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fore/After : 어느 카피라이터의 좌충우돌 패션 변신 체험기

카피라이터는 참 괴로운 직업 중 하나입니다. 미국의 선배 카피라이터인 핼 스테빈스라는 분은 ‘카피는 초등학교 6학년도 이해할 수 있도록 써라’라고 하셨죠. 한마디로 쉽게 쓰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광고 작업을 할 때에도 클라이언트들은 디자인이나 편집 보다는 카피에 보다 쉽게 참견을 하기 마련입니다. 직업이 카피라이터인 저도 그런 경우를 많이 만나게 되죠. 제가 쓴 카피를 보고 “왜 이렇게 카피가 길어욧?” ‘헤드라인 좀 바꾸면 안 돼욧?” 같은 얘기를 하는 경우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심지어 ‘시작은 윤리 경영이었습니다’라는 홍보영화의 리드 카피를 보고 “우리 회사는 지금도 윤리 경영을 하고 있는데 이건 왜 과거형이냐?”고 따지는 분도 계셨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그 입 다물라, 다물라! 꼴도 보기 싫으니 돌아서 있으라!” 라고 저하처럼 외치고 싶은 마음을 애써 누르고 “아, 예. 그럴 줄 알고 B안, C안도 준비해 봤습니다. 헤헤.”라며 또 다른 카피가 씌어져 있는 A4지를 꺼내곤 하죠. 엉엉.

이른바 ‘전문가 존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사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전 세계 어디에서나 전문가를 재깍재각 알아 모시고 존중하는 경우는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다만 그 사람의 경험과 아우라가 차곡차곡 쌓여 드디어 상대방을 제압할 수 있는 경지에 오른 경우엔 전문가의 말 한 마디에도 무게가 실리게 마련입니다. 그런 얘기를 하는 너는 어떤 편이냐, 라고 물으신다면 저는 정치가 말고는 거의 모든 전문가를 존중하는 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실제로 저는 최근 일년 간 어느 전문가 한 사람을 만나 속칭 ‘팔자를 고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때는 작년 5월 말. 저는 새로운 여자 친구를 사귀게 되면서 그녀의 친동생이 유명한 스타일리스트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10년이 넘게 KBS 등 방송국에서 스타일리스트로 일해 온 그녀가 제게 한 첫 충고는 ‘티셔츠를 바지에 넣어 입으라’는 것이었습니다. 평소 청바지와 티셔츠를 즐겨 입는 저는 그때까지 평생 한 번도 셔츠를 바지 안에 넣어 입지 않았습니다. 키도 작고 배가 나온 체형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배를 가려야 한다는 생각에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단호했습니다. 그럴수록 더 당당하게 노출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전 속는 셈 치고 그녀의 말을 따라보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저보고 살이 빠져 보인다, 다리가 길어보인다, 라고 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지나가던 사람들이 저를 길에 세워놓고 한 얘긴 아니고,다 아는 사람들이 해준 얘기였지만 그래도 저는 신이 났습니다. 그녀의 충고는 계속되었습니다. 제가 입고 있는 모든 옷의 치수를 하나씩 줄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저는 팔은 가늘고 어깨도 좁은 체격이라 늘 박스형 티셔츠로 몸을 감싸고 다녀야 했습니다. 콤플렉스가 많은 몸매에 타이트한 옷을 입고 다닌다는 건 ‘사회적인 죄악’이라고 생각했던 거지요.

그런데도 그녀는 어느날 다짜고짜 저를 끌고 가로수길의 아무 옷집으로 데려가더니 이것저것 작은 티셔츠와 스티니진 등을 마구 구입한 뒤 제 카드를 빼앗아 강제로 결재를 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동안 다니던 미용실도 바꾸고 안경도 금테로 바꾸게 했습니다. 티셔츠에 청바지만 입는 저에게 그동안 입지 않던 셔츠와 가디건 입는 법, 옷에 맞춰 신발 연출하는 법까지 가르쳐 주었습니다. 어느새 저는 ‘참 일하기 귀찮아하는 것처럼 보이는 심드렁한 광고인’에서 ‘냉철한 두뇌와 세련된 감식안을 가진 프리랜스 카피라이터’로 변신을 하고 있었습니다...움홧홧.

옛날 미스코리아 대회나 슈퍼모델 선발대회에서 가장 많이 주고받던 얘기가 뭔지 기억하십니까? 바로 ‘내면의 아름다움’입니다. 전 왜 이쁜 여자들이 수영복만 입은 채 한결같이 그런 얘기를 종알거리는지 정말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건 정말 공감이란 단어를 국 끓여먹은 시추에이션이지요. 내면의 아름다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상대방이 알기까지는 기나긴 시간이 걸립니다. 반면에 첫인상은 단 3초 만에 결정이 됩니다. 어느 기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잘못 전달된 첫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무려 7,8개월의 시간이 걸린다고 하더군요.

저를 변신시켜준 YHMG의 윤혜미 대표는 특히 남성의 옷차림에 정통한 나머지 얼마 전 [남자의 멋∙품∙격]이란 책까지 출간했습니다. 그동안 그녀의 충고를 충실하게 따른 저는 겉모습이 변함에 따라 내면까지 변하게 된다는 걸 실감했습니다. 모든 일에 자신감이 생겼고 클라이언트를 만날 때도 이전보다 더 당당하게 어깨를 펼 수 있었습니다. 거기에 여친의 충고까지 곁들여져 면도를 하고 나서 아무렇게나 벅벅 문지르던 값싼 스킨로션 대신 추천해준 스킨과 에센스를 신중하게 바르기 시작했고 외출을 할 때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꼭 썬블럭을 발랐습니다. 전 햇빛이 쨍쨍 내려 쬐는 바닷가나 한여름의 등산로가 아니면 썬크림은 절대 바르지 않는 건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자외선은 해가 뜨나 날이 흐리나 늘 피부를 공격한다는 걸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정말 배우고 때때로 익히니 자다가도 떡이 생기더군요. 시키는 대로 했을 뿐인데 세련된 옷차림에 피부까지 좋아지다니 이게 웬일입니까.

전문가의 의견을 너무 따르다 보니 생각지도 못했던 부작용도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좋아진 제 모습을 보고 “아니, 저 자식 요즘 좀 살만한가 보네?”라든가 “너 아주 잘 나가시는 모양이네요.”라고 오해를 품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 제발 사람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지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전 그냥 스타일이 쬐끔 좋아진 것뿐 입니다. 그리고 아직도 ‘밥은 사 먹고 술은 얻어 먹는다’라는 백수의 모토를 버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술값 안 낸다고 욕은 하지 말아주세요. 제발. (그리고 요즘은 가끔 술값도 내요. 가끔이라 그렇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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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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