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인간을 살인병기로까지 만들 수 있는 요인은 무엇일까? '복수'라는 단어만큼 강력한 성취동기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오래된 전설은 물론 수많은 소설이나 영화가 앞다투어 복수극이라는 테마를 즐겨 사용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나의 부모 형제나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남의 복수에 평생을 바치는 것도 가능할까? 만약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슨 의미일까? 연극 <조씨고아 - 복수의 씨앗>은 그런 의문을 테마로 만들어진 연극이다.

중국 진나라때 조정의 충신인 조순은 정적이자 간신인 도안고의 계략에 의해 역적으로 몰려 자신은 물론 일가 300명이 멸족되는 대재앙을 겪는다. 조순에게 사랑 받았던 시골 의원 정영은 마흔 다섯 살에 늦게 자식을 하나 얻었는데 낳은지 한 달이 지난 그 자식을 대신 죽게 함으로써(도안고가 바닥에 세 번 패대기를 쳐서 죽었다고 한다) 조씨 가문의 마지막 핏줄인 조씨고아를 살린다. 그리고 간신 도안고 밑으로 들어가 조씨고아를 도안고의 양아들이 되게 한다. 스무 살이 되면 조씨고아에게 복수를 하게 하려는 일념으로. 이 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버린다. 그리고 이십 년 후 정영과 조씨고아는 드디어 도안고에게 복수를 하는 데 성공한다. 황석영의 역작 [손님]이 그랬던 것처럼 서로의 가족을 도륙하는 이 비극의 끝엔 무엇이 남을까.

이 연극은 13세기에 살았던 기군상이 사마천의 <사기>에 있던 기록을 토대로 쓴 희곡이 원작이다. 이를 현재 가장 잘 나가는 연출가인 고선웅이 각색해 재작년 처음 무대에 올렸는데 어느새 '명불허전'이라는 평을 들으며 전회매진을 기록하는 작품이 된 것이다. 그제 내가 명동예술극장에 가서 본 [조씨고아 - 복수의 씨앗]은 본토인 중국 베이징 공연을 거쳐 국내에서 세 번째로 무대에 올려지는 작품이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군신을 위해 초개 같이 목숨을 버리거나 적장으로 들어가 신분을 숨기고 오랜 세월을 견디다가 복수를 감행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용인이 되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그런 설정은 많았으니까. 그러나 그건 개념적으로 따졌을 때 얘기고 실제로 숨 쉬고 밥 먹고 소리 지르며 살아가는 인간군상들 속으로 들어가 보면 그게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더구나 연극이 상연되는 지금은 진나라나 원나라 시대와는 가치관이 다르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작품에서도 정영의 아내는 "당신이 한 약속따위가 무슨 상관이야? 그런다고 제 자식을 죽여?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라고 남편에게 외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영은 조순의 아들이자 부마인 조삭과 공주의 눈물어린 부탁을 저버리지 못한다. 간단치 않은 캐릭터를 앞에 두고 연출가의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이 작품을 21세기에 한국에서 상연하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가 선택한 것은 '존재론적 질문과 유희정신의 조화'였던 것 같다. 군신을 위한 복수극이라는 테마를 다루고 있지만 등장하는 인물들은 유머코드로 무장하고 있다. 언뜻 생각하면 심각함과 유머가 공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간신인 도안고나 시골 의원 정영은 물론 하물며 복수를 부탁하는 공주의 대사와 몸짓에도 경쾌한 유머가 스며있어서 관객들이 1, 2부로 나뉘어진 150분 동안 여러 번의 감정적 이완을 느끼며 연극을 즐길 수 있다. 이건 훌륭한 각본과 연기가 뒷받침 되어야만 가능한 일인데 이 연극은 그것을 해내고 있다. 극의 중심이자 복잡한 주제의식을 실어나르는 정영 역의 하성광은 그 중에서도 눈이 부신다. 장엄할 때는 장엄하게, 소심할 때는 소심하게 천의무봉의 연기를 펼치는 것이다. 특히 높은 목소리로 길게 이어지는 그의 탁월한 대사 능력은 놀랍다. 가만히 듣고 있다보면 연극대사가 아니라 랩처럼 리듬감이 느껴지는 것이다. 게다가 극에서 누군가 죽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검은 옷을 입고 나타나 부채를 펼치는 묵자라는 캐릭터는 그리스 비극의 코러스처럼 감초 역할을 적절히 수행한다.

도안고 역을 했던 장두이는 초반에 좀 대사를 불분명하게 처리해 눈쌀을 찌푸리게 했으나 이내 컨디션을 회복하고 극의 중심 역할을 해낸다. 그 밖에도 공손저구 역의 정진각, 조순 역의 유순웅, 정영의 아내 역을 맡은 이지현, 공주 역의 정새별 등도 자신의 역할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그게 딱 맞는 열연을 펼친다. 대사 처리에서 가장 미숙한 사람은 조씨고아 역을 맡은 이형훈이었는데 이는 맡은 역할이 열혈청춘인 스무 살의 젊은이라는 걸 생각하면 그리 흠이 되진 않았다.

무대는 아주 미니멀하하게 꾸며져 흡사 부조리극을 보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아내는 예전에 LG아트센터에서 보았던 피터 브룩의 <마술피리>가 떠오른다고 했다). 고선웅은 천정이 높은 명동예술극장의 장점을 살려 소도구들에 줄을 매달아 천정에서 내려오게 하거나 올리는 무대연출을 선보인다. 두 겹으로 되어 있는 커튼은 공간의 폭을 더욱 넓게 만들어 몇 사람만 등장하는데도 당장 옛 중국 대륙과 왕실의 스케일이 느껴지게 만든다.

연극을 보기 전 프로그램을 한 권 샀다. 연출가 인터뷰가 실려 있었는데 인터뷰어 김민정이 원작인 기군상의 [조씨고아]와 고선웅 각색의 차이를 묻는 질문에 "내가 아무리 뛰고 날아봤자다. [조씨고아 - 복수의 씨앗]은 결국 기군상 작가의 손바닥 안에 있다."라고 하는 대답이 믿음직스러웠다. 그의 말대로 이 작품은 원작의 문제의식을 가볍게 뒤집거나 하지 않는다. 다만 마지막에 복수에 성공하고 그 복수극 때문에 죽은 사람들과 정영이 마주치는 장면이 나오는데 그의 아내를 비롯한 죽은 자들이 그를 아는척 하지 않고 그냥 지나침으로써 복수의 허망함을 전할 뿐이다. 그렇다고 복수를 하지 말았어야 할까. 그건 쉽게 대답할 문제가 아니다. 연극은 즉답을 회피함으로써 우리에게 '살아가는 원동력'에 대한 커다란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고선웅은 2018 평창동계올림픽과 패릴림픽 개폐회식 연출을 맡아 누구보다 바쁜 일정을 보냈던 스타 연출가다. 5·18광주민주항쟁을 다룬 ‘푸르른 날에’를 연출한 것 때문에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올랐다가 문체부 차관이 당시 초연인 이 작품을 보고 리스트 삭제를 부탁했다 해서 유명세를 치룬 적도 있다. 1부를 보고 인터미션에 잠깐 밖으로 나오다가 우리 좌석 맨 뒷열에 앉아 있는 배우 이혜영을 보았다. 얼마 전 이 극장에서 그가 주연했던 [메디아]를 보았기에 더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좋은 연극을 보았다. 저녁을 먹으며 아내가 십만 원을 내고 국립극단 회원으로 가입하면 할인 혜택도 많고 또 일 년 간 국립극단에서 올리는 작품만 제대로 찾아 보아도 좋은 연극을 많이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하길래 흔쾌히 그러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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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극장은 장소 이전에 그 자체가 추억이요 고유의 작품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는 '명동 엘칸토예술극장'과 '삼일로 창고극장'이 그런 경우인 것 같다. 아직 감수성이 여물기 전인 십대 후반에 처음 연극을 봤던 곳이 바로 이 극장들이었으니까. 나는 여기서 추송웅이 번역, 연출, 연기 등 거의 모든 것을 도맡아 했던 화제의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을 보았다. 당연히 초연은 아니었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 앵콜공연을 할 때 보았던 것 같다. 창고극장은 운영 상의 문제로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나중에 '떼아뜨르 추'라는 이름으로 바뀌기도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런 명동의 추억들 말고 더 추가하자면 송승환이 출연했던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을 보았던 광화문의 '마당세실극장'과 운석화 윤소정의 [신의 아그네스]를 보았던 명륜동의 '실험극장' 정도였을까.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을 해석한 작품들이 재개관 기념극으로 새로 올라간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전화 예매를 했다(인터넷으로 예매하려다가 이런저런 난관에 부딪혀 결국전화를 했다). 내가 표값 4만 원을 카드로 계산하겠다고 하자 담장자가 놀라서 물었다. 무슨 통신할인이나 하다못해 배우할인이라도 없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4만 원 을 계산할 테니 예약을 해달다고 했다. 제 값을 안 내고 보는 게 추세이다 보니 이런  해프닝이 생기는 것  같아 씁쓸했다. 

우리가 예매한 작품은 [빨간 피터들] <추ing_낯선 자>라는 작품이었다. 신유정 연출에 하준호 배우가 출연하는 모노드라마였다. 40 여 분 정도의 짧은 작품이라고 했는데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무대와 객석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바닥에 놓인 스툴에 관객들이 앉아 있으면 되는 시스템이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 연극은 무대와 객석이 따로 구별되어 있지 않으니 적당한 의자를 골라 앉으시면 되고 조금 있다가 배우가 나와 연기를 하다가 관객 가까이 가더라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말라'는 안내멘트였다. 우리는 웃으며 배우를 기다렸다. 연극영화과를 다니는 듯한 젊은 관객들이 많았다. 

불이 꺼지고 어디선가 배우가 나타났다. 바지를 입고 웃통을 벗은 원숭이 분장이었는데 코를 뒤집어 원숭이처럼 꾸미고 가슴과 등에 털을 달아서 언뜻 보면 진짜 원숭이 비슷하기도 했다. 말을 전혀 하지 않고 원숭이처럼 '기긱', '우우~' 소리만 내는 무언극이었다. 잠시 후 천정에서 땅콩이 후두둑 떨어지고 배우는 그 땅콩을 집어던지며 관객들과 이야기거리를 만들어갔다. 우리는 흡사 진짜 원숭이를 본 것처럼 놀라워했고 수 많은 사람들 틈에서 혼자 원숭이 역을 잘 해내고 있는 배우를 보며 감탄했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순간순간 달라지는 연기이기에 배우 관객 모두 빠른 순발력이 필요했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에 서로 신기해 하거나 뿌듯해했다. 순간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혼란스러웠다. 원숭이 역을 하고 있는 배우를 진짜 원숭이로 여겨야 하나, 아니면 원숭이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배우로 봐야 하나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원작자인 카프카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고 왕년의 각색자인 추송웅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으며 새롭게 추송웅과 카프카의 작업을 재해석한 연출가 신유정과 배우 하준호가 원하는 바이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부가 끝나고 암전 후 웃도리를 차려 입은 하준호가 나와 2부를 시작하면서 극은 새로운 활기를 띄었다. 하준호는 잘 나가지 못하는 연극배우 역할을 했는데 끊임없이 울리는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는 중간중간 관객들을 툭툭 건들면서 자신의 위치와 생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배우로서의 애환이나 개인적인 역사를 드러내던 배우는 돌연 다시 원숭이가 되어 무대 위를 훨훨 날아다니다가 끝을 맺었다. 배우가 끝내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하고 다시 원숭이로 돌아간 것 같아 슬펐다. 

그런데 왜 원숭이일까. 

설마 이 기회에 원숭이의 생각이나 삶을 들여다보자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것에 늘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인간과 닮은 '원숭이 메타포'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영화 [혹성탈출]도 마찬가지다. 원숭이의 눈을 통해 들여다 볼때 인간의 모습은 더 적나라하게 보이지 않던가. 그래서 '빨간 피터'라는 원숭이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고 추송웅의 작업을 재해석한 일련의 작품들도 2018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나름의 의의를 갖는 것이라 생각한다. 40여 분의 짧은 러닝타임이었지만 느낀 바가 많았고 신선한 자극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좋은 연극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연극이라고 해야할지 퍼포먼스라고 해야할지 약간 헷갈리긴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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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란한 마음을 달래는 방법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노래방이나 단란주점에 가서 남자답게 술을 마시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어두컴텀한 극장에 혼자 들어가 나보다 더 찌질한 인생을 그린 영화나 연극을 관람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두 번째 방법을 선택했다... 이건 예전 한석규, 김지수 주연의 영화 [사랑할 때 이야기하는 것들]을 보고 썼던 리뷰의 첫 대목이었다. 오늘 연극 [모럴 패밀리]를 보고 소주를 한 병 마시고 집에 와서 리뷰를 써볼까하고 노트북을 펼쳤더니 십여 년 전 썼던 그 대목이 고스란히 다시 떠올랐다. 

큰 언니는 술집에 나가고 고등학생인 여동생은 인터넷 방송으로 자신이 입었던 팬티를 판다. 공부를 제법 하는 남동생은 성정체성이 게이라서 너무 괴로워 가출을 할까 생각 중이다. 그리고 늘 침대에 누워 지내는 폐인 오빠는 어렸을 때 본드를 너무 많이 해서 몸도 가누질 못해 남들이 시간 날 때마다 똥을 닦아줘야 하는 존재다. 큰 언니가 오랜만에 마음에 드는 남자를 데려와 소파에서 오럴 섹스를 하고 있을 때도 동생들은 무심히 들어와 말을 걸거나 훼방을 놓는다. 고등학생 여동생은 인터넷 방송으로 자신의 팬티를 경매에 붙이다가 마침 들어온 언니에게 한 마디 하라고 하고 언니는 픽 웃으며 카메라 앞에 서서 "야, 니네들 이런 거 왜 보냐? 이 병신 새끼들아."라고 욕을 한다. 카메라를 이어받은 동생은 우리 언니, 존나 이뻐서 더 나오면 안 된다. 니네들 언니 보고 딸딸이 쳐서 안 된다, 하는 멘트를 거침없이 날린다.

거실에 놓인 소파의 뒷모습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 심란한 가족의 이야기는 흡사 영국에서 시작해 미드로까지 리메이크 되었던 [셰임리스]와 비슷하다. 실제로 미드에서 에미 로썸이 맡았던 역할은 오늘 본 연극의 큰 언니 연설하 배우와 많이 겹치는 느낌이다. 그런데 이 연극이 [셰임리스]와 가장 다른 점은 아마도 '언어'일 것이다. 물론 영어가 짧은 내가 미국 드라마의 슬랭을 다 알아 들었을 리가 만무하지만 그래도 평소에 잘 쓰지 않는 '씹'이나 '보지', '자지' 같은  날것 그대로의 언어들을 듣고 있다보면 처음엔 재미 있다가도 나중엔 오히려 슬퍼지는 경지에 이른다. 특히 동생 역을 맡은 강선영의 찰진 욕들은 성인 인터넷 방송을 할 때 빛을 발하는데 너무 잘 해서 오히려 마음이 아프다.  

더구나 이 연극은 1회에 들어올 수 있는 관객 수를 딱 50명으로 제한하고 원래 있던 무대를 더욱 축소해 스테이지와 관객이 거의 같은 공간에 있는 것처럼 느껴지도록 구성을 했다. 거기에 배우들의 거침 없는 노출 연기, 동성애, 근친상간 암시까지 겹치니 웬만한 사람들은 숨도 쉬기 힘들 지경이다. 그런데 그런 극단적 상황들이 계속 되다 보니 오히려 자학적 쾌감을 지나 기분이 신선해지는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진리를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고나 할까.

가족은 선택할 수도 없고 마음대로 바꿀 수도 없는 삶의 굴레다. 오죽하면 일본의 영화감독 기타노 다케시는 '가족이란 남들이 안 볼 때 어디론가 갖다 버리고 싶은 존재'라고 했을까. 그만큼 힘든 존재인 가족 얘기 중에서도 이렇게 극단적인 상황을 다루면서 '모럴 패밀리'라는 반어법적인 제목을 붙인 감독의 감성이 믿음직하다. 

우리에게 작품을 권한 연극배우 이승연은 '작품이 너무 세서 일반인들에겐 권하기 꺼려지지만 혜자 언니 부부 정도면 좋아할 것 같아서'라는 말을 덧붙였는데, 결과적으로 너무나 고마운 추천이었다. 이승연 자신은 이 연극을 보고 한 사흘 정도 빙의가 되어 헤어나질 못했다고 한다. 늘 열정적인 연기를 선보이는 그다운 반응이요 리뷰였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연극을 본 날은 3월 4일 일요일인데 4월 1일까지 대학로 드림아트센터에서 공연한다.  '응답하라 1988'에서 호연을 했던 김선영 배우가 대표로 있는 <극단 나베>의 작품이고 김선영 배우의 남편 이승원 감독이 극본과 연출을 모두 맡았다. 이제 막 데이트를 시작한 커플이나 각별히 예의를 지켜야 하는 사돈지간만 아니라면 누구랑 같이 봐도 절대 후회하지 않을 재미있는 연극이라 단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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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연극이 무대에 다시 오른다는 소식만으로도 사람들이 꺄아, 소리를 지르는 작품들이 있다. 지난 달 1년 만에 다시 막을 올린 [모든 군인은 불쌍하다]가 그랬다면 이번 달엔 2년 만에 대학로로 돌아온 [프로즌] 역시 그렇다. 도대체 사람들은 왜 이 작품들에 열광하는 걸까. 극단 맨씨어터 10주년 기념으로 올린 [프로즌]을 보았다.

연극을 영어로는 'Play'라고 한다. 기본적으로 뭔가를 생산하는 행위라기보다는 노는 것에 가까워서 그럴 것이다. 하지만 조금 더 생각해 보면 그럴 듯한 거짓말을 지어놓고 무대 밑에서, 또 무대 위에서 서로 암묵적으로 진짜처럼 여기며 그 세계를 통해 진실을 말해보려는 '수작'이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더 맞는 거 아닐까. 더구나 [프로즌] 같은 번역극은 분명히 우리나라 배우들이고 우리 말 대사인데도 등장인물들의 이름이나 의상, 분장, 배우들의 억양 등에서 어릴 적 TV에서 보던 '더빙 외화'를 보는 듯한 낯섦을 경험하는 재미가 플러스 된다. 물론 그만큼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 능력이 보증되어야만 가능한 쾌감이겠지만.

어린 딸 로나를 유괴당하고 20년 동안 그녀가 살아 돌아오기만을 기다렸던 낸시가 있다. 그리고 로나를 비롯한 수십 명의 소녀를 납치 및 성폭행한 소아성애자이며 연쇄살인범인 랄프가 있다. 두 사람 사이엔 연쇄살인범들의 심리를 연구하는 정신과의사이자 알코홀릭인 아그네샤가 끼어든다. 그녀는 랄프 같은 사람은 정상인들과는 뇌구조부터 다르므로 그의 납치 강간 살해행위도 범죄라기보다는 일종의 질병으로 판단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는 심리 전문가다. 그러나 천진한 미소를 띤 살인마에게 사랑하는 딸을 잃은 낸시도 그렇게 생각할까? 대충 설정만 훑어봐도 만만치 않은 연극이다. 과연 이렇게 꽉 짜여진 등장인물 구도 속에서 배우들은 어떤 이야기를 펼쳐갈 것인가.


랄프는 참 표현하기 힘든 인물이다. 관객들에게 혐오와 연민을 동시에 느끼게 해야 한다. 어린아이에게 말을 걸었다가 무시를 당하면 심하게 상처를 받는 약한 영혼임과 동시에 소녀들을 밴으로 유인해서는 '아프지 않게' 죽였다고 자랑하는 섬뜩한 싸이코패스이기도 하다. 심지어 자신을 체포하러 온 경찰들의 무능을 지적하기도 하는 전도본말의 캐릭터다. 랄프 역을 맡은 배우 박호산은 흥분하면 말을 더듬거나 쌍욕을 내뱉는 중간중간 해맑은 미소를 내보이는 설정에 '틱장애'라는 신의 한수를 더 얹어 싸이코 살인마의 내면으로 깊숙히 들어간다. 막판에 격하게 자신의 뺨을 치는 장면에서는 '정말 아프겠다'라는 생각에 저절로 객석에서 비명이 튀어나오지만 나중에 만나 물어본 결과, 그 순간엔 아픈 것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만큼 극 속으로 몰입한 것이다. 낸시 역을 맡은 배우 우현주의 발성과 대사처리능력 또한 탁월하다(극단의 대표인 우현주는 공동번역 작업까지 맡았다).

왜 '프로즌'인가. 대사 중 아그네샤가 아직 탐구하지 못한 인간의 뇌 세계를 '얼어붙은 땅' 비슷하게 표현한 것도 있고 또 20년 전 로나를 유괴당한 순간부터 낸시의 감정이 얼어붙어서 그렇다는 말도 있다. 나는 영국의 극작가  브라이오니 래버리(Bryony Lavery)가 창조한 극단적인 이야기와 한국 배우들의 열연이 보여주는 극한의 시너지가 이 여름의 더위를 꽝꽝 얼려버리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뚱딴지 같은 생각을 해 본다.


이 연극은 여성 캐릭터인 낸시와 아그네스만 붙박이 출연이고 랄프 역은 세 명의 남자 배우가 돌아가면서 맡는다. 그러면서도 하루 한 번 공연 뿐이다. 하루에 두 번 공연을 올리는 연극도 있지만 이 작품은 그런 건 꿈도 꾸지 못한다고 한다. 연극이 끝나면 배우들이 모두 탈진하기 때문이란다. 2년 전 인간이 체험할 수 있는 최대의 고통을 보여준다는 세평 덕분에 '멘탈 탈곡극'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심리 스릴러 [프로즌]. 강추하는 작품이다. 7월 16일까지 에그린 씨어터에서 상연한다. 놓치지 마시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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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연유에서인지는 모르겠는데 고등학교 2학년 때 명동 엘칸토 예술극장에서 피터 한트케의 언어유희극 <카스파>를 본 적이 있다. 아무런 사정 정보 없이 보게 되었는데 당시로는 매우 파격적인 일인극이라 충격을 받은 기억이 있다. 

나는 연극 도중에 목이 칼칼해서 계속 '음,음...'하고 헛기침을 했는데 배우가 갑자기 연극을 멈추고 나를 똑바로 노려 보며 "거, 연극을 볼 때는 그 목으로 음,음...소리 좀 내지 말아요!"라고 소리를 질렀던 것이다(지금 생각해 보면 그 배우도 좀 너무 했던 것 같다). 고등학생인 나는 너무 놀라고 무안해 얼굴이 홍당무가 되었었다. 그러니 어찌 그 연극을 잊을 수가 있으랴.  


내게 명동은 구두와 연극의 거리였다. 엘칸토 예술극장이라는 이름도 금강제화라는 구두회사의 후원 때문에 생겨난 것이었을 것이다.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을 본 것도 명동 삼일로 창고극장에었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창고극장은 사라졌고, 엘카토예술극장도 없어졌다. 그런데 언제인가 명동예술극장이 다시 문을 열었다. 

동네에 사는 김진경 연출가가 이 연극을 우리에게 추천했고 아내가 김광덕 배우에게 예약을 부탁했는데 마침 예약 취소된 자리가 있다고 해서 운 좋게 빨리 그 연극을 보게 되었다. 어제 저녁 연극을 보고 나와 차를 마시는 자리에서 휴대폰으로 급하게 관람후기를 써서 페이스북에 올렸었다. 오늘 정신을 가다듬고 독서일기를 하나 올린 뒤 오자 수정을 해서 여기에도 다시 한 번 올려 본다. 


아아. 내가 이렇게 문화 생활을 자주 해도 되는 걸까. 성북동으로 이사 온 뒤로 영화는 좀 줄었는데 오히려 연극 나들이가 부쩍 늘었다. 배우들이 이웃에 살아서 그런가 보다. 오늘은 명동예술극장에서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을 로버트 알폴디가 새로 해석한 연극 [메디아]를 관람했다. 성북동에 사는 여배우 김광덕 씨가 코러스로 출연하는 작품인데 오랜만에 보는 배우 이혜영 주연 작품이라 더욱 기대가 되는 연극이었다.

난 어렸을 때 엉터리로 읽은 기억이 조금 나긴 하는데(그리스 비극이 다 그렇듯이)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과 배신, 분노, 복수를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일단 나는 이혜영의 목소리와 억양을 매우 좋아하는데 이번 연극의 타이틀 롤인 메디아 역으로는 이혜영 이외의 배우를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딱 적역이었다(단 8분 간 출연했지만 강렬한 인상을 남긴 남명렬 배우 - 요즘 아로나민 골드 CM에 나와 '드신 날과 안 드신 날의 차이을 경험해 보십시오' 라고 말하는 분 - 도 좋았다) 같이 출연한 김광덕 씨는 이혜영 선배와 출연하며 그 카리스마를 목격하는 것만으로도 영광이었다는 소감을 남겼다.

믿었던 남자 이아손에게 배신을 당한 메디아의 마지막 선택은 무엇일까. 배신자에게 가장 큰 아픔을 남기는 방법을 고안해낸다. 그건 바로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을 죽이는 것이다. 최고의 복수는 자신을 파괴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스스로 용서 받을 수 있는 여지를 남기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대단히 극단적인 방법이지만 비극의 장치로서 이보다 더 센 선택은 없을 듯하다. 감독은 신들의 이야기였던 원작에서 신의 영역을 모두 삭제하고 철저하게 인간의 '러브 스토리'로 개작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나중에 관객과의 대화에서 이혜영 배우에게 들은 얘기지만 '분노는 큰 사랑에서 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도 했다.

앞뒤로 움직이는 기다란 의자를 이용한 심플한 무대도 멋졌고 그리스 비극이지만 모두 현대 의상을 입고 나오는 점도 좋았다. 다만 유머가 거의 없는 정극 특유의 팽팽한 긴장감 때문에 좀 힘들었다. 그리고 해설을 대신해 가끔 나오는 직설적인 대사는 너무 친절해서 짜증이 났다.

연극이 끝나고 나서 내 앞에서 일어서던 여자 관객은 옆 친구에게 "야, 내 기가 다 빨린 느낌이다." 라며 웃었다. 두 시간 내내 계속된 열연과 긴장감에 약간 탈진을 한 것이다. 물론 연출가도 배우도 관객도 쉬운 길을 마다하고 일부러 선택한, 고되지만 뿌듯한 탈진감이었다.

끝으로 이혜영 얘기 하나만 더. 연극이 끝나고 관객과의 대화에서 많은 이야기를 나눴는데(두 아이를 죽인 뒤라 옷과 손에 피를 묻힌 상태로 인터뷰를 진행했다) 특히 이혜영이 개인적인 얘기를 언급하는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그동안 계속 작품 활동을 하긴 했지만 지난 이십 년간 엄마와 아내로서 아이들 키우는 데만 집중하다가 작년에 연극 [갈매기]를 기점으로 '숨어있던 욕망'을 다시 발견했음을 깨닫고 작품이 끝난 뒤 집에서 일주일을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런 심정을 추동력 삼아 이번에 다시 [메디아]라는 작품에 임하게 되었다고 한다. 4월 2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상연한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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