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책장을 정리하자고 한다. 올 8월이면 이 집으로 이사온 지 4년이 된다. 7층에서 바라보는 한강이 한 눈에 보이고 거실에는 친구들과 술 마시기 좋은 테이블도 있고 책꽂이도 양쪽으로 큰 게 있어서 더 살고 싶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번엔 이사를 가야 할 것 같다. 아내가 눈대중으로 세어보니 대략 1,500권 정도란다. 책욕심을 버리기로 했다. 가지고 있는 책을 줄여야 한다. 어떻게 줄일까.


일단 무슨 책을 남기고 무슨 책을 없앨 것인가부터 정해야 한다. 오늘 아침에 출근길에 아내와 한강변을 함께 걸으며 그 문제에 대한 의견을 나누었다. 며칠 전 친구 표문송과 술을 마시다 무슨 얘기 끝에 내가 '십수 년 전에 홍명희의 <임꺽정> 열 권을 사놓기만 하고 아직 못 읽었다'고 했더니 그 책만큼은 절대 버리지 말고 나중에라도 꼭 읽으라고 한 게 기억난다. 그 책을 기준으로 남겨야 할 책과 없애야 할 책들을 생각해 보자.

조정래의 <태백산맥>과 <아리랑>, <한강> 중엔 아무래도 <태백산맥>을 다시 읽고 싶어질 것 같다. <아리랑>은 읽으면 가슴이 너무 아리고 답답해져서(특히 정신대와 하와이 사탕수수농장 부분) 다시 읽기 힘들 것 같고 <한강>은 두 책에 비하면 개인적으로 크게 당기지가 않았다. 그러니 <아리랑>과 <한강>을 다른 데로 보내고 필요하면 도서관에서 빌려 읽도록 하자.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책들이나 히가시노 게이고처럼 늘 잘 팔리는 작가의 책들은 초기 희귀본이 아니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으니 모두 내보내자. <용은 잠들다>나 <방과 후> 같은 건 기념으로 한 권씩 남겨 놓을까.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책들도 몽땅 내보내기로 하자. 이미 후배 윤보라가 내가 개포동 옥상 있는 집에 살 때 놀러와 우리집에서 술을 마시고 <개미> 전집 다섯 권을 빌려가다가 그날 밤 택시 안에서 분실한 터라 이건 그리 어렵지 않을 듯하다. 

창간호부터 절판될 때까지 읽었던 SF잡지 [판타스틱]은 놔두자. 거기서 배명훈의 소설들도 만났고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보건교사 안은영>의 저자 정세랑의 단편도 처음 접했으니까. 1983년도쯤 문학잡지 [현대문학]을 일 년치 구독한 것은 순전히 당시 대성고등학교 국어교사인 권희돈 선생님 때문이었다. 수업시간에 '벌레'인지 '벌레구멍'인지 하는 시를 칠판에 적어주셨는데 시 말미에 '현대문학 몇월호'라고 출처가 씌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분히 허영심에서 선택한 정기구독이었지만 나에게는 당시 몇 달치 용돈을 모아 저지른 작은 사건이기도 했다. 덕분에 그 잡지에 막 연재를 시작했던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제목으로나마 먼저 구경할 수 있었다. 현대문학 과월호도 지금은 구하기 힘든 책이 분명하니 그냥 놔두기로 하자. 

김용 선생의 <사조영웅전>과 <신조협려>는 어떻게 할까. 난 <사조영웅전>을 너무 재미있게 읽은 나머지 중독성 때문에 <신조협려>까지 선뜻 손을 대지 못하다가 여태 못 읽은 케이스다. 엉뚱하게도 무협지를 좋아하는 뚜라미 동기이자 '오근네닭갈비'1,2호점의 사장님인 고한우가 빌려다가 며칠 밤 통독을 하고 다시 돌려줬다. 허멘 멜빌의 <모비딕>이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백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등 읽다가 만 책들은 그냥 놔둘 생각이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에서>나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 등은 너무 어렸을 때 읽었으므로 다시 읽으려고 일단 눈에 들어올 때마다 사놨으나 아직 읽지는 못한 책이다. 일단 놔두자. 대신 아멜리 노통브나 무라카미 류, 마루야마 겐지, 야마다 에이미 등 한때를 풍미했던 작가들의 작품은 언제든지 구할 수 있으니 모두 내보내자. 아, 그런데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떻게 할까. 왠지 이 사람 책은 그냥 놔두고 싶어지는데. 그냥 무시하고 싶다가도 그 꾸준함이나 향상성 때문에 자꾸 생각나는 작가다. 최근작 <여자 없는 남자들>에 실린 단편들만 읽어봐도 그렇다. 어쨌든 참 잘 쓴다. 

황석영의 소설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무기의 그늘>과 <손님>만 남길까 한다. <손님>은 어쩌다보니 세 번이나 같은 책을 샀다.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없게 가까운>도 세 번째 산 책이다. 내보낼 순 없을 것 같다. <헤밍웨이, 파리에서 보낸 7년> 같은 책은 쉽게 절판될 것 같으니 놔둬야 한다. 커트 보네거트의 <제5 도살장>이나 <나라 없는 사람> 같은 책을 어찌 내보낼 수 있으랴. 밀란 쿤데라의 책들도 일단 다 품고 있어야 한다. 이런 책을 내보내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다. 새라 워터스의 <핑거 스미스>도 누군가 훔쳐가는 바람에 다시 샀던 책이다. <벨벳 애무하기>라면 혹시 몰라도 이 책은 안 된다. 모옌의 <홍까오량 가족>은 인덕이한테 선물받은 책인데 아직 안 읽었고 <탄샹싱>은 정말 정말 어렵게 구했던, 애지중지하는 책이다. 그런데 바르가사 요사의 책들은 다 어디 간 걸까. 


김훈의 책들은 일단 모셔 두기로 한다. 윤대녕의 단편집들도 마찬가지다. 폴 오스터의 책 중 그래도 <뉴욕 통신>쯤은 남겨둘까. 아,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어서 집에 가서 어떤 책들이 꽂혀 있는지 다시 한 번 살펴보고 싶다. 이러다가 몇 권이나 내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서재 결혼시키기'보다 어려운 게 '서재 시집보내기' 인 것 같다. 이건 일단 거실 왼쪽에 있는 내가 산 책들 중심의 책장 이야기다. 오른쪽에 아내가 산 책들까지 생각하면 정신이 약간 아득해진다. 아내는 그 책들 중에서 또 어떤 걸 골라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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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볼 연극 제목이 뭐랬지?” 

“반도체소녀!”


그럼 좀 심각한 내용이겠네. 저는 반도체소녀라는 말을 듣고 김옥빈이 나오는 이재용 감독의 옛날 영화 ‘다세포소녀’를 떠올렸다가 피식 웃고 말았습니다. 그래, 가끔은 심각하고 진지한 연극도 한 편 봐줘야지. 게다가 이 연극은 아내와 같이 ‘여자연구소’ 라는 모임의 멤버로 활동 중인 연극배우 이승연 씨가 출연하는 덕분에 가게 된 거니까.



지금 대학로 ‘아름다운극장’에서 문화창작집단 날이 상연하고 있는 연극 [반도체소녀]는 짐작대로 영화 <또 하나의 약속>처럼 삼성반도체에서 일하다가 사망한 노동자 이야기입니다. 소재 자체가

슬프고 심각한 이야기지만, 그렇다고 한 시간 반 가량 되는 상연시간 내내 심각하기만 하면 관객들 몸이 뒤틀려서 끝까지 보기 힘들겠지요. 그래서 여기에도 재미있는 캐릭터가 등장합니다. ‘일인다역’ 역을 맡은 배우 오주환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연극 도중 부당해고 된 재능교육 선생님들의 복직을 요구하며 시위를 하는 인물 혜영 옆에 가 느닷없이 작업을 거는 연극배우 오주환은 자기가 가난한 연극배우임을 밝히며 이번에 들어간 연극 [반도체소녀]에서는 자그마치 ‘1인 14역’을 맡았다며 한탄을 하기도 합니다. 그 후에 그는 정말 신문기자, 인사담당자, 취객, 경찰, 퀵서비스 직원 등등 벼라별 변신을 거듭하며 관객들에게 깨알 웃음을 선사합니다. 어제는 판사로 분한 장면에서 맨 앞줄에 앉아 보던 저에게 와 망치를 선물하고 갔습니다 



연극은 호스피스로 일하며 ‘반도체소녀’와 인연을 맺은 간호사 정민과 그녀의 남동생 세운, 정민의 남자친구 동용, 그리고 세운의 여자친구 혜영을 중심으로 펼쳐집니다. 호스피스인 정민은 임신 3개월 상태인데 얼마 전에 정을 붙였다가 죽어버린 환자 ‘반도체소녀’가 늘 눈에 밟히고 삼성전자 서비스센터에서 일하고 있는 남자친구 동용의 건강도 늘 걱정입니다. 삼성에 입사하는 꿈을 꾸며 공부를 하고 있는 동생 세운은 마르크스의 ‘공산당선언’을 언급하며 자신의 ‘스펙쌓기’를 회의적으로 바라보는 이상주의자 노교수가 못마땅하고 그런 자신을 이해하고 독려하기는커녕 사사건건 비난하며 ‘쓸데 없이’ 재능교육 1인시위나 하고 있는 여자친구 혜영이 야속하기만 합니다. 이래저래 모두들 하루하루 살아가기가 힘든 피곤한 인생들이죠. 


연극은 그러나 섣불리 그들의 처지를 도약시켜 해피엔딩으로 이끌거나 하지 않습니다. 반도체소녀는 죽은 뒤에도 이승을 뜨지 못해 정민 곁을 맴돌고 세운은 입사시험에서 낙방을 하고 맙니다. 설상가상 몇 개월 뒤 정민과 결혼식을 올리려던 동용은 갑자기 심장이 멈춰 죽어버리구요. 교수님이나 혜영에게도 뭐 뾰족한 수가 생기는 건 없습니다. 아마 이 연극은 우리가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직시하게 함으로써 우리에게 지금 2014년의 현실을, 그리고 우리 같은 사회 구성원들이 크게 달라지지 않는 한 앞으로도 크게 달라질 게 없는 2015년, 2016년의 대한민국을 보다 입체적으로 보라고 요구하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을 좀 찾아보니 이 연극에서 교수 역을 맡은 오세철 연세대 명예교수는 실제로 ‘우리나라 강단의 마지막 맑시스트’로 유명한 분이더군요. 아무래도 현직 연기자가 아니라 연기는 좀 부자연스러웠지만 그 진정성을 생각하면 고개가 저절로 숙여지는 분이었습니다. 일부 수구언론에서 이 작품에 ‘빨갱이 연극’이라는 낙인을 찍었다고 하던데, 아마 이 분의 출연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결론적으로 말씀 드리면 이 연극이 빨갱이 연극은 아닙니다. 가난하고 억울한 사람들 얘기하면 무조건 다 빨갱이 콘텐츠입니까. 그리고 요즘 세상에 빨갱이 연극이면 또 어떻습니까. 하긴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백]도 ‘빨치산 소설’이라고 쓰는 기레기들한테는 뭐든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저는 연극을 볼 때면 늘 신기합니다. 특히 어제처럼 소극장 연극인 경우 바로 눈 앞에서 자잘한 소도구들만으로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내는 게 그렇습니다. 바로 제 발 앞에 놓인 기다란 직사각형의 아크릴 박스와 약간의 물, 그리고 모래만 가지고도 금방 바닷가가 되는 마술이 벌어지니까요. 불이 꺼지고 깜깜했다가 다시 들어오면 어둠 속에서 시치미 뚝 떼고 앉아 있거나 서 있는 배우들도 신기하구요. 배우들과 관객이 서로 짜고 거짓말을 하는 것 같은 공법의식이 생겨 늘 즐겁습니다. 그리고 이런 ‘쓸데 없는’ 일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착하게 느껴져 고마운 생각도 들고요. 


대학로 좋은 배우들의 고른 열연이 빛나는 연극이었습니다. 일단 11월 30일까지 상연한답니다. 시간 내셔서 한 번 관람하시기 바랍니다. 어제 제 아내는 이 연극을 보며 참 많이 울었습니다. 함께 연극을 보고 저희에게 맛있는 청국장 등을 선물해 주신 전미옥 대표님도 반갑고 고마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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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국문학 강의를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 술을 마시다가 요즘 문창과 학생들의 꿈이 대부분 동화작가라는 얘기를 듣고 깜짝 놀랐다. 젊은 애들이 너도나도 갑자기 동심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나? 그럴 리가 없다. 졸업 후 순수 소설가나 시인으로는 도저히 살아갈 자신이 없으니 그나마 잘 팔린다는 동화 쪽으로 발길을 들여 놓겠다는 속셈이다. 한숨이 나왔다. 도대체 누가 동화작가는 먹고 살 만하다는 환상을 심어 주었단 말인가? [마당을 나온 암탉] 같은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고 서점에서 [Why?] 같은 아동 학습물이 꾸준히 팔린다고 해서 동화를 쓰는 일이 만만할 리가 없지 않은가.



문제는 장르가 아니라 내용이다. 코난 도일이 ‘먹히는’ 장르인 추리물을 선택해서 쓰는 바람에 지금도 셜록 홈즈가 TV시리즈 등으로 계속 확대 재생산 되고 있단 말인가? 아니다. 내용과 캐릭터가 훌륭해서다. 스티븐 킹의 수많은 소설들은 원래 대중 소설이라 영화계와 방송국에서 앞다투어 작품 계약을 하는가? 아니다. 그의 작품은 흥미진진하고 뭔가 새롭기 때문이다.


소설가 김탁환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그의 소설들은 서점에 나오기가 무섭게 [조선 명탐정] 같은 대중 영화로, [불멸의 이순신]이나 [나, 황진이] 같은  드라마로 판권이 팔려 나간다. 그런데 그가 작품을 구상할 때마다 “아마 몇 년 있으면 이순신이 뜰 거야”, 라거나 “이번엔 백탑파를 한 번 띄워 볼까”라고 생각했을까? 전혀 그렇지 않다. 작년에 마포의 문화공간 숨도에서 열렸던 '기획자의 마음'이라는 강의에서 소설가 김탁환을 만난 적이 있다.


어떻하면 그렇게 내놓는 소설마다 현재 트렌드에 부합되는가? 라는 사람들의 질문에 그는 ‘본질이 트렌드다’라는 획기적인 답변을 대뜸 내놓았다. 본질이 트렌드라니? 자기가 트렌드를 따라가거나 예측하는 게 아니라 가만히 인간의 모습과 역사의 물결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뭔가 본질적인 것이 보이고 그것들을 입체적인 시각과 설계로 불러일으키고 나면 결국은 그것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새로운 ‘트렌드’가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사랑, 행복, 고통, 질투, 꿈, 비루함 등 몇몇 단어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는 게 우리 호모 사피엔스의 삶이다. 아울러 역사의 본질이란 무엇인가? 곧은 길과 굽은 길의 대결, 도전과 실패의 반복과 교차, 합리와 불합리를 넘어서는 막막함, 만약을 허용치 않는 냉정함, 끊임없이 반추하는 과거와 미래의 대화가 인간의 역사다.



그런 김탁환이 이번에 선택한 소재는 바로 ‘금융’이다. 20세기를 넘어 21세기까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이 ‘자본주의’라는 괴물은 도대체 어떻게 시작되었으며, 우리나라에서 민족자본이 형성되던 시절에 그 곳에선 어떤 인물들이 살고 있었는지를 작정하고 탐구해 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물이 바로 3권짜리 장편소설 [뱅크]다.


구정 연휴에 무심코 책꽂이에서 꺼내 들었던 [뱅크] 1권은 빠른 속도로 읽혔다. 개성 상인 장훈, 인천 상인 서상진, 서울 상인 홍도깨비 등 한반도 주요 지역의 상권을 대표하는 세 거상이 모여 급격하게 밀려드는 외세의 자본으로부터 이 나라를 지키자고 맹세하는 술자리에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곧 그들의 아들 딸들인 장철호와 박진태, 최인향의 이야기로 뻗어나간다. 

1868년생 동갑내기로 강화도조약 체결 당시 모두 아홉 살이었던 이들은 인천 부두를 배경으로 인연을 맺기 시작하면서 모험과 도전, 경쟁, 배신, 살인, 섹스, 러브스토리 등이 난무하는 거대한 이야기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된다.


김탁환은 소설을 쓰기에 앞서 자료를 많이 모으고 공부를 많이 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역사소설을 쓰는 사람은 아주 사소한 단서라도 역사적 고증에 철저해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통상 한 편의 소설을 쓰기 위해 100권이 넘는 책을 사고 그 중 10권 넘는 책을 샅샅이 읽는다고 하니 소설가의 근면함과 장인정신에 고개를 숙일 따름이다. 이번 소설도 마지막 권 말미에 실린 참고문헌록을 보면 ‘국역 경성부사, 서울특별시시사편찬위원회’, ‘조선후기 상업자본의 발달’ 처럼 개화기를 다룬 수 많은 책과 논문들은 물론 우리가 읽었던 장하준의 [사다리 걷어차기]나 유시민의 [국가란 무엇인가] 같은 대중서적도 쉽게 눈에 띔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그런 그도 이 소설을 쓰면서 두 번이나 집필을 중단했다고 한다. 은행의 역사에 대해 빠삭하게 공부를 하고 나면 곧 작품을 완성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글을 써나가다 보니 이 땅의 주식회사가 생겨난 배경이  필요해졌고, 주식회사 역사를 섭렵하고 나자 다시 조선 후의 경제상황이 궁금해졌기 때문이다. 덕분에 이전까지는 흥선대원군과 명성황후, 고종 등 정치적 인물들만으로 가득했던 구한말의 이야기는 작가 김탁환의 노력으로 인해 드디어 경제적인 부분의 상상력까지 갖추게 된 것이다.



나는 오랜 버릇대로 소설을 읽기 시작하면서 등장인물들의 개요와 인상착의를 메모하기 시작했다. 등장인물이 많이 나오는 장편소설을 읽을 때는 이렇게 독자 스스로 인물들의 개요를 정리하면서 읽어야 훨씬 입체적으로 이야기의 흐름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장훈, 서상진, 홍도깨비를 시작으로 해서 어린 철호와 진태, 인향 등은 내 메모의 양이 늘어감에 따라 나이를 먹고 도중에 권혁필 같은 악인도 만나게 된다.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이 훌륭한 이유는 김범우나 염상진보다 염상구를 잘 그렸기 때문입니다.”



김탁환은 [태백산맥]의 염상구를 예로 들면서 ‘악인 캐릭터 창출의 매력’에 대한 소설가적 쾌감을 만끽했음을 고백했다. 이번 소설 [뱅크]에는 절대 악인 권혁필이 등장한다. 15살에 인천 부두에 흘러 들어 온 권혁필은 타고난 지혜와 집념으로 내거간을 거쳐 인천 상단을 접수함은 물론 나중에는 대한제국 상권을 좌지우지할 위치에까지 다다른다. 물론 그렇게 되기까지는 수많은 협잡과 배신, 살인, 음모 등이 배경도움에 있었음은 물론이다. 권혁필의 야심 덕분에 천민의 아들로 태어나 멋진 복수극을 꿈꾸던 박진태는 배신자의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고, 기생으로 시작해 천하의 절창으로까지 성공한 장철호의 여동생 장윤주도 결국 아편중독에 이어 비극적 죽음을 맞게 된다.


1권을 하룻밤 새 다 읽은 나는 다음날 건대점 반디앤루니스까지 달려가 바로 2,3권을 샀다. 이번 소설은 각 권마다 꽤 두꺼운 분량이었지만 손에 잡기만 하면 다음 내용이 궁금해 나도 모르게 술술 읽히는 흡입력을 자랑했던 것이다. 나는 책이 너무 빨리 읽히는 게 아쉬워 중요한 장면마다 줄을 치기도 하고 페이지를 접어놓기도 하다가 결국은 한 챕터를 다 읽고 나면 즉시 챕터 시작 페이지로 돌아와 간단한 내용을 메모하기로 했다. 그러자 그 동안 별 생각 없이 읽던 소제목들의 의미가 한결 더 분명하게 머릿속으로 들어오는 희한한 경험을 덤으로 얻을 수 있었다.



[뱅크]는 100년 전을 불꽃처럼 뜨겁게 살다 간 젊은이들의 이야기다. 그러나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2014년을 사는 우리들의 모습과 본질적으로 똑같다. 누구나 성공하고 싶어하고 간절한 사랑을 꿈꾼다. 복수를 인생의 목표로 삼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이 세상을 이롭게 하는 선한 의지로 가득 찬 사람도 있다. 다만 우리의 인생은 이 소설 속의 인물들처럼 그렇게 극적이지도 못하고 구조적으로 완벽하지도 못할 뿐이다. 그래서 흡입력 있는 소설 [뱅크]를 읽는 것은 재미있는 이야기를 따라가는 것 외에도 우리의 인생이 경험하지 못한 다른 세상을 살아본다는 차원에서 ‘대리만족’의 기능까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곧 TV드라마로 방영될 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든 드라마나 영화가 그렇듯 원작 특유의 분위기와 촘촘한 플롯을 드라마가 따라잡기는 어렵다. 정말로 재미를 느끼려면 소설로 읽어야 한다. 그것은 비범하고 성실한 작가가 튼실한 자료와 상상력으로 축조해 놓은 세계로 함께 들어가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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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을 넘게 서가 앞에서 서성이던 앳띤 고교생은 결국 ‘엠마누엘부인 시리즈 특집’ 이란 기사가 실린 [월간 스크린]을 내밀며 ‘누나, 이것 좀 싸주세요’ 라고 은밀하게 말했다.
 
막 사춘기에 들어섰던 나는 소문만 무성하던 그 영화 '엠마누엘 부인'의 스틸 컷 몇 장이 실린 잡지 표지에 이미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던 것이다. 서점 주인 누나는 알았다는 듯 씽끗 웃으며 코팅 포장지와 스카치테이프로 정성껏 책을 싸주었다. 그게 재희 누나와의 두 번째 만남이었던 것 같다.
 

1982년 겨울, 그때 나는 고등학교 일학년이었다. 당시 내가 살던 시커먼 동네 구파발엔 서점이 딱 한 군데 있었는데 그게 바로 전철역 앞의 [진양서점]이었다. 기자촌 입구 쪽에 있는 헌책방 하나를 제외하면 도대체 책을 살 수 있는 곳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여기밖에 없었던 것이다.
 
누구나 마찬가지였겠지만 언제나 용돈이 풍족하지 못했던 나는 그 후로도 가끔 서점에 들러 한 시간이 넘도록 이 책 저 책을 집적거리다가 그냥 집으로 돌아가곤 했다. 서너 번을 들러 야 겨우 소설책 한 권을 사는 게 고작이었는데, 어느 날 주인 누나가 한숨을 쉬며 차 한 잔을 타더니 난로가에 앉으라고 했다. 이젠 올 때마다 책을 안 사도 괜찮으니 언제든지 놀러 오라는 얘기였다.
 

누나의 이름은 재희였다. 서재희. 서른이 넘은 노처녀였으며 신춘문예 6수생. 그닥 예쁘지 않은 얼굴이었지만 길고 풍성한 머리카락을 가진 선량하고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었다. 그날부터 나는 참새가 방앗간 들르듯 매일 서점에 가서 놀았다. 책 얘기를 많이 했고 광주사태, 김대중, 계훈제, 전두환, 장영자 사건 등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했다.
 
 

“언니, 용이 아제가 죽었어. 흑흑…”
 
당시에 박경리의 <토지>를 열심히 읽던 동네 누나가 책방 문을 열고 들어오며 애석해 하던 얼굴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진양서점엔 나 말고도 단골손님이 많았다. 당연히 우리들은 쉽게 친구가 되었고 저녁이면 사랑방처럼 난로가에 둘러앉아 이런 저런 책 얘길 나누었다.
 
 
이외수의 <들개>, <훈장>, <장수하늘소>, 한수산의 <부초>, <해빙기의 아침>, 윤흥길의 <장마>,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 <내 마음의 풍차>, 김성동의 <만다라>, <기차길옆 오막살이>, 김홍신의 <난장판>, <인간시장>, 함석헌의 <씨알의 노래>, 황석영의 <객지>, <장길산>, <죽음을 넘어, 시대의 아픔을 넘어>, 김주영의 <객주>, <아들의 겨울>,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 김지하의 <오적>, 최인훈의 <광장>, <회색인>, 이병주의 <지리산>, <행복어 사전>…
 
춘천 거지로 유명했던 이외수, 여자보다 더 여성적인 문체를 만들어내던 한수산, 술과 여자가 없으면 글을 쓰지 못한다던 이병주, 읽다 보면 정부 발표보다 훨씬 더 많은 광주 희생자의 숫자가 까발려짐으로써 당국의 미움을 샀던 황석영, 김지하와 박경리의 거룩한 관계 등 우리는 서로 앞다투어 읽은 책들과 그 주변에 얽힌 뒷얘기들을 나누었고 또 읽고 싶은 책들에 대해 듣고 말하고 감탄했다. 
 
당시에 한 문학월간지에 조정래의 <태백산맥>이 막 연재를 시작했었는데 경상도 억양이 심한 재희 누나는 이 소설에서 쏟아지듯 펼쳐지는 전라도 사투리들을 그렇게 재밌어 했다.

염상진의 아내 죽산댁이 주재소로 끌려가 빨치산인 남편에게서 연락이 오면 신고하란 말을 듣고 ‘고로코럼은 못하지라!’’ 라고 하는 대사를 억지로 흉내 내는 걸 보고 우리들은 박수를 치며 웃었다.
 
(난 염상구의 쫀득쫀득한 전라도 사투리들 - ‘서울말 고것이 워디 붕알 단 남자덜이 헐 말입디여? 밑구녕 째진 것덜이나 헐 말이제. 밥 먹었니이? 잘 잤니이? 고 간사시럽고 방정맞고 촐싹거리는 말이 워디가 좋다고 배우것습디여?’ - 이 단연 좋았다)
 
 
아직 이명박이 현대건설 사장이었고 정광태가 <독도는 우리땅>이란 노래를 부를 때였다. 어둡고 돈은 없었지만 또한 좋은 시절이었다. 난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매일 술을 마시고 매일 담배를 피웠으며 연애를 했고 또 군대도 갔다. 이제는 그때 나를 가르치던 선생님들 보다 나이가 많아졌다. 그리고 책은 거의 인터넷으로 산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과 대학 초반을 진양서점과 함께 보냈다. 그곳에 모였던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 재희 누나는 잘 있을까.
 
빠알갛게 달아오르던 연탄난로에 모여있던 사람들. 어제는 무슨 책을 읽었으며 이번엔 또 무슨 책을 읽을까 얘기하던 사람들. 이젠 가물가물해져 추억의 책갈피도 되지 못한다. 그래도 가끔은 그립다. 토토가 어린 시절의 극장을 다시 찾아갔던 것처럼 나도 꼭 한 번 다시 가보고 싶은 곳. 진양서점. (2008.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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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겐 이상한 버릇이 있습니다. 뭔가 일을 시작하면 좀처럼 다른 걸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제가 하루 종일 일만 하는 워커홀릭이냐 하면, 그건 또 아닙니다. 사실 우리가 일을 하는 시간은 아주 짧습니다. 아이디어를 내는 직업일수록 더 그렇지요. 그 나머지 시간은 대부분 “어떡하지”, ”일을 해야 하는데”,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데…”하고 근심 걱정으로 보내는 시간이 전부입니다. 이건 일의 성과와는 아무 상관도 없습니다. 그냥 제가 새가슴이라 그런 겁니다.

일을 회피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술을 마시는 겁니다. 일단 마시기 시작하면 취해서 몸도 마음도 늘어지기 때문에 뭐든 포기가 빠르죠.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는 데’는 술만한 게 없습니다. 그런데 일이 싫다고 늘 술만 마실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러다보면 일도 지지부진하면서 다른 것도 전혀 즐기지 못하는 오갈 데 없이 한심한 상태가 도래합니다.

이래저래 전 몇 달 간 전혀 책을 읽지 못했습니다. 영화도 죄다 놓쳐서 [건축학개론], [어벤저스], [은교] 등 못 본 영화가 지천으로 널렸습니다. 더구나 요즘은 SNS나 블로그에도 글을 잘 올리지 못합니다. 일도 성에 차게 못하면서 다른 걸 한다는 게 맘에 내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제가 컴퓨터 프로그래머인데 프로그램은 별로로 짜면서 취미로 멋진 탁자를 만들었다고 칩시다. 저는 이렇게 반문할 것입니다.

 “그럼 넌 목공을 하지 왜 프로그래머를 하고 있는 거야?”

 

마음에 공황 상태를 메우기 위해서는 ‘잘 읽히는 책’이 필요했습니다. 물론 [지리산]은 쉬운 책은 아닙니다. 그러나 이 책은 이병주라는 한 시대의 천재가 목숨을 걸고 쓴 대하장편소설입니다. 요즘처럼 인문학과 실용서만 주로 읽던 제겐 [지리산]처럼 유장하고 압도적인 스토리텔링이 있는 소설이 필요했습니다. 더구나 이 책은 전에 제가 어렸을 때 줄까지 쳐가며 읽었던 소설인데, 지금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습니다.

새로운 문물이 쏟아지던 격동의 세월을 거스르며 살다 죽어간 한반도의 젊은이들의 이야기인 이 소설은 TV드라마로도 각색되어 방영된 적도 있지요. 생각해보면 [태백산맥]이나 [토지]에 비해 너무 일찍 완간된 불행한 소설이기도 합니다. [관부연락선]이랑 이어 읽은 기억이 나서 그것부터 읽을까 하다가 일단 책장에서 눈에 띄길래 이 책부터 집어들었습니다. 앞으로 매일 조금씩이라도 읽고 티블로그에 독서일기를 연재할 생각입니다. 이미 끝까지 읽은 독자들이 수두룩한데, 이런 식의 독서일기가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기도 하지만, 쥐가 자라나는 이빨을 시멘트 바닥에 갉아내는 기분으로 그냥 미련하게 한 번 진행해 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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