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남은 휴가를 긁어 모아 짧은 유럽 여행을(그것도 배낭여행이 아니라 폼 안 나게 여행사 패키지 상품으로) 갔다 온 저는 귀국하자마자 호쾌하게(!) 회사를 그만두었습니다. 그런데 정말 대책 없이 그만둔 회사였기 때문에 그 즉시부터 전혀 할 일이 없었고, 시간은 누에똥처럼 펑펑 남아돌기만 했습니다. 이른바 술과 장미의 나날이었죠. 그때 제가 회사를 그만 두고 제일 먼저 한 일은 [고우영 삼국지] 박스세트와 MBC 드라마 [네멋대로 해라] DVD 세트 구입이었습니다.


지금은 홍자매나 김도우, 김지우([마왕]과 [부활]을 쓴) 등 마니아층을 형성하는 작가들이 꽤 많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거짓말]의 노희경과 [넷멋]을 쓴 인정옥 등이 그나마 가장 튀는 작가들이었습니다. 인정옥은 그 동안 잠잠하다가 얼마 전 딴지일보 김어준 총수의 애인으로 밝혀져 다시 화제를 불러모은 적이 있죠.

아무튼 고다르의 데뷔작 제목을 그대로 따온 이 드라마는 처음엔 그리 기대가 가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양복을 입고 다니는 소매치기 얘기라니 식상하잖아, 였던 거였죠.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이상한 관심과 애정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는 드라마였습니다. 일단 인정옥의 대사가 신선했습니다. TV 여주인공들이 좀처럼 쓰지 않던 “새끼”를 무심하게 내뱉게 했고, 공효진의 말버릇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돈 버느라 그랬지…’도 “내가 돈 버니라 그랬지” 처럼 입에 붙는 말 그대로를 대사로 쓰는 게 신기하고도 정감 있었습니다. 심지어 무슨 소린지 잘 들리지 않던 양동근의 웅얼거리는 말투도 단점이 아니라 매력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이 드라마는 참 가슴이 아픈 드라마이기도 했습니다. 양동근이 자신을 그렇게 좋아하던 공효진을 버리고 어쩔 수 없이 새로 생긴 애인 이나영에게로 가는 얘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가끔은 ‘도파민의 과다분비 현상’으로 오해 받기도 하는 ‘사랑’이라는 이상한 감정의 불가해성이 진정 아프고도 실감나게 드러난 작품이었던 거죠.

그리고 높은 완성도도 이 드라마를 더욱 사랑하고 싶은 작품으로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했습니다. 대개 시청률로 몰아치는 인기 작가들은 모든 시퀀스를 주인공들과 주요 사건에만 집중시키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네멋]은 주변 인물 한 명 한 명이 전부 다 살아있었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별스런 대사 없이도 사보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신구의 연기를 비롯, “그 대가리나 까딱까딱 하는 게 무슨 음악이냐?”고 이나영에게 야멸차게 굴다가도 아내 이해숙만 나타나면 금방 활짝 웃으며 “응, 당신 왔어?”라고 말하며 바보가 되는 조경환. 그리고 “이 아저씨 은근히 느끼하다?”라는 공효진의 대사에 “야, 은근히는 무슨 은근히냐. 나 보는 사람마다 다 느끼하다고 하던데.”라고 맞받아치는 이세창. 마지막 장면에서 야쿠르트 아줌마로 변해 공효진에게 봉변을 당하고 “아유, 그 아가씨 참 싸가지 없네.”라고 중얼거리는 윤여정까지 모든 등장인물들의 캐릭터가 균등하게 그 존재감을 부여 받고 있었습니다.

 

저는 방송을 지켜보다가 서서히 [네멋]의 팬이 되었고 DVD를 사서 반복 시청하면서부터는 ‘네멋 폐인’이 되었습니다. 여기엔 당시 무명에 가까웠던 이동건이 이나영을 좋아하는 신문기자로 나왔었고 나중에 [커피 프린스]에 나왔던 김재욱이 양동근의 꼬붕으로 나오기도 합니다. 생각해보니 이 드라마도 참 오래되었네요. 엊그제 같은데 벌쎄 10년이 지났어요. 근데 지금도 서울 하늘 아래 어디선가 복수와 미래, 경이가 피시피식 웃으며 살고 있을 것만 같으니, 전 이 드라마를 참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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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익명 2013.10.15 11:39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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