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서강대 김대건홀에서 열리는  '김아라 배우 아카데미'에 아내를 따라가 이명세 감독의 특강을 들었다. 이명세 감독은 오래 전부터 한 번 만나뵙고 싶었는데 드디어 오늘 강의를 통해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여러 예술 장르 중에서도 '영화는 정말 ET와 같은 존재다'라는 명제로 말문을 연 이명세 감독은 1895년 '열차의 도착'이라는 최초의 영화부터 시작해 자기가 가지고 있는 연기론에 대해 자유롭게 이야기를 펼쳤다. 특히 연극 워크샵에 참여하는 배우들에게 영화 연기와 연극 연기의 차이에 대해 얘기하는 형식으로 진행된 강의는 이명세 감독이 가지고 있는 영화에 대한 풍부한 식견과 함께 실제 제작 현장에서 일어났던 많은 일화들을 들을 수 있는 소중한 자리였다. 

흔히들 알랑 드롱이 잘 생기긴 했지만 그를 명배우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뭔가 열연을 하지 않고도 잘 생긴 얼굴 덕분에 날로 먹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야말로 가만히 세둬 두기만 해도 그림이 된다. 그런데 이것이야말로 굉장한 미덕이라고 이명세 감독은 말한다. 말하자면 이런 정도 분위기의 남자배우와 여자배우는 금새 사랑에 빠질 수 있지만 만약 송강호 같은 배우였다면 수 많은 작업과 과정이 있어야만 두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걸 관객들이 납득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영화라는 매체의 특징은 바로 이런 것에서 시작된다. 연극과 달리 배우의 얼굴과 아우라를 밀착해 잡아내는 카메라와 촬영 이후에 벌어지는 '편집의 마술'이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배우들에게 연기력이 필요 없다는 얘기는 아니다. 오히려 훨씬 더 정교하고 깊은 연기력이 필요하다. 다만 스타니스랍스키가 설파한 '메소드 연기'에만 너무 의존하다 보면 '오버'라는 페혜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영화는 연극과 달라 20 정도만 연기해도 200의 효과가 나올 수 있는 장르라고 한다. 그 예로 이 감독은 [겨울 나그네]라는 영화에서 이혜영이나 안성기보다 연기를 더 잘 한 배우는 다름 아닌 강석우였음을 상기시켰다. 그는 불필요한 오버를 하지 않음으로써 영화 속에서 말 그대로'민우'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명세 감독은 만나는 배우들마다 마이클 케인의 강연집인 [명배우의 연기수업]이라는 책을 추천한 얘기를 하며 그 책 안에 자신이 썼다는 추천사 얘기도 해줬다. 알프레드 히치콕 감독의 [오명(Notorious)] 때의 일화다. 키스씬을 찍을 때 어떻게 하면 두 남녀의 사랑을 더 강렬하게 보일 수 있을까 궁리하던 히치콕 감독은 캐리 그랜트와 잉그리드 버그만의 하체를 강제로 묶어놓고 촬영을 했다는 것이다.얼핏 생각하면 미친 짓처럼 느껴지지만 결과적으로 이 장면은 영화 사상 가장 애절한 키스신으로 남았다고 한다. 영화란 궁극적으로 '화면 속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이다'라는 이명세 감독의 주장을 정확하게 뒷받침해주는 에피소드가 아닐 수 없다.

강의가 끝나고 함께 밖으로 나왔다가 자전거를 타고 온 이명세 감독과 함께 커피숍에 들러 잠깐 커피를 마셨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는 아내와 감독님이 지난 얘기를 나누고 싶어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지내게 된 계기가 무슨 인터뷰 때문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아내가 예전에 기자 생활을 했었으니까) 사실은 당시 아내가 '이명세 감독 후원회'를 사칭했던 사람에게 돈을 뜯길 위기에 처했다가 그걸 해결하는 과정 때문이었다는 것이다.  정말 어이 없는 계기로 친분을 텄던 두 사람은 뒤늦게 그걸 기억해 내고는 깔깔깔 웃었다. 

그날 들은 강의 얘기를 했고 우리가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는 배우들 얘기도 좀 했다. 연극은 물론 박정범 감독의 영화 [산다], 문소리 감독의 [여배우는 오늘도] 등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배우 이승연 얘기를 시작으로 뒤늦게 결혼한 뒤 성북동으로 이사해 같은 동네에 살고 있는 박호산이나 김혜나 얘기도 하게 되었다. 한 동네 선후배라는 친분 덕분에 얼마 전 온에어 된 '화재안전' 공익광고에 박호산이 출연한 얘기를 했더니 그 광고를 당신이 만들었냐며 감독님이 반가워 하셨다. 이명세 감독은 무릎에 물이 차는 등 건강이 안 좋아서  자전거를 타기 시작했는데 덕분에 무릎도 낫고 담배도 끊었다고 했다. 요즘은 자전거로 돌아다니다가 예쁜 커피숍에서 커피 마시고 책 읽으며 다니는 게 새로운 낙이라고 했다. 새로운 작품은 거의 다 구상이 끝났는데 투자자가 잡히는대로 제작에 들어갈 것이라고 했다. 우리는 [M]이나 [형사:듀얼리스트] 등 우리가 좋아했던 감독님의 작품들을 거론하며 어서 새 작품이 극장에 걸렸으면 하는 마음을 전했다. 아내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감독님과 나는 뜨거운 아메리카노였고 나만 샷을 하나 추가해서 마셨는데 커피 맛이 좋았다. 다음에 또 만나자는 얘기를 하고 가볍게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자전거를 끌고 걸어가는 감독님의 뒷모습이 청년 같았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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