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프리랜스 카피라이터로 일할 때 모 그룹 회장님의 '추모 영상’을 만든 적이 있었다. 병원에 있는 회장님이 돌아가시면 장례식장에서 틀어놓고 하객을 맞을 중요한 영상이었다(대기업엔 그런 의전도 존재한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나는 회장님에 대한 자료들을 모아 공부를 하고 그분의 인품과 업적이 드러나도록 정성을 다해 추모 카피를 썼다. 같이 일하던 PD도 열심히 관련 자료를 모으고 편집을 해서 썩 괜찮은 결과물을 내놓을 수 있았다. "큰 산이 있었습니다..."로 시작하는 카피도 심금을 울린다는 평가를 받았다. 

문제는 오랜 기간 혼수상태에 있던 회장님께서 좀체 돌아가시질 않는 것이었다. 처음엔 다행이라고 얘기를 하긴 했지만 막상 대기 시간이 길어지고 딱히 할 일이 없던 홍보실 직원들이 틈만 나면 우리를 불러 추모영상을 수정하다 보니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거듭되는 수정에 지친 우리들은 급기야 저녁에 모여 소주를 마시며 '미안하지만 이제 그만 회장님이 돌아가 주셔야 수정 편집도  끝나고 대금 결제도 될 것 같다'며 울분을 토했다. 우리의 바람과 상관 없이 결국 회장님은 돌아가셨지만 맹세코 그때 말고는 '누가 죽었으면' 하고 바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정말이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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