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가 고민이 있을 때 당신은 어떻게 하는가? 나는 길을 걷는다. 하염없이 걷다보면 고민 해결의 실마리가 보일 때도 있고 마음이 좀 가라앉기도 하기 때문이다. 물론 대부분은 아무 생각이 없어지지만. 그런데 머릿속이 어지러울 때 길을 좀 걷는 게 아니라 아예 지리산을 시작으로 백두대간 종주를 결심한 대책 없는 남자가 있다. 원순 씨다. 지금의 서울시장 박원순 씨 말이다.

 


“무식한 자가 일을 저지른다”

 

2011년 7월 19일부터 49일간 계속된 박원순의 백두대간 종주기 [희망을 걷다] 본문은 이런 문장으로 시작한다. 희망제작소 등등 사회적기업 활동으로 평소 일정도 초분 단위로 쪼개 써야 하는 형편이고 등산 경험이라고는 지리산 등반 두어 번이 전부인 데다가 결정적으로 심한 평발이라 남들보다 걷는 게 훨씬 더 힘든 체질이라는 걸 알면서도 덜컥 저질러버린 자신의 무모함을 개탄하며 하는 소리다.

 

박원순은 “이제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묻기 위해 산에 올랐다 한다. 사색의 시간이 절대로 필요한 그 중요한 순간에 그는 오히려 육체적 괴로움을 택한 것이다. 탁월한 선택이 아닐 수 없다. 원래 몸과 마음은 그런 식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을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시작부터 좌충우돌 박원순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지경이다. 사실, 남자들끼리 매일 이 산 저 산 옮겨다니는 얘기가 무슨 재미가 있겠는가. 그러나 이 책은 재미가 있다. 단순한 등산이 아니라 백두대간을 한 발 한 발 힘겹게 밟아가는 동안 박원순이 버리고, 가려내고, 정리하고, 듣고, 배우고, 자라는 생각의 모습들이 때로는 여유롭게 때로는 비장하게 또는 유머러스한 문장들로 촘촘히 들어있기 때문이다.

 

놀라운 건 박원순의 처절하도록 철저한 기록 정신이다. 등산을 해본 사람이면 다 공감하겠지만 누구나 등산길에 나서서 한나절만 지나면 발이 아프고 기운이 쪽 빠져 아무 것도 하기 싫어진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든 휴식시간마다 우리의 원순 씨는 작은 수첩에 메모를 하고 또 했다. 그리고 산장에 들어 모두들 곯아떨어지거나 자유롭게 휴식을 취하는 시간에도 홀로 컴퓨터 앞에 앉아 하루 종일 그동안의 일기를 정리하곤 했다.

 


누군가를 알고싶다면 그 사람과 여행을 해보라는 말이 있다. 이 책은 박원순이라는 인간이 궁금해 함께 여행을 떠나고 싶은 사람들을 위한 솔직하고 친절한 안내서와 같다. 그는 여행을 하면서 끊임없이 일행들과 대화하고 질문하며 자연과 교감한다. 그러니 가는 길마다 새록새록 새로운 이야기와 성찰이 피어난다.

 

예를 들어 육십령이라는 고개는 예전에 산적들이 들끓어서 육십 명이 모여야만 비로소 고개를 넘어가던 곳이다. 그런데 이런 사실을 미리 알지도 못하고 나중에라도 알려고 하지도 않는다면 같은 곳을 가더라도 “와, 여기 무척 험하네.”에서 그치고 말 것이다. 만약 김훈이 아무 생각 없이 자전거를 타고 경치 좋은 산천만 구경하고 돌아다녔다고 생각해 보라. [자전거 여행] 같은 책이 나왔겠는가.

 


“무기수 중에서 끝까지 살아남는 사람은 들어오자마자 구두를 닦는 사람”이란다. 희망이라는 단어를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이 더 오래 살기 때문이란다. 이 말은 박원순이 함께 팀을 꾸려 온 백두대간 종주팀 ‘다섯 손가락’의 석 대장님이 쉬는 시간에 박원순에게 해준 말이다.

 

박원순은 여행의 의미를 확충시킬 수 있는 감성과 지식을 둘 다 소유하고 있는 사람이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그 지역에 얽힌 일화와 전설을 들춰내고 거기에 얽힌 고사성어를 떠올린다. 어떤 곳에서는 [장자]의 도척 편에서 공자가 도척이라는 도둑을 설득하러 갔던 이야기를 꺼내기도 하고 어떤 곳에서는 신영복 선생이 즐겨 이야기 한다는 ‘독버섯의 우화’를 떠올리기도 한다. 힘든 산행 도중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라는 책이나 시시포스의 신화를 되새겨보기도 한다. 쏟아지는 여름 빗속에서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이 강산의 미래를 걱정하는가 하면 고장난 스마트폰 때문에 더 이상 SNS를 할 수 없게 되자 “드디어 난 세상을 버렸다”라고 귀여운 한탄을 하기도 한다.

 


이 책은 백두대간 깊은 산속까지 서울시장 보궐선거 얘기가 스며들어와 결국 정치의 바다로 뛰어들 것을 결심하고 안철수 후보와의 만남 때문에 5일 정도 일정을 앞당겨 산을 내려가는 것으로 해서 끝을 맺는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것처럼 두 사람은 극적인 단일화를 이루어 냈고 박원순은 서울시의 시장이 되었다.

 

사색의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다. 골방에 숨어 몇 날 며칠 끙끙대는 것도 방법이다. 그리고 박원순처럼 ‘무조건 저지르는’ 방법도 있다. 어느 것이 더 옳은 길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다만 그 사색의 과정과 결과가 중요하다. 박원순의 사색은 누구보다도 의욕적으로 합리적으로 일하면서도 세상의 어두운 부분을 놓치지 않으려 노력하는 현재의 시정을 통해 그 빛을 발하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 더 멋진 건 책 뒷부분에 적혀있는 ‘다섯 손가락’ 석락희, 박우형, 김홍석, 홍명근, 그리고 보급대장 신충섭이 쓴 글이다. 20대부터 50대까지 모든 멤버들이 하나같이 박원순을 ‘원순 씨’라고 부르고 있지 않은가! 박원순 씨는 정말 멋진 사람이다.

 

 

2월 어느날, 일산에서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던 날 우리는 강남 교보문고에 들렀다가 이 책과 마주쳤다. 여자친구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이 책을 다섯 권이나 사더니 우리가 읽을 책 한 권만 빼고 모인 친구들 부부에게 선물로 주었다. 결과적으로 여덟 사람에게 책을 선물한 셈이다. 그러나 아마도 내 친구들은 여덟 개의 ‘희망’을 선물 받았다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 친구들도 꽤 멋진 인간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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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꿀벌의 언어].지난 주말에 우리집에 와서 술을 마시던 친구가 최근에 읽은 책 중 최고라며 추천한 책인데 알라딘에서 중고서적을 주문했더니 오늘 도착했네요. ‘이재룡의 문학 이야기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데 우리나라에서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맨 처음 번역한 이재룡 교수가 2004 1월부터 2005 12월까지 [현대문학]에 연재했던 글을 모은 평론집이랍니다.

 

택배봉투를 열고 표지를 넘기니 누군가 지인에게 선물했던 흔적이 남아 있네요. 서글픈 일입니다. 책을 열어보면 압니다. 책을 받은 후 단 한 장도 읽지 않고 곧장 내다판 게 분명하군요. 이 책을 선물한 남자는 그날 저녁에 “모처럼 그녀에게 좋은 책을 선물했다는 흐뭇한 마음으로 한 잔 했을지도 모르는데 말이죠. 그녀 대신 저라도 열심히 읽고 나중에 독후감을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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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집에 와서 술을 마시던 친구가 책을 한 권 추천했습니다. 책이름은 [꿀벌의 언어]. 최근에 읽은 책 중 최고랍니다. 추천자는 남정욱이라는 교수님인데, 지금 둘이 소주를 다섯 병이나 마셨으므로 믿으란 말은 못하겠습니다. 일단 제가 먼저 읽어보고 독서일기를 쓸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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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빌 브라이슨 식의 유머를 구사한 글이 읽고 싶어졌다. 빌 브라이슨 식의 유머를 읽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당연히 빌 브라이슨이 쓴 글을 읽으면 된다. 며칠 전에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미국 산책]이라는 신간이 서점에 나왔다는 기사를 본 기억이 있지만 그걸 읽으려면 당장 서점까지 가야 하므로 그냥 집에 있는 책을 찾아서 읽기로 했다. 책꽂이를 찾아보니 [나를 부르는 숲]이 있었다.


그런데 320페이지에 내가 좋아하는 초록색 3M 테잎이 붙어있는 걸 보니 빌 브라이슨이 애팔래치아 트레일 종주를 끝내지 못한 것처럼 나도 이 책을 끝까지 완독하지는 못한 모양이었다. 나는 [나를 부르는 숲]이라는 책이 나오도록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빌 브라이슨의 친구 카츠가 등장하는 장면을 읽다가 이상한 문장들을 발견했다. 어떻게 이상하냐면…음. 매우 ‘좀스럽게’ 이상하다. 제정신인 사람들이라면 절대 나누지 않을 어색한 대화들이 들어있는 것이었다. 길게 설명하는 것보다 일단 이 책 88페이지에 있는 메리 앨런이란 여자와 빌 브라이슨의 대화를 인용해 보자.

 


“우리도 거기서 시작했어. 여기까지 13.44킬로미터밖에 안 돼.”
그녀는 마치 집요한 파리라도 흔들어 쫓아내려는 듯 머리를 강하게 흔들며 “22.7킬로미터가 맞아.”라고 말했다.
“아니야. 정말로 그건 13,44킬로미터밖에 안 돼.”


 

13.44킬로미터, 22.7킬로미터…황당한 수치들이다. 난 우리가 대화 중에 절대로이런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에 거액을 걸 용의가 있다. 이건 빌 브라이슨 식의 유머와도 거리가 있다. 그런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아마 미터법 표기 때문일 것이다. 미국 사람들은 킬로미터보다 마일을, 밀리리터보다 온스나 갤론을 많이 쓴다. 물론 그건 그들의 잘못이다. 이미 전 세계적으로 미터법이 기준이 된 마당에 아직도 자기들에게 익숙한 단위를 멋대로 쓰는 건 엄연한 반칙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책에 나오는 대화까지 “13.44킬로미터” 식으로 번역하는 건 좀 오버가 아닐까? 내 짐작엔 이건 번역자인 홍은택의 생각은 아닐 것이다. 출판사가 정한 엄한 기준이 있거나 관련 법규를 지키려다 보니 일어난 해프닝일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짜장면을 짜장면이라 부르지 못하고 자장면이라 해야 했던 우리의 웃긴 과거가 떠올랐다. 뭐든지 억지로 하는 건 좀 이상해지기 마련이다. 이봐요, 빌. 당신이 원체 웃기기도 하지만 한국에 있는 당신 책에는 이렇게 당신이 의도하지 않았는데 웃긴 일도 좀 있다오. 듣고 있나요, 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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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잎들은 속수무책으로 떨어져내렸다. 그것들의 삶은 시간에 의하여 구획되지 않았다. 그것들의 시간 속에서는 태어남과 절정과 죽음과 죽어서 떨어져내리는 시간이 혼재하고 있었다. 그것들은 태어나자마자 절정을 이루고, 절정에서 죽고, 절정에서 떨어져내리는 것이어서 그것들의 시간은 삶이나 혹은 죽음 또는 추락 따위의 진부한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어떤 새로운, 절대의 시간이었다. 꽃잎 쏟아져내리는 벚나무 아래서 문명사는 엄숙할 리 없었다. 문명사는 개똥이었으며, 한바탕의 지루하고 시시껍적한 농담이었으며, 하찮은 실수였다. 잘못 쓰여진 연필 글자 한 자를 지우개로 뭉개듯, 저 지루한 농담의 기록 전체를 한 번에, 힘 안 들이고 쓱 지워버리고 싶은 내 갈급한 욕망을, 천지간에 멸렬하는 꽃잎들이 대신 이행해주고 있었다. 흩어져 멸렬하는 꽃잎과 더불어 농담처럼 지워버린 새 황무지 위에 관능은 불멸의 추억으로 빛나고 있었다.    

 

 밑줄을 긋는다는 것은 언젠가는 그 부분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이기에. 불현듯 김훈의 [풍경과 상처]를 열어 맨 처음 밑줄 그었던 문장들을 읽는다. 도대체 떨어지는 벚꽃들을 이토록 찬란하게 추모해도 되는 일인가. 아닌밤중에  마음속에서 벚꽃들이 지랄염병 흩날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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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친이 점심 때 건대입구역에서 비즈니스 미팅이 있다는 말을 듣고 쭐레쭐레 쫓아가 롯데백화점 푸드코트에서 그녀가 비즈니스를 하는 동안 옆에서 꾸역꾸역 점심을 얻어먹고 혼자 지하1층 반디앤루니스에 들른 나는, 느닷없이 이 땅의 문화 부흥에 미약한 힘이나마 보태야 한다는 일말의 책임감과 나의 페친인 류근 시인을 더욱 긍휼히 여겨야 한다는 갸륵한 마음이 두서없이 일어나 마침내 그의 시집을 찾아내고야 만 것이었다.

[상처척 체질]…”아 제목도 참 슬퍼…” 하다가 “아니지. 이런 건 류근 식으로 아 씨바 제목도 조낸 슬퍼…해야지” 라고 마음을 고쳐먹고 문제적 시집을 펼친 것이었다. 페이지마다 술냄새가 진동하는 이 퇴폐적인 시집은 뒤적뒤적할수록 읽을 만한 시들이 꽤 많이 나오지만 나는 특히 ‘유부남’이라는 야비한 시와 ‘가족의 힘’이란 뻔뻔한 시가 마음에 쏙 드는 것이었다. 일단 ‘가족의 힘’이라는 시를 소개한다.

 

 


가족의 힘

                          류근


애인에게 버림받고 돌아온 밤에
아내를 부둥켜안고 엉엉 운다 아내는 속 깊은 보호자답게
모든 걸 다 안다는 듯 등 두들기며 내 울음을 다 들어주고
세상에 좋은 여자가 얼마나 많은지
세월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지
따뜻한 위로를 잊지 않는다
나는 더 용기를 내서 울고
아내는 술상까지 봐주며 내게 응원의 술잔을 건넨다
아 모처럼 화목한 풍경에 잔뜩 고무된 어린것들조차
아빠 힘내세요. 우리가 있잖아요. 노래와 율동을 아끼지 않고
나는 애인에게 버림받은 것이 다시 서러워
밤늦도록 울음에 겨워 술잔을 높이 드는 것이다
다시 새로운 연애에 대한 희망을 갖자고
술병을 세우며 굳게 다짐해보는 것이다

 

 

 

다들 류근 시인이 김광석의 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의 가사를 쓴 사람이란 것은 아실 것이다. 이 시를 읽고 ‘유부남’이라는 시의 내용까지 궁금해진 분들은 나처럼 돈을 내고 이 시집을 사시기 바란다. 물경 팔천 원밖에 안 한다. 그마저 비싸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알리딘 중고서점을 뒤져보는 것도 좋겠다. 류근의 시들이 야리야리하고 좀 슬프고 많이 웃기긴 하지만 연애편지에 인용하기에는 지나치게 궁상맞거나 자학적이라 다만 한 번 읽고 즉시 내다 판 놈들도 대략 많을 것이란 것이 나의 짐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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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기 전 햇볕이 따스하게 비치는 거실 창가에 앉아 로저 젤라즈니의 SF단편 [캐멀롯의 마지막 수호자]를 읽었다. 


이 소설은 뉴욕의 밤거리에서 세 명의 강도에게 둘러싸인 백발의 노인이 지팡이로 그들을 가볍게 제압한 뒤 운수점을 치는 여인의 집으로 들어서며 시작된다. 알고 보니 이 노인은 성배를 찾아 헤매는 아서왕의 기사 랜슬럿이었던 것이다. 점장이 여인은 천년 동안 죽지 않고 전 세계를 여행하며 살아 온 랜슬럿을 알아보고 끝나지 않는 그의 생애엔 마법사 멀린의 계략이 숨어있음을 알려준다. 


아서왕의 전설을 현재까지 끌어 온 이 짧은 이야기는 젤라즈니의 학식과 통찰력이 빛나는 작품이다. 천년 만에 깨어나  "그동안 세상은 어떻게 변했느냐"고 묻는 멀린에게 랜슬럿은 편리하게 변한 것도 많지만 그만큼 세상은 더 복잡해졌다고 대답한다. 그리고 전쟁을 좋아하는 인간의 본성은 변하지 않았음을 개탄한다. 


책 뒷쪽에 붙은 짧은 해설을 읽어보니 이 단편은 조지 R.R. 마틴의 각색으로 [환상특급(Twilight Zone)]의 한 에피소드로 방송된 적도 있다고 한다. 로저 젤라즈니 원작에 조지 R.R. 마틴 각색이라니, 정말 환상적이지 않은가! 이 책은 몇 년 전에 김은하 사무실에 꽂혀있던 걸 빌린 건데. 은하야, 쫌만 더 읽다 줘도 괜찮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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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진 재능이 얼마나 되는지 걱정하는 것보다 더 쓸모없고 흔해빠진 에너지 소모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요즘 읽고 있는 책 [예술가여, 무엇이 두려운가!(ART&FEAR)]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능력을 의심하고 미리 걱정하며 노력도 해보지 않은 채 지레 포기하고 맙니다. 그것은 어떤 분야에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많은 사람들도 마찬가지죠. 하지만 알고 보면 이‘재능’이라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에서 아주 작은 부분을 차지할 뿐이라고 합니다. 성공은 타고난 재능과 크게 관계가 없다는 말이죠. 과연 그럴까요? 물론입니다. 이 책에 소개된 한 가지 실험을 살펴보면 더 이해가 빠를 겁니다.

수업 첫날 도예 선생님은 학급을 두 조로 나누어서, 작업실의 왼쪽에 모인 조는 작품의 양만을 가지고 평가하고, 오른편 조는 질로 평가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평가 방법은 간단했다. “양 평가” 집단의 경우는 수업 마지막 날 저울을 가지고 와서 작품 무게를 재어, 그 무게가 20킬로그램 나가면 “A”를 주고 15킬로그램에는 “B”를 주는 식이었다. 반면 “질 평가”를 받는 집단의 학생들은 “A”를 받을 수 있는 완벽한 하나의 작품만을 제출해야만 했다. 자, 평가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겼다. 가장 훌륭한 작품들은 모두 양으로 평가 받은 집단에서 나온 것이다. “양” 집단들이 부지런히 작품들을 쌓아 나가면서 실수로부터 배워나가는 동안, “질” 집단은 가만히 앉아 어떻게 하면 완벽한 작품을 만들까 하는 궁리만 하다가 종국에는 방대한 이론들과 점토 더미 말고는 내보일 게 아무 것도 없게 되고 만 것이다.
훌륭한 작품을 완벽한 작품과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예술은 사람이 하는 것이며 사람은 누구나 실수를 하기 마련이다.


처음부터 명작을 만드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완벽하게 조건이 다 갖춰진 상태에서 일을 시작하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만약 작가가 되고 싶다면 그저 미련하게 읽고 꾸준하게 쓰고 무조건 해보는 게 성공할 수 있는 ‘재능’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우린 이미 재능을 다 타고 난 셈이네요. 다만 그 재능을 쓰지 않고 걱정만 터지게 하고 있으니 문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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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는 '나만이 절대적인 진리를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자각에서 출발합니다. 우리들 중 누구도 정답을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데서부터 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내가 잠정적으로 정답이라고, 정의라고 생각하는 것은 존재하지만, 그것은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면서 언제든지 수정 가능한 것이어야 합니다. 상대방과 나누는 대화에 의해 내가 가진 정보의 양이 늘어나다 보면 분명히 어느 지점에선가 내 생각을 바꿔야 하는 순간이 찾아옵니다. '대화'란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받아들이므로써 내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는 재미있는 작업입니다.

(김두식의 [헌법의 풍경]이라는 책을 읽다가요. 메모를 하고싶은 구절이 생겨서 오랫만에 만년필로 베끼고 나중에 제목을 달았더니 글씨들이 손에 닿아 번지고 난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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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일기 2

독서일기 2012. 5. 14. 15:26

 

핑계 같지만, 요즘은 도대체가 소설책 읽을 시간이 안 나네요. 그래도 어딘가 이동할 때마다 조금씩 읽긴 했습니다. 하루라도 책을 읽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던 안중근 의사가 새삼 존경스럽습니다.


규가 상주에서 입시공부를 하며 도꼬노미 야스꼬라는 여관집 딸과 기묘한 만남을 가지게 되는 건 지난번에 말했었죠. 수학문제를 가르쳐준 수재 규에게 홀딱 반한 야스꼬는 그 다음에 또 규가 있는 곳으로 수학문제를 들고 찾아옵니다. 그런데 그날 폭풍우가 치고 바람이 몹시 거세게 불어서…ㅋㅋㅋ 아아, (이거 무슨 도미시마 다께오의 포르노소설 같은 설정이지만) 둘은 결국 같이 잤습니다만, 너무 어려서 그랬는지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싱겁기 짝이 없는 일이죠.


새학기가 되어 학교에서는 학생복을 카키색으로 바꿉니다. 각반도 상시 착용하게 하구요. 이른바 ‘전시체제’로 돌입하는 것이죠. 학생들은 카키색 학생복을 입기 싫다 하여 수업 거부를 하기도 하고 심지어 전학을 가기도 합니다만 대세를 거스를 순 없었습니다. 학우 중 주영중과 곽병한은 이 문제로 서로 심하게 싸우기도 합니다. 작가는 명급장인 김상태를 등장시켜 이 사건을 마무리하지만 나중에 주영중이 뭔가 동티를 남긴다는 암시로 “주영중은 무서운 사나이”라고 기록해 놓습니다.

한편 권위를 싫어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자 괴짜 선생인 쿠사마는 학교를 그만두게 됩니다. 그는 2차대전 발발을 거론하며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가 승리자이니 모두 살아서 10년 후를 기약하자”라고 말하고 학교를 떠납니다.

규는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에 진학할 생각을 하죠. 그러나 아버지 심부름으로 찾아간 종갓집 형에게서 네 형편에 고등학교 진학은 꿈도 꾸지 말라는 독한 얘기와 행패를 경험하고 굉장한 충격을 받습니다.


여기서 1940년 2월 11일에 있었던 ‘창씨개명’ 사건이 비중있게 다뤄집니다. 창씨개명을 하지 않으면 진학의 길도 막혀버릴 상황이 되었습니다. 작가는 돈 많은 ‘딜렛탕트’ 하영근의 입을 빌어 당시 창씨개명에 앞장 섰던 작가 이광수를 심하게 비난합니다.(189페이지) 글은 달착지근하게 잘 쓰지만 아무런 사상도 진정성도 갖지 못한 모리배 같은 자라는 거죠.

우여곡절 끝에 친구 윤근필과 함께 일본 경도에 있는 ‘삼고’에 입학한 규는 경도 안에 있는 묘심사라는 고요한 절에 자주 가 책을 읽다가 세스꼬라는 여학생과 친하게 됩니다. 조선인이지만 수재들만 다닌다는 삼고 학생인 규에게 세스꼬가 홀딱 반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그 후 세스꼬의 집에 찾아갔던 규는 사춘기 소년이면 당연히 치밀어오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욕정에 놀라 도망을 칩니다. 그러나 결정적 순간엔 여자가 더 대담해지는 법. 결국 둘은 대판에 있는 여관에 들어가 어렵게 어렵게 첫경험을 치르게 됩니다. 규는 허망한 첫경험 이후 자신이 비로소 욕정으로부터 해방되었음을 느낍니다.

대판에 가서 세스꼬와 자던 날, 규는 우연히 길에서 국민학교 동창인 고완석과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무작정 일본에 와서 고학을 하며 성실하게 생활을 하다가 어느 일본인의 눈에 들어 그 집의 양자로까지 들어가게 되면서도 민족적 자존감 만은 잃지 않는 꿋꿋한 친구를 보며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한편 규가 삼고로 진학을 하는 동안 창씨개명 문제로 퇴학을 당한 천재 박태영은 경도로 규를 찾아와 <죄와벌>의 라스꼴리니코프를 비난하다가 자신은 앞으로 조선의 독립을 위해 한 몸 바칠 결심을 털어놓습니다.

“나는 앞으로 술도 담배도 안 할끼다. 어느 시기까진.”
아까부터 넌 어느 시기, 어느 시기 하고 있는데 도대체 그 시기란 뭣고?”
“우리나라가 독립될 때까지.”


그리고 쿠사마 선생이 얘기한 10년 후를 거론하며 둘 다 27세, 28세가 되었을 때를 상상하며 독립투사와 대학자로서의 기초작업을 하자고 약속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자신은 검정고시를 준비하겠다는 말도 합니다.

박태영은 일본에서 우유배달을 하며 검정고시 공부를 틈틈히 합니다. 그러나 천재는 어디 가서도 표가 나는 법. 태영은 기어코 일을 내고야 맙니다. 전검시험에서 1등 합격을 하는 바람에 신문기자가 찾아오고 어쩌구…결국 전국적인 스타가 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에게서 팬레터를 받게 된 태영은 특히 김숙자라는 교포 여학생의 편지에 감복해 그녀를 찾아가게 되고 둘은 졸지에 사랑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역시 청춘남녀들은 어떤 상황에서도 마른 풀처럼 불이 잘 붙습니다.

우유배달소엔 태영 말고도 원서를 읽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다리를 저는 20대 후반의 과묵한   청년 무나까와였습니다. 경찰의 고문에 못 이겨 이층에서 덜어지는 바람에 다리를 절게 되었다는 무나까와는 태영에게 독일어를 배울 것을 권하고 곧 그의 독일어 개인교사가 됩니다...


분명 전에 다 읽은 내용들인데 어쩌면 이렇게 새 책 같은지 참 신기하기만 합니다. 지금 2권 71페이지까지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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