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작가가 꿈이었다. 어머니는 의사가 되기를 원했지만 성적이 좋지 않았다. 간호대학에 들어간 후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해 국문과 친구들의 강의를 대신 듣기도 하고, 과제를 대신 써주기도 했다. 그러다 최초로 나를 눈여겨봐준 선생님을 만났다. 원래는 전남대 교수님이었는데 5.18 때 해직을 당하는 바람에 우리 학교에 출강하게 됐고, 두 학기 동안 '교양 국어'를 가르치셨다. 아마 중간고사 때였을 것이다. 우리는 시험지 대신 백지를 받았고, 멍한 심정으로 교수님이 칠판에 '얼굴'이라고 쓰는 걸 쳐다봤다. 그게 시험문제였다. 글을 쓰든지, 그림을 그리든지, 너희들 맘대로 해보라. 50분 만에 백지 앞뒷면을 빽백하게 채웠다. 일주일 후, 교수님이 부르더니 대뜸 '습작노트 가져와봐' 하셨다. 그런 게 있는지 여부도 묻지 않는 걸 보면, 있다고 짐작하신 것 같다. 짐작대로, 그간 친구들을 대신해 쓴 과제물이며, 독후감, 산문 같은 걸 써둔 노트가 있어 가져다드렸다. 부끄럽긴 했지만, 내 글을 평가받고 싶다는 마음이 더 컸을 것이다. 일주일 후에 다시 만났을 때, 교수님이 다짜고짜 물었다. 국문과롤 전과할 마음이 없느냐. 어머니가 반대한다고 말씀드리다가 하마터면 울 뻔했다. 생긴 건 이래도 눈물이 꽤 많은 편이라...
그때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기나긴 세월 동안 나 자신을 믿는 근거가 되었다. 문장을 잘 쓰는 학생들은 수없이 봤지만 이야기를 할 줄 아는 아이는 처음 봤다고 했다. 포기하지 말고 아주 잠시만 꿈을 접어두라고 하셨다. 나중에 작가가 되면 나를 한 번 찾아오라고도...내가 작가가 되었을 땐 이미 작고하셨다. 

- Axt 2007년 8월호 인터뷰 중에서 


* 오늘 정유정의 인터뷰 기사를 읽다가 이 대목에서 눈물이 찔끔했다. 자신을 알아봐주는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벅찬 일인가.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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