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부터 좀 우스웠던 것 중 하나는 미스코리아나 수퍼모델 선발대회 같은 미인대회를 할 때마다 출연자나 사회자가 결론처럼(또는 기획의도처럼) ‘결국 내면의 아름다움이 제일 중요하다'는 얘기를 반복하는데 하필이면 그게 수영복 심사일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아니,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면서 왜 영혼과 별 상관 없는 쭉쭉빵빵 몸매를 뽐내는 수영복 심사 때 그런 얘기를 나누는 것일까. 하긴 나도 아름다운 몸매가 좋긴 했다. 일단 뚱뚱하고 못생긴 외모에는 아름다운 영혼이 깃들기 힘들 것 같았고 이쁜 여자와 못 생긴 여자 중 누가 더 착할 것 같냐고 물으면 왠지 이쁜 여자일 것만 같은 게 당연한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건 예쁘고 귀여운  강아지일수록 주인에게 더 사랑받는 이치나 들판에 핀 꽃 중에서도 예쁜 꽃들이 아이들에게 먼저 꺽이는 것만큼이나 분명한 진리처럼 보였다. 보기 드문 추남이었다던 소크라테스도 만약 헐리우드 배우인 브래드 피트나 데인젤 워싱턴처럼 매력적인 외모를 소유하고 있었다면 과연 그렇게 쉽게 독배를 마시고 죽어을까, 하는 의문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그러나 세상은 조금만 진지한 자리가 되어도 무조건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하다’는 교조주의를 내게 강요했고 나도 자발적으로 그들의 거짓 정서에 굴복하는 일반인으로서의 생활을 영위해야만 했다.

오늘 본 백감독의 영화 [뷰티 인사이드]는 제목 그대로 '내면의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내면의 아름다움’이라는 말 자체가 품고 있는 아이러니가 얼마나 큰가. 이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심한 부담감을 안고 들어가는 불리한 프로젝트였다. 사실은 백종열 감독이 장편상업영화 데뷔작으로 이 영화를 선택했다고 발표했을 때부터 약간의 의아함을 느꼈었다. 지난 20여 년간 광고계나 뮤직비디오 업게에서 최고의 감독으로 별 실패 없는 필모그래피를 쌓아온 백종열 감독이 왜 하필 인텔인사이드와 도시바가 만들어서 이미 '깐느광고영화제 그랑프리'라는 단물을 다 빼먹은 유명 콘텐츠에 도전했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더구나 6부작으로 만들어진 기존의 광고영화는 ‘매일 밤 자고 일어나면 모습이 바뀐다’라는 빅 아이디어가 이미 알려질대로 다 알려지고 한글자막까지 나돌던 유투브의 인기 콘텐츠였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뭔가 새로운 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예전 왕가위의 영화를 한 콤마 한 콤마 그대로 베껴 재기불능의 상태가 될때까지 욕을 먹었던 김의석 감독이나 히치콕의 [싸이코]를 컷바이컷으로 그대로 모사해 비웃음을 샀던  브라이언 드 팔머 꼴이 날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는 그런 여러가지 구차한 걱정을 전혀 다른 차원으로 극복해 버린 특이한 경우라고 해야할 것이다.  원작처럼 주인공 우진은 아침에 눈을 뜨면 나이, 성별, 인종에 이르기까지 먀번 전혀 다른 사람으로 깨어난다. 어떤 사람이 될지 ‘미리보기’ 따위는 존재하자 않는다. 그것은 ‘절대고독’을 전제로 하는 잔인한 운명이다.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라 하는 것은 '관계를 이루는 존재’라는 점 때문인데 열여덟 살 이후로 우진에게 지속적인 관계란 자신의 비밀을 알고 있는 어머니, 그리고 절친인 상백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 우진의 삶에 어느날 이수라는 여자가 들어온다.

영화는 마술적이고 동화적인 기본 설정답게 생활의 냄새는 최대한 지우고 두 사람의 로맨틱한  상황에만 집중한다. 그래서 전체적인 분위기는 일본 영화를 보는 것처럼 따뜻하고 착한  아날로그적 분위기로 일관한다. 이는 무려 스물한 명에 달하는 우진 역의 남녀 배우들이 그들의 개성을 살리기보다는 매일밤 새로운 얼굴을 맞아야 하는 우진이라는 캐릭터에 충실하게 복무한 까닭이기도 하고 가구점이나 가구 디자이너라는 나무 질감이 많이 등장하는 인간적인 직업설정이나 공간, 소품배치 등에도 기인하다. 그러나 이 영화가 훗날 따뜻한 기억으로 남고 뭔가 작고 흐뭇한 에피소드들이 자꾸만 생각난다면 그 공은 아마도 여주인공 이수 역을 맡은 한효주 덕분일 거라고 생각된다. 아름답지만 독하거나 격정적이지 않고, 스물아홉 살의 젊은 여자지만 마치 누나나 여동생처럼 나의 이야기를 찬찬히 잘 들어줄 것만 같은 여자. 이수는 그런 넉넘함을 표정과 제스추어에 탑재하고 있는 흔치 않는 캐릭터였다. 더구나 우진의 비밀을 알고 한참 사귀다가 너무 힘들어 헤어지려는 마음을 먹었을 떄(이수의 언니가 우진이 만들어준 의자에 앉아 “이건 너무 니 싸이즈다”라고 말하는 것을 듣고 눈물을 흘리는 이수를 안아줄 때)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연기력을 과시하기도 했다. 

물론 우진의 이야기를 아버지 세대로까지 확장시킨 후반부나 ‘내면의 아름다움’만을 이야기하기엔 너무나 예쁘고 잘 생긴 주인공들 때문에 정신과 의사까지 동원해 틈만 나면 설교하듯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반복 강조하는 후반부는 좀 성기고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러나 이건 '짜고치는 고스톱’처럼 설정에서부터 관객과 감독 배우 모두 서로 이해하고 들어가는 로맨틱 코미디 아닌가. 더구나 스포일러라고 할 것도 없이 기본 아이디어가 모두 공개된 콘텐츠이기도 한데 뭐 더 새로운 것을 그렇게 바라나. 

이미 나이가 든 우리 커플은 초대형 팝콘 박스와 음료수컵을 든 젊은 커플들에 밀려 맨 오른쪽 자리로 피해가야만 했다(영화 보는 도중 옆에서 우적우적 팝콘 먹는 소리가 정말 싫기도 하다). 이 영화를 보러 온 커플 중에 아직 손을 못 잡은 커플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오늘 이 영화를 보고 마음이 풀어져서 서로 손을 잡거나 키스를 한다면 어떨까. 아니면 맥주를 한 잔 걸치고 처음으로 같이 잔다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이 영화는 그런 종류의 공감을 가진 작품이다. '내면의 아름다움’이 중요라다는 것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일단 눈에 보이는 아름다움이 더 급하다고 생각하는 대다수의 관객들이 두 시간 동안 소소한 에피소드에 웃음짓거나 안타까워 하다가 결국 기분 좋은 추억을 안고 집으로 돌아가는 영화. 그래서 친구들에게 추천하게 되고 비록 평론가들은 낮은 평점을 부여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극장에 찾아가기 위해 시간을 비우는 영화. 원래 로맨틱 코미디라는 것은 클라크 케이블이 나왔던 프랭크 카프라 감독의 [어젯밤에 생긴일] 이후부터 지금까지 늘 그런 이유로 사랑받지 않았던가.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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