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병>

뒷담화의 향연 2017. 7. 6. 16:16


어제 부친상을 당한 후배 상모 신애 부부를 보러 서울성모병원 장례식장에 갔다가 오랜만에 뚜라미 선후배들을 단체로 만났다. 남천이는 머리카락이 점점 많아진다는 소릴 들었고 동호는 뒤늦게 애인이 생겨 프로포즈를 한다고 자랑을 하기도 했다. 상화는 자신이 다니는 주얼리 회사의 홍보 방안에 대해 나와 잠깐 얘기를 나누다가 아이가 아파 먼저 일어선다고 하며 다음을 기약했다. 

현경이가 부친상 공고를 뚜라미 페이지에 올렸는데 그걸 잘못 읽은 명지가 그 밤에 장지인 파주 성당으로 가서 전화를 하는 일이 발생했다. 나도 분당 서울대병원으로 가야 하는데 아무 생각 없이 일원동 삼성병원 영안실로 간 적이 있기 때문에 명지가 지금 느끼고 있을 황당함과 자괴감이 얼마나 클지 짐작할 수 있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머리카락이 예술가처럼 멋지게 센 권일이는 요즘 강경화 장관 덕분에 백발들이 득세하는 세상이 되었다는 농담을 날리며 웃었다. 나는 아침부터 컨디션이 너무 안 좋아 아홉 시쯤 집에 가려고 일어섰으나 복도에서 인엽이 형과 딱 마주치는 바람에 다시 돌아와 상 앞에 주저앉았다. 그래도 열 시까지는 있다 가는 게 문상객의 도리 아니겠느냐는 선배의 충고를 차마 저버릴 수 없어서였다.

현경이 말에 의하면 요즘 내가 사람들 사이에서 도마에 오르는 경우가 잦다고 한다. 예전과 달리 여름 휴가도 오지 않고 각종 모임에도 불참하기 때문일 것이다. 한 삼사 년 내리 여름 '대기리 휴가'를 가지 못했는데, 사실은 그때마다 절박한 사정이 있어서였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예전에 비해 내가 너무 여유없이 살아서이기도 하다.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이번 대기리 휴가는 주말 일박이일이라도 참석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인엽이 형도 도대체 요즘은 영화를 한 편 보거나 책 한 권 읽지 못하며 살고 있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형과 예전에 같이 본 영화와 책들 얘기를 신나게 나누다가 내가 술병이 나서 입원했던 얘기까지 하게 되었다.

부모님 집에 얹혀 살고 있던 나는 당시 직장을 잠깐 쉬고 있었는데, 남아도는 시간과 불안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매일밤 사람들을 만나 술을 퍼마시고 들어오다가 어느날 덜컥 병이 나고 말았던 것이다. 밤부터 슬슬 열이 나고 편도선이 붓기 시작하더니 결국 두통까지 찾아와서 밤새 한잠도 잘 수가 없었다. 병원은 아홉 시에 진료를 시작하는데 열이 펄펄 나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파 도저히 그때까지 참고 기다릴 수가 없었다. 여섯 시에 택시를 잡아타고 청구성심병원 응급실로 갔다. 

침대 위에 누워서 덜덜 떨고 있었는지 아니면 씩씩거리고 있었는지는 잘 기억이 잘 나지 않는데, 아무튼 한참 후에 당직 의사가 나를 진찰실로 안내해 이곳저곳을 만지고 쑤시고 들춰보고 하더니 거의 탈진 상태인 나에게 다가와 '다 알고 있다'는 표정과 목소리로 속삭였다.


닥터 : 지금 아무 생각이 없으시죠? 
성준 : 네... 

닥터 : 가족들한테는 감기몸살이 심한 걸로 해줄 테니까   
          며칠만 입원해서 쉬세요. 술병 났습니다. 
성준 : 아, 네...고맙습니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대로 6인병실로 올라가 환자복으로 갈아입고 입원을 했다. 가족들은 워낙 신경이 예민한 내가 심신이 미약해진 나머지 병이 난 것 같다고 진심으로 걱정을 해줘 나를 더욱 미안하게 만들었다. 첫날은 죽이 나왔는데 정말 한 숟가락도 먹지 못하고 그대로 물리고 말았다. 입이 깔깔하고 얼굴을 숙이면 쏟아질 것 같아서 먹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날은 그렇게 링거 수액을 맞고 주사와 약 처방을 받은 뒤 한숨 푹 자고 났더니 몸이 한결 개운해지는 것 같았다.

이튿날부터는 죽을 먹기 시작했다.입맛이 돌고 점점 기운을 차리게 되니 병원에 누워있는 일이 심심하게 느껴졌고 새삼 세상이 궁금해졌다. 의사에게 이제 괜찮아진 것 같다고 했더니 그래도 이틀 정도는 더 입원을 해야한다고 야단을 쳤다. 저녁을 먹고 침대에 누워 TV를 보는데 드라마에 출연하는 탤런트들이 술집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며 얘기를 하고 있었다(당시엔 TV에서도 담배 피우는 장면이 나오던 시절이었다). 와, 쟤네들은 좋겠다. 마음대로 담배도 피우고 술도 마실 수 있어서. 송충이가 솔잎을 먹듯이 나는 술을 마셔야 하나 보다 생각했다. 

내가 입원을 했다고 했더니 악당 같은 친구 남길 씨와 내성이 형이 문병을 오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이들한테는 친구가 술병이 걸려 입원을 한 사실 자체가 무척 재미있고 신나는 이벤트인 것 같았다. 남길 씨는 나를 살살 꼬셔 병원 근처 호프집으로 끌고 갔다. 처음엔 질색을 했지만 막상 생맥주 한 잔을 마시니 세상 살 것 같았다. 웃음이 나왔다. 아,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이렇게 나쁜 친구들이 있나. 근데 맥주집에서 환자복은 너무 튀는구나...


예전 추억에 젖어 있다가 문득 차리니 벌써 열한 시 반이었다. 이젠 정말 일어서야지 하고 있는데 뒤늦게 재섭이와 한우가 도착했다. 한우는 운영하는 닭갈비집 영업을 마치고 오느라 늦은 것이고 재섭이는 집에 가서 저녁까지 먹고 왔다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자리에 앉아 수다를 떨다가 결국 한 시가 다 되어 일어났다. 한 번 만나면 쉽게 헤어지지 못하는 게 뚜라미들의 오랜 습성이라는 사실을 잠깐 까먹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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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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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류남길 2017.07.06 16:32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이런. 이런. 이 글, 혜자씨가 보면 안되는데.^^

  2. 류남길 2017.07.06 23:17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작성란에 필명이라고 써있어서.
    파블로프 처럼. 써봤어요. 날선생.ㅠ
    악마같은 친구. 표현이 무척 마음에는 드는데.
    그래도. 음. 음.
    그시절이 그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