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은 글 짧은 여운'에 해당되는 글 54건

  1. 2019.07.11 나사를 푸는 시간
  2. 2019.02.03 초단편 4 - 고재영은 천사
  3. 2018.12.21 첫 단추
  4. 2018.11.25 초단편 3 - <타임머신 소년>
  5. 2018.11.23 초단편 2 - <내가 사과할게>
  6. 2018.11.21 초단편 1 - <나무들의 반란>
  7. 2018.11.16 수능과 보상심리
  8. 2018.09.25 꽃들의 말
  9. 2018.08.27 문병
  10. 2018.04.24 예전에 써놓은 시 한 편

그동안 나사를 너무 조이고 살아왔다. 초등학교 때 남들과 똑같이 조여져 있던 나사를 중고등학교 때 시도 쓰고 소설도 읽고 하면서 조금씩 풀기 시작했는데  대학 들어가서는 술 담배를 너무 해서 그랬는지 나사가 계속 왼쪽으로만 돌아갔다. 더 이상 견디기 힘들 정도가 되자 군대를 갔다. 군대에서는 군인정신으로 무장한 선임과 간부들이 차례로 달려들어 십자드라이버로 몸과 마음의 나사를 꽉꽉 조여주었다. 지금도 그 분들의 친절함을 잊지 못한다.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한 뒤에도 '너는 현실감이 떨어진다'면서 선배와 동료, 경영진까지 시시때때로 기름을 치고 나사를 조이고 태엽을 감아 주었다. 나사를 꽉 조일수록 안정감이 생겨서 좋긴 한데 벽이나 바닥에 딱 붙어야 하기 때문에 시야가 좁아지고 마음대로 돌아다닐 수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발이 아프고 몸이 갑갑했지만 세상이 그런 것이려니 하며 살았다. 

 

어느날 아침 일어나 보니 두 발이 땅에 붙어 움직일 수가 없었다. 수십 년 넘게 착 달라붙어 살았는데 이젠 나사 좀 풀고 살면 안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지난 5월 말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나사를 헐겁게 했더니 바람이 조금만 불어도 심신이 덜컹거렸다. 아내는 원래 그런 거니 너무 놀라지 말라며 웃었지만 그녀의 웃음을 순진하게 다 믿을 순 없었다. 바지 주머니에 몰래 넣어 두었던 십자드라이버 하나를 손으로 만지작거려 보았다. 아직은 이걸 꺼낼 때가 아니지. 그동안 박아 놓은 세월이 있으니 쉽게 나사못이 빠지진  않을 거야. 당분간은 이렇게 흔들흔들하며 가보자. 내일부터는 혼자 제주로 여행을 떠난다. 바닷바람이 세찰 것이다. 그러나 아직은 나사를 조일 때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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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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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장이 나가고 회의실엔 정적이 감돌았다. 십 년째 국내 점유율 1,2위를 다투는 등산복 브랜드 '에이픽스'의 새로운 광고대행사를 선정하기 위한 경쟁PT가 이주일 반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 기획 컨셉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3차 회의가 열렸으니 다들 이게 뭐하자는 짓인가 하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사장이었다. 무슨 프로젝트가 시작되든 킥오프 하는 날부터 무조건 이틀에 한 번씩 회의를 하지 않으면 발작 상태가 되어버리는 이 대행사의 사장 현민섭 말이다. 사장이 회의실에 들어오는 이유가 회의를 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회의 시간에 화를 내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는 사원들의 반응은 그래서 오늘도 유효하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일차적인 잘못이 AE들에게 있다 하지만 찜찜한 건 고재영CD팀도 마찬가지였다.  고재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장 이 새끼는 변하질 않지. 드디어 대행사를 그만 두어야 하나. 오늘따라 고재영은 자신의 뚱뚱하고 둔한 몸이 더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오늘 나온 얘기 가지고 뭐라도 아이디어를 좀 만들어서 내일 오후에 다시 만나시죠." 

이렇게 말하면서 고재영은 카피라이터 실장 편성준을 바라보았다. 아이구, 저 마음만 여린 병신 같으니라구. 내가 어쩌다가 저런 놈이랑 한 배를 타가지고 이 고생이냐. 역시 지난 달 사장과 싸웠을 때 미련 없이 사표를 쓰는 거였는데. 내가 너무 착했어. 너무 약해졌어. 고재영은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커피 텀블러의 빨대를 쭉 빨아들였다. 고 실장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편성준은 고 실장님, 오랜만에 우리 냉면이나 드시러 가실래요? 하고 속편한 소리를 하며 다가왔다. 

**

고재영은 천사다. 흔히 마음씨 착한 사람을 표현할 때 쓰는 메타포로서의 천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진짜 천사다. 영어로는 Angel. 그가 태양계 중 지구라는 별로 파견 근무를 온 건 이만 년이 좀 넘는다. 당연히 지구 위에 인간들이 생겨나는 것을 지켜 보았고 수 많은 종교와 철학, 전쟁 들이 발발하고 유지되고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인간 세상에 어울려 살면서 그들을 연민하지도 억압하지도 않고 지켜보다가 위기의 순간이 오면 일종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천사 고재영에게 부여된 주된 임무였고 그는 대체로 이 어려운 임무를 이만 년이 넘도록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뼈아픈 실수도 있었다. 예수가 태어나기 직전에 한 번, 그리고 십자군 전쟁 때 한 번 잠시 방심했던 고재영이 인간들에게 겉모습을 들켜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사는 모두 흰 천으로 된 옷을 입고 하얀 날개가 달린 금발의 꼽슬머라 뚱보라는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하긴 그때 내가 좀 많이 먹긴 했지. 고재영은 그때를 생각하며 잠깐 웃었다. 20세기에 물리학자 아이슈타인이라는 작자가  '4차원'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을 땐 천국 여기저기서 그야말로 난리가 났었다. 당장 신과 인간계 사이의 비밀을 누설한 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대대적인 색출작업에 들어갔으나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고 아인슈타인은 은하계를 통틀어 가장 이례적인 스타가 되어버렸다. 결국 천국에서 열린 긴급회의에서는 아이슈타인이 거절하지 못할 정도의 빅딜을 제시하기로 했고 그는 인간의 시간으로 장장 십오 년을 고민한 끝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우주를 통틀어 사람이  천사가 된 케이스는 아직도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유일무이한데, 그는 원자폭탄과 인간들이 존재하는 지구가 싫다며 지금은 아주 먼 은하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제가  어제 승찬이, 박수하고 한 잔 하면서 얘기를 해봤는데요. 에이픽스는 절대로 어렵고 복잡한 컨셉으로 가면 안 돼요. 더구나 창업주가 대구에 있는 재래시장에서 등산복 도매로 시작한 사람이잖아요. 밑바닥에서 시작해 메이저가 된 입지적인 인물이라구요. 신문 기사에서 읽었는데 자기 얘기를 소설로 쓰면 열 권도 넘을 거라고 큰소리를 치던데요. 고집이나 카리스마도 장난이 아닐 거구요. 아직도 회의 시간에 커피잔이 날아다닌다던데...이런 사람한테는 정말 직관적인 걸로 그냥 한 방 던지고 빠져야 돼요." 

편성준은 애주가다. 늘 어제 누구랑 몇 차까지 갔었고 술자리에서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무용담을 늘어놓는 걸 즐긴다. 인간들은 왜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걸까. 어젯밤 자신이 한 고민의 총량이나 반성의 질량을 주량과 병치시키길 좋아하는 인간들의 습벽을 마주하면 고재영은 쓴웃음부터 나온다. 자신이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술고래에 골초였는지 알면 얘네들이 놀라 자빠질 텐데.  술이나 담배, 마약, 도박, 하다못해 섹스까지, 인간들이 즐기는 기호품이나 습성들 중에서 중독성이 유난히 강한 품목들은 모두 천사들에게서 온 것이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천사들은 아무리 음주와 흡연을 일삼아도 죽지 않지만 인간들은 그럼으로써 원래 얼마 되지도 않는 수명을 더욱 단축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고재영은 수천 년 전부터 지구의 인구 수를 조절하는 데 술과 담배, 설탕을 요긴하게 사용했다. 어쨌든 그는 이만 년 전부터 태양계 안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천사니까. 

그런 고재영이 당장 등산복 PT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우주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잠복근무는 천사들의 또다른 숙명이다. 인간세상에 섞여 살려면 어쩔 수 없이 가정과 직업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고재영에게도 가족이 있고 취미가 있다.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 [사신의 7일]에 나오는 '사신 치바'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것 중에 음악을 가장 마음에 들어해 틈만 나면 음악을 듣는데, 고재영은 그런 면에서는 음악보다 영화가 더 좋았다. 1890년 초반 우연한 기회에 뤼미에르 형제에게 '영화'라는 영감을 주게 되어서만은 아니었다. 인간 세상에 또 하나의 예술 장르를 만들어 내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된 고재영은 그 이후로 수 많은 영화들을 섭렵했는데 그 중에서도 에밀 쿠스트리차와 크지쉬토프 키에슬롭스키,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을 좋아했다. 그가 지금 광고 아트디렉터라는 직업을 택한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였는지도 몰랐다. 

**

 등산복 시장은 급격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고등학생들의 유니폼이라 불리던 **페이스 같은 제품의 판매량이 반토막이 나기 시작하더니 덩달아 어른들의 외출복 노릇을 하던 등산복 바지나 점퍼 등도 판매량이 뚝뚝 떨어졌다. 일본이나 이탈리아에서 들어온 SPA 브랜드들이 시장을 잠식하면서 트렌드가 변한 것이다. 그래서 광고량도 급격하게 줄었는데 이번에 에이픽스의 회장이 '기업의 명운을 걸고' 제품부터 광고까지 전혀 새로운 캠페인을 만들겠다고 해서 광고계의 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사람들은 궁금해 했다.  새로운 출구전략이 될 것인가, 아니면 언발에 오줌 누기로 그칠 것인가.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일단 경쟁 PT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등산복 광고가 아무리 달라진다 해도 산 나오고 등산복 나오는 거야 당연한 일이니 PT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광고전략이요 컨셉이었다. 그 중에서도 메인 카피는 정말 중요했다. 

"박수, 내일 회의 때 내놓을 카피 좀 써봤어?" 
"몇 개 써봤는데, 다 별로예요." 

박수가 경쾌하게 대답했다. 고재영은 박수가 천사가 아닐까 약간 의심하고 있다. 일단 밥을 너무 안 먹는다. 깡마른 체격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토록 밥을 안 먹는 인간은 참으로 드물다. 참고로 천사들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 고재영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 연기를 하다 보니 뚱뚱한 몸이 되었지만 갑자기 체형을 바꾸면 의심을 받을까봐 몇십년 째 지금 같은 섭식을 유지하고 있다. 박수가 천사라면 고재영은 긴장해야 한다. 가끔 천국에서는 기존 천사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잠입 천사들을 내려보내기도 한다. 부정을 감시한다, 라기보다는 기존 천사가 너무 인간화되지는 않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박수가 천사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다. 모든 천사는 점조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고 어떤 잠입 천사라고 해도 고재영에게 문제가 생겼을 경우가 아니라면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박수는 원래 이름 '박수연'에서 '박수'로 개명하기 훨씬 전부터 팔뚝에 '337'이라는 문신을 새기기도 했다. '337박수'라는 대한민국에만 있는 풍습으로 몸에 낙서를 한 것이었다. 이는 아무리 너그럽게 봐줘도 천사들이 할 만한 짓은 아니었다. 다만 일부러 그럴 수는 있다. 하긴 수만 년을 넘어 거의 영원히 사는 천사들의 속을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 

서울 하늘은 며칠째 쨍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지만 고재영팀이 있는 논현동의 사무실엔 하루 종일 답답한 공기가 감돌았다. 편성준이 카피를 써왔다. 몇 개의 카피 중엔 다행히 에이픽스 회장이 마음에 들어할 만한 게 하나 있었다. 

"사람과 산 사이, 에이픽스가 있다" 

간결하면서도 등산복의 본질과 기능을 한꺼번에 꿰뚫은 펀치라인이었다. 고재영은 이번 PT는 이 슬로건 덕분에 이길 것임을 직감했다. 물론 고재영의 능력이라면 등산복 PT 정도야 얼마든지 이기게 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전쟁이나 자연 재해 등 커다란 이슈에는 가끔 개입을 해도 이렇게 자잘한 일상사는 개입하지 않는 게 고재영의 신조였으니까. 문제는 천국에서 받은 메시지였다.  갑작스럽게 고재영의 내근이 결정된 것이었다. 그동안의 임무를 대체로 무리없이 수행한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50년 간의 안식년을 보너스로 받으면서 천국 내 인사과로 새로이 발령이 난 것이었다. 남은 시간은 겨우 육 개월. 고재영은 잠깐 망설였다. 이대로 가면 편성준은 이번 PT를 비롯한 몇 건의 프로젝트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어 광고계에서 제법 인정을 받겠지만 술을 좋아한 댓가로  간암에 걸려 일찍 죽을 텐데. 떠나는 마당에 그에게 조금 더 성취감을 주고 수명도 더 연장을 해주는 건 어떨까. 

"고 실장님, 전근 축하해요. 헤헤." 

그 때 박수가 와서 속삭였다. 역시 짐작대로 그녀는 잠입 천사였던 것이다. 고재영은 약간 짜증이 나서 이십만 볼트짜리 벼락 한 가닥을 품에서 꺼내 박수에게 던졌지만 그녀는 그것을 가볍게 손바닥 안으로 흡수해 버리며 소리 없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러기냐, 진짜? 안 그래도 너 좀 수상했어." 
"하지 마세요. 그런 인간 어디가 이쁘다고 봐줄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설마 걔가 이뻐서 그러겠냐? 인간들 흥망성쇠가 게 하도 빤해서 장난 좀 쳐보려는 거지." 
"하지 마세요. 요즘은 제가 보고 안해도 천국에서 먼저 안다니까요." 

고재영은 이 순간 편성준을 살리려는 자신이 천사일까 악마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인간들은 천사와 악마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고 머무는 곳도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언제라도 천사였다가 금방 악마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선악 기준이라는 게 그만큼 편협할 뿐이다. 고재영은 편성준이 업계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은 취소하고 간암으로 사망하는 것만 막아주기로 했다. 술 좋아하면서 오래 살면 그것도 괜찮지 뭐. 딱 그정도가 적정선이라고 생각했다. 고재영은 자기가 전출되고 나면 다음에 어떤 천사가 올까 궁금해졌다. 기왕이면 자신처럼 악마보다는 천사쪽에 가까운 성격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노트북 앞에서 일하는 척하고 있는 박수를 다시 한 번 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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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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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단추

짧은 글 짧은 여운 2018. 12. 21. 16:51

첫 단추 잘못 끼워도 괜찮아요.
어차피 하루에 한 번은 옷 벗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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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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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생을 기억하는 소년이 있었다. 충남 논산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소년 박장오는 자신의 열다섯 번째 생일인 2018년 11월 1일 아침에 갑자기 지나온 모든 전생이 다 기억나는 바람에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어느날 아침 일어나 자신은 전생에 이집트의 왕자였다고 주장하는 소년의 황당한 이야기에 부모를 비롯한 주위 사람들 모두가 이 아이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걱정했지만 우연히 그 얘기를 전해듣고 흥미를 느낀 신문기자가 한 명 있었기에 갑작스럽게 인터뷰가 성사되었다. 

기자 : 이름은? 
소년 : 박장오입니다. 

기자 : 생년월일은? 
소년 : 2003년 11월 1일입니다. 

기자 : 그럼 열여섯 살이네. 고향은 어디에요? 
소년 : 충남 논산시 양촌면 양촌리 3XX. 개인주택입니다. 

기자 : 부모님은? 
소년 : 아버지가 고향에서 펜션 사업을 하십니다. 어머니도 함께. 외아들입니다.  

기자 : 지금 학교는 안 다니고 있나요? 
소년 : 전생이 기억난 뒤로 그만두었습니다. 

기자 : 자신이 이집트의 왕자였다고 주장하는데...
소년 :  투탕카멘이 제 동생이었습니다. 

기자 : 파라오의 저주로 유명한 그 투탕카멘 왕자? 
소년 : 네. 그 무덤은 사실 제가 임시 보물창고로 쓰던 곳이었구요. 

기자 : 잠깐, 잠깐. 다른 전생도 기억나는 게 있다면서요? 
소년 : 네. 하지만 다 얘기하면 아마 소설책 열 권도 넘을 거예요.  

허풍이 아니었다. 어떻게 이 아이는 이런 얘기를 꾸며내게 됐을까, 라는 생각으로 시작한 인터뷰는 예상과 달리 3일에 걸쳐 열세 시간이 넘도록 이어졌다. 소년은 아무도 모르게 투탕카멘의 무덤에 자신의 보물들을 숨겨놓았는데 갑자기 왕비에게 독살을 당하는 바람에 그 왕관과 다이아몬드 등이 수천 년을 버티다 20세기 초에나 발견되었다는 것이었다. 소년은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세헤라자드 같았다. 역사, 철학, 문학까지 모르는 게 없는 청산유수. 명실상부한 스토리텔링의 대가였다. 다소 장난스런 마음으로 소년을 만났던 충남일보의 이명현 기자는 며칠 후 동료들과의 술자리에서 '나도 믿기 힘들지만, 소년의 이야기는 전부 사실인 것 같다' 라는 충격적인 고백을 하기에 이르렀다. 소년은 이집트의 왕자이기도 했고 공자의 제자이기도 했으며 에도시대엔 무사들의 사회를 경험하기도 했다는 것이었다. 이 기자는 소주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집에 가서 녹취록을 풀면서 걔가 말한 걸 인터넷으로 다 찾아봤어. 세세한 부분까지 아주 정확해. 어떤 건 인터넷보다 낫고." 

같이 술을 마시던 동료 기자 남선우는 소년이 [맨 프롬 어스(Man from Earth)]라는 영화를 보고 꾸며낸 얘기일 거라며 그만 정신 차리는 게 좋을 거라고 충고를 했지만 이명현은 다음날 기어이 그 소년과의 인터뷰를 자신의 블로그와 SNS에 올렸다. 소년과 인터뷰를 하겠다는 아이템을 낼 때부터 반대했던 편집장 이철호가 인터뷰 전문을 읽어보고는 기겁을 하는 바람에 신문 기사로는 인터넷판으로도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선택한 곳이 블로그와 페이스북이었다.  

반응은 엉뚱한 곳에서 시작되었다. '타임머신학회'라는 곳에서 이 박장오의 인터뷰 기사에 대해 관심이 있다며 연락을 해온 것이었다. 협회는 '비밀리에 진행되던 타임머신 프로젝트가 이제 거의 완성단계에 있으며, 앞으로 4년 이내에 우리나라에서 타임머신이 발명될 것인데 마침 이런 이슈가 생겨 반갑다고 하면서 베타 버전이 출시되는 대로 협회 대원들과 지원자들이 팀을 구성해 소년이 거론한 연도로 거슬러 올라가 사실 여부를 확인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정말 며칠 후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에 이명현 기자의 인터뷰 기사 링크와 함께 '과거를 예약하세요. 전생을 기억하는 소년과 함께 떠나는 과거로의 답사여행, 런칭기념 할인!'라는 희한한 광고가 링크되었고 이는 호기심 많은 유저들에 의해 이틀만에 이천오백 번이 넘게 공유되기에 이르렀다. '음모임'(음모이론을 분쇄하려는 사람들의 모임)의 명의로 당장 이 광고를 내리게 해달라는 청와대 청원이 등장한 것은 물론 JTBC뉴스룸까지 한 꼭지를 할애해 '타임머신의 발명과는 상관없이 소년이 스무 살이 되는 해에 어쩌면 우리는 과거여행 패키지 상품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라는 다소 시니컬한 논평을 내기도 했다. 이명현은 머리가 어지러워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게 다 어찌된 일인가. 내가 무슨 짓을 한 것인가. 그리고 뭐 이런 자들이 다 있나. 남의 전생을 이용해서 아직 발명되지도 않은 타임머신 예약광고라니. 자신의 인터뷰가 진지한 토론을 만들어내는 대신 이렇게 상업주의와 연결되었다는 자괴감에 그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어야 했다. 

곧장 반론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백 번 양보해 전생이라는 게 존재한다 해도, 어떻게 그렇게 너는 유명한 사람들만 거치는 전생일 수가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자 소년이 반박을 하고 나섰다. 가야국에 살 때는 노비였고 임진왜란 때는 평범한 병사로 싸운 적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뒷받침해줄 근거로 이순신 장군의 얼굴 생김새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명량해전 때 자신이 바로 옆에서 싸웠기 때문에  그 얼굴을 상세하게 기억하는데  지금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이상범 화백의 초상화는 엉터리라는 것이었다. 물론 그 초상화는 화가가 충무공이  활동한 지역을 답사하거나 초상화를 보고 그린 것이 아니라 당시 신문 연재를 하던 소설가 이광수에게 충무공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상상으로 그린 것이었기에 소년의 얘기가 어느 정도 신빙성은 있었다. 그러나 충남 아산 현충사에 소장돼 있는 장우성 화백의 정부 표준영정까지 실물과 조금도 닮지 않았다는 얘기가 나오자 문제는 일파만파로 커졌다. 국가가 정식으로 인정한 초상화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의심받는 상황에 이르자 이순신에 대한 소설을 썼던 어떤 소설가(이름을 밝히지 말아달라 요구했다)가 중립적인 입장을 약속하고 조용히 소년을 만나보기로 했다. 그는 홀로 논산에 가서 소년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기자들과 마주치자 '당장 밝히기 힘든 내밀한 얘기들을 많이 나눴다. 아마 어떤 내용은 이후 내 작품에 모티브로 작용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 소년은 같은 나이였을 때의 이창호 9단보다도 더 머리가 좋은 느낌이었다' 등의 소감을 남겼다. 

곧 소년의 아이큐가 검색어 1위로 등극했다. 중학교 때 학적부에 기재된 소년의 지능지수는 131로 평균보다 약간 높은 정도였다. 그 정도 지능지수로 그 많은 이야기들을 꾸며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일반 정신과의들의 입장이었다. 그러나 정신심리학협회의 의견은 조금 달랐다. 일반적인 경우엔 당연히 그렇지만 이번 케이스처럼 한꺼번에 떠오른 전생들로 인해 얻은 엄청난 지식들이 소년의 아이큐를 단번에 높였을 수도 있다는 지적이었다. 아이큐 이야기는 어느덧 소년이 한 전생 이야기들이 사실이냐 아니냐라는 원래의 이슈로 다시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가 사라졌습니다." 

소년의 아버지 박준철 씨가 실종신고를 낸 것은 이 모든 소동이 시들해진지 삼 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서였다.  소년이 편지를 써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이었다. 소년의 편지 내용은 담백했다. 자신은 이 곳에 잠시 머물뿐이며 미래를 향한 여행을 계속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는 것이었다. 


어머니 아버지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저는 당신들의 자식이기 이전에 시간을 
거슬러 오가는 존재로 살도록 운명지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갑자기 전생을 
기억하는 바람에 뜻하지 않게 이번 시대에 
큰 소란을 피우고 가서 죄송합니다 미래의 
어느 시대이든 다시 만나 인사 드릴 수 있게 
되길 희망하며 - 당신의 아들 박장오 올림





그 후로 소년에 대한 이야기는 한껏 달아오른 남북통일 이슈 등에 묻혀 다시 거론되지 않았고 그 소년을 본 사람도 없었다. 다만 타임머신협회에서 '소년이 미래에 가서 무슨 허풍을 쳐 혼란을 야기할지 모르니 그를 막기 위해서라도 협회는 타임머신 개발에 박차를 가할 것이며, 이제 정말로 거의 완성단계에 이르렀다'는 사실을 간헐적으로 SNS에 올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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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은 세월호 특별법 서명을 받는 자리에 와서 서명대 집기를 부수었다. '인천-제주'편으로 수학여행을 떠났다가 맹골수도에서 가라앉아 목숨을 잃은 아이들의 부모에게 세금도둑이라고 욕도 했다. 이른바 '태극기 부대'였다. 지나가면서 다들 눈쌀을 찌푸렸지만 감히 말리는 사람은 없었다. 노인을 비롯한 시위대는 너무나 기세가 등등해서 누가 건들기만 하면 가스통처럼 펑하고 터질 것만 같았다. 차례 소동이 잦아들 무렵 여인이 나타났다. 정신과 의사이면서 세월호 유족들을 위해 일하는 가냘픈 사람이었다. 물론 태극기 노인은 여인이 누구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할아버지."
"?"
"고향이 어디세요?"
"?"
"고향이 어디시냐구요."
"그건 알아서 뭣하게?"
"그냥요."
"저기, 남쪽..."
"할머니는요?"
"할멈? 죽었어."
"그러셨구나... 사이는 좋으셨어요?"
". 좋긴 . 할멈이 나한테 잘했지."
"자식들은 뭐하는 분들이세요?"
"아들놈 하나 있는데...나도 몰라. 도대체 하고 다니는 놈인지." 
노인은 뜻밖에도 선선히 대답을 하며 대화를 이어나갔다. 전라북도 익산이 고향이지만 어렸을 마을에서 문제로 싸움을 하다가 사람을 죽게 했던 아버지가 야반도주하다시피 짐을 싸서 논산으로 옮기는 바람에 노인도 고향을 등지고 논산에서 학교도 다니고 청년기까지 보냈다. 아버지는 작고했지만 그때의 희미힌 원한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지금도 익산엔 가지 않는다고 했다. 
"기구한 인생이지.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권으로도 모자랄 거야" 
노인은 세상에 원망스러운 많았다. 요즘 것들은 고생을 해봐서 배부른 소리만 한다는 것이었다. 
"걔들이 인민군을 만나봐야 세상 무서운 알지. 죽는 맛이 뭔지 당해 봐야..." 
터진 말문은 끝이 없었다. 알고보니 구라가 노인이었다. 특히 공산당에게 맞아죽을 뻔했던 육이오 사변 얘기를 많이 했는데 월남전에도 참전했다는 얘기를 하는 거 보면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주장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육이오 때는 아주 어렸거나 태어난지 얼마 상태였을 같았다. 아니면 월남전 얘기가 거짓말이거나. 여인은 쓴웃음을 깨물며 그래요? 그러셨군요, 하고 맞장구를 치고 밴딩머신에서 커피를 뽑아와 노인에게 건냈다. 
" 놈도 어렸을 착했어." 
"아드님이 해주세요?" 
"잘해주긴. 맨날 마누라 눈치나 보는 병신이." 
"며느리가 미우세요?" 
노인은 젊었을 전국을 떠돌아 다니며 돈을 벌었다고 했다. 큰돈을 벌진 못했지만 가족을 굶긴 적은 번도 없었단다. 여인이 노인의 손을 슬쩍 보니 마디마다 거친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드러나 있었다. 고생을 해서 아들을 키워놨는데 살쾡이 같은 년이 들어와서 주인 행세를 한다는 것이었다. 며느리는 음대를 나온 여자였다. 원래 노인이 데면데면한 성격이기도 했지만 성악을 전공한 며느리와 월남전 참전용사 시아버지 사이엔 공감대가 생길 리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이대 나온 년들을 싫어한다니까." 
"며느님이 이대 나오셨어요?" 
"이댄가 숙댄가...아유 몰라." 
입에 침이 마르는지 헛기침을 한바탕 노인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오래 세상을 떠난 아내 얘기을 때는 쓸쓸하던 눈빛이 아들과 며느리 욕을 하면서 뜨겁게 변했다. 결정적으로 손주가 없다는 것이 노인의 화를 키웠다. 아들 커플은 딩크족었던 것이다. 
"아니, 결혼을 했으면 애를 낳아야 아냐? 왜 피임을 하고 지랄이냐구." 
집에 있으면 며느리와 자꾸 부딪혀서 아침 먹고나면 밖으로 나와 떠돈다고 했다. 하지만 일당 오만 때문에 시위에 나오는 아니라고 말하며 담배를 태우는 노인의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여인은 슬펐다. 거리에 버려진 부서진 장롱 같은 그의 삶을 듣다가 눈물이 차오르기도 했다. 한참 신세한탄을 하던 노인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쪽으로 고개를 돌리는 모습이 쓸쓸했다. 여인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내가 아까 아이 엄마(세월호 유가족)들한테 욕한 부끄럽지." 
"그런 마음이셨군요. 그러셨군요." 
사과 말씀을 듣자고 시작한 얘기가 아니었는데 노인은 사과를 했다. 미안하다고 하며 한숨을 내쉴 얼핏 눈물까지 비쳤다. 가슴 속에 숨겨놨던 말을 어렵게 꺼낸 사람만이 가질 있는 맑은 눈물이요 눈빛이었다. 
유순한 노인이 그토록 사나운 태극기 부대였다는 믿기지 않았다. 위로 마디에 이렇게 쉽게 무너질 거면서. 여인은 생각했다. 아들이 조금만 일찍 들어와서 아버지와 매일 이야기를 나누기만 했다면. 며느리가 시아버지의 말도 안 되는 허풍이나 투정을 조금만 열린 마음으로 들어주었더라면. 
다음 주에 논산에나 가봐야겠다고 하면서 노인은 힘없이 돌아섰다. 거긴 고향도 아니라면서요. 친구도 없다면서요. 여인은 혼잣말처럼 뒤늦은 대꾸를 했다. 노인의 뒷모습이 쓸쓸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깜짝할 사라져버리고 없었다. 
(*정혜신 쌤의 [당신이 옳다] 읽다가 태극기 노인 대목이 인상 깊어서 이야기를  길게 써보고 싶은 충동을 느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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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쯤 모든 나무들이 한꺼번에 걸어다니던 적이 있었다. 보통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그때 나라에 큰 일이 생겨서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다거나 어느 절의 탑이 밤새 소리를 내고 눈물을 흘렸다느니 하는 얘기가 나오기 마련이다. 아니니 다를까 십 년 전쯤에도 일시적인  은하계의 균열로 태양과 목성, 금성이 나란히 선 순간이 잠깐 있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난다. 아무튼 수백억 년 만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우주적 사건이 있었던 날, 하루 아침에 지구 위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천연덕스럽게 걸어다니는 이변이 함께 일어난 것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자신의 발로 걸어다닐 수 있게 된 나무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출퇴근'이었다. 인간의 발처럼 뿌리를 인식하게 된 도시의 가로수들은 저녁이 되어 가로등에 불이 켜질 때쯤 스스로 땅에서 뿌리를 뽑아내고 자신이 빠져나온 지점을 탁탁 다진 뒤 퇴근을 감행했고 각자 어디론가 사라져서 평생 처음 안락한 수면을 취한 뒤 아침에 해가 뜨자 다시 출근을 해 근무를 섰다. 수많은 가로수들이 광화문과 을지로는 물론 뉴욕과 씨애틀, 모로코에서도 시내 곳곳으로 걸어 들어와 근무처로 향하는 광경은 그자체로 장관을 이루어 인터넷과 TV뉴스를 장식했다. 

물론, 출퇴근보다 더 특이한 행보를 보인 나무도 있었다. 용문사에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는 이제 나도 세상 구경을 하겠다며 거대한 몸통을 일으켰다. 그가 크게 기지개를 켜고 일어서자 용문사 근처에 있던 모든 나무들이 앞다투어 길을 비켰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에 나오는 나무는 자그마치 천 년을 한 자리에 서 있었대. 그러면서 수십 세대로 이어진 인간들의 희노애락을 다 지켜 본 거지. 얼마나 힘들고 지루했겠어? 난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나도 오백 살이나 되었으니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가뿐히 열 권은 넘을 걸?" 

나무들 중에서도 큰 어른에 속하던 용문사 은행나무가 던진 메시지는 젊은 나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날 밤부터 나무들은 저마다의 자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급기야 자아를 찾겠다며 인도나 산티아고, 방디르드 등으로 명상여행을 떠나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나무들이 산과 수목원을 벗어나자 목재상들과 출판계는 난리가 났다. 가구값이 상승했고 건축자재 품귀현상이 일어났으며 새 책을 찍어낼 펄프가 부족해서 만년 인기 없을 것만 같던 전자책이 뒤늦게 호황을 맞는 기현상까지 일어났다. 가장 큰 문제는 종이박스가 귀해서 졸지에 노숙자들이 찬서리를 맞게 된 것이었다. 인류는 20세기부터 컴퓨터나 스마트폰의 지배를 받는다고 엄살 섞인 잘난 체를 했지만 사실은 아직도 땅이나 하늘, 나무 등에 너무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작가가 거부했지만)이자 영화로도 유명한 작품 [닥터 지바고]에도 등장했던 자작나무들이 남쪽으로 내려 갔다가 태양열을 못이겨 말라죽는 사건이 일어나자 나무들의 긴급회의가 시베리아에서 열렸다. 거기 모인 자작나무, 측백나무, 소나무, 너도밤나무 등은 그 누구도 인간이라는 존재를 좋아하진 않지만 수억 년 지구 역사상 가장 진회된 생명체인 인류를 위해 나무들이 먼저 자숙을 하자는 성숙한 결론을 내렸다. 모든 나무가 다시 이전처럼 땅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기로 한 것이었다. 회의의 진행은 나무들의 인트라넷인 '트리파시(Tree-Pathy)'를 통해 태양계 전체에 실시간으로 전달되었고 투표 결과 '48대 52'라는 극적인 합의가 이루어졌음이 선언되었다. 

합의는 이루어졌지만 이런 사안이 공감을 얻으려면 먼저 어른들의 시범이 있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아마존 밀림에 있던 만년수가 가지들을 꺽고 몸을 접어 스스로를 불태우는 용단을 내렸고  그 불꽃은 지상 5킬로미터까지 치솟아 전 세계인들에게 목격되었다. 신기하게도 그 불꽃을 본 순간부터 사람들은 나무가 움직였다는 사실 자체를 모두 잊었다. TV나 인터넷, 모바일로 그 장면을 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하필 나무가 움직이는 것을 본 직후 절벽 아래로 떨어져 기절했다가 실명된 채 구조된 나만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졸지에 시각장애인이 된 나는 의사에게 외쳤다. 

"저기요...나무가 걸어다녔다구요!"

그러나 내 말을 귀담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시적인 쇼크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거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무가 걸어다니던 시절의 일은 나무들과 나만 아는 비밀이 되었다.  지금도 나는 대숲에 가면 그들에게 속삭인다. 나는 알아. 니들이 한때 걸어다녔다는 것을. 대숲은 아무도 몰래 고개를 끄덕인다. 대숲이 가끔 내 얘기를 듣고 울음소리를 내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행동' 사람들과 양평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창 밖 나무들을 보고 문득 생각이 나서 메모했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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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수능을 치룬 수험생의 부모이기도 한 페친 한 분께서 '두 아이, 세 번 모두 시험장에 혼자 보낸 이야기'를 올렸다. 시험이 끝날 때까지 교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아이가 나오면 껴안고 울고 하는 부모도 있지만 이 아버지는 '담담한 태도로 다른 날과 똑같이 다녀 와, 라고만 했던 게 덜 사랑해서가 아니라 사랑하는 남으로 존중하기 때문이었을 거라고 아이가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취지의 글을 올렸고 나는 거기에 "훌륭한 부모이십니다."라는 댓글을 달았다. 

나는 자식이 없지만 대입 시험 보는 날 교문 앞에서 추위를 참아가며 하루 종일 기다리는 부모에게 숨어 있는 '보상심리'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자식을 너무 사랑하지만 그 사랑 때문에 자식의 인생에 사사건건 개입하는 부모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자식이 가령 법대나 상대를 졸업한 뒤 엉뚱하게 예술가가 되고 싶다고 했을 때 (서양도 똑같다. '부모에게 자신이 게이라는 걸 밝힐 배짱이 없다면 예술가가 되겠다는 희망은 애저녁에 포기하는 게 낫다'라고 말한 작가가 누구였더라) 그 부모는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그딴 소릴 해?' 라고 울부짖을 게 뻔하고 마음에 차지 않는 여자를 데려오면 나중에 나쁜 일이 생길 때마다 '여우 같은 년이 들어와서 우리 집안이 이 모양 이 꼴'이라고 조질 게 백 퍼센트에 가깝게 때문이다. 살다가 바람이 나거나 의견 충돌로 이혼하는 커플도 마찬가지다. 대부분 '니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라는 원망이 쏟아질 것이다. 난 사실 그게 좀 무섭다.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구속과 억압이 얼마나 많은가. 아, 수능 얘기하다가 흘러흘러 이혼 얘기라니. 금요일인데 반주로 소주를한 병만 마시고 그냥 들어와서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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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들의 말>

최근 학계의 연구 발표에 따르면 꽃들이 언어를 구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연구진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꽃들의 말을 번역하는 '꽃말번역기 - 스피킹플라워스'까지 함께 개발했는데 이미 완성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꽃들이 전한 말들이 화제가 되고 있다. 아직 공식적인 발표는 아니지만 유비통신에 따르면 수선화는 "내가 언제 고결과 자만을 얘기했다고 그러냐? 억울하다"라는 심정을 토로했고 국화는 "시대에 뒤떨어지게 정조, 순결이 웬말이냐"며 엄중 항의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개나리는 "내가 희망을 얘기한 것은 맞다"라며 기자회견을 열고 입장을 밝혔는데 옆에서 듣고있던 백합이 "나는 순결이라는 단어 속에 들어있는 남성 중심 이데올로기를 극히 혐오한다. 내 꽃말이 순결이란다. 꽃말협회를 상대로 고소를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고 한다.

한편 이 소동을 전해들은 해당화가 "이기고 지는 일은 다 허무한 것인데 이제 피고 지는 것만 알던 꽃들까지 인간에게 물들어 이기고 지는 것을 논한다"며 개탄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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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병

짧은 글 짧은 여운 2018. 8. 27. 18:54

문병


엄밀하게 말해서 사람들은 모두 환자다.
가벼운 감기부터 고혈압, 당뇨, 비만,
스트레스...하다못해 어린 마음을 할퀴고
지나가는 상사병까지.

그 환자들 중에서 조금 더 아픈 사람들은
병원에 가거나 입원을 하고 덜한 사람들은
그냥 참고 견디며 하루하루를 살아낸다. 

우리들은 모두 난치병 환자거나
또는 약간의 정신병자다. 

그러니 오늘 당장 친구에게 문병을 가라.

입원한 친구는 병원으로 찾아가고
그냥 아픈 친구는 술집으로 찻집으로 
불러내서 따뜻하게 위로하라. 

우린 모두 서로에게 문병할 의무가 있다. 
그게 사는 거다. 



(*10년 전에 썼던 글을 우연히 발견해서 괜히 만년필로 옮겨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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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걸 올려도 되는지 모르겠으나, 에버노트를 뒤지다 보니 몇 년 전에 써놓은 시가 한 편 있더군요. 그때나 지금이나 별로 변하지 않은 마음이고 생각이라 한 번 올려봅니다.  


<별 볼 일 없는 놈>


아무리 별이 총총한 밤이라도
별에다 소원을 빌진 마

어떤 건 쳐다보는 데만
수만 년이 걸린다는데 
니 얘길 듣고 대답을 하면 
또 수만 년 걸릴 거 아냐 

차라리 재수 없더라도
꾹 참고 사람을 쳐다봐
별 볼 일 없는 놈이라도  
니 옆에 있는 사람이  
하늘 위의 별보다는 나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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