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을 읽는 기쁨 - 필립 로스의 [미국의 목가]

요즘 출퇴근길에 필립 로스의 [미국의 목가]라는 반어법적인 제목의 소설을 읽고 있는데 2부 첫머리에 말썽쟁이 딸 메리 때문에 장갑 공장을 찾아온 비키라는 여자에게 스위드가 장갑 생산 공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무두질 하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가죽 무역 이야기, 그리고 장갑 사업의 역사를 거쳐 재단 재봉작업에 대한 아주 세세한 공정과 일화까지 장장 18페이지에 걸쳐 숨가쁘게 펼쳐지는 이 스펙터클한 묘사는소설가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한 하나의 교본이나 다름없다.  

필립 로스는 이 한 장면을 쓰기 위해 가죽과 장갑 생산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많이 섭렵했을까. 책을 읽다가 너무 좋아서 전철 안에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무릇 소설을 읽는 쾌감은 이런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카메라로 보여주고 스토리라인으로 알려주는 것만으로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서술의 세계. 필립 로스의 전작을 다 구해서 읽고싶다.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Posted by 망망디
,


페이스북 친구 신청자 명단을 보고 있노라면 이상한 이름 때문에 눈쌀을 찌푸릴 때가 있다. 일단 도저히 사람 이름이라고는 여길 수 없는, 닉네임이 분명한 단어나 문장 뒤로 자신의 정체성을 숨기는 것도 탐탁지 않지만 그보다는 너무나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난 이름의 부담감 때문에 선뜻 친구로 받아들이기 망설여진다.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만 그런 건 아니다. 책을 쓴 작가나 방송에 나오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면 김구라, 같은 이름은 말을 청산유수로 잘 한다는 것을 '구라' 라는 속어로 치환한 것인데 처음엔 정말 듣기 거북했다(지금은 워낙 오래 되기도 했고 김구라라는 개인의  진정성이 많이 인식되어서 괜찮아졌지만). 마찬가지로 이름에 '글'이나 '작가'가 들어간 경우도 안쓰럽다. 내가 그런 불만을 토로했더니 같이 술을 마시던 한 선배는 "그 사람은 얼마나 작가가 되고 싶었으면 그랬겠어?"라고 반문했다. 

딴에는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전적으로 공감할 수는 없다. 작가가 되고 싶으면 글을 열심히 쓸 것이지 왜 이름으로 배수진을 치냔 말이다. 그런 면에서 '에도가와 란포'라는 이름은 처연하기까지 하다. 추리소설 작가 에드거 앨런 포우를 너무나 존경한 나머지 일본어를 가지고 그 이름을 차용한 것이다. 물론 일본 추리문학엔 '에도가와 란포상'이라는 게 있을 정도로 그 사람 역시 훌륭한 작가가 되었다지만(그의 작품을 읽어보진 못했으니 이런 글을 쓰는 나도 떳떳하진 못하다) 그렇게까지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름은 그렇게 지었는데 막상 뛰어난 추리소설가가 못 되었으면 어쩔 뻔했느냔 말이다.이름은 영혼의 문신과도 같은 것이라 생각한다. 그냥 김철수, 이영아 같은 이름이 자연스럽게 몸에 난 점이나 무늬라면 '에도가와 란포' 같은 예명은 난 이런 사람이 될 테야, 하고 온몸에 문신을 새기는 것과 같다는 것이다. 문신은 쉽게 눈에 띄고 한 번 새기면 쉽게 지우기 힘들다. 

어렸을 때 라디오에서 어떤 음악 평론가가 나와 새로 생긴 헤비메틀 그룹(이름이 로즈였던가) 멤버 전원이 결속을 과시하기 위해 온몸에 장미 문신을 새겼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그러면서 그가 덧붙인 걱정은 '장미 문신은 가까이서 보면 아름답지만 멀리서 보면 매우 기괴하다. 게다가 밴드는 걸핏하면 깨지기 쉬운데 탈퇴 후 그 문신은 어떡할 것인지 걱정된다' 정도였던 것 같다. 지금 그 멤버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 조니 뎁의 어깨에도 문신을 지운 흔적이 있다. 위노나 라이더와 살 때 새겼던 '위노나 포에버'라는 글자였다. 사람의 마음이나 처지는 쉽게 변한다. 그래서 인생에서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말은 '절대로'라는 부사다, 라는 농담도 있다. 안 그래도 피곤한데 이름에까지 그렇게 명백한 의도를 넣고 살아야 하나. 그냥 좀 설렁설렁 사는 건 정녕 죄악이란 말인가. 일 때문에 일찍 나온 주제에 엉뚱한 생각에 젖어 자판 앞에 달라붙어 있는 나는 또 뭐냔 말이다. 어서 일이나 하자.   

 


Posted by 망망디
,


어제 새벽에 희한한 일이 있었다. 난데없이 해외 결제로 100만 원이 넘게 빠져나가게 되었다는 문자메시지가 뜬 것이었다. 결국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당시에는 너무나 황당한 사건이라 아침에 출근해서 페이스북 담벼락에 사연을 남겨놨었다. - 기록 차원으로 여기에도 다시 한 번 남긴다. 왜? 그냥. (또는 저 이렇게 멍청해요, 라는 자조적인 자랑) 


아내는 일이 있어서 신새벽에 나가고 나 혼자 좀 더 자다가 여섯 시에 깨보니 그새 문자메시지가 세 개나 떠 있었다. 내가 해외에서 물품을 구입했는데 금액이 무려 백십만 원이란다. 어엇. 기가 막혔다. 해외라고는 여름에 일본에 잠깐 다녀온 게 전부인데 거기서 내가 뭘 얼마나 샀단 말인가. 더구나 날짜가 오늘 새벽 한 시 삼십육분이었다. 내가 무슨 수로 새벽에 해외로 날아가 물건을 산 뒤 곧바로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다시 돌아와 자고 있단 말인가. 몸은 이렇게 말짱한데.


잠이 확 깼다. 아, 왜 나한텐 맨날 이런 일만 일어나는거야. 통장에서 백만 원이 빠져나가면 이번 달엔 진짜 심각한데... 누군가 해외에서 장난질을 친 모양이었다. 범인은 아이튠즈를 통해 내 돈을 빼내간 것이 확실했다. 내 마음을 읽기라고 한 것처럼 결제금액 표시 바로 밑엔 '해외원화결제시 가맹점이 추가수수료를 가산할 수 있어 현지통화 거래가 유리합니다.'라는 안내문까지 적혀 있었다.


그렇지. 이런 건 당장 전화를 해야 해. 아침 6시 15분에 우리카드 고객센터에 전화를 했다. 안내방송에 따라 휴대폰 번호와 주민번호 앞자리를 누르고 상담원과 연결이 되었다.


상담 : 네, 고객님.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성준 : 카드사용내역을 보고 놀라서 전화 드렸는데요.


상담 : 네.

성준 : 엉뚱한 게 해외결제가 됐다고 나와서...


상담 : 잠깐 사용내역을 살펴보겠습니다

(Pause)


상담 : 아이튠즈 사용하셨네요

성준 : 네. 그런데 결제금액이요...


상담 : 혹시 아이클라우드 사용하시나요?

성준 : 네. 그런데 결제금액이 어떻게 백만 원이 넘게...


상담 : 천백 원인데요, 고객님?

성준 : 네?


상담 : 천백 원이요.

아, 지난 달부터 원화로 표시되고 있습니다.

성준 : 아...


자세히 보니 KRW라는 알파벳이 선명했고 '1,100'이라는 글자 뒤에 있는 건 콤마가 아니라 점이었다. 그러니까 1,100.00 원이었던 것이었다. 어쨌든 카드회사가 나쁘다. 이 자식들이 사람 헷갈리게 뒤에다 .00은 왜 붙이는 거야?


상담 : 고객님, 더 도와 드릴 건 없으십니까?

성준 : 네. 죄송합니다. 아, 고맙습니다.


상담 : 아, 아닙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오.

성준 : 네. 감사합니다.

(Pause)


상담 : 고객님, 전화를 먼저 끊어주셔야 합니다.

성준 : 아, 네.


전화를 끊었다. 다행이었다. 그런데 정말 화가 난다. 새벽에 일어나 바로 스마트폰을 보면 점이나 뒤에 붙은 '00' 같은 숫자는 잘 안 보인다. 그렇지 않은가. 왜 이렇게 사는 게 힘든가. 내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아침부터 이런 시련을 주는가 말이다.



 

'짤막한 비망록들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수영복  (0) 2019.03.28
공원의 불륜 커플  (0) 2018.10.09
특별한 일  (0) 2018.08.10
처음 개봉관에 갔던 날, 영화 [킹콩]을 보았다  (0) 2014.04.26
Posted by 망망디
,


'만약 내 아내가 바람이 났는데 그 상대가 내가 쫓아다니던 여자였다면 기분이 어떨까?' 이런 도발적이면서도 발랄한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흥미로운 독립영화를 보았다. 김재식 감독의 [이, 기적인 남자]다. 부산의 한 대학 연극영화과 교수가 과 사무실에서 근무하는 예쁘장한 조교 여자애를 좀 어떻게 해보려고 쫓아다니고 있었는데 알고보니 그녀가 자기 아내의 새 애인이더라는 얘기다. 예전에 시트콤 [프랜즈]에서 로스의 전부인이 레즈비언이라서 헤어졌다는 히든 에피소드가 있긴 있었지만 그래도 이런 역전적인 성역할 설정은 도발적이고 새롭다.

영화는 바다가 보이는 부산을 배경으로 해서 그런지 마치 닐 사이먼이 쓴 것처럼 경쾌한 실내극을 가져다가 영화로 만든 느낌이었고 시종일관 카메라를 장악하는 주연배우 박호산의 연기가 빛을 발했다. 그는 이 영화로 작년에 부산독립영화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영화가 끝나고 GV 시간에 감독은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커밍아웃을 한다면 어떻게 반응할까'라는 착상으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래서 원제도 남자 주인공의 마음 상태를 나타내는 '안개'였는데 마주치는 사람마다 다른 해석을 내리고 또 결정적으로 시나리오 대로 첫 장면에 안개를 만들어 넣을 예산도 부족해 고심한 끝에 지금의 제목으로 바꿨다고 했다. 난 안개보다 '이, 기적인 남자'가 백 배 나은 제목이라 생각한다.

관객과의 대화에서 '퀴어영화냐'라는 논란까지 있었지만 박호산이 얘기한대로 이 영화는 한 찌질한 남자의 변화를 보여주는 '성장영화'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1억 원도 안 되는 예산으로 제작했다는 하이컨셉의 영화 [이, 기적인 남자]를 추천한다. 극장에서 만나시길 바란다. 블록버스터든 인디영화든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 게 제일 재미있으니까.




Posted by 망망디
,

아내의 리즈 시절

혜자 2018. 10. 23. 16:08

며칠 전 밤에 TV를 보던 아내가 갑자기 책장에서 앨범을 꺼내 옛날 사진들을 들여다 보는 것이었다. 옆에서 맥주를 마시고 있던 나도 괜히 아내 옆으로 가서 앨범 구경을 했다. 

"아, 옛날엔 정말 예뻤단 말야..." 

아내가 혀를 차며 혼잣말을 했다. 고등학교 땐 정말 작고 어린애 같더니 대학 졸업하고 나서 대전엑스포에서 일할 땐 굉장히 예뻐졌다. 아내는 첫 남자친구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해서 그때 찍은 사진이 많다고 말했다. 사진을 좋아하는 여친을 한 번도 사귀어본 적이 없는 나는 그냥 바보처럼 "흠, 이쁘네" 라고 말하며 아내의 사진만 쳐다보다가 갑자기 생각난 듯 휴대폰으로 몇 장을 찍어보았다. 이른바 아내의 리즈 시절이다. 


'혜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내와 나  (0) 2019.01.19
여보, 하고 불렀더니  (0) 2018.11.06
빵터진 아내  (2) 2018.10.07
루꼴라가 있는 풍경  (1) 2018.09.24
쫄면  (2) 2018.06.12
Posted by 망망디
,


연희동에 있는 연희문학창작촌은 참 좋은 곳이더군요. 우리나라 현역 작가들이 들어와서 일정 기간 작품을 쓰고 가는 일종의 레지던스였는데, 우선 조용한 동네에 자리 잡고 있는 벽돌 건물이라 고전적인 느낌이 났고 녹음이 우거진 건물들 사이로 난 산책로는 걷는 사람의 마음을 가라앉혀 주는 곳이었습니다. 2018년 10월 13일 토요일 오후, 연희문학창작촌 안에 있는 <책다방 연희>라는 곳에서 '독하다 토요일'의 일곱 번째 모임이 있었습니다. 지난 여섯 번은 한 달에 한 번씩 회원들끼리 대학로 카페 겸 서점인 '책책'에 모여서 한국 소설들을 읽었는데요(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 - 한강의 [흰] - 김언수의 [뜨거운 피] -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 -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이번엔 번외편이자 오픈 모임으로 김탁환 선생을 모시고 그의 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를 읽기로 했던 것입니다. 

저와 윤혜자 씨가 페이스북을 통해 공지를 했고 소설가 김탁환 선생도 따로 공지를 해서 많은 분들이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늘 그랬던 것처럼 2시부터 모여서 한 시간 동안 묵독을 하고 3시부터 행사를 시작하기로 했었지만 장소가 바뀌어서 그런지 많은 분들이 지각을 했습니다. 김하늬 씨 같은 경우는 뒷문 쪽으로 오는 바람에 책다방 연희로 들어오질 못해서 고생을 했구요. 2시 40분 경에 김탁환 선생이 와서 같이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조금 더 사람들을 기다리다가 3시 10분경에 제가 인사를 하며 행사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독하다 토요일'은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한 시간 정도 미리 정해진 책을 각자 가져와 묵독하고 그 이후에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인데 모임의 모토가 '너무 열심히 하지 말자'라는 얘기를 인사말 삼아 했습니다. 우리가 문학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뭔가 이루어야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니니 너무 심각한 토론을 할 필요는 없지 않느냐는 것이 저의 처음 생각이었고 아직은 그런 생각이 모임에서 통용되는 것 같아서 좋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리고 모임이 끝나면 얼른 같이 술을 마시러 술집으로 몰려간다고 했더니 다들 웃으셨습니다.  

'우리는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제목으로 김탁환 선생이 강연을 시작하기 전에 [이토록 고고한 연예]에서 감명 깊었던 구절을 낭독해보는 코너가 있었습니다. 정아름 씨가 나와서 87페이지 부근에 있는 달문이 인삼 장사하는 대목을 읽었고 572페이지 부분도 좀 긴 내용이지만 읽었습니다. 그리고 뒤이어 제가 203페이지쯤 달문이 선배 재인들을 만나 산대놀이로 번 돈을 몽땅 나눠주고 나서 모독과 나누는 대화를 읽었습니다. 

김탁환 선생은 자신이 쓴 문장을 남이 읽는 걸 들을 때마다 묘한 감정이 든다고 말문을 열었습니다. 독자는 인상 깊은 부분이라며 낭독을 하는데 막상 작가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해 힘을 주었던 대목을 찾아 읽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것이죠. 작가와 독자의 입장이 그만큼 다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라는 얘기는 다른 데서는 해본 적이 없다고 하면서 강의가 시작되었습니다. 

김탁환 선생에겐 [이토록 고고한 연예]라는 작품이 어떤 분기점이 된 것 같습니다. 인생에서 중요한 작품임을 넘어서 이제 '달문의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생각까지 가지게 되었다고 하니 말입니다. 앞으로 10년 정도는 계속 달문의 마음으로 '사회파 소설'을 계속 써내려갈 결심을 했다고 합니다. 달문이 예술에 임하던 자세로, 달문이 사람들을 만나던 자세로, 그리고 나아가 달문이 인생을 살아가던 그 눈부신 자태로. 

그러기 위해서 일단 소설가로 살아가는 것 이외에 모든 것을 정리했다고 합니다. 작업실도 너무 커서 크기를 줄이고, 영화쪽 만나던 사람들도 대폭 정리했고(선생의 작품이 영화화 되는 경우가 많으니까), 칼럼이나 에세이도 안 쓰는 걸 원칙으로 정했다고 했습니다. 강연도 도서관 강연 말고는 안 하기로 하고요. 쉽게 말하면 돈이 되는 건 거의 다 안 하기로 한 것인데 ‘이게 다 달문 때문’이라며 웃었습니다. 가히 마루야마 겐지가 산속으로 들어갈 때 세웠던 결기만큼 김탁환의 마음가짐도 (온화한 성품과는 달리) 매우 분연했습니다. 

오는 10월 22일에 나오는 새 소설 [살아야겠다] 얘기를 했습니다. 메르스에 대한 이야기인데 [이토록 고고한 연예]보다 20페이지 정도 더 두꺼운 책이라 했습니다. 추천사를 써준 심리 기획자 이명수 선생이 '해머 같은 소설'이라고 했다지요. 우선 두께 때문에 그랬겠지만 아마도 프란츠 카프카가 얘기한 그 '망치'까지 중의법으로 표현한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36살의 주인공은 실존인물이었는데 마침 오늘이 그의 생일이라고 했습니다. 김탁환 선생은 학생들을 지도할 때도 언제나 주인공의 나이와 생일 등을 꼭 물어본다고 합니다. 구체적인 인적사항들이 촘촘히 정해져야 비로소 소설의 등장인물은 유일무이한 존재가 된다고 했습니다. 그걸 부여받은 캐릭터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볼륨 자체부터 다르니까요. 예전에 허 샤오시엔 감독이 줄리엣 비노쉬와 <빨간 풍선>이라는 영화를 찍을 때 카메라 프레임 안으로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 줄리엣 비노쉬의 남편 직업이 교수라는 것과 예전에 부부 사이에 있었던 자잘한 에피소드들까지 설명해주더라는 애기를 듣고 감탄했었는데, 또 그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역시 뛰어난 작가들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는 걸 느꼈습니다.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했습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나오기 이전부터 김탁환 선생은 ‘인간은 이야기하는 동물이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다고 했습니다. 세상엔 너무나 많은 이야기들이 있는데 그 이야기 앞에서 무력해지지 않겠다는 태도가 소설을 읽는 것이라고 했습니다(이야기 앞에서 무력해지는 경우는 예를 들면 ‘영화를 보는 순간’이라 했습니다. 독서와는 달리 관객이 개입할 여지가 전혀 없이 영화가 보여주고 들려주는 대로만 받아들여야 하니까).
그런데 단편 소설을 읽고 내 인생을 바꾸었다, 라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인생을 바꾸는 건 언제나 장편소설이라는 거죠. 왜 그럴까. 우리는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많은 곳을 가기도 하구요. 그런데 그 무엇 하나 나의 의도대로 되는 건 없습니다. 태어나보니 이미 내 부모가 있는 것이고 우연히 만난 사람과 하라고 하니까 그냥 결혼을 하기도 합니다. 활동하는 시대도 내가 정할 수 없죠. 그런데 소설가는 그런 걸 다 의지대로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장편소설에서는. 그래서 장편소설을 쓴다는 것은 주어진 대로 살지 않고 작가가 원하는 세상을 의지대로 그려나가는 행위라고 뜻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작가는 언제나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고 했습니다. [전쟁과 평화]도 [죄와 벌]도 질문을 던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인물을 만듭니다. 김탁환은 왜 정도전을 골랐을까. 왜 하필 달문이었을까. 이유는 그 인물에 그의 질문이 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어느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읽어오라고 시켰더니 다 읽은 학생들이 ‘이 소설에 어떤 정보가 들어 있어서 읽으라고 한 건지 잘 모르겠다’라는 반응을 보여 충격 먹은 얘기를 했습니다. 그런 질문을 한다는 건 학교 다니는 내내 모든 책은 시험에 나오는(또는 세상살이에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해서 읽는 것이지 이야기가 만들어낸 어떤 ‘감정’을 느껴야 한다는 걸 배운 적이 없다는 뜻이었으니까요. 아무 감정을 싣지 않고 그냥 이야기만 하려는 사람이 있는데 김탁환 선생은 그게 가장 안 좋은 태도라고 했습니다. 논리적이기만 하면 내용을 받아들일 것이라는 착각이라는 거죠. 인간은 감정이 전달되어야 움직이는 존재입니다. 그래서 허구인 소설을 읽어야 하는 것이구요. 

김탁환 선생은 소설은 적어도 세 번은 읽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 번째는 그냥 읽고, 두 번째에는 작가의 입장에 서서 왜 하필 그 인물이고 그 시대였을까를 생각하면서 읽으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읽으면서 확 끌리거나 유난히 싫은 부분이 무엇이었는지 생각하며 읽어보라 했습니다. 그런 게 눈에 띄는 이유는 작가가 그걸 쓰기 전에 ‘천 번 정도’는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소설은 태생부터 굉장히 ‘의도적’인데 그런 건 장편소설 말고는 불가능하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함께 모여 장편 소설을 읽는 일은 매우 소중한 것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무엇인가를 함께 느껴보자는 것이니까요. 

그래서 제가 ‘작가 김탁환이세 번씩 읽고 싶어질 정도로 짱짱하게 쓰는 외국 작가가 있으면 몇 명만 추천해 달라’고 했더니 존 스타인백과 필립 로스, 그리고 가즈오 이시구로와 오르한 파묵을 들었습니다. [분노의 포도], [빨강머리의 여인], [순수 박물관] 등등의 작품을 거론하면서 말이죠. 

“베스트셀러 작가로 살지 않겠습니다. 진지한 독자 만 명과 살겠습니다. 달문처럼.” 

이제 달문처럼 살겠다고 한 김탁환 작가는 대학 때 우리나라에 18세기부터 있었던 대하소설들을 읽고 깜짝 놀랐다고 했습니다. [유씨삼대록]이나 [곽장양문록] 같은 소설을 읽은 거죠. 그것도 몇 번씩이나.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역사소설을 쓰게 되었고 역사 공부를 더 하게 되었으며 또 그러다 보니 이제는 자기만 쓸 수 있는 게 있다는 강한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고 합니다. 나밖에 못 쓰는 글을 쓰자, 인간의 본질을 틀어쥐고 장편소설을 쓰는 작가가 되자, 라고 결심하게 되었다는 얘기를 결론처럼 했을 땐 장내가 잠시 숙연해졌습니다. 

그러나 숙연함도 잠시. 강의가 끝나고 몰려간 백암순대국에서는 순대와 수육에 많은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이어갔고 2차로 간 치킨집에서는 각자 치맥을 아낌없이 들이부었습니다. 그 날 처음 뵙는 분들도 많았는데 모두 금방 친해져서 너 나 할 것 없이 웃음꽃을 피웠고 평소엔 뒷풀이에서 맥주만 간단히 마시다가 먼저 사라지곤 하던 김탁환 선생도 그날은 아주 작정을 하고 나왔는지 끝까지 자리를 지키며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결국은 거의 모든 멤버가 3차인 중화요리 전문점 ‘문차이나’까지 가서 백주를 벌컥벌컥 마시며 밤을 불살랐습니다. 

모두 취해서 다행이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거실에 아무렇게나 벗어놓은 옷가지와 핸드폰 속 사진들을 보니 대단했더군요. 그런데 기분이 매우 상쾌했습니다. 소설을 통해 만나서 그런지 모두 같은 마음처럼 느껴졌구요. ‘독하다 토요일’의 번외편 모임은 이렇게 끝을 맺고 다음 달엔 ‘독하다 토요일 2기’ 모임을 시작해야 합니다. 우선 앞으로 회원들이 함께 읽을 책들을 정해야 하는데, 이번엔 회원 여러분들의 추천을 받아 리스트를 만들기로 했습니다. 이번에도 역시 한국의 소설에 국한해서 읽어볼까 합니다. 어떤 책들이 좋을까요? 혹시 좋은 책 알고 계시면 추천 좀 해주세요. 꼭 새 책이 아니어도 좋습니다. 우리가 아직 안 읽은 책은 다 새 책이니까요.  





Posted by 망망디
,




한 달 전쯤 '오빠, 뜬금없지만 최근에 읽은 책 중에 몇 권만 추천해 주실 수 있으세요?' 라는 문자가 왔다. 대학 졸업 후에는 별로 연락이 없다가 페북 친구가 된 써클 후배인데 미술 전공자 아닌 사람들은 어떤 책을 읽는지 궁금했다고 한다. 아마 내 페이스북 담벼락을 훑어보다가 생각난 김에 혹시나 하고 메시지를 보내온 것 같았다.

내가 대뜸 "어, 그럼 이런이런 책을 읽어봐" 라고 얘기할 만큼 지적 역량이 되지도 않고 순발력이 있는 것도 아니라서 좀 난감하긴 했지만 재미 있을 것 같기도 했다. 마침 나 혼자 집에 있는 저녁이어서 잠시 책꽂이를 둘러볼 시간이 있었다. 예전에 읽거나 가지고 있던 책은 말고 지금 우리집 책꽂이에 꽂혀있는 책 중에 몇 권만 추천해 보기로 했다. 나 혼자 손에 집히는 대로 책을 몇 권 거내 거실 탁자에 놓고 책을 설명하는 메모를 짧게짧게 썼다.

내게 무해한 사람 - 최은영
최은영 신작 소설집인데 작품 전체가 다 좋아. 전작 <쇼코의 미소>도 좋고.

여름, 스피드 - 김봉곤
작가가 실제로 게이인데 실려 있는 모든 단편이 게이들의 사랑과 섹스 이야기. 자기 얘기를 용감하고 귀엽게 쓰는 작가. 읽는이에 따라 호오가 엄청 갈릴 것 같긴 하지만. 난 이 책에 실린 데뷔작이 제일 좋았어.

이토록 고고한 연예 - 김탁환
조선 후기 실제 인물인 거지이자 광대였던 달문의 이야기. 아라비안나이트처럼 얘기가 술술 흘러넘쳐. 소설가 김탁환이 자기가 만난 최고의 캐릭터라고 하더라.

일본적 마음 - 김응교
일본에서 오래 생활한 교수가 쓴 에세이인데 어떤 건 좋고 어떤 건 그저 그래.

염소의 축제1,2 -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
노벨문학상을 이걸로 받았다고 하던데 정말 끝내주는 실화소설. 도미니카 독재자였던 투르히요 대통령 암살사건. 후반에 나오는 긴 고문장면들은 압권이야. 잔인한 거 혐오하면 못 읽을 듯. 암튼 재밌어.

지구만큼 슬펐다고 한다 - 신철규
참 착한 시를 쓰는 시인. 시가 슬프고 깨끗해.

강원국의 글쓰기 - 강원국
내 책 원고 쓰는데 도움 받으려고 산 책. 다 알고 있는 내용 같아도 막상 읽어보면 새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와 사례들. 어쩌면 유시민의 글쓰기 책보더 낫다.

허수경 산문집 '그대는 할말을 어디에 두고 왔는가'
어디를 펼쳐도 기가 막히고 단정한 산문을 만날 수 있는 책. 시인의 산문이란 이런 거구나 하고 감탄하게 돼.

열두 발자국 - 정재승
요즘 인기 있는 책이라 샀는데 인간 심리와 통찰에 대한 얘기들을 강의식으로 쉽게 풀어놔서 잘 읽혀. 강의할 때 참고할 사례들도 많고.

편의점 인간 - 무라타 사야카
편의점에서 벌어지는 이야기들. 소설 주인공처럼 작가가 지금도 편의점에서 일을 한대. 아르바이트생으로. 허먼 멜빌의 <바틀비> 같은 느낌인데 작년 말에 읽은 책 중 가장 좋았어.

그녀는 추천 목록 중 읽은 책이 딱 한 권 있다고 했다. 그리고 땡기는 책이 딱 한 권 있다고도 했다.


#여기서퀴즈 #무슨책이었을까요 #맞춰도상금상품없습니다 #죄송합니다







Posted by 망망디
,



점잖은 사람도 운전대만 잡으면 욕쟁이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운전은 생명과 직결되는 행위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누구든 좀처럼 다른 운전자의 입장에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기서 왜 깜빡이를 안 켜?
저 아저씨 왜 안 가고 저기서 뭉기적거리는데?

나도 그런 운전자 중 하나였다(이제 운전 안 한지 십 년도 넘었지만). 어느 늦은 밤 아내와 택시를 타고 집에 오다가 우리가 들어가야 할 진입로 입구를 막은 채 오도가도 못하는 차 한 대를 만났다. 아, 뭐하는 거야...? 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내게 택시운전사가 하신 말씀은 정말 뜻밖이었다.

"다 이유가 있어요."
"네?"
"서있는 차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과연 그 차도 조금 있다가 뭔가 사소한 문제를 해결한 모양인지 위잉,하고 가려던 길로 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구나. 우리는 "아저씨 말씀이 명언이네요!'라고 외치며 택시비에 팁 이천 원을 더 얹어 드렸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고, 누구나 아프다. 시인 이성복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고 썼다. 사실은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아픈데도 서로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자 하는 대신 누군가의 마음에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 어서 정신과 의사를 만나보라고 충고한다. 나는 의사나 심리치료사가 아니니까, 미안하지만 다른 데 가서 잘 치료하고 오라고.

'정혜신의 정적심리학 [당신이 옳다]'는 마음이 아파서 숨이 넘어가는 사람은 큰 병원이나 전문가에게 보내지 말고 심폐소생술(CPR) 하듯 지금 당장 여기서 섬세한 시선과 지지를 통해 보살펴줘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다.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 간단하지만 본질을 건드려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책에 나온 것처럼 아프리카 아이들이 힘겹게 이고 다니는 물동이 대신 큰 공 모양의 물통을 만들어 굴리고 다닐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언젠가 보았던, 오염된 물에 꽂고 빨아도 순식간에 정수 작용을 해 오지의 아이들도 맑은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주는 빨대 같은 것이다.  

정혜신은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고 묻는 것만으로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게 하거나 삶이 달라지게 하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사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렇게 묻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질문 전후로 털어놓는 이야기의 질이 너무나 달라지는 걸 계속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묻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건성으로 묻지 않고 정말 호기심을 가지고 사소한 부분까지 마음으로 느끼면서 세세하게 물어야 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어떤 이유로 집을 뛰쳐나와 울다가 밤늦게 전화를 걸어온 친구에게 "야, 달밤에 체조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 들어가."라고 충고하는 건 당사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정혜신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한 사람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다고 단언한다. 자신의 자의적 판단과 논리에 입각해 '빨리 들어가라'고 다그치는 대신 "니가 이 시간에 집 밖을 배회하고 있다면 그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라고 섬세하게 공감해주는 순간 '천애고아' 같았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리고 가슴엔 따스한 체온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볼수록 심리적 CPR의 핵심은 '행동'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많은 자원봉사자들은 진도에 내려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울면서도 무슨 일이든 했다고 한다. 같이 손 붙잡고 울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자는 것만으로도 유족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일인지는 정작 그들도 몰랐던 것이다. 이는 심리적 CPR이 이해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고,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는 사례다. 그리고 그 기술의 핵심 키워드는 언제나 '사람'과 '공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한'이 많은 민족이다. 스트레스가 그만큼 많다. 그런데 그걸 어디 가서 털어놓을 곳이 없어 못된 시어머니가 되고 태극기 부대가 되고 가출 청소년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나의 감정에 집중해주고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뒤늦게 결혼하고서 가장 좋았던 것은 우주 최강의 '내 편'이 하나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언제나 내 이야기에 먼저 귀를 기울여주고 내 기분이 어떤지 제일 먼저 헤아려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눈보라 치고 성난 파도가 넘실대는 바깥에서의 삶을 견디게 해주는 철갑옷을 얻은 것과 같았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과 심리 기획자 이명수 부부. 그들은 책상머리가 아니라 국가폭력 피해자,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이 생과 사를 넘나드는 심리적 참전의 현장에서 그들이 개발한 '심리적 CPR'로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는 전사들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엄격한 잣대나 의학 지식이 아니라 공감이다. 묻고 또 물어 마침내 같은 입장에 서고 또 공감함으로써 벼랑끝에 선 사람들을 살린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온 수 많은 경험담과 사례는 한 번 읽고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늘 곁에 두고 도움이 필요한 타인을 만나는 경우마다 적용시켜야 할 보석 같은 이야기들이다. 

방탄소년단은 얼마 전 유엔에서 "오늘의 저는 과거의 실수들이 모여서 만들어졌습니다. 내일, 저는 지금보다 조금 더 현명할지도 모릅니다. 이 또한 저입니다. 그 실수들은 제가 누구인지를 얘기해주며, 제 인생의 우주를 가장 밝게 빛내는 별자리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누구이고 싶은지를 모두 포함해 나를 사랑하세요."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싶어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옆에서 "미안해. 니가 그렇게 힘든지 몰랐어."라며 진심으로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다. 그리고 당신이 옳다, 라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의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살린다. 그게 정혜신이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전부다. 

      



Posted by 망망디
,



아내가 카톡으로 단편소설을 하나 보내왔다. '요즘 2030한테 젤 핫하대'라는 문자와 함께. 창비에서 상을 받은 단편소설인데 장류진이라는 신인 작가의 <일의 기쁨과 슬픔>이라는 제목이었다. 

첨부된 창비 URL을 눌러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요새 판교 노동자들에게 최고 인기...세 번 읽었다'라는 미다시(라는 말은 쓰면 안 되지만)가 왜 붙었나 했더니 이게 '판교 테크노밸리'의 스타트업 기업 얘기라 그런 모양이었다. 

"합시다, 스크럼." 이라는 첫 문장부터 '홍콩행 왕복 티켓을 결제했다. 조금 비싼가 싶었지만 오늘은 월급날이니까 괜찮아, 라고 생각했다.'라는 마지막 문장까지 단숨에 읽었다. 

읽으면서도 재밌다고 생각했는데 다 읽고 나서 뒷맛까지 상큼했다. 사장이 직원들 이름을 다 영어로 바꿔 부르게 한 이유가 '수평적 일처리' 때문이 아니라 박대식이라는 촌스러운 본명보다 데이빗이라는 영어 이름으로 불리고 싶어서가 아닐까 의심하는 장면부터 삐져나오는 자잘한 유머들이 작품 전반에 고르게 배어 있다. 그리고 '하이퍼 리얼리즘'이란 평을 들을 정도로 회사 생활이나 업무 처리에 대한 리얼한 묘사가 압권이다. 

중고물품을 판매하는 '우동마켓'이라는 앱 회사를 배경에 '월급을 카드 포인트로 받게 된 어떤 여자 얘기'가 기둥이긴 하지만 그것만 놓고 얘기하면 이 소설을 폄하하는 게 된다. 짧은 분량과 날아갈 듯 가벼운 문체 속에 현대인을 바라보는 냉소적인 시선이 제대로 살아 있으니까. 엔씨소프트 건물이 만든 네모난 하늘 안으로 용이 지나간다는 상상도 재미 있고 카드 포인트 여자가 기르는 거북이의 이름이 람보(람보르기니의 준말)라는 설정도 재미 있었다. 마지막에 어린 개발자에게 레고를 선물하는 장면과 그의 반응 묘사는 정말 좋았다. 

소설보다 먼저 수록된 인터뷰를 읽어보니 장류진은  7년 동안 회사원이었고 한겨레문화센터를 다니면서 처음 소설을 써보았다고 한다. 뭔가 미야베 미유키 아줌마의 데뷔 때와 비슷하지 않은가. 그리고 손보미 작가와 권여선 작가를 좋아한다고 한다. 그런 인터뷰를 읽고 나서 그런지 몰라도 왠지 손보미의 발랄하고 미국스러운 문체와 권여선의 의뭉스러운 유머가 이 작가의 글에서 한꺼번에 버무려져 있는 느낌도 좀 들었다. 아무튼 아내 덕분에 느닷없이 읽은 단편이지만 꽤 재미 있었다는 얘기. 이른 저녁부터 술약속이 있으니 빨리 독후감 올리고 나가야겠다는 결론.  


장류진의 <일의 기쁨과 슬픔> 읽으러 가기 --> http://bit.ly/2RrjePd


Posted by 망망디
,


또 미루고 미루다 이제야 쓰게 되었네요. 독하다 토요일에서 정한 책의 마지막권은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이었습니다. 지난 9월 8일 오후 2시 대학로 서점 '책책'에서 사람들이 모여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날은 모임이 끝나고 저희집 '성북동 소행성'에 가기로 했었고 옥상에서 맥주도 한 잔씩 하기로 했었습니다. 그래서 미리 김하늬 씨에게 우쿠렐레 연주를 부탁하기도 했었구요. 약속대로 김하니 씨가 우쿠렐레를 가져와서 더 즐거웠던 토요일이었습니다. (아깝게도 김인혜 씨는 집안일 때문에, 손영연 씨는 회사일 때문에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정아름 씨도 집안 사정으로 참석을 못했고 김성희 씨는 결혼식장 갔다가 전철을 반대로 타는 바람에 고생고생하며 늦게 도착했습니다. 왜 그런 날 있잖아요. 평소에는 안 그러는데 그날만 이상하게 헷갈리는 날. 임기홍 씨는 여전히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원서를 들고 나타났구요. 독하다 토요일 때만 읽는 책이 틀림 없는데, 다 읽으면 자신이 정리한 영어단어장을 회원들에게 보내주기로 했습니다)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은 50여 명의 인물이 등장하는 단편소설들이 모여 장편을 이룬 작품입니다. 좀 특이한 시도라고 할 수 있죠.  저는 이 작가 역시 '판타스틱'이라는 SF잡지에서 발견했는데요, 데뷔작이 <드림,드림,드림>이라는 단편이었습니다. 아쿠다가와라는 소설가를 알게 해주신 친할아버지에게 감사한다는 얘기를 어딘가 인터뷰에서 읽었는데 그런 언급 자체부터 좀 특이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보건교사 안은영]이라는 소설을 읽고 혹딱 반했죠. 평범한 교사가 학교에서 근무하면서 이사장의 손자인 한문선생과 손을 잡고 귀신을 퇴치하는 내용인데 매우 재미 있습니다. 

아무튼 저는 이렇게 좋아하는 작가지만 윤혜자 씨는 자기 취향이 아니라는 부정적인 태도로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어린 티가 팍팍 나는 글이라는 평가였죠. 그런데 김하늬 씨는 대체로 재미 있게 읽었다고 했습니다. 요즘 들어 온기를 품고 있는 글들이 좋아졌는데 이 작가의 글이 그렇다는 것이었습니다. 비록 주인공 중 칼에 오십몇 번이나 찔려 죽는 사람도 나오지만. 그러면서 등장인물 중 양혜경과 윤창민 등을 거론했는데, 자세한 내용은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짧은 글들임에도 완결성이 느껴지고 연결도 잘 되어 있어 좋다는 소감도 얘기했습니다. 

임기홍 씨는 병원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를 읽으면서 정말 큰 병원에서는 이런 일들이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다고 했습니다. 통속적인 남녀 역할이 바뀌어진 것들도 재미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외과수술을 잘 하는 천재소녀 얘기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하면서 갑자기 '언어학 개론' 얘기를 꺼내며 'Me Tazan, You Jane' 얘기를 했고 퍼포먼스(실제 실행)와 컨피던스(내재적 능력)의 차이 등을 매우 심도 있게 설명해서 사람들의 기를 죽였습니다(자세한 내용은 물론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천재들은 감성적인 면에서 무딘 편인데 여기 나오는 천재는 너무 쿨하다고도 했습니다. 그는 소설 쓰는 사람들이 궁금하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이런얘기를 쓸 수 있을까 늘 감탄한다는 것입니다. 이 소설은 중간 이후로 좀 루즈해졌다가 마지막에 화들짝 놀라게 하는 면이 있어서 좋았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김하늬 씨는 자기는 원래 '숲보다 나무를 보는 성향'인데 모든 인물이나 사건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면에서 이 책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쓴 [올리브 키터리즈]와 매우 비슷한 책이라고 느꼈다고 했습니다. 모여서 하나의 책을 읽으면서 각자 예전에 읽었던 책을 떠올리는 것도 독서모임의 즐거움 중 하나인 것 같습니다. 

정아름 씨는 한 번 통독을 하고 다시 읽었는데도 재미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두번째 읽을 때는 어디가 어떻게 연결되었는지를 살피면서 읽었는데 진선미 아줌마 부분을 가장 웃으면서 읽었다고 했습니다. 아마도 정세랑이 긍정적인 부분을 잘 다루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잠깐 해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뭔가 세어보았다고 했는데( 열다섯 개라고 했는데) 뭔지는 생각이 안 납니다. 너무 늦게 정리를 하다 보니 이렇군요. 거듭 죄송합니다. 

김하늬 씨가 중간에 [죽고싶지만 떡볶이는 먹고싶어] 얘기를 했는데 아마 제목 때문에 그런 얘기를 한 것 같습니다. 

윤혜자 씨는 작가가 '머리 좋은 편집자'로 느껴졌다는 얘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나이든 사람들은 잘 그리지 못했지만 상대적으로 젊은 20대 30대들에게는 각광을 받을 만큼 잘 썼다는 얘기를 했고, 그것만으로도 베스트셀러가 될 자격이 충분하다는 얘기도 했습니다. 출판기획자의 입장에서 얘기를 해보면 무슨 책이든 연령층에 따라 독자층이 확연히 구분되기 마련인데 자신이 처음 기획을 했던 [마흔의 심리학]이라는 책도 중년들에겐 공감을 얻었지만 20대들에겐 외면을 받았던 경험을 떠올린 것 같았습니다. 

정아름 씨가 입사 10년차의 고민은 무엇일까 얘기를 시작했더니 김하늬 씨가 '회사 생활보다는 그 나이에 찾아오는 우울증 등 개인적인 심리가 더 큰 일'이라고 했고 이어 정아름 씨가 책 안에서 싱크홀에 빠졌던 여자의 슬럼프 부분이 마음에 와 닿았다고 하며 자신도 정신과 의사나 전문가의 상담을 한 번 받고 싶다고 했더니  윤혜자 씨가 상담은 자기가 해줄 테니 어서 돈을 내라고 농담을 해서 다들 웃었습니다. 

어쩌다가 대학교 얘기가 나왔고 '통페합'에 대한 비판이 중구난방으로 쏟아졌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윤혜자 씨는 '출판사의 기획'에 의해 쓰여진 책인 거 같은데 너무 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다 보니  중간중간 기복이 느껴져 작가가 겨우겨우 썼을 것 같은 안쓰러운 느낌도 받았다고 했고 정아름 씨가 차라리 장편소설이라는 얘기를 안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조심스럽게 내놓았습니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을 따뜻하게 다루는 시선이 좋았고 특히 장유라 편에서 화물연대에게 빵을 주는 장면을 읽으며서 이 작가가 사회적인 문제도 잘 다루는 것 같다고 윤혜자 씨가 잠깐 칭찬을 했습니다. 

그후 관장합시다, 10년 후 영점 조정, 문용림 교조적이더라, 진선미 아줌마의 딸...등등 아무말 대잔치 같은 순간이 있었는데 자세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김성희 씨도 통폐합 얘기를 오래 했고 소설에서 귀에 벌 들어간 사람이나 컬에 찔린 사람 얘기는 너무 '잘 기획된 느낌'이라는 얘기를 했습니다. 임기홍 씨가 대학 얘기에 나도 공감한다고 하면서 9월이 수시입학이 절정인데 교사로서 입시를 대하는 부모들을 보면 마치 자녀의 배우자를 고르는 느낌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서동현 씨는 여기 모인 사람 중 자기만 공대 출신(건축과)이라고 얘기를 꺼내면서 이번 책은 많이 읽지 못하고 왔지만 일단 문체가 매우 좋았고 눈에 띄는 표현들도 많았다고 했습니다. '통속적이고 적나라한 일상을 잘게 다져서 계속 카메라로 비추는 느낌'이었다고 간단한 총평을 했습니다. 그러면서 건축가들도 다 스타일이 달라서 어떤 사람은 전체부터 구상을 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작가처럼 장면장면을 그려서 나중에 한덩이로 만드는 경우도 있다고 했습니다. 소설을 건축에 비교하니 또다른 재미가 있었습니다. 

김성희 씨가 자신은 '병원 드라마 성애자'라는 고백을 하며 그래서 이 책을 더 각별하게 읽었다는 얘기를 했고 그러다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예전에 학교 다닐 때 싫었던 기억들에 대해 얘기를 하자 거의 모든 사람들이 참여해 그 주제로  이야기꽃을 피웠습니다. 그러다가 임기홍 씨가 또 유발 하라리의 [사피에스] 얘길 꺼내며 '우리는 개체가 사라지기 전에도 진화를 하는 놀라운 일을 한다. 그래서 인간 세상은 그냥 쫓아가기에도 정신이 없다'는 내용의 얘기를 해서 모임의 종말을 재촉했습니다. 

이날은 '혜화칼국수'로 이차를 가서 전과 칼국수 등을 먹고 약간의 술을 마신 뒤 약속대로 저희집 '성북동소행성'에 올라갔습니다. 각자 마실 맥주를 사가지고 옥상에 올라가 노을을 바라보며 놀있습니다. 커다란 다라이에 얼음물을 채우고 맥주를 담가놓았더니 뭔가 피크닉을 온 것 같았습니다. 김하늬 씨가 우크렐레를 꺼내 연주를 하며 노래를 불렀고 저도 답례삼아 기타를 가져와 노래를 불렀습니다. 같은 뚜라미 출신이지만 저와 다르게 기타를 매우 잘 치는 임기홍 씨가 반주를 해줘서 사람들이 이런저런 노래를 많이 부르고 놀았습니다. 원래는 노을 지고 달 뜨면 헤어질 생각이었는데 너무 재미 있어서 열한 시 넘어서까지 놀았습니다. 

'독하다 토요일'을 시작할 때 함께 읽기로 했던 책들(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 한강의 [흰] 김언수의 [뜨거운 피] 배명훈의 [안녕, 인공존재]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이 모두 끝났습니다. 다음엔 번외편인 김탁환의 소설 [이토록 고고한 연예]를 읽을 때 만나기로 하고 그때 다음 책들은 뭘로 정할까도 얘기해 보기로 했습니다. 

끝으로 제가 써 본 세줄평을 첨부해 봅니다: 

50여 명의 등장인물들이 희미한 끈으로  이어진 이 연작소설은 로버트 알트만의 [숏컷]을 생각나게 한다. 병원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많다. 생과 사를 다루기에 적합해서 그럴 것이다. 정세랑의 [피프티 피플]도 병원을 중심으로 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태피스트리처럼 엮여지는데 마지막엔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 [영화처럼]이 그랬듯이 극장에서 감동적인 결말을 맺는다. 가볍고 따뜻한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살인이나 불륜, 연애, 섹스 등을 아무렇지도 않게 섞어도 차가워지지 않는 건 정세랑이라는 작가만의 능력일 것이다. 


Posted by 망망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