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호산 

내가 아직 광고 프로덕션에 다니던 때였다. 화재 예방 공익광고 아이디어로 가져온 카피라이터 박수의 안이 좋았다. 담배꽁초 버리기, 비상구 짐으로 막기, 소방도로에 주차하기 등 대형 화재를 유발하는 내용으로 이루어진 <화재>라는 영화가 곧 개봉한다는 '가짜 예고편'이 광고의 테마였는데 마지막에 "영화에는 예고편이 있지만  화재에는 예고편이 없습니다"라는 카피로 뒤통수를 치는 아이디어였다. 우리는 회의실에서 영화 예고편이니까 진짜 영화배우가 출연하면 당선 확률이 더 높아질 것 같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러다 누군가 "실장님, 박호산하고 친하다면서요? 한 번 부탁해 봐요."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동네 선후배 사이라는 다소 싱거운 인연으로 친하게 된 배우 박호산에게 카톡 메시지를 넣었다. 화재예방 공익광고 아이디어를 냈는데 너를 모델로 해도 되겠냐고. 혹시 우리 시안이 당선되어 광고를 찍게 되면 모델비도 좀 싸게 해 줄 수 있겠냐고. 곧 호산에게서 좋다는 답장이 왔다. 공익광고의 취지에 동감한다는 것이었다. 고마운 일이었다. [슬기로운 감빵생활]이라는 드라마로 한창 잘 나가던 시절인데도 선뜻 내 부탁을 들어주는 게 쉬운 일은 아니었을 텐데 말이다.  

그런데 일이 잘 되려고 그랬는지 내가 프리젠터로 나서 설명한 시안은 그 어느 때보다 코바코 심사위원들에게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고 결국 당선작으로 결정이 되어버렸다. 나는 퇴근을 하는 길에 기쁜 마음으로 호산에게 이 소식을 알렸다. 호산은 너무 잘됐다고 하면서 방금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에 캐스팅되었다는 소식이 왔다는 말을 했다. 경사가 겹친 것이다. 그런데 호산은 "오늘은 너무 좋은 날이지만 너무 미안한 날이기도 해서 마음 놓고 기뻐할 수가 없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호산이 맡은 역은 원래 다른 배우가 하기로 되어 있었는데 촬영 직전에 '미투 논란'이 터지는 바람에 캐스팅이 전격 취소된 것이었다. 선배에게 생긴 불미스러운 일을 딛고 들어가게 된 자리라 너무 면목이 없다는 호산의 말에 나도 더 이상 흥분할 수는 없었다.  

[나의 아저씨]에서 이선균과 송새벽의 형으로 나온 박호산은 어리숙하면서도 인간적인 면을 가진 '박상훈' 역에 딱 맞는 배우였다. 박호산은 정말 '후계동'에서 조기축구를 할 것처럼 생겼고 사업 실패로 이혼을 당하고 '형제청소방'을 운영할 것 같은 표정의 남자가 되었고 저녁이면 동네 술집 '정희네'에 가서 앉아 있을 것만 같았다. 박호산은 주인공이 아니면서도 드라마 안에서 펄펄 날았다. 촬영 초기에 아이유와 악수를 했다고 인스타그램에 자랑을 하던 박호산은 드라마가 끝난 뒤엔 어느덧 같은 같은 연예인들이 악수를 하고 싶어 하는 배우가 되었다. 

박호산은 주인공이 아니면서도 드라마 안에서 펄펄 날았다.

아이유 

평론가 신형철은 자신의 책 [느낌의 공동체] 서문에 “삶의 어느 법정에서든 김민정 시인을 위해 증언할 것이다”라는 글을 썼다. 자신의 책을 만들어준 편집자이자 문학적 동료 김민정에게 할 수 있는 최상의 찬사가 아닐까 한다. 드라마 [나의 아저씨]에 나오는 가수 아이유, 아니 연기자 이지은을 지켜본 사람들도 아마 이와 비슷한 심정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우리 집에서는 오래된 농담이 있다. "아이유가 싸가지가 없다고? 없으면 어때? 저렇게 노래를 잘하는데!" 물론 그 '싸가지 없음'이라는 게 연예인 특유의 방어기제 덕분에 생긴 아주 편파적인 평판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이유의 광팬인 아내는 아마도 이제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아이유가 무슨 잘못을 해도 나는 아이유 편이 될 거야. 저렇게 연기도 잘하고 노래도 잘하는데, 어떻게 착한 것까지 바라?" 

비록 정당방위이긴 하지만 살인자였다는 과거를 가지고 있고, 자신에게 남은 것은 병든 할머니와 부담스러운 사채빚뿐인 스물한 살의 여자 아이 이지안. 그녀는 건설회사 계약직 사원으로 일하며 번 돈을 모두 사채업자에게 바치느라 저녁이면 다른 아르바이트를 또 뛰어야 할 정도로 퍽퍽한 인생을 살아간다. 입사지원서 특기란에 '달리기'라고 쓸 정도로 내세울 것 하나 없는 계약직이기에 다른 직원들과 말을 섞지도 않고 같이 밥을 먹지도 않는다. 그런데 어떤 사건을 계기로 박동훈이 그녀를 알아보고 손을 내민다. 그리고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표정으로 그녀에게 잘해준다. 평생 처음으로 사심 없는 친절과 관심을 받게 된 이지안은 어리둥절하다. 빚 갚을 기회를 잡느라 박동훈에게 도청장치를 심어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데도 그에겐 불온한 기운이 감지되지 않는다. 대신 무능한 형제들 틈에서 멀쩡한 척해야 하고 아내에게 배신당하고 학교 후배인 사장 측으로부터 누명을 써 축출당할 위기에 놓인 피곤한 사십 대의 모습이 있을 뿐이다. 

드라마를 보면서 많이 울었는데 대부분 이지안 때문이었다. 그녀가 "밥 좀 사주죠. 배고픈데."라고 박동훈에게 손을 내밀 때, 자신이 한 짓이 들통난 걸 다 알고 미안하다며 울부짖을 때, 인사평가회에 증인으로 나가서 사람 좋아하는 걸 왜 비웃냐고 따질 때 나는 하릴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이유는 열연을 하지 않음으로써 열연을 하는 아이러니를 완성했는데, 이는 그녀가 드라마의 '맥락'을 이해하지 않으면 부라능한 연기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그냥 대사만 달달 외워서는 절대로 알 수 없는 인간의 쓸쓸함에 대하여, 따뜻함이 주는 에너지에 대해여, 인생은 결과가 아닌 과정이라는 것을 그녀는 어떻게 한 방에 다 알았을까 궁금했지만 결국 두 손을 들고 항복할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녀는 알고 있는 게 분명했으니까. 그렇지 않고는 그런 억양, 눈빛, 몸짓이 나올 수 없으니까. 노래 잘하고 곡도 잘 만들던 가수 아이유는 그렇게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를 통해 연기자가 되었다. 

아이유는 열연을 하지 않음으로써 열연을 하는 아이러니를 완성했다.

3

나 

TV의 예고편은 물론 동네 사는 배우 박호산을 통해서도 [나의 아저씨]라는 드라마가 방영된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작가가 [또! 오해영]을 쓴 사람이라 볼 만할 것이라는 얘기도 들었다. 그런데 회사가 너무 바빴다. 허구한 날 야근을 하느라 TV드라마를 챙길 시간이 없었는데도 어쩌다 일찍 들어오는 날이면 아내와 함께 드라마를 지켜보다가 가슴이 철렁하는 대사들이 나올 때마다 눈물이 핑 돌았다. 박호산이 청소하다가 무릎 꿇는 장면에서 울었고 정희가 유라에게 '불행 배틀'엔 자신이 있다고 하며 술잔을 높이 들 때도 눈물이 났고 이지안이 박동훈에게 "아저씨가 정말로 행복했으면 했어요."라고 흐느낄 때도 같이 울었다. 그 중에도 아이유의 무미건조한 대사는 백미였다. 지금도 유튜브에서 '나의 아저씨 아이유 사이다 대사들'이라 검색하면 그녀가 얼마나 극의 흐름을 잘 파악하고 연기를 하는지 알 수 있다. 나는 존댓말을 잘 하지 않는 이지안이 마치 혼잣말로 묻듯 "다들 그렇지 않나...?" 식으로 상대방에게 던지는 대사 처리가 너무 좋았다. 이지안이 가진 총기와 비뚤어짐과 두려움이 동시다발로 느껴지는 이 대사 구사 방식은 자신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여직원이 "너 짤리고 싶냐?"라고 묻자 회의실 의자에 등을 기대며 "같이 짤리자."고 일갈하고는 여직원의 사내 불륜 사실을 들이미는 장면에서 절정을 이룬다. 

드라마 마지막 회가 방영되는 날 배탈이 나서 저녁도 못 먹고 들어온 나를 보고 아내는 "나의 아저씨 마지막 회는 소주를 한 잔 하며 봐야 하는데 남편이 저 모양이니. 아이고, 내가 못 산다." 라면서 화를 냈다. 그렇게 나의 아저씨가 끝나고 여전힌 나날들이 계속되던 어느 날 나는 대책 없이 퇴직을 했고, 제주도에 내려가서 한 달을 혼자 살아보기도 했고, 느닷없이 한옥집을 사서 고치고 이사하느라 몇 달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가 되었다. 한옥으로 이사를 와 집안 정리를 하고 있던 때쯤 스트리밍 서비스 넷플릭스에 '나의 아저씨'가 올라와 뒤늦게 정주행을 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나는 가끔 보면서도 가슴이 뭉클뭉클했는데 이걸 처음부터 다시 보면 또 얼마나 울어야 하나, 하고 망설이고 있다가 이사 비용 때문에 잠을 못 이루고 심란해하던 어느 날 밤에 '나의 아저씨 정주행'을 시작했다. 처음엔 시큰둥하던 아내도 나를 따라 밤을 새 가면서 드라마에 몰두했다. 우리는 넋을 읽고 TV를 들여다보며 웃다가 한숨을 쉬다가 눈물을 글썽이다가 서로를 쳐다보고 멋쩍게 웃었다. 

우리가 [나의 아저씨]를 보면서 눈물을 흘린 이유는 무엇일까. 사람이 사람을 좋아한다는 당연한 일의 소중함을 너무 오래 잊고 있었는데 박동훈과 이지안이 그걸 일깨워주었기 때문 아닐까. 사랑하는 것과 좋아하는 것은 다른 것이다. 사랑은 불꽃처럼 타오르다가도 금방 식을 수도 있지만 좋아하는 것은 누군가를 측은지심으로 바라보고 그 사람의 마음을 가슴속에 묻어둔다는 것이다. 누군가를 묻어둔 사람이나 누군가의 가슴에 묻힌 경험이 잇는 사람은 결코 약하지 않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엔 황량한 바람과 먼지가 남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흐뭇한 기억으로 남아 남은 시간을 살아가게 하는 에너지가 된다. "인생도 내력과 외력의 싸움이야. 무슨 일이 있어도 내력이 세면 버티는 거야."라는 박동훈의 대사는 이지안이 아니라 자신에게 했던 말인지도 모른다. 인생의 내력은 하루아침에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그건 혼자가 아니라 자신을 좋아하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어야 한다. 이 드라마는 인생의 의미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셸부르의 우산] 이후로 가장 쿨했던 마지막 동훈과 지안의 만남은 이지안 같은 애도 잘 살아가는 세상이 제대로 된 세상이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 같아서 또다시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이 드라마는 인생의 의미는 결과가 아니라 과정에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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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 아내가 바람이 났는데 그 상대가 내가 쫓아다니던 여자였다면 기분이 어떨까?' 이런 도발적이면서도 발랄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흥미로운 독립영화를 보았다. 김재식 감독의 [이, 기적인 남자]다. 부산의 한 대학 연극영화과 교수가 과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예쁘장한 조교 여자애를 좀 어떻게 해보려고 쫓아다니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녀가 자기 아내의 새 애인이더라는 얘기다. 예전에 시트콤 [프랜즈]에서 로스의 전부인이 레즈비언이라서 헤어졌다는 히든 에피소드가 있긴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역전적인 성역할 설정은 도발적이고 새롭다.

영화는 바다가 보이는 부산을 배경으로 해서 그런지 마치 닐 사이먼이 쓴 것처럼 경쾌한 실내극을 가져다가 영화로 만든 느낌이었고 시종일관 카메라를 장악하는 주연배우 박호산의 연기가 빛을 발했다. 그는 이 영화로 작년에 부산독립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가 끝나고 GV 시간에 감독은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커밍아웃을 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착상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래서 원제도 남자 주인공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안개'였는데 마주치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내리고 또 결정적으로 시나리오 대로 첫 장면에 안개를 만들어 넣을 예산도 부족해 고심한 끝에 지금의 제목으로 바꿨다고 했다. 난 안개보다 '이, 기적인 남자'가 백 배 나은 제목이라 생각한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퀴어영화냐'라는 논란까지 있었지만 박호산이 얘기한대로 이 영화는 한 찌질한 남자의 변화를 보여주는 '성장영화'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1억 원도 안 되는 예산으로 제작했다는 하이컨셉의 영화 [이, 기적인 남자]를 추천한다. 극장에서 만나시길 바란다. 블록버스터든 인디영화든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게 제일 재미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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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he-pr.co.kr/news/articleView.html?idxno=33516



저희 팀이 박호산 배우와 함께 제작한 '화재 안전' 공익광고 인터뷰 기사가 났네요. 코바코 공익광고팀 정준형 차장님이 인터뷰에서 기획과 쵤영 당시의 자세한 에피소드를 얘기해 주셔서 영상 제작 책임자인 저도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기존 매체에선 보기 힘든 TV-CM 30초 버전도 한 번 감상해 보시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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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tvcf.co.kr/YCf/V.asp?Code=A000342766



'영화에는 예고편이 있지만 화재에는 예고편이 없습니다'라는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아...그리고 박호산이 제 동네 후배입니다, 라고 얘기했더니 심사위원들이 와하하 웃었고 저는 순간 우리 아이디어가 일 등으로 뽑힐 것을 예감했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심사위원 중 한 분이 그러시더군요. 이제 공익광고도 좀 변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어때요? 이런 공익광고, 감당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이번 공익광고의 주제인 '화재 안전' 편은 최근 부쩍 늘어난 대형 화재 사고로 인한 피해들을 돌아보고 불의 무서움에 대한 전 국민적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자 만든 공익광고였습니다.  다들 모여 이런 저런 아이디어들을 내고 옥신각신하다가 막내 카피라이터 박수가 가져온 '영화 예고편' 아이디어가 재미 있어서 최종적으로 그걸 다듬고 발전시켰습니다. 연기력 좋은 모델을 주인공으로 내세우면 더 좋겠다는 얘기가 있어서 제가 그 자라에서 배우 박호산에게 전화를 걸어 출연을 부탁했더니 흔쾌히 허락을 해주었습니다.  

이세돌 씨와 찍었던 '경쟁위주 사회문화' 이후 오랜만에 만드는 공익광고라 욕심을 좀 부렸습니다. 촬영날은 하루 종일 겨울비가 내렸는데 문미영 감독과 스태프들의 헌신적인 노력이 있었고 박호산과 다른 조연배우들의 열연이 있어 좋은 결과물이 나온 것 같습니다. 애정어린 마음으로 봐주시기 바랍니다. 교조적이거나 뻔하지 않은 공익광고라 자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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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작자들에게 가장 큰 애증의 대상은 누구일까. 아마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닐까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 없이 전해준 스승, 그리고 걷는 법부터 시작해 창작의 방법론까지 그에게서 모든 것을 다시 배운 제자. 서로는 너무나 잘 아는 사이이면서도 주종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애증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제자들에게는 제 스승을 넘어서야 하는 무의식적인 의무감까지 있다. 흔히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는 말이 스승을 존중하고 어려워하는 말로 해석하지만 사실은 스승이 이룩한 길을 피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여기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애증의 결정판 같은 이야기가 있다. 토종 연극 <도둑맞은 책>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작품을 쓸 정도로 잘 나가는 시나리오 작가가 된 서동윤은 어느 날 자신의 보조작가였던 조영락에게 납치를 당한다. 영락은 스승의 방과 똑같이 꾸민 곳에 그를 집어넣고 최소한의 음식과 커피만 제공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쓰라고 위협한다. 주제는 '슬럼프에 빠진 작가가 살인을 하고 그의 작품을 훔친다'이다. 동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게 다 무슨 미친 짓인가 하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으며 제자에게 욕을 하고 야단을 친다. 그러나 휠체어에 자신의 두 팔을 결박한 채 골프채를 휘두르며 달겨드는 영락을 본 후로는 쉽게 웃을 수 없게 되었다. 자, 좋든 싫든 살기 위해선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 어디서 많이 본 얘기라고? 그렇다. 모티브만 놓고 보면 캐시 베이츠가 출연했던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 <미저리>가 떠오른다. 그러나 모티브는 비슷해도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에 각 작품이 도달하는 위치는 사뭇 다르다.


이 연극은 원래 영화를 위해 씌여진 글(2011년 대한민국 스토리공모대전 수상작)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심리 드라마'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위에서 언급한 '미저리'를 생각하면 이 컨셉은 스릴러나 심리 드라마로서 그리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없이 글을 쓰던 서동윤이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자신의 시나리오에 애착을 갖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영락과 함께 '좋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진정으로 고민하는 장면부터 이야기는 급속도로 재미있어진다. 그리고 시나리오 안으로 들어가면서 생기는 플래시백을 통해 맨 처음 수업 시간에 <차이나타운>의 시나리오 작가가 누구인가를 묻는 장면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영화지식 겨루기'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오타쿠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즐거운 장면들을 목격할 수 있다. 동윤을 위협하면서 예전 스승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상기시키고 지금 동윤이 쓰는 시나리오에 적용시키며 비웃는 영락, 그리고 그에 맞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 몸부림치는 동윤. 이 연극은 어쩌면 그런 두 남자의 불꽃 튀는 화학작용이 가장 큰 '스펙터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장르적 분류는 작가를 위협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글을 쓰게 하는 미친 팬심 스릴러 <미저리>보다는 기존 공포영화의 온갖 룰들을 들먹이며 가지고 놀던 <스크림>의 악동들 쪽에 더 가까운 듯하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객석을 둘러보니 오른편 뒤쪽에 배우 송영창이 혼자 앉아 있었다. 더블 캐스팅 중인 배우가 다른 팀의 연기를 모니터링 하며 자신의 대사도 한 번 더 점검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날 밤 연극이 끝나고 서동윤 역을 맡은 박호산 배우와 술을 한 잔 하며 들어보니 지금 진행되고 있는 캐스팅 중 송영창 박용우 팀은 '클래식'에 가깝고, 자기네팀은 '재즈' 분위기를 내기로 해서 똑같은 연출가와 각본이라도 아주 다른 연극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간다고 한다. 욕심 같아서는 다른 팀의 공연도 한 번 관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만, 내가 뭐 평론가도 아니고 또 그렇게 시간을 낼 자신도 없다. 사실은 그날도 갑자기 업무가 길어지는 바람에 야근하는 동료들을 놔두고 혼자 도망치듯이 뛰쳐나와 겨우 관람한 연극이었으니까.


얼마 전 성북동으로 이사를 와서 새로 생긴 이웃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박호산 배우였다(도대체 우린 이게 무슨 인복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같이 연극을 본 아내는 박호산 배우가 '너무도 능글맞게 연기를 잘 하는 바람에 무대 위로 달려가서 머리를 한 대 탁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하며 웃었다. 노련하고 안정감 있는 배우와 연출의 힘이 균형감 있게 느껴지는 흐뭇한 공연이었다. 다만 소극장이라고 하기엔 공간이 약간 크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소극장 공연은 관객이 바로 옆에서 피부로 느끼는 맛도 있는 법인데 말이다. 


9월 1일부터 25일까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있는 충무아트센터 블루에서 만날 수 있다. 한가위 연휴 빨간날들 중 하루 골라서 이 연극을 한 번 보시는 건 어떨까 적극 권장하는 바이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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