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방구에서 팔던 장난감 같은 영화 - [퍼시픽 림] 



영화 [퍼시픽 림]에 에 나오는 ’카이주’는 괴수의 일본 발음이라죠. 외계인은 늘 하늘에서 날아오는 줄 알았는데, 어느날 태평양에서 괴물들이 출현해 도시를 파괴하고 다니는 겁니다. 외계인들이 수억 년 전 공룡시대에 지구에 왔다가 ‘아, 아직 때가 아니구나’하고 그때부터 진득하니 기다렸다가 이제야 나타났다는 거죠. 


카이주라는 이름부터 그 괴물들을 쳐부수는 로봇 ‘예거’를 두 명이 조종한다는 설정, 그리고 괴물들의 입장에서 보면 장난감처럼 무력하기만 한 탱크와 비행기들… 길예르모 델 토로 감독, 오타쿠 맞습니다. 오덕입니다. 마징가Z나 로보트태권V같은 캐릭터들이 우리나라 만화라고 생각하며 자랐던 저희 세대랑 크게 다르지 않은 사람 같습니다. (영민했던 저는 철이가 마징가Z의 조종관으로 들어가 기어를 조종하면서 “화이야, 온!”이라 외치는 걸 보고 일본 만화라는 걸 진작에 눈치챘지만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만화의 주인공들은 왜 기어나 버튼을 조작하면서 그렇게 소리를 지르는 걸까요? 기합 넣는 건가? 아직도 궁금해요) 



이 영화의 ‘좋은 로봇’ 예거는 마징가나 그레이트 마징가, 태권V처럼 버튼이나 기어 대신 두 명이 직접 몸을 움직여 조정하는 일종의 ‘모션 트레이스’ 방식입니다. 브라이언 브라운이 [F/X]에서 썼던 그 특수장비 옷처럼 말입니다. 아, 얼마 전에 휴 잭맨이 나왔던 [리얼 스틸]도 대충 이런 식이었군요. 


이 작품은 캐릭터도 좀 뻔하고 인물들간의 갈등구조나 해소도 고만고만합니다. 요즘 유행하는 [진격의 거인]처럼 진지하게 벽을 쌓아 괴물을 막는 어이없는 설정도 나옵니다. 대신 로봇들의 질감이나 규모는 진짜 현실감 넘칩니다. 시가지에서 괴물과 싸우느라 거침없이 부서져 나가는 건물과 자동차들은 그야말로 스펙터클합니다. 문방구에서 파는 그리운 장난감 같은 이 작품을 보고 ‘대도시파괴성애자를 위한 영화’라는 글을 누군가 인터넷에 올렸다는 얘길 듣고 한참 웃었습니다. 


여주인공 마코 모리 역의 기쿠치 린코는 좀 안습이더군요. 그렇게 이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고 눈만 큰 여자애. 브래트 피트 주연의 [바벨]에 나올 때는 그렇게 인상 깊었었는데. 린코 대신 배두나가 맡았어야 했다는 어느 페친의 말씀에 많이 동감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보다 이 캐릭터에 대한 감독의 무신경함이 더 큰 패착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앞섭니다. 



공감 가는 점도 많은 영화입니다. 우선 이런 블록버스터마다 등장하는 ‘팍스 아메리카나’가 없어서 좋습니다. 물론 대사는 모두 영어로 나옵니다만 이 영화에서 미국은 그저 ‘태평양연안(퍼시픽 림)’의 동맹군일 뿐이죠. 그리고 두 명의 조종사가 ‘드리프트’를 해야 한다는 설정도 재미 있었습니다. 드리프트는 서로의 경험과 생각, 심리상태 등을 모두 공유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이라도 이런 걸 하게 되면 서로의 성적 취향을 속속들이 알게 되고 결국 “이런 변태새끼!” 소릴 할 만도 한데, 어린 관객을 위해 그런 건 다 그냥 넘어가는군요.  


영화 종반 즈음, 괴수들의 공격으로 최신 예거들이 동작을 멈췄을 때 제일 처음 만들어졌던 구닥다리 예거가 나서서 세계를 구하는 장면이 나오죠. 디지털 기반의 기계들이 어떤 에러로 인해 동작을 멈추었을 때 바보 같은 아날로그가 나선다는 이 설정은 기성세대들에게 보내는 감독의 따뜻한 위로이자 찬가일 겁니다. 찡했습니다. 저도 나이가 들었다는 증거죠. 제기랄. 


전 이 영화를 공짜표로 보았습니다만, 뭐 돈을 내고 봤다고 하더라도 재미있게 즐기며 봤을 것 같습니다. 거창한 기대나 새로운 선언 없이 ‘아는 사람들끼리’ 모여 소소하게 떠들면서 볼 수 있는 그런 정감 있는 영화죠. 제가 볼 때는 옆에 초등학생, 앞에 중학생들이 앉아서 함께 떠들면서 봤는데 걔들이 중간에 화장실도 다녀오고 서로 내용도 물어보고 하는 게 오히려 정겹고 좋았습니다. 



영화 보면서 웃었던 거 하나. 이런 영화에서 대장들은 아무리 시끄러운 장소에서도 입만 열면 다른 사람들이 일순 조용해지고 연설하는 목소리도 쩌렁쩌렁 울리게 마련이죠. 이 영화에 나오는 저항군 사령관 스탁커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설하는 목소리는 기름지고 호흡도 여유롭습니다. 배경음악도 우퍼가 진동할 정도로 장엄하게 깔리죠. 다른 영화에서 수사결과를 발표하는 경찰청장이나 전쟁을 선포하는 대통령들도 연설 참 잘 합니다. 그런데 실제 세계에서는 왜 다들 그렇게 목소리들이 쫌팽이 같을까요? 억양이나 발음도 후지고. 


전 박원순 시장을 좋아하는데, 서울시장 선거전 할 때 TV토론 본면서 답답해 죽는 줄 알았습니다. 상대 후보 나경원의 똑부러지고 앙칼진 말솜씨에 비하면 그 분은 얼마나 어눌하고 느려터지던지. 박 시장님, 어렸을 때 웅변학원 같은 데 좀 다니시지 그러셨어요…? 그래도 응원합니다. 존경하구요. 음. 뭐 결론이 좀 이상하네요. 하지만 고치지 않고 그냥 가겠습니다. 이건 그냥 비 오는 날 아침에 일찍 일어난 김에 마구 쓰는 영화 수다니까요. 영화평이 아니고.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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