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가 요즘 아프다. 중이염에 이어 감기까지 낫질 않아서 며칠째 고생이다. 어제도 낮 공연을 본 뒤 이른 저녁을 함께 먹고 들어와 자리에 누운 아내가 여덟 시도 안 돼 그냥 잠이 들었길래 쓰고 있던 안경을 벗겨주고 불을 껐다. 아내가 잠든 걸 확인하고 혼자 서재에서 책을 좀 읽다가 열 시쯤 나도 잠이 들었는데 새벽 두 시에 오줌이 마려워서 깼다. 아내는 이미 깨서 깜깜한 데 누워 휴대폰 게임을 하고 있었다. 화장실에 다녀와 다시 자리에 누운 내게 아내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보, 나랑 놀자." 

불을 켜고 TV를 켰다. <사랑의 불시착>이라는 손예진 현빈 주연의 드라마 재방송 1회가 끝나가고 있었다. 음, 이 정도면 술 마시며 욕하기 좋은 드라마인 것 같은데. 술 좀 사올게. 나는 갑자기 기운이 뻗쳐서 옷을 되는 대로 꿰입고 왕복 20분 거리인 세븐일레븐으로 달려갔다. 술 코너에 가서 조니워커와 화요를 쳐다보다가 일단 훈제닭다리와 즉석오뎅을 안주로 사서 카운터에 올려놓고 다시 술 코너의 조니워커 레드와 화요 사이에서 고민을 했다. 결국 두 병을 다 샀다. 술병을 카운터로 가져가자 "결정 하셨어요?"라고 물으며 편의점 사장님이 웃으셨다. 새벽에 별별 손님들이 다 오겠지, 라는 생각이 들어 "네."하고 짧게만 대답하고 얼른 나왔다. 

빠른 걸음으로 다시 집으로 올라오니 아내는 시금치와 방울토마토, 굴을 함께 볶은 안주를 해놓고 있었고  TV에서는 손예진이 북한 어딘가 산에서 낙하산줄에 매달려 무전기로 투덜대고 있었으며 밑에선 현빈이 권총을 들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런 드라마군. 나는 "조니워커와 화요 둘 다 마시고 싶어서 할 수 없이 두 병을 다 사왔어." 라는 한심한 변명을 지나가는 말처럼 흘리며 비닐봉투를 열었다. 아, 남북한을 소재로 한 로맨틱 코미디로구나, 하면서 휴대폰으로 작가 이름을 찾아보니 [별에서 온 그대]를 쓴 박지은이었다. 그러면 그렇지. 손예진의 연기를 싫어하는 우리는 괜히 드라마 욕을 마구 하면서 술을 마셨다. 아내는 반 잔씩 따르고 나는 한 잔씩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한꺼번에 마셔보니 조니워커 레드보다 화요가 더 나았다. 술을 마시고 싶어 마신 게 아니었다. 드라마 욕을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었다. 그냥 일요일 밤이 무서워서 그런 것이었다. 우린 금요일이나 토요일 밤엔 이토록 심란해하진 않는다. 아무래도 아내와 나는 조삼모사형 인간인 것 같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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