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일러 없습니다)

영화제 특수'라는 말이 있다. 깐느나 베니스영화제 등지에서 큰 상을 타고나면 국내에서 반짝, 하고 흥행이 되었다가 바로 꺼지는 현상을 일컫는 용어다. 그런데 그런 영화들은 대부분 흥행에 크게 성공하지는 못한다. 상을 탄 영화들은 대부분 심각한 주제의식이나 난해한 미장센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 관객들에겐 지루하게 느껴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어제 개봉한 깐느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봉준호의 [기생충]도 그런 영화일까? 결론적으로, 아니다. 전혀 그렇지 않다.

가족 구성원 전원이 백수인 집이 있다. 반지하에 살면서 휴대폰 와이파이마저도 윗집 것을 몰래 따서 쓰는 기택과 기우, 기정(이 집은 이상하게도 아버지와 아들 딸이 다 기 자 돌림이다) 가족은 어떻게 남을 속여서라도 돈을 좀 벌어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간절한 생각에 온 가족이 똘똘 뭉쳐 모종의 사기극을 꾸민다. 이 과정에서 아들 딸들은 말끝마다 육두문자를 남발하지만 그걸 듣는 부모들은 태연하다. 자기들도 똑같이 숨쉬듯 쌍욕을 입에 달고 사니까. 그러나 박 사장이 사는 집을 공략하기 위해 캐릭터들을 만들고 거기에 맞는 연극 대사 연습을 하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슬며시 웃음이 나오다가 결국은 이 사람들이 거사에 성공했으면 하는 생각마저 하게 된다. 관객이 주인공들에게 자연스럽게 동화가 되는 것이다.

스토리 누설은 여기까지다. 이 영화는 등장인물을 소개하는 전반부를 제외하면 가는 곳마다 스포일러가 터지는 부비트랩 같은 영화니까. 대신 배우들 얘기를 해보자. 송강호야 새삼 말하면 입만 아픈 '연기의 신'이지만 조여정이 이렇게 연기를 잘 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감독의 조련에 의해 연기력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나 하는 건 [친절한 금자씨]의 이영애 이후 참 오랜만인 것 같다. 그리고 젊은 박소담이 이렇게 연기를 잘 하는 배우였는지 누가 알았단 말인가. 대사를 구사하는 호흡이나 목소리는 물론 순간을 제압하는 카리스마도 장난이 아니다. 최우식, 이정은의 연기도 시종일관 너무나 뛰어나다. 결국 어느 정도 선의 연기를 해냈음에도 불구하고 박 사장 역의 이선균이 가장 처진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반지하 창에서 바라 본 1층 거리 풍경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선명하게 드러내기에 손색이 없다. '기생충'이라는 제목이나 해외에서의 반응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이 영화는 계급 문제를 다룬다. 그러나 이 영화의 감독은 켄 로치가 아니고 봉준호다. 어떤 심각한 얘기를 하더라도 유머와 재미를 놓치지 않는 그가 이번이라고 그 미덕을 포기할 리가 없다. 박 사장과 그의 부인 연교에게 접근하는 기태 가족의 속임수들은 아이디어와 능청이 넘치고 계급 간의 경멸을 표현하는 데는 '반지하'보다도 '냄새'가 가장 치욕적이라는 통찰도 놓치지 않는다. 박 사장의 집으로 들어간 후에도 봉준호는 놀라운 구성과 연출로 관객이 딴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 '봉테일'이라는 별명에서 알 수 있듯 디테일에서도 감탄을 금할 수 없다(단 몇 장면밖에 나오지 않는 체육관 씬의 정교함을 보라!). 카메라, 음악 등등 모두 베테랑의 숨결이 느껴지는데 특히 정재일의 클래식 음악은 영화의 품격을 더욱 높여주기에 모자람이 없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나와 함께 옆자리에서 영화를 본 아내는 영화가 너무 슬프다고 하며 사람들 위에서 군림하는 박사장 가족과 그의 집에 들러붙어 생활을 영위하려는 기택의 가족 중 진짜 기생충은 누구일까, 라는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사운드가 좋은 극장에서 한 번 더 봐야겠다고 했다. 물론 나도 한 번 더 보고 싶어졌다. 이렇게 분명한 주제의식을 가지고도 유머와 공포와 비극미를 고르게 가지고 있는 영화는 전체 내용을 다 파악하고 보는 재미 또한 각별할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기자는 [기생충]의 황금종려사 수상은 한국 영화 백년의 쾌거라고도 하지만 내 생각에 이건 한국 영화 뿐 아니라 세계 영화의 쾌거다. 이런 걸작은 우리나라는 물론 지구촌 어디에서도 쉽게 나온지 못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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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가 마지막 퇴근하는 저의 뒷모습을 도촬했습니다. 

 


첫 차는 아반떼였다. 부모님과 함께 살면서 광고대행사를 다니던 시절에 만기가 된 작은 적금을  찾아 그 차를 샀다. 이유는 '나만의 공간을 갖고 싶어서'였지만 차를 꾸미는 데에 도통 관심이 없고 카오디오도 시쿤둥한데다가 길눈도 엄청 어두운 나는 출퇴근 이외의 용도로 차를 쓰는 일이 드물었고 술을 좋아하는 바람에 차는 늘 주차장에 혼자 서 있는 일이 많았다. 다른 사람들은 데이트할 때 차가 필수라고 하는데 나는 유독 술과 담배를 좋아하는 여자애들만 좋아해서 그런지 도통 내 차에 여자를 태워본 기억이 없다. 나만의 공간은커녕 아침에 일어나면 '가만, 내가 어젯밤에 차를 어디다 뒀더라?'라고 기억을 떠올리기 바쁘기에 결국 2년 만에 차를 팔아버리고 다시 뚜벅이가 되었다.

대행사를 그만두고 작은 크리에이티브 브띠끄에 다니던 시절, 차를 몹시 좋아해서 별명이 '차돌이'인 친구가 차를 바꾸면서 자신이 타던 차를 나에게 넘겼는데 차종은 랜드로버 프리랜더였다. 졸지에 남들이 타고 싶어한다는 외제차를 갖게 된 것이다. 당시에 네비게이션이 본격적으로 보급되던 시기였는데 내 차엔 무슨 전자장치가 숨어있는 바람에 수신 방해를 심하게 받았다. 길치에 가까운 방향감각을 타고난 나는 결정적일 때마다 내비게이션 작동이 멈추는 바람에 길바닥에서 곤욕을 치르곤 했다. 차를 정비하는 것도 서툴러서 이전에 내 차를 타던 친구가 가끔 찾아와 혀를 끌끌 차며 정비소에 데려다주곤 했다. 결국 그 친구와 함께 운영하던 사무실을 접으며 차를 팔아버리고 나는 다시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자동차 없이 지냈다. 뒤늦게 만난 아내도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고 또 걷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우리 집에 자가용 없는 게 큰 문제는 아니었다. 다만 운전을 전혀 하지 않는 건 좀 아쉽다고 말했다. 나는 운전을 쉰지 십 년이 훨씬 넘었고 이전에도 남의 차는 거의 운전하지 않았으므로 렌트카를 덥썩 빌려 운전하는 게 왠지 생소하고 겁이 났다. 그러다가 용기를 내 시내 주행 연수를 나흘 정도 받아보았다. 생각보다 운전이 어렵지 않았고 예전에 운전하던 감각도 되살아났다. 자신감이 붙은 나는 아내가 없던 어느 주말, 쏘카를 불러서 빨랫감을 싣고 아리랑씨네센터 맞은편에 있는 빨래방으로 가서 빨래를 했다. 평소엔 버스를 타고 가던 곳이었는데 빨래가방이 너무 무거워서 '이럴 땐 정말 차가 있어야 하는데'라고 생각한 적이 많았기 때문이었다. 쏘카를 이용하게 된 시기와 회사를 그만두게 된 시기가 우연히 겹쳤다.

나는 사회 생할을 시작할 때부터 카피라이터로 일했고 지금까지 계속 광고회사에만 다녔다. 작은 사무실도 운영해 보았고 프리랜서로도 일해 봤다. 광고는 어렵고 복잡한 이야기를 쉽고 흥미롭게 표현해서 소비자들에게 전달하는 게 관건인데 결과물을 보면 쉬워보여도 막상 과정은 늘 어렵고 막막했다. 게다가 나는 성격상 일을 맡으면 거기서 벗어나지 못하고 하루 종일 노심초사하는 편이다. 당연히 다른 개인적인 일엔 소홀할 수밖에 없고 저녁에 초주검이 되어 귀가하면 날카로워진 신경을 다스리느라 혼자라도 술을 마시고 잠드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아내는 안주 없이는 술을 못 마시는 나의 음주습관 덕분에 자신의 몸무게도 십 킬로그램이나 늘었다고 투덜댔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가 지적한 대로 자본주의는 '많이 벌었으니 이제 그만 하면 됐다'라고 말하는 법이 없었다. 업계는 늘 위기였고 다니는 회사마다 사정이 안 좋았다. 갑을관계가 분명한 업계의 속성 때문에 불합리한 일도 많았다. 늘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아야 하는 스트레스, 촉박한 스케줄, 원래 의도대로 나오지 않는 결과물 등 괴로운 일이 많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나 자신이었다. 점점 자존감을 잃어가고 있었다. 힘든 건 그 동안의 공력이 있어 그런대로 참을 만 했지만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일들은 켜켜이 쌓여 그대로 마음 속 상처가 되었다. 전혀 행복하지 않았고 이대로 계속 회사를 다니면 계속 불행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한 달 전 회사를 그만 두겠다고 결심했다. 아내에게 제일 먼저 말했더니 '당신이 오죽했으면 이러겠어'라며 흔쾌히 동의해 주었다. 자신도 속으로는 무척 걱정이 되겠지만 나한테는 아무 걱정도 하지 말라고 했다. 마지막 출근을 하는 날 나의 뒷모습이 유난히 가벼워 보인다며 도촬을 하기도 했다. 마지막 출근을 하는 날 나의 뒷모습이 유난히 가벼워 보인다며 도촬을 하기도 했다.  사진에 얽힌 사연을 써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올려도 되느냐고 묻길래 아직은  된다고 했다. 공식적으로 얘기를 하지 않은 상태라 대행사나 광고주 분들이 알면  되기 때문이었다. 퇴직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한 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리는 법이라고 했다. 손에 쥔 공을 놓아야 더 큰 공을 잡을 수 있다는 말도 했다. 어쩌면 비슷한 시기에 다시 시작하게 된 운전과도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퇴직을 선언한 후 어느 일요일, 쏘카를 빌려 논현동에 있는 회사로 가서 개인짐을 챙겨오면서 '남이 운전하는 차만 타다가 내가 운전하는 게 이렇게 다르구나' 라는 걸 새삼 느꼈다. 앞으로의 삶도 그럴 것이다. 새벽에 일어나 이 글을 쓰는 이 순간이 나는 즐겁고 뿌듯했다. 비록 작은 차라도 내가 운전하는 삶이 시작되는 것이니까. 아내를 태우고 쏘카를 반납하러 가는 길에 내가 그 동안 운전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운전이 워낙 미숙하다 보니 나 혼자 타고 가다가 사고가 나 죽으면 몰라도 같이 타고 가다가 당신까지 죽게 만들까봐 무서워서...그 소리를 듣던 아내는 '혼자 죽는 게 걱정이지 둘이 같이 죽는 건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며 호탕하게 웃었다. 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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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에 딱 한 장

혜자 2019. 5. 25. 11:19



매년 결혼기념일마다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행사가 뭐 없을까 하다 생각해 낸 것이 '결혼기념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사진 찍기' 놀이였습니다. 첫 해는 우연히 일찍 눈을 떴으나 일어나기는 싫고 해서 무심코 사진을 찍었는데 전날 먹고 마신 술과 안주에 팅팅 부어터진 얼굴들이 재밌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해도 계속 찍다보니 어느덧 여섯 해가 지났습니다. 저희 부부는 해마다 이맘때면 여행을 하기 때문에 올해는 부산의 한 호텔에서 문제의 베드씬을 찍게 되었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그 동안 일 년에 딱 한 장씩 찍어서 올린 사진들을 바라보니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습니다. 올해는 좀 근엄하게 찍어볼까도 생각해 보았으나 결국 또 깔깔깔 웃으면서 찍게 되었습니다. 해마다 5월이면 주책 없는 커플사진을 목도하시느라 괴로워하실 만장하신 친구 여러분, 죄송합니다. 오늘 하루만 너그럽게 봐주세요. 내일부턴 정말 안 이럴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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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나는 5월에 만나 이 년 후 5월에 결혼식을 했고 또 내 생일도 5월에 있는데 이들이 나란히 이어져 있는 까닭에 해마다 오월이면 함께 여행을 한다. 어떤 때는 제주도를 가기도 하고 태국처럼 가까운 해외로 나가기도 했다. 작년엔  일본 교토와 오사카에 갔었고 이번엔 부산에서 일주일을 보내기로 했다. 여행을 떠날 때마다 어디 가서 무엇을 꼭 보거나 먹어야지 하는 뚜렷한 목적은 없다. 그저 서울이 아닌 곳에서 두 사람이 온전히 24시간을 보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토요일 정오 서울역에서 출발하는 KTX를 탄 우리들은 열차 안에서 더 이상 커피나 간식을 팔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바람에 부산까지 커피를 마시지 못하고(자판기가 있었으나 현금도 없었고 캔커피를 마시기는 싫었으므로) 괴로워하다가 겨우 도착한 부산역에서는 커피 대신 어묵을 한 꼬치씩 사 먹고 호텔로 향했다. 밖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미리 예약한 중앙동의 한 호텔에 올라가 짐을 풀고 다시 1층으로 내려와 투썸플레이스에서 커피를 한 잔씩 마셨다. 창밖으로 떨어지는 비를 맞으며 걸어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내는 여행지에서 비를 만나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다시 21층 객실로 올라온 우리는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한 뒤 각자 침대에 누워 가져온 책들 - 나는 이명수 선생이 전에 보내준 [내 마음이 지옥일 때]와 서울역에서 산 김진영의 [마당이 있는 집], 아내는 서울역에서 산 김훈의 [연필로 쓰기] - 게으르게 뒤적이다가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비가 와서 그런지 이따금씩 네온이 반짝이는 중앙동과 광복동 거리는 더 이국적으로 보였다. 우리는 이명세 감독의 영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 등장해 더 유명해진 40계단에 올라 '이곳은 6.25 때 내려온 피난민들의 애환이 담긴 곳'이었다는 설명문을 읽고 정말 거기 쓰여있는 대로 영도다리가 보이는지 바다쪽을 쳐다보았다. 계단 위 왼쪽으로 쭉 이어지는 인쇄골목을 지나 국제시장에도 잠깐 들러보았다. 몇 년 전 여기에 있는 '개미집'에 와서 왕창 먹고 마셨던 추억을 소환했다. 사실은 예약해 놓은 식당으로 사는 길이었는데 아직 예약시간이 되지 않았기에 시간을 떼울 겸 거리를 천천히 배회한 것이었다. 

 

드디어 여섯 시가 되어  아내가 인스타그램에서 만나 전부터 눈여겨 봤다던 <유노우>라는 일식요리집으로 갔다. 처음엔 사장님 혼자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기에 우리는 우리는 카운터 자리에 앉아서 음식이 준비되기를 기다렸다. 곧 아름다운 여직원도 나타났다. 이 분은 식당의 첫 스텝인데 5살 때 고열로 청력을 잃었다고 한다. 지금은 수술도 하고 보청기를 끼고 있어서 소통을 할 수 있지만 작은 소리는 잘 못 듣는다는 얘기를 인스타그램에서 읽었다. 사장님이 어렸을 때 친구나 동네 형 등 장애인들과의 좋은 추억이 있어서 얼굴도 보지 않고 청해서 이 분을 뽑았다는데 결과적으로 너무 예쁘고 손님들을 세심하게 살피는 성실한 직원이었다.

 

우리는 생선회 모듬과 키조개튀김 등을 시키고 술은 사케를 주전자에 담아달라고 했더니 정말 날렵한 주석주전자가 나왔다. 주석이 차가운 기운을 오래 지켜준다는 설명도 들었다. 일식집은 카운터에 앉으면 주방장이 생선을 요리하는 모습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특전이 주어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속도로 오이를 얇게 저며 우리를 놀라게 하던 사장님은 생선을 가져와 날렵하게 회를 치기도 하고 젖은 천에 감쌌던 오징어를 풀어 가볍게 칼집을 낸 뒤 썰어 접시 위에 담기도 했다. 꼬챙이에 생선을 샤샤샥 꿴 뒤 오른쪽 가스레인지로 달려가 굽기도 했다. 잠시도 쉬지 않고 바삐 움직이는 모습이 흡사 묘기대행진을 보는 것 같았다. 

 

세 테이블에 갈 모듬회를 함께 만들어 한 그릇씩 담아 냈는데 우리에게 온 건 분재처럼 작은 나무들 사이로 각종 회가 누워 있어서 마치 '숲을 지나 회를 먹으러 바다로 가는 느낌이 들었다. 회도 맛있고 술도 좋아서 아내와 나는 그 만족스러움에 거의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아내의 말에 의하면 사장님인 유병찬 요리사가 나온 '츠지요리학교'(가게 앞 명판에 표시가 되어 있다)는 커리큘럼도 빡세고 되게 힘든 곳이라고 한다. 

 

키조개튀김튀김이 나왔는데 정말 바삭하고 맛이 좋았다.어느덧 사케 주전자 하나가 다 비워졌다 . 원래는 한 주전자 마시고 나면 소주로 바꾸기로 했는데(사케는 비싸니까) 아내가 사케 한 주전자만 더 마시면 안 되냐고 묻기에 망설이지 않고 사케 한 주전자를 더 시켰다. 오늘 같은 날 안 마시면 도대체 언제 이렇게 맛있는 안주에 사케를 마신다는 말인가. 죽순튀김과 표고새우튀김 등 다양한 음식이 서비스로 나왔고 마지막으로 대선소주를 한 병 시키니 마침 금태구이까지 나왔다.  우리는 금태 두 마리의 크기가 서울보다 30%는 더 큰 것 같다고 하며 엄지 두 개를 세워 보였다. 

 

 

"가게를 연 지 한 일 년 되셨죠?"라고 아내가 물으니 그렇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사장님은 원래 충청도가 고향인데 부인이 부산 사람이라 부산에 정착하게 되었고 곧 둘째딸이 태어난다고 했다. 처음엔 좀 외진 곳이라 선배들이 여기 가게 여는 걸 말렸는데 마침 부산에서 유명한 블로거 한 분이 오셔서 가게를 포스팅해준 뒤부터는 전화를 받느라 일을 못할 정도로 손님이 몰리기도 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하면서 마침 오늘 그 블로거 커플이 오셨다고 하는데 가르키는 손을 보니 바로 우리 옆자리 커플 손님이었다. 그 블로거는 술과 음식이 너무 맛있는데 마침 자기가 임신 중이라 지금 술을 못 마신다고 아쉬워했다. 

 

배가 너무 불렀다. 남은 소주는 내가 마시고 사케는 아내가 해치우기로 했는데 결국은 소주와 안주를 아주 조금 남겼다. 부산 여행 첫 날의 첫 식사는 완벽했다. 모든 식재료는 훌륭했고 유병찬 요리사의 요리는 노련했다. 식기 하나하나에도 공을 들인 태가 역력했다. 너무 뿌듯하고 고마운 마음에(사실은 아내가 그렇게 하라고 해서) 계산할 때 10퍼센트를 더 얹어달리고 했더니 처음엔 사양하다가 곧 받겠다고 하고는 직원에게 고생했다며 바로 현금으로 바꾸어 주었다. 음식 가격이 서울의 70% 수준이라고 아내가 귀뜸을 했다. 다시 밖으로 나와 비그친 거리를 천천히 걸어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여행을 한다는 것은 일상을 벗어나는 즐거움도 있지만 이렇게 새로운 사람과 장소를 만나는 기쁨도 있다. 국제시장 근처다. 부산 중구 광복중앙로 14-13. 

 

 

#부산여행 #유노우 #yoo_no_woo #남포동맛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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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를 한, 영, 일로 읽다!

어렸을 때부터 많이 들어온 말 중 하나가 '우리는 언제 노벨상을 타나?'였습니다. 특히 노벨문학상에 대한 얘기가 많았습니다. 최인훈이나 이문열 같은 작가가 타지 않을까 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최인훈 선생은 이미 돌아가셨고 소설가 이문열은 젊은 날 쌓아올렸던 위상을 스스로 허물어뜨린지 오래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는 옆나라 일본의 가와바타 야스나리나 오에 겐자브로가 노벨문학상을 탄 것을 부러워하긴 해도 그 상을 타기 위해 그들처럼 번역에 제대로 힘을 쏟거나 중견 작가들의 작품을 해외에 소개하는 일은 게을리 했던 것 같습니다. 최근엔 다행히 고은이나 황석영 같은 작가들이 노벨상 후보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만약 그 추세를 몰아 고은이 덜컥 수상자가 되어버렸다면 상을 주는 스웨덴 한림원이나 받는 우리나라 사람들이나 죄다 곤혹스러워지지 않았을까 하는 상상도 해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들려 온 한강 작가의 맨부커상 수상 소식은 참으로 반가웠습니다. 오매불망 노벨상만 바라보고 있던 우리들에게 살만 루시디도 타고 가즈오 이시구로도 탄 맨부커상을, 그것도 오르한 파묵 같은 쟁쟁한 작가들을 제치고 한강이 수상을 했다는 소식은 정말 대단한 사건이었지요. 저는 그 뉴스를 접하고서야 진작에 사놓고 읽지는 못했던 한강의 연작소설집 [채식주의자]를 펼쳐 읽기 시작했습니다. 소설은 벌써 베스트셀러로 떠오르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의 또 다른 역작 [소년이 온다]의 감동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1980년 광주에 대한 이야기를 그렇게 기발한 방식으로 현장에 밀착하면서도 가슴 서늘하게 그리는 작가가 또 있을까요. 그런데 [채식주의자]는 어느 날 갑자기 육식을 거부하고 브래지어도 풀어버린채 채식주의자가 된 '평범했던' 여인을 통해 소년이 온다와는 전혀 다른 문제의식과 감동을 높은 예술적 성취와 함께 전달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가을 아내인 윤혜자 씨와 저는 로버트 파우저 교수님과 함께 인사동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습니다. 곧 미국으로 돌아가는 파우저 교수님의 배웅하는 자리였지요. 우리는 파우저 교수님의 역작 [외국어 전파담] 출간 기념 강연 시간에 나누었던 얘기를 다시 꺼냈습니다. 파우저 교수님은 그때 한강의 [채식주의자] 얘기를 했습니다. 자신은 영어판과 일어판으로는 이미 읽었고 한글로는 아직 안 읽었는데 아마도 원작인 한글판은 영어로 쓰여진 작품과는 사뭇 느낌이 다를 것 같다고 했습니다. 문화의 차이가 번역에도 나타난다는 것이었죠. 그래서 그날 한국어판도 읽어보시라고 제가 즉석에서 책을 한 권을 사드렸습니다. 이렇게 되면 아마도 우리나라에서 3개국어로 그 작품을 다 읽은 사람은 파우저 교수님이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생각하면서. 그리고 다시 가을의 술자리. 윤혜자 씨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소재로 한 강연을 기획하고 있었습니다. 모국어인 영어는 물론 일어와 한국어에도 능통한 파우저 교수님이 세 나라 언어로 읽은 소설의 차이점과 공통점에 대해 이야기하며 번역의 본질을 짚어보는 특강을 해보면 매우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었습니다. 물론 그에 대해서는 파우저 교수님도 긍정적인 반응을 보여주고 있었구요. 마침 저와 윤혜자 씨가 운영하고 있는 독서모임 '독하다 토요일' 시즌 2가 끝나가고 있었는데 시즌 3을 시작하기 전에 오픈 특강을 한 번 하면 좋을 것 같았습니다. 즐거운 작당이었습니다. 결국 파우저 교수님은 다음 해 봄 어느날 특강을 약속하고 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정말로 봄이 왔고 파우저 교수님도 돌아왔습니다. 우리는 두 번째 토요일인 2019년 5월 11일 토요일, 광화문과 서소문 사이에 있는 '청춘여가연구소'에 모였습니다. 파우저 교수님의 특강 '[채식주의자]를 한, 영, 일로 읽다!'라는 특강을 듣기 위해서였죠. '독하다 토요일'은 회원제로 운영하는 모임이라서 늘 7~8명 정도의 사람들이 모여 책을 읽고 토론을 하다 헤어지곤 했는데 이 날만큼은 써클의 문을 열어 회원이 아닌 분들도 참석할 수 있게 했습니다. 보다 많은 분들이 모처럼의 좋은 강연을 접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습니다. 윤혜자 씨와 저는 간식을 사들고 피어선빌딩 10층으로 올라갔습니다. 오후 2시가 지나자 한 둘씩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임기홍 씨나 서동현 씨, 손연영 씨, 김성희 씨 같은 기존 회원들도 있었고 예주연 씨, 콜린 마샬 씨, 김수진 씨처럼 처음 뵙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3시 10분 전쯤 로버트 파우저 교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먼저 윤혜자 씨가 나와 오늘 강연을 기획하게 된 이야기와 독하다 토요일이라는 모임에 대한 짧은 소개를 했습니다. 그리고 장소를 대여해 준 '청춘여가연구소'의 정은빈 대표가 나와 피곤하고 외로운 현대사회에 이런 장소에서 같은 관심사를 나눔으로써 사람들을 '사회적인 가족'으로 엮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사업을 시작하게 된 배경에 대해서도 짧게 코멘트를 했습니다. 그리고 이어 제가 나가서 다시 독하다 토요일을 하게 된 이유를 시작으로 제가 요즘 토요일마다 벌이고 있는 다른 기획들(토요 식충단, 토요워킹퀸 등)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전 스피치가 두 번이나 있었고 파우저 교수님도 뒤에 앉아 있는 상태였기에 제 얘기에 귀를 기울이는 분들은 없었습니다. 비난과 조바심의 눈초리를 의식한 저는 서둘러 이야기를 끝맺고 파우저 교수님에게 강의를 부탁드렸습니다.

파우저 교수님은 1997년에 [한국문학의 이해]라는 책을 영어로 번역하던 에피소드로 이야기를 시작했습니다. 당시엔 문학이론을 번역하는 일이 드문 시기였고 그 책은 현대와 고전을 아우르는 '문학 사례'가 많았는데 그걸 번역하면서 번역의 어려움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Beautiful English'이라는 정의에 대해 회의를 품게 된 파우저 교수는 번역 작품도 일정한 문학성은 가지고 있어야겠지만 그게 반드시 영어권의 고전작품들 같은 품격의 형태일 필요는 없다는 생각 - 본인은 그것을 '1인야당'이라고 표현- 을 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당장 한국에 와서 생활하면서 부딪히는 '물은 셀프' 같은 표현을 어떻게 번역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하다는 것이었죠.

파우저 교수님은 한국과 일본에서 각각 13년 정도 살면서 언어를 다루고 가르쳤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전공이 문학이면서도 윤혜자 씨와 냈던 책은 인문서인 [미래시민의 조건]이었죠. 그 후에 나온 두 권의 책도 마찬가지였군요. 그러다보니 문학이나 번역에 관해 이야기를 듣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습니다. 파 교수님(트위터 시절부터 유명했던 그의 애칭)은 '오바마 케어' 가입 안내서나 세금 보고서 같은 글을 번역할 때는 문학성이 필요 없지만 문학작품을 번역할 때는 정확성과 더불어 문학성도 겸비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오에 겐자부로가 노벨문학상 수상 수락연설에서 읽었던 유명한 글 - [설국]으로 먼저 노벨상을 탔던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수상소감을 끌어와서 더 화제였죠 - '일본은 회색지대다'라는 말처럼 번역도 정확성과 문학성이 조화를 이루어야지 극단적인 논쟁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러면서 일본 학생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설국]의 첫 문장을 예로 들었습니다.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 신호소에 기차가 멈춰 섰다."

우리는 한글로 먼저 읽어 그 뜻을 파악하고 일어, 영어로 된 문장들을 차례로 살펴보았습니다. 파 교수님이 뭔가 번역에 이상한 게 없느냐고 물으니 당장 '눈의 고장'이라는 표현이 어색하다는 반응이 튀어나왔습니다. 국경이라는 말의 뜻도 애매하다는 질문이 이어졌구요. 파 교수님은 일단 에도시대에 막부 별로 나뉘어져 있던 일본 지역의 역사를 이해해야 '국경'의 뜻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점을 비롯해 '밤의 밑바닥이 하얘졌다'라는 표현이 어떤 풍경을 얘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설명을 했고 그런 저런 사정들을 생각하면서 다시 한 번 읽어보면 우리말이나 일어에 비해 영어로 된 문장에서는 '드라마'가 사라지고 건조한 묘사만 남는 특징이 있음도 지적했습니다. 이는 번역 언어로 사용될 때 각각의 언어가 갖는 기본적인 태도에 대해서도 방향성을 가늠할 수 있는 좋은 예였습니다. 파 교수는 '밥상이 들어왔다'라는 문장이 영어로 번역될 때는 과연 어떤 문장이 되어야 하는가를 물어서 모두들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영어로 하면 식탁이 방으로 걸어들어가는 모습이 연상되어서였죠. "형이 술을 천천히 마셨다."라고 말할 경우도 형을 'Brother'라고 써야할지 'hyeong'이라고 써야할지 고민되는 지점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채식주의자]를 번역한 Deborah Smith의 '오역 논쟁'에 대해 얘기를 꺼냈습니다.

드보라 스미스는 교수가 아닌 전문 번역가라는 점이 특이한 지점이라고도 할 수 있는 인물이었는데 그것과는 상관 없이 소설 내용 전체를 너무 '영국화 했다'는 점이 지적을 받았고 이는 번역자 자신도 어느 정도 시인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백 퍼센트 정확한 번역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하며 결국 번역이란 것은 어느 정도 '창의적'이어야 함을 주장했는데 파 교수는 그에 대해 뭐라 말하기 힘든 입장이었음을 고백했습니다. 미국 출신의 백인 남성인 파우저 교수가 드보라의 편을 들면 역시 백인은 어쩔 수 없어, 라고 생각하게 되기 쉽고 반대파의 입장에 서면 한국에서 오래 생활한 사람이라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오해를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같이 번역 분야에서 일하고 있는 콜린 마샬 씨를 괜히 끌어들여 웃음을 자아내게 했습니다. 파 교수의 지목을 받은 콜린 마샬 씨는 '한국어로 쓰여 있는 소설에서는 아내를 약간 비하하는 듯한 남편의 심리가 잘 나타나 있는데 번역을 하면서 그런 뉘앙스들이 다 사라진 게 아닌가'라는 날카로운 의견 및 질문을 펼쳤고 파 교수도 맞다고 하며 그래서 "여보, 지금 뭐하고 있는 거야, 여기서?"라는 문장을 영어로 옮겼을 때 여보를 'Darling'이라고 옮긴 것이 얼마나 엉터리인지를 예로 들었습니다. 똑같은 'Darling'이라도 맥락에 따라서는 사랑스럽게 들리기도 하고 비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는 것이죠(일어로는 마초적인 게 느껴지고 영어로는 신사가, 한국어로는 교양 있는 남편이 느껴진다 했습니다). 영국식과 미국식을 오가며 목소리 연기를 펼치는 파 교수님 덕분에 강의를 듣던 사람들이 모두 깔깔깔 웃었고 '달링'은 단박에 우리들만의 유행어로 등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no'라는 단순한 단어 하나에 무려 88개의 각각 다른 의미가 들어 있다는 학계의 보고를 소개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에서 한국어를 가르쳤던 파 교수는 어미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따라 가르치는 게 정말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했던 교수법에 대한 얘기도 들려주었습니다. 말끝을 '~해요'"로 처리하는 이른바 '욘사마적 교과서'라고 한다나요. 아무튼 비빕밥과 'Mixed Rice'는 다른 것인데 파 교수는 어중간하게 타협을 하느니 차라리 'Bibimbab'이라 표기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리고 드보라 스미스의 [채식주의자] 논쟁을 다룬 뉴요커의 기사를 인용하며 번역문장을 왜 읽느냐로까지 생각의 지평을 넓혀갔습니다. 자기는 문학을 좀 가벼운 느낌으로 즐기고 싶은데 요즘 미국에서는 다소 '있어보이려는 의도' 때문에 문학이 소비되기도 함을 얘기했습니다('Political Correct).

강의가 마무리될 때쯤 소설 등단 준비를 하고 있는 김하늬 씨가 '드보라 스미스가 번역을 할 때 한국적인 특수 상황 - 남편의 지나친 여성 비하, 다른 사람들의 억압적 강요 - 들을 모두 약화시킴으로써 오히려 서양 심사위원들이 선택당하기 쉽게 만든 것은 아닐까?'라는 날카로운 질문을 했습니다. 저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라 보충 질문을 더했습니다. 번역자가 작품을 그토록 두리뭉실하게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강이라는 작가가 쓴 원작의 힘이 너무 강력해서 수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라고. 그림을 그리는 이창희 씨는 더 나아가 드보라가 수상을 하지 못할까봐 의도적으로 작품을 '훼손'한 것은 아닐까 의심하면서 만약에 그렇다면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파 교수는 그 질문들에 어느 정도 동감하면서도 모르긴 몰라도 작가가 여성이라 그에 대한 배려도 조금은 있었을 것이라는 얘기를 슬쩍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상이라는 게 항상 시대성을 반영하기 마련이라는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자꾸 드보라를 공격하는 듯한 분위기로 흐르니 김하늬 씨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번역 때문에 좋았던 점에 대해서도 살펴보자'라는 제안을 했고 파 교수가 그 애기를 받아서 번역의 훌륭한 점에 대해서 도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아까도 얘기했지만 'Good English'라는 명목 하에 원작을 바꾸어 '좋은 작품'으로 만드는 번역은 어떠한 경우에도 반대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마지막엔 이창희 씨의 소개로 왔다는 미술학 전공자 황규원 씨가 파 교수에게 작품을 세 언어로 모두 읽은 사람으로써 언어별로 그려지는 그림이 어떻게 다르던가에 대해 질문을 던지기도 했습니다.

정말 흥미진진하고 즐거운 강의였고 수강생들의 열의도 대단했습니다. 보통 강의가 시작되고 시간이 좀 흐르면 흐트러지기 마련인데 이날 모인 사람들은 끝나는 순간까지 단 한 사람도 주의가 흐트러지지 않고 모두 반짝이는 눈으로 강의를 경청했습니다. 그리고 강의 중간 PPT 화면을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다 카메라로 찍어서 분위기를 흐리는 사람이 하나쯤 있기 마련인데 이날은 열심히 필기는 해도 그런 짓을 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어서 기뻤습니다.

뒷풀이는 윤혜자 씨가 추천을 했는데 저도 한 번 가본 적이 있는 서대문의 '고향식당'이라는 음식점이었습니다. 가게는 오래되어서 좁고 지저분했지만 음식만큼은 정말 맛있는 곳입니다. 특히 주인 아주머니가 직접 담근 김치가 일품이고 제육볶음도 무시무시하게 두꺼운 곳이었습니다. 총 13명이 앉아 술과 음식을 마음껏 즐기고 일어섰는데 일인 당 1만6천 원밖에 나오지 않아서 모두들 깜짝 놀랐다는 후문입니다. 음식점을 나서 집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고 파 교수님을 비롯한 몇몇은 다시 버스를 타고 성북동으로 이동해 '성북동 만섬포차'에서 세꼬시와 계란말이 등등을 시켜 이차를 하고 헤어졌습니다. 좋은 강의와 좋은 청중이 만나 서로 행복해했던 밤이었습니다. 윤혜자 씨와 파 교수님은 기분이 너무 좋은 나머지 즉석에서 뭔가 또 모종의 일을 꾸몄는데, 아직은 발설할 단계가 아니므로 당분간은 비밀에 붙이도록 하겠습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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