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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욱은 후배인 혜원을 좋아한다. 그런데 혜원은 동욱의 마음을 알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한다. 같은 업종에 있는 사람과 사귀는 건 곤란하다는 것이다. 오늘도 동욱이 조르고 졸라서 겨우 만든 둘만의 술자리이지만 얘기는 겉돌기만 한다. 테이블 앞에 앉은 두 사람은 새로 옮긴 혜원의 직장 얘기를 하다가 혜원이 육 개월 전부터 동욱의 바로 옆자리에 앉아 일하는 임창수 대리와 사귀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옆자리 직장 동료와 몰래 사귀고 있다는 사실에 격분한 동욱은 일방적으로 혜원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동욱의 행동을 바라보고 있던이 술집의 주인이자 선배 영식은 혼자 남은 동욱을 위로하고자 중국에서 가져 왔다는 술을 한 잔 따라 준다. 그런데 동욱이 이 술을 한 잔 마시고 고개를 든 순간 영식은 사라지고 눈앞에 사라졌던 혜원이 다시 앉아 있는 게 아닌가. 시점은 둘이 새로 옮긴 직장 얘기를 하던 불과 몇 분 전 상황이다. 동욱은 이미 알고 있지만 혜원은 자신이 임창수 대리와 사귄다고 고백한 사실을 모르고 있다. 다시 얘기를 이어가다가 임창수 대리와 그의 전 애인 은나가 사귄 기간 얘기를 하며 싸우는 두 사람. 이번엔 동욱이 나가고 술집 주인 영식이 중국술을 마시게 된다.그리고 또 타임슬립. 이게 어떻게 된 걸까. 비밀은 술이다. 이 술은 과거로 돌아가게 만드는 마법의 약이었던 것이다.

흔히 단편영화라고 하면 웬지 예술적이라 뭐가 뭔지 모르는 알쏭달쏭한 내용일 거라 생각하기 쉽다. 실제로 흥행과는 담을 쌓은 듯 어렵게만 만든 단편영화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일반론을 가볍게 뒤집는 흥미로운 작품이다. [시간을 달리는 소녀]라는 일본 애니메이션이 정말 좋았건 이유는 타입 슬립이라는 소재를 다루면서도 그 능력으로 지구를 구한다거나 복권을 산다거나 하는 거창한 게 아니라 동생이 훔쳐먹은 푸딩을 다시 차지한다거나 너무나 갑작스러운 첫사랑의 고백을 되돌린다는 사소함에 쓰이는 게 더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이었다. 이 영화도 그렇다. 타임 슬립을 일으키는 중국술은 놀라운 능력을 발휘하는 하이컨셉이지만 여기서는 각자의 입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도구 이상으로 쓰이지 않는다. 대신에 연애나 질투 같은 사소한(?) 감정들이 개연성 있는 플롯 속에서 대활약을 한다. 장소 한 번 바꾸지 않은 술집이라는 한정된 공간에서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물론 임창수 대리는 얼굴 한 번 나오는 일 없는데도 신기하게도 영화 내내 그 존재감이 느껴지는 건 감독의 뛰아난 각본 감각과 연출력 때문일 것이다. 



30분남짓 되는 이 단편은 나와 같은 건물에서 근무하는 백영욱 감독이 만든 영화인데 얼마 전 이 작품이 외국의 어떤 영화제에서 뒤늦게 상을 또 받게 되었다는 소식을 페이스북에 올림으로써 알게 되었다. 우리 회사의 김건익 실장님에게 영화 [한 잔] 얘기를 했더니 자신은 시사회 때 후배인 백영욱 감독은 물론 그의 가족 친구들과 함께 이 영화를 보았다고 자랑을 하셨다. 맨 마지막에 혜원이 중국술을 한 잔 마시고 처음의 설전으로 되돌아가는 장면은 아주 어릴 적 읽었던 <기적을 일으키는 사나이>라는 동화가 생각나서 더욱 반가웠다.

같은 건물에서 일하는 사람 중에 이런 멋진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있다는 것은 흐뭇한 일이다. 안 그래도 어렴풋이 술 약속을 해놓긴 했는데 11월이 가기 전에 백영욱 감독님하고 만나 이 영화 얘기 하면서 소주 '한 잔'을 해야겠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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