까지 커피를 마시지 못하고(자판기가 있었으나 현금도 없었고 캔커피를 마시기는 싫었으므로) 괴로워하다가 겨우 도착한 부산역에서는 커피 대신 어묵을 한 꼬치씩 사 먹고 호텔로 향했다. 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미리 예약한 중앙동의 한 호텔에 올라가 짐을 풀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투썸플레이스에서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창밖으로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내는 여행지에서 비를 만나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시 21층 객실로 올라온 우리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뒤 각자 침대에 누워 가져온 책들 - 나는 이명수 선생이 전에 보내준 [내 마음이 지옥일 때]와 서울역에서 산 김진영의 [마당이 있는 집], 아내는 서울역에서 산 김훈의 [연필로 쓰기] - 게으르게 뒤적이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비가 와서 그런지 이따금씩 네온이 반짝이는 중앙동과 광복동 거리는 더 이국적으로 보였다. 우리는 이명세 감독의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등장해 더 유명해진 40계단에 올라 '이곳은 6.25 때 내려온 피난민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었다는 설명문을 읽고 정말 거기 쓰여있는 대로 영도다리가 보이는지 바다쪽을 쳐다보았다. 계단 위 왼쪽으로 쭉 이어지는 인쇄골목을 지나 국제시장에도 잠깐 들러보았다. 몇 년 전 여기에 있는 '개미집'에 와서 왕창 먹고 마셨던 추억을 소환했다. 사실은 예약해 놓은 식당으로 사는 길이었는데 아직 예약시간이 되지 않았기에 시간을 떼울 겸 거리를 천천히 배회한 것이었다. 

 

드디어 여섯 시가 되어  아내가 인스타그램에서 만나 전부터 눈여겨 봤다던 <유노우>라는 일식요리집으로 갔다. 처음엔 사장님 혼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기에 우리는 우리는 카운터 자리에 앉아서 음식이 준비되기를 기다렸다. 곧 아름다운 여직원도 나타났다. 이 분은 식당의 첫 스텝인데 5살 때 고열로 청력을 잃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술도 하고 보청기를 끼고 있어서 소통을 할 수 있지만 작은 소리는 잘 못 듣는다는 얘기를 인스타그램에서 읽었다. 사장님이 어렸을 때 친구나 동네 형 등 장애인들과의 좋은 추억이 있어서 얼굴도 보지 않고 청해서 이 분을 뽑았다는데 결과적으로 너무 예쁘고 손님들을 세심하게 살피는 성실한 직원이었다.

 

우리는 생선회 모듬과 키조개튀김 등을 시키고 술은 사케를 주전자에 담아달라고 했더니 정말 날렵한 주석주전자가 나왔다. 주석이 차가운 기운을 오래 지켜준다는 설명도 들었다. 일식집은 카운터에 앉으면 주방장이 생선을 요리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오이를 얇게 저며 우리를 놀라게 하던 사장님은 생선을 가져와 날렵하게 회를 치기도 하고 젖은 천에 감쌌던 오징어를 풀어 가볍게 칼집을 낸 뒤 썰어 접시 위에 담기도 했다. 꼬챙이에 생선을 샤샤샥 꿴 뒤 오른쪽 가스레인지로 달려가 굽기도 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흡사 묘기대행진을 보는 것 같았다. 

 

세 테이블에 갈 모듬회를 함께 만들어 한 그릇씩 담아 냈는데 우리에게 온 건 분재처럼 작은 나무들 사이로 각종 회가 누워 있어서 마치 '숲을 지나 회를 먹으러 바다로 가는 느낌이 들었다. 회도 맛있고 술도 좋아서 아내와 나는 그 만족스러움에 거의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사장님인 유병찬 요리사가 나온 '츠지요리학교'(가게 앞 명판에 표시가 되어 있다)는 커리큘럼도 빡세고 되게 힘든 곳이라고 한다. 

 

키조개튀김튀김이 나왔는데 정말 바삭하고 맛이 좋았다.어느덧 사케 주전자 하나가 다 비워졌다 . 원래는 한 주전자 마시고 나면 소주로 바꾸기로 했는데(사케는 비싸니까) 아내가 사케 한 주전자만 더 마시면 안 되냐고 묻기에 망설이지 않고 사케 한 주전자를 더 시켰다. 오늘 같은 날 안 마시면 도대체 언제 이렇게 맛있는 안주에 사케를 마신다는 말인가. 죽순튀김과 표고새우튀김 등 다양한 음식이 서비스로 나왔고 마지막으로 대선소주를 한 병 시키니 마침 금태구이까지 나왔다.  우리는 금태 두 마리의 크기가 서울보다 30%는 더 큰 것 같다고 하며 엄지 두 개를 세워 보였다. 

 

 

"가게를 연 지 한 일 년 되셨죠?"라고 아내가 물으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장님은 원래 충청도가 고향인데 부인이 부산 사람이라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고 곧 둘째딸이 태어난다고 했다. 처음엔 좀 외진 곳이라 선배들이 여기 가게 여는 걸 말렸는데 마침 부산에서 유명한 블로거 한 분이 오셔서 가게를 포스팅해준 뒤부터는 전화를 받느라 일을 못할 정도로 손님이 몰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하면서 마침 오늘 그 블로거 커플이 오셨다고 하는데 가르키는 손을 보니 바로 우리 옆자리 커플 손님이었다. 그 블로거는 술과 음식이 너무 맛있는데 마침 자기가 임신 중이라 지금 술을 못 마신다고 아쉬워했다. 

 

배가 너무 불렀다. 남은 소주는 내가 마시고 사케는 아내가 해치우기로 했는데 결국은 소주와 안주를 아주 조금 남겼다. 부산 여행 첫 날의 첫 식사는 완벽했다. 모든 식재료는 훌륭했고 유병찬 요리사의 요리는 노련했다. 식기 하나하나에도 공을 들인 태가 역력했다. 너무 뿌듯하고 고마운 마음에(사실은 아내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계산할 때 10퍼센트를 더 얹어달리고 했더니 처음엔 사양하다가 곧 받겠다고 하고는 직원에게 고생했다며 바로 현금으로 바꾸어 주었다. 음식 가격이 서울의 70% 수준이라고 아내가 귀뜸을 했다. 다시 밖으로 나와 비그친 거리를 천천히 걸어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일상을 벗어나는 즐거움도 있지만 이렇게 새로운 사람과 장소를 만나는 기쁨도 있다. 국제시장 근처다. 부산 중구 광복중앙로 14-13. 

 

 

#부산여행 #유노우 #yoo_no_woo #남포동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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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토요일에 만나서 괜히 걷다가 헤어지는 모임 '토요WalkingQueen'이 있는 날이었습니다. 이번엔 남산길을 코스로 정했습니다. 벚꽃은 다음 주가 절정일 것 같지만 저희가 그때는 다른 스케줄이 있어서 이번 주로 정한 것이었습니다. 저희 부부는 아침에 영화 [약속]을 보러 일찍 명동으로 나갔습니다. 전도연과 설경구가 또 얼마나 사람들을 울릴까 걱정을 하면서 갔고 실제로 영화를 보면서 저와 아내 모두 엄청나게 눈물을 흘렸지만 결론적으로 영화를 보기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월호 참시 이후의 개인적 삶을 정면으로 다룬 극영화이다 보니 접근 자체가 굉장히 조심스러웠으나 시나리오와 연기에서 과잉이나 쓸 데 없는 욕심을 부리지 않아서 좋았습니다. 이창동 감독이 제작을 맡았고 감독인 이종언도 이전 이창동의 작품에서 일을 했던 인물이라 믿음이 가기도 했었죠.

영화 상영 시간 내내 코를 풀어내며 우느라 힘이 쪽 빠진 저희 부부는 충무로의 단골집인 '사랑방 칼국수'에 가서 닭백숙을 먹었습니다. 그리고 동대입구 태극당에 가서 커피와 빵을 먹으며 영화에 대한 얘기를 했습니다. 오후 두 시 정각에 오늘 처음 참여하는 이창희 씨가 오셨습니다. 저와 페친이신데 그림을 그리는 분이라고 하셨습니다. 유화를 그리신답니다. 곧이어 채윤정 씨가 도착해서 함께 나가 걷기 시작했습니다. 국립극장 쪽으로 올라가 남산을 한 바퀴 도는 코스였습니다. 오후에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서 날이 잔뜩 흐렸지만 그래도 봄을 맞아 여기저기서 피어난 개나리, 진달래, 벚꽃 들의 기운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우리는 꽃들의 아름다움과 싱그러움을 만끽하면서 차가 없는 남산길을 걸었습니다.

이창희 씨는 많이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서 나오셨다고 했고 저희는 잘 오셨다고 박수를 보냈습니다. 자기는 나무와 숲이 많은 곳으로 오면 후각이 날카로워진다고 하며 덕분에 식물들의 냄새를 많이 느낄 수 있어 좋다고 했습니다. 채윤정 씨도 조금 귀찮았었는데 막상 나오니 너무 좋다고 하며 활기찬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런데 세 시가 넘으니 비가 후두득 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아내와 저, 채윤정 씨는 윈드브레이커의 모자를 뒤집어썼고 이창희 씨는 가방에서 고장 난 우산을 꺼내 썼습니다. 걷기 힘들 정도의 비는 아니라서 다행이었습니다. 한남동 쪽을 돌아 다시 동대입구 쪽으로 내려와 걷기를 멈추고 평안도집에 가서 족발 대자를 시켰습니다. 제가 소맥을 세 잔 만들어 돌렸더니(요즘 금주 중인 윤혜자 씨는 물을 마셨습니다) 다들 맛있다고 하며 기뻐했습니다. 우리는 배가 부르지만 계속 음식이 들어가는 게 신기하다는 뻔뻔한 얘기를 하면서 막국수와 빈대떡까지 시켜 먹었습니다. 술이든 음식이든 더 이상 먹을 수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일어난 저희는 바로 옆에 있는 '달콤커피'에 가서 커피도 한 잔씩 마셨습니다. 이창희 씨가 창밖을 바라보며 비가 오니 참 좋다고 했고 채윤정 씨가 자기도 그렇다고 맞장구를 쳤습니다. 졸지에 소녀가 된 세 여성과 함께 이런저런 감성 수다를 떨다가 족발 값 및 커피값을 N분의 1로 나누어 주고받음 뒤 헤어졌습니다. 아무런 목적이나 이슈 없이 그냥 내키는 사람들끼리 토요일에 만나 걷는 게 생각보다 즐겁습니다. 다음 토요워킹퀸엔 또 어떤 분들이 함께 하실지 벌써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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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김굿을 보려고 휴가를 내고 내려온 진도. 이게 무슨 복인지 아내와 함께 요즘 우리나라에서 제일 바쁜 고수(북치는 이) 태영 씨의 집으로 와서 먹고 마시며 노는 행운을 누리고 있습니다.

어젯밤에도 간재미무침, 병어찜 그리고 산낙지 안주에 검정찹쌀홍주로 호강을 했는데 모텔에서 자고 일어나 또다시 찾아온 우리 부부에게 어머님이 차려주신 아침 밥상은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지는 진수성찬입니다. 메인 반찬인 보리굴비와 조기는 물론 곱창김무침, 멸치볶음, 갓김치, 그리고 가시리국까지 어느 하나 맛없는 게 없습니다. 이 정도 밥과 반찬만 매일 보장된다면 수감생활도 가능하겠다고 얘기했더니 다들 와하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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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에 만나 괜히 걷다가 헤어지는 모임 '토요워킹퀸'이 열리는 날이었는데 오전에 급하게 정리해 넘겨야할 일이 있어서 나는 정시 출발을 하지 못하고 아내만 먼저 나갔다. 열두 시쯤 겨우 일을 마치고 나가 어제의 중간기점인 마장역 근처 '황귀닭곰탕'에서 윤정, 동현, 하늬 등 멤버들을 만났다. 이곳은 24시간 영업을 하는 기사식당인데 닭백반, 닭곰탕, 닭껍질, 닭껍질무침 등 메뉴들이 세분화 되어 있고 가격도 아주 싸다. 남대문 갈치골목의 '진미닭집'의 포스에 미치지는 못하지만 훌륭한 닭요리집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닭껍질 요리를 시켰고 닭백반을 시킨 아내가 닭껍질무침도 하나 시켰다.

"닭껍질을 보니까 캐서린 비글로의 영화 <폭풍속으로>가 생각나네."

내가 이렇게 말을 꺼내자 아내가 "거기서 키애누 리브스가 얼마나 멋있게 나오던지." 라고 말을 받았다. 키애누 리브스와 패트릭 스웨이지 둘 다 너무나 멋있게 나오던 끝내주는 오락영화였다고 다들 그 작품을 추억했다. "거기서 키애누 리브스가 FBI 사무실을 걸어가면서 선배에게 이런 말을 하거든. 저는 술도 안 마시고 담배도 안 피우고 닭껍질도 안 먹어요. 그래서 어, 저놈들도 닭껍질은 몸에 안 좋다고 조심하는 모양이구나 생각했지."

그러자 듣고 있던 윤정이 마지막에 키애누 리브스가 FBI 신분증을 바다에 던지는 장면이 멋있었다고 말했다. "그 장면하고 똑 같은 게 '하버드 대학의 공부벌레들'이라는 영화에 나와. 하트로 나오던 티모시 보텀스가 마지막에 A- 학점이 적힌 성적표를 종이비행기로 만들어 바다에 날리지. 하트는 계약법을 가르치던 킹스필드 교수의 딸과 사귀었는데 그 딸이 린지 와그너였어. <소머즈>에 나왔던."

윤정이 놀라서 묻는다. 어떻게 그런 걸 다 기억해요? 예전에 영화 좋아하는 친구와 그 대사 얘기를 한 적이 있었다고 대답하자 옆에서 동현도 말한다. 저도 <폭풍속으로>는 많이 봐서 거의 외우다시피 봤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대사가 있었는지는 몰랐네요. 그런자 아내가 "오빠는 날 앉혀놓고 맨날 이런 얘기를 해. 난 알아듣지도 못하는데." 라며 웃는다. 아내는 영화 제목이나 배우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라 이런 내가 특히 이상하고 한심하게 느껴질 것이다. 나는 아내가 못 알아 들으면 순자라도 앉혀놓고 그런 얘기를 계속 한다고 농담을 했다.

생각해보면 참 쓸 데 없는 얘기들이다. 폭풍속으로가 밥을 먹여주냐 아니면 거기서 돈이 나오냐. 그러나 나에겐 이런 실없는 얘기를 할 때가 가장 즐겁고 걱정 없는 시간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아무런 목적없이 흘려버리는 일종의 치유시간이라고나 할까. 늘 중요한 얘기만 하고 사는 인생은 재미 없다. 그런 면에서 요즘 내가 회사에서 지내는 시간을 돌아보면 처참할 지경이다. 직원들과는 물론 클라이언트와 만나도 농담 한 마디 하지 않는 것이다. 농담이나 한담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위험신호다. 이렇게 계속 나사가 안 풀어지면 크리에이티브한 생각을 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회사에서 안 되면 집에서라도 정신의 나사를 자주 풀어야 한다는 게 나의 지론이다.

그나저나 닭껍질을 다 먹고 다시 청계천 길을 걷느라 <폭풍속으로> 얘기를 다 하지 못했다. 사실 그 영화는 캐서린 비글로가 감독이지만 제임스 카메론이 옆에서 도와주지 않았다면 그렇게까지 멋진 영화로 탄생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녀의 전남편이었던 제임스 카메론은 이 영화의 제작자로서 당시 자신이 감독하던 영화보다 더 열심히 이 작품에 심혈을 기울이는 의리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제임스 카메론은 영화 작업을 하다가 만난 여자들과 계속 결혼을 하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건 그의 첫 영화였던 <터미네이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영화의 시나리오를 써가지고 영화사를 돌아다니던 제임스는 게일 앤 허드라는 제작자와 만나 '감독을 하는 조건으로 단돈 1달러에 시나리오를 파는' 담판을 지었고 내친 김에 그녀와 결혼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에이리언2> <터미네이터2> <타이타닉> <아바타> <알리타> 같은 블럭버스터 영화들로 이어지는 제임스 카메론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었다. 이것도 다 쓸 데 없는 얘기이긴 하지만. 뭐, 그냥 그랬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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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에 두 번 가는 아침 수영 클래스를 마치고 나와 간단하게 요기를 하려고 늘 가던 김밥천국을 향해 걷고 있었다. 날씨는 여전히 추웠고 길은 황량했다. 광림교회 앞쯤에서 어떤 오십 대 아주머니가 지나가던 여자에게 뭔가를 묻다가 거절을 당한 뒤 웃으며 인사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아주머니는 곧장 내게로 다가와서 간절한 눈빛으로 휴대폰을 내밀었다. 혹시 특뿔식당이라고 아시나요? 휴대폰을 내려다 보니 문자메시지를 찍은 사진이 보였고 그 안엔 '압구정역5번출구 나와 직진 우리은행 끼고 돌아 계속 직진 투뿔등심'이라는 내용이 잔뜩 틀린 맞춤법으로 적혀 있었다. 특뿔식당이 아니라 투뿔등심이네요, 아주머니. 내가 그렇게 정정하자 "맞아요. 투뿔등심!"이라고 하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초초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흔히 '조선족'이라 불리던 재중동포인 것 같았다. 

"오늘 처음 일하러 가시는 거예요?" 
"네." 
"근데 우리은행 끼고 직진하면 여긴데, 투뿔등심이 안 보이네요." 
"아이고, 어떡하나. 열 시까지 가기로 했는데... 죄송해요, 바쁘신데. " 
"아니에요. 벌써 열 시 오 분이네요. 빨리 식당을 찾아야죠." 

내 휴대폰 지도서비스로 투뿔등심을 검색해 보니 제일 가까운 게 가로수길점이고 그 다음이 논현2호점이다. 둘 다 이 근처는 아니다. 아주머니 휴대폰을 다시 보여달라고 했더니 설상가상 배터리가 다 돼서 꺼졌단다. 보조배터리를 연결했는데 전원이 들어오려면 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게 추우면 더 잘 안 들어와요." 

아주머니는 애꿎은 휴대폰을 손바닥으로 탁탁 치면서 말했다. 검은색 휴대폰엔 애플 마크가 붙어 있었지만 왠지 가짜처럼 보였다. 나는 아주머니와 함께 근처 부동산으로 향했다. 마침 부동산 아저씨는 창에 달린 블라인드를 떼어 재설치 하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나는 바쁘신데 미안하다고 사정 얘기를 하고 근처에 투뿔등심이 있느냐고 물었다. 옆에서 아저씨를 돕던 아주머니가 이 근처에는 투뿔등심이 없다고 말했다.  그때 재중동포 아주머니의 휴대폰 전원이 다시 들어왔다. 문자메시지 안에 있는 010으로 시작하는 전화번호가 보였다. 내가 이 번호로 전화를 해서 물어보라고 했더니 자기 전화로는 통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까 본 휴대폰 메시지도 사진으로 찍어 놓은 걸 보면 이건 뭔가 아주머니 소유가 아닌 일종의 대포폰인 것 같은데, 아무튼 안쓰럽고 답답한 상황이었다. 나는 아주머니의 사진을 다시 켜서 그 번호를 찍은 뒤 통화를 시도했다. 

"여보세요, 거기가 투뿔등심인가요?" 
"네." 
"제가 지금 거기 찾아가시는 어떤 아주머니를 길에서 만났는데요." 
"그러세요?" 
"문자메시지엔 압구정역5번출구로 나와서 우리은행 돌아 직진하면 투뿔등심이 나온다고 돼 있는데..."
"거기 아닌데." 
"네. 뭔가 잘못된 것 같긴 해요." 

그때 복덕방 아주머니가 뛰어나오셨다. 자기가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투뿔등심은 가로수길에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알아서 가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고 다시 복덕방 안으로 들어갔다. 유리가 덮인 테이블 위엔 설치하려다가 만 블라인드가 심란하게 놓여 있었다. 얼른 재중동포 아주머니에게 약도를 그려주자며 내가 종이를 찾았더니 아주머니가 빈 로또복권 용지를 들고 왔다. 거기에 그리긴 힘들 것 같아서 내 가방 안에 있는 다이어리를 꺼내 속지 한 장을 북 찢어냈다. 아주머니가 가로수길로 가는 길을 설명하며 종이 위에 도형을 그리기 시작하자 옆에 있던 아저씨가 언제 한가하게 그걸 그리고 앉아있느냐면서 테이블 위의 블라인드를 한켠으로 치우더니 유리 밑에 깔린 커다란 지역지도를 가리켰다. 그걸 카메라로 찍어서 찾아가게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맞아요, 맞아. 다들 박수를 치며 그게 좋겠다고 말했다. 

재중동포 아주머니의 휴대폰 중 유일하게(?) 사용 가능한 카메라로 투뿔등심 가로수길점까지 가는 약도를 촬영했다. 그리고 복덕방 아주머니가 밖으로 따라나와 손으로 길을 가리키며 저쪽으로 가다가 왼쪽으로 쭉 가서 두 블럭 지나 가로수길을 건너서...하며 목이 터져라 열심히 설명을 해줬다. 재중동포 아주머니는 연신 고맙다고 고개를 숙여 우리에게 인사를 했다. 재중동포 아주머니는 가로수길을 향해 바쁜 걸음을 옮겼고 복덕방 아저씨 아주머니 커플은 다시 들어가 블라인드를 마저 설치하기 시작했으며 나는 김밥천국으로 달려가 이천 원짜리 원조김밥을 한 줄 사서 사무실로 왔다. 2019년 1월 두 번째 화요일 아침에 벌어졌던 '압구정동 오지라퍼 커넥션'의 결말은 이렇게 싱거웠다.  그나저나 아주머니는 그 식당 잘 찾아 가셨을까. 오늘이 첫 날이라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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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요>

길위의 생각들 2019. 1. 6. 13:22


서양 사람들이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도 쉽게 미소를 짓고 악수를 나누는 것은 누구와 마주치더라도 내가 당신을 해칠 의도가 없고 내 손엔 아무런 무기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한 일종의 공생욕구에서 출발했다고 한다. 지금은 이 인사법이 서양뿐 아니라 전 세계에서 통용되는 상식임은 물론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제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밴드 등 가상의 세계에 들어가서 누군가의 게시물에 '좋아요'로 그 선의를 표시하고 산다. 페이스북을 처음 만들 때 주커버그가 '싫어요'도 같이 만들지 않는 바람에 우리는 좋아요 하나만 가지고 감정을 표해야 하는 약간 복잡한 상황에 직면했다. 그래서 오늘도 할 수 없이 '좋아요'를 누르고 다닌다. 이렇게 멋진 사진을 올렸는데 좋아요를 안 누르면 안 되지. 저렇게 좋은 글을 써서 올렸는데 좋아요를 안 누르면 섭섭해 할거야. 그렇게 얼굴이 예쁜데 좋아요를 안 누르면 질투해서 건너뛴다고 생각할거야....졸지에 좋아요를 안 누르면 그것은 곧 '싫어요'라는 표시로 둔갑한다. 괜히 좋아요 한 번 안 눌러서 내가 자기를 싫어한다는 오해를 받으면 손해니까 누르자. 뭐, 돈 드는 일도 아닌데.  

그러다 보니 오늘도 페이스북에 들어가서 내 게시물의 좋아요 숫자를 확인한 뒤 그 좋아요를 눌러 준 사람들의 담벼락에 들어가서 인사 삼아 그의 게시물에도 좋아요 몇 개를 누르고 나온다. 친구 어머님이 돌아가셔서 확인차 밴드에 들어갔다가 내가 전부터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던 놈의 게시물에조차 좋아요를 누르려다가 멈칫한 나는 순간 아연실색한다. 아, 이렇게 살아도 되는걸까. 늘 얼굴에 미소를 띄우고 입에 발린 소리나 하면서 가면처럼 사는 인생이라니. 어제 대학 써클 모임에서 선배 형에게 내가 의외로 사회 생활을 잘 한다는 소리를 들었다. 예전부터 나약하고 빈 구석이 많은 나를 잘 아는 형이 전혀 비꼬는 의미 없이 해준 칭찬이었지만 왠지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재미 없게 느껴졌다. 그리고 오늘 숙취에 시달리면서 과연 잘 산다는 건 무엇일까 다시 생각해 보았다. 물론 그런 엄청난 인문학적 질문에 쉽게 답이 나올 리가 없다. 다만 바라건대 올해는 예전보다 좋아요를 좀 덜 누르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필요할 땐 싫어요! 라고 소리도 지르며 살았으면 좋겠다. 어느새 싫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취향이 아닌 권력의 문제가 되고 말았으니까. 성공한 대기업의 회장님이나 CEO들 중엔 성격이 급한 사람들이 유독 많은데 생각해 보면 그건 그가 급한 성격 그대로 살 수 있는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그런 위치에 있지 못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위치보다는 마음이 더 문제다. 내가 좋아요를 누른 횟수 만큼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싫어요를 말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고 살자 결심해 본다. 그러니 아내여, 친구들이여, 부디 새해부터 나와 함께 단체로 삐뚤어져 보지 않겠는가. 착하고 올바르게만 살면 재미 없으니까. 그리고 난 그대들이 그렇게 착해빠지거나 올바른 성향이 아니라는 것도 잘 알고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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