웬만하면 이런 얘기는 쓰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늘 아침에 또 수영복을 잃어버렸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잃어버린 건 어제 점심때일 것이다. 20분 간의 자유수영을 서둘러 마치고 나온다는 게 수영복과 수영모자를 탈수기에 그냥 넣고 나온 모양이다. 하얀색 수영모자도 함께 안 보였다. 옷을 다 벗고 라커를 잠그고 샤워실로 들어가다 보니 아쿠아백이 지나치게 가벼운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백을 열어보니 수영복과 모자가 없었다. 다행히 모자는 전에 잃어버렸다가 다시 찾은 검은색이 하나 남아 있었다. 청소하시는 아저씨와 함께 탈의실 여기저기를 찾아보았지만 내 분실물은 보이지 않았다. 수업은 이미 시작되었지만 수영복이 없으니 풀장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청바지와 반팔 티셔츠만 다시 챙겨입고 매점으로 갔다. 매점 아줌마가 또 반가워하면 어떡하나 약간 걱정을 하며 갔는데 왠일인지 돌연 처음 보는 척을 하시는 것이었다.

 

성준) 사장님, 수영복 하나 주세요. 

아줌) 수영복이요? 날씬허시네. 95 입으슈.

 

아줌마가 행거에 걸린 수영복을 손으로 훑다가 점점 왼쪽으로 가는 것이었다. 왼쪽은 비싼 쪽이다. 이 아줌마가 또 바가지를 씌우려고 하는구나. 나는 얼른 아줌마에게 소리를 질렀다.  

 

성준) 저렴한 걸로 주세요!

아줌) 저렴한 거라...마침 저렴하면서도 좋은 게 하나 있는데!

 

아줌마가 중간쯤에서 까만색 수영복을 하나 꺼내보였다. 나쁘지 않은 것 같아서 얼른 달라고 했다. 아줌마가 내 카드를 그으러 간 사이 내가 가격표 플라스틱 줄을 가위로 끊으려다가 가격을 확인하고 놀라 소리를 또 질렀다.

 

성준) 10,3000원이요...?

아줌) 70프로 할인이에요.

 

성준) 70프로 할인이라구요? 그러면...

아줌) 아니, 30프로 할인. 70프로만 받는다구.

 

성준) 아, 네.

아줌) 더 비싼 것도 있는데.

성준) 아뇨. 됐어요.

 

아줌마와 더 신경전을 벌이기 싫어서 나는 얼른 수영장 안으로 들어갔다. 새 수영복을 입고 열심히 수영을 했더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옷을 갈아입고 출근을 하는데 스마트폰 알람이 울리길래 열어보니 국민카드 사용금액 72,000원이 찍혀 있었다. 아줌마가 계산은 정확한 분이네. 아침부터 선량한 아줌마를 도와드린 것 같아서 괜히 어깨가 으쓱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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씻김굿을 보려고 휴가를 내고 내려온 진도. 이게 무슨 복인지 아내와 함께 요즘 우리나라에서 제일 바쁜 고수(북치는 이) 태영 씨의 집으로 와서 먹고 마시며 노는 행운을 누리고 있습니다.

어젯밤에도 간재미무침, 병어찜 그리고 산낙지 안주에 검정찹쌀홍주로 호강을 했는데 모텔에서 자고 일어나 또다시 찾아온 우리 부부에게 어머님이 차려주신 아침 밥상은 그야말로 입이 딱 벌어지는 진수성찬입니다. 메인 반찬인 보리굴비와 조기는 물론 곱창김무침, 멸치볶음, 갓김치, 그리고 가시리국까지 어느 하나 맛없는 게 없습니다. 이 정도 밥과 반찬만 매일 보장된다면 수감생활도 가능하겠다고 얘기했더니 다들 와하 웃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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讀하다 토요일 - 황석영의 <손님>을 읽던 날

봄이 서서히 오고 있습니다. 차갑기만 하던 보도블럭이 점점 녹고는 있지만 아직도 바람은 차갑기만 합니다. 아마도 우리가 사는 세상이 퍽퍽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세상이 퍽퍽하든 어떻든 책을 읽는 소소한 즐거움은 계속되어야겠지요. 2019년 2월 16일 토요일에 서소문에 있는 '청춘여가연구소'에서 讀하다토요일 2기 네 번째 모임이 열렸습니다. 이번에 함께 읽을 책은 황석영의 <손님>이었습니다. 이 책을 예전에 꼼꼼히 다 읽고 이번에 또 한 번 읽은 저는 책상 앞에 앉아서 전날 봤던 영화 <가버나움>에 대한 리뷰를 스마트폰으로 쓰고 있었습니다. 윤혜자 씨와 제가 오는 길에 빵을 좀 사왔는데 조금 늦게 온 김인혜 씨도 홍제시장에서 샀다며 순대와 떢볶이를 가져오셨습니다. 그래서 다들 기뿐 마음으로 빵과 떢볶이 순대를 먹으며 책을 읽었습니다.

<손님>은 6.25사변 때 좌익 세력과 기독교 세력이 황해도 신천(信川)에서 벌인 우리 민족들끼리의 살육전 이야기입니다. 미국에 사는 류요한이라는 목사의 목소리로 시작하는 이 소설엔 특이하게도 유령들이 등장하죠. 1950년 경에 황해도에서 억울하게 죽은 동네 머슴 이찌로, 순남이 아저씨 그리고 얼마 전에 미국에서 죽은 류요한의 형의 류요섭 등이 수십 년만에 고향땅 황해도로 향하는 류요섭의 여행에 동행하며 대화를 주고받음으로써 뒤늦은 살풀이굿을 펼치는 것입니다.

이 책을 읽은 임기홍 씨의 첫 느낌은 '어렵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책 내용이 너무 생소하고 형식이 특이해서 그런 면도 있었지만 우리가 전혀 모르던 내용이라 충격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전쟁 때 여기저기서 불행한 일이 있었다는 건 어렴풋이 들어 알고 있었지만 북한에서 그런 학살이 있었다는 건 왜 의심조차 해보지 않았을까 하는 뒤늦은 자책이 일었던 것입니다. 우선은 반공교육의 폐해가 아닐까 생각했다며 자신은 황석영의 소설은 처음인데 아마 이번 기회가 아니면 이 책도 읽지 않았을 것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윗세대들이 어떡하든 자식들에게 이 얘기를 안 하려 한 것은 어쩌면 떳떳하지 못한 역사에 대한 공범의식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는 복잡한 심정이 되었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이 책에는 우리 세대가 왜 이런 상황에서 살아가야만 하는가에 대한 해답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읽었다고 합니다. 뒤늦게라도 이런 책을 읽음으로써 누군가를 이해하거나 미워하거나 알고나 당하자, 라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죠.

윤혜자 씨는 우리 모임에서 가장 젊은 김하늬 씨의 소감이 가장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자신은 어렸을 때부터 반공포스터를 그리고 교련이나 간호교육 따위를 받은 세대지만 이십 대인 김하늬 씨는 그런 분위기에서 비교적 자유롭다 생각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김하늬 씨는 어떻게 얘기를 해야할지 모르겠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일단 자기 취향도 아니고 잘 모르는 이야기라 쉽게 공감하기 힘들었다면서 민족의 비극이라기보다는 진영간의 다툼이라는 면에서 지금과 그리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습니다. 너무 슬프고 잔인한 이야기에 할 말을 잃게 되지만 따져보면 이권 때문에 벌어진 일이 아닌가 하는 냉정한 시각이 발동했던 것입니다. 유령들과이 서로 대화하면서 화해에 이르는 모습들에도 쉽게 공감가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제가 그런 게 바로 씻김굿 아니겠느냐고 했지만 이승에서 서로 실컷 싸우다가 내세에 이르러 겨우 화해하고는 다 잘 될 거야, 라고 하는 건 종교든 정치든 자기 편한 대로 갖다붙이는 게 아닌가 하는 입장이었던 것 같습니다.

서동현 씨는 지금까지 우리가 함께 읽었던 소설가들에 비하면 '헤비급 선수'를 만난 기분이라고 했습니다. 레벨이 다르다는 것이죠. 충분히 공감할 만한 소감이었습니다. 끝까지 읽다보니 김성종의 [여명의 눈동자]도 생각난다고 했습니다. 맑스주의와 기독교가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이땅에 들어와서 얼마나 큰 격랑을 만들어냈는지 절절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손님'이라는 제목은 그런 의미에서 너무나 적확한 표현이었습니다.

김인혜 씨는 우리나라에 처음 기독교가 들어온 게 황해도였고 당시 젊은이들이 기독교와 함께 일본에서 자생했던 사회주의와도 만나게 되면서 얼마나 혼란스럽고 힘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이 책을 읽으며 더 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차라리 조선시대에 농지개혁을 했더라면 이런 비극은 없었지 않을까 하는 흥미로운 시각도 내보였습니다. 윤혜자 씨가 황석영의 <손님>을 읽으면서 현기영의 <순이삼촌>도 같이 읽어보면 좋겠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때 얘기들은 조정래의 <태백산맥>이나 이병주의 <지리산>등에서도 맥락을 찾을 수 있을 것이란 얘기였습니다. 한집에 사는 저와 윤혜자 씨는 이번에 한 권의 책을 번갈아 읽었는데 각자 읽으며 그은 밑줄이 같기도 하고 다르기도 해서 누가 어떤 구절에 밑줄을 그었는지 따져보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우리가 학교 다닐 때 근현대사에 대한 교육을 수박 겉핧기 식으로 배운 것에 대한 분노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때 당신에 대해 우리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죠. 하지만 김하늬 씨는 '어제 <오이디프스>와 <안티고네>를 읽었다. 책을 읽다보면 .주인공들이 왜 그렇게 행동했나보다는 작가가 어떤 입장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나를 더 생각하게 된다'라고 했습니다. 객관적인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누군가의 입장에 치우칠 수밖에 없으니 읽는 이의 입장에서는 불편한 부분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얘기였습니다. 저는 '불편해도 할 수 없다. 그것이 작가에게 필요한 기능 중 하나 아니겠느냐'라고 말했지만 쉽게 합의가 이루어지지는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김하늬 씨가 지난 목, 금, 그리고 토요일인 오늘까지 특정 종교에 시달린 사연에 대해 얘기하다가 얼마 전 윤혜자 씨가 스타벅스에서 만난 - 남녀가 마주 앉아 역사와 신념에 대한 얘기를 진지하게 하다가 특정 종교에 대한 충고까지 하는 걸 보고 기가 막혔다 - 얘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학교 선생님인 임기홍 씨가 자신이 가르치던 학생들 중 만났던 여호와의증인, JMS, 통일교, 신천지 등등의 다채로운 종교인 경험에 대해 얘기하면서 배가 또다시 산으로 올라갔습니다. 이제 모임을 끝내고 애프터를 하러 갈 시간이 되었다는 뜻이겠죠.

이차는 서울역 근처에 있는 닭한마리집으로 갔었고 삼차는 또 근처에 있는 작은 술집(이름이 생각 안 납니다)으로 가서 배가 터지게 술과 안주를 먹었습니다. 다음 달엔 정지돈의 소설집 [건축이냐 햑명이냐]를 읽기로 하고 헤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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