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언수의 [뜨거운 피]를 읽고 있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작가 김언수가 '구암'이라는 가상의 도시를 배경으로 희수라는 건달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는데, 우선 놀라운 것은 쫀득쫀득한 대화들이 장난 아니게 재미 있다는 것이다. 원래 건달들이 주먹보다는 입으로 먹고 산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얘기이긴 하지만 여기 나오는 희수나 만리장 호텔 사장 손영감 등 주요 등장인물들이 주고받는 대사는 반말과 존대를 자연스럽게 오가는 부산 사투리의 유연함에 힘입어 한 마디 한 마디가 퐁당퐁당 튀어다니는 느낌이다. 장르가 느와르 소설이기에 범죄 얘기가 영화차럼 흥미롭게 펼쳐지고 기기묘묘한 불법과 사기, 도박 시퀀스들이 흘러넘친다. 나이 마흔이 되어 집 한 칸 없이 호텔방을 전전하는 희수의 처지에선 짙은 우수도 흐른다. 

김언수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전쟁 때 내려온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판자촌에서 자랐는데, 거기 섞여 살던 건달, 창녀, 사기꾼, 살인자 들의 모습이 그대로 소설 속 구암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책 뒤에 붙어있는 '작가의 말' 중 일부를 읽어보자(난 소설을 읽기 전에 작가의 말부터 읽는 습성을 가지고 있다). 

비밀은 없고, 마음은 안타깝고, 피는 뜨겁다. 그래서 그 동네 술자리에선 싸움이 벌어지고 술판이 엎어지는 일이 흔했다. 죄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는 백수에, 건달에, 루저 주제에 서로에게 훈장질을 어찌나 해대는지, 사실 술자리가 엎어지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한 남자가 점잖게 충고를 한다. "니가 일을 그딴 식으로 처리하니 망조가 드는 거다. 다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니 내 말 들어라." 그러면 앞의 남자가 발끈한다. "너나 잘해라. 이 새끼야. 마누라한테 처맞고 다니는 주제에 어따 대고 훈장질이고." 그러면 어김없이 술판이 뒤집어지고 소주병이 날아다니고 주먹질이 이어진다. 하지만 하루만 지나면 다시 또 술을 마시며 "어제는 미안했다." "미안은 무슨. 우리가 뭐 남이가." 이 난리를 치는 동네 말이다.  

출퇴근 시간에만 조금씩 아껴서 읽고 있는데 마침 김동식의 [회색인간]을 비롯한 소설집 세 권도 도착해서 걱정이다. 뭐부터 읽어야 하나.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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