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100100&artid=201606232116005



며칠 전 신문에서 문정희 시인이 부에노스아이레스 국제 시 페스티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한 기사를 읽었습니다. 그러다 오늘 우연히 좋아하던 시 '남편'을 다시 찾아 읽게 되었구요. (구글에 '문정희 남편' 이렇게 쳤더니 탤런트 겸 배우 문정희의 남편 스펙이 좌르르 뜨더군요)


저는 이 시를 참 좋아하는데, 특히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도 제일 먼 남자'라는 구절이 정말 좋습니다. 귀여운면서도 넉넉한 시인의 풍모와 유머감각이 그대로 드러나죠. 


오늘 저녁엔 텅빈 회사 사무실에서 이 시 한 편 읽고 혼자 빙긋 웃었습니다. 좋아서요.


 


남편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도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Posted by 망망디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2212117265&code=990303



대량생산과 대량소비의 반대말은 다품종 소량생산이 아니라 공유경제와 공유소비가 되었다는 글쓴이의 통찰, 경청할 만한 시론이다. 사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소유해야 할 것은 생각보다 많지 않다. 다만 집도 자동차도 책도 남의 것을 빌려 쓰거나 함께 쓰는 게 익숙치 않아서 하는 수 없이 다 따로따로 구입해야 하는 것이다. 


이 칼럼을 읽으면서 공유에 대한 생각을 조금 더 깊이 파고 들어가 우리 삶에 적용해보면 의외로 쉬운 해결책이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일단 나의 삶에서도. 

Posted by 망망디
,

사막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도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파리 지하철공사가 시민을 대상으로 한 공모전에서 1등으로 당선된 시란다. 짧은 단상이지만 그 상징성과 압축미가 너무 뛰어나 이 시를 소재로 쓴 이문재의 칼럼이 사족처럼 느껴진다. 시민 공모작인데도 수준이 이 정도라니, 어렸을 때부터 철학과 문학을 제대로 배우는 나라의 전통이 부러울 뿐이다. 우리나라 지하철에 걸려있는 어이없는 시민 공모작들과 비교해 보면 더욱 그렇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601292113195&code=990100



Posted by 망망디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60205&artid=201512112036545


가끔 휴일 새벽에 일어나 남의 글을 천천히 읽는다. 술을 많이 마신 다음날 일어나는 갈증 때문이다. 오늘 읽은 글은 조간신문에 실린 경향신문 백승찬 기자의 <신의 위대한 질문 인간의 위대한 질문>이라는 책 소개 글이었다. '심오하게 종교적인 비신앙인(deeply religious non-beliver)' - 나는 크리스찬이 아니지만 이런 식으로 종교에 접근하는 아인슈타인의 생각을 존경한다. 목이 말라 물을 마신다. 나는 다시 잠들 것이다. 


예수는 급진적인 혁명가였다. 어떤 지배계층도 예수 같은 인물을 곱게 내버려둘 수는 없었을 것이다. 예수는 허탕만 치던 어부 시몬에게깊은 데로 나가 그물을 내려라라고 말한다. 고기라곤 잡아본 없는 듯한 샌님의 말이었지만, 시몬은 그의 말대로 갈릴리 한가운데로 향한다. 그러자 그물이 찢어질 많은 고기가 낚인다. 시몬은 이름을 베드로로 바꾸고 예수의 가장 충직한 제자가 된다.

예수는 베드로의 지갑을 두둑하게 하거나, 신통력을 발휘해 마음을 사로잡으려 것이 아니다. 예수의 말의 그리스어 원문은깊은 곳으로 다시 돌아오라 해석된다. 이는 제한구역, 따분한 일상을 넘어 탈출하라는 속삭임이다. 마치 <노인과 바다>에서 84일간 마리도 잡은 노인이 다른 어부들이 가지 않는 파도가 높고 물살이 빠른 해협까지 나간 것과 비슷하다. 예수는 어제와 같은 , 익숙한 자신으로부터 탈출할 것을 선동하고 있다.


Posted by 망망디
,

토요일이었던 어제, 회의를 하러 가는 길에 차 안에서 김건익 실장님과 함께 피아니스트 조성진에 대한 얘기를 나눴는데 오늘 신문을 펼쳐보니 ‘조성진의 음악’을 위하여,라는 백승찬 기자의 칼럼이 나왔더군요. 


‘조성진이 국가의 영광을 위해 피아노치지 않길 바란다’라는 구절이 가슴에 와서 쿡 박혔습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11202048565&code=990105





Posted by 망망디
,

지인의 페이스북 담벼락을 구경하다가 뒤늦게 좋은 칼럼을 읽고 공유합니다. 

쓸모없는 것들을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가 '황우석 사태'처럼 언젠가 있을 대박을 터뜨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는, 너무도 당연하지만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해주는 글이라서요.





[정동칼럼]쓸모없는 것들을 가르칠 의무

대학에 갓 입학한 ‘고등학교 4학년’들이 내 수업에서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들의 첫 질문은 과연 그것이 시험 범위에 들어가는지 여부이고, 내가 궁금한 점은 어떻게 모든 종류의 추천도서 목록에 빠지지 않는 이 책을 읽어본 학생이 없는가 하는 점이다. 이들이 예의 바르게도 묻지 않는 질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게 우리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나요?”

목적의식이 뚜렷한 세대이며 목적 없는 “쓸모없는 것들”을 가차 없이 퇴출시켜나간 교육시스템이다. 대학은 더 좋은 직장으로의 취업을 준비하는 곳이고, 고등학교는 더 좋은 대학으로의 입학을 준비하는 곳이며, 중학교는 더 좋은 대학에 많이 입학시키는 고등학교로 갈 준비를 하는 곳이며, 초등학교는, 그리고 유치원은…. 아니, 이 앞의 문장은 상식이 되어버려 새삼 지면에 옮기기도 뜬금없다.

그러나 나는, 우리 교육의 황폐화와 우리 현실의 암담함이 이런 목적론적 교육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문화의 시작이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이었고, 학술의 근원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는 궁금증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 교육에는 문화도 학술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쓸모없는 것들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그것이 매우 자랑스럽다. 이것을 서생정신이라 불러도 좋고 아마추어리즘이라 불러도 좋다. 쓸모없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것은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을 통해 아이폰을 만들 수 있었고, 워런 버핏이 ‘풍부한 독서’를 통해서 훌륭한 투자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이다. 학술과 교육과 문화는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기치 않게 페니실린이 발견되기도 할 것이며 우연찮게 뢴트겐은 X선에 손을 대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폰과 주식투자와 페니실린과 X선이 - “대박”이 - 학술과 교육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혹은 전해주고 싶은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책이, 이 강의실이, 나아가 학교에서의 모든 경험들이 당신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 있고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동굴의 우상’이 무엇인지를 외우기 전에, 동굴에서 무기력한 삶을 살던 이가 동굴을 나와서 처음 광명한 햇살을 느꼈을 때의 그 저미는 고통을, 그리고 다시 동굴로 되돌아갔을 때의 뼈를 깎는 격통을 책으로 느낄 수 있다면 당신들은 이미 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 이것은 시험에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며 당신들이 살아가는 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지금, 이 자리가 아니라면 다시는 읽어볼 수도, 고민해볼 수도, 토론해볼 수도 없을 마지막 기회라는 것. 나는 우리의 대학교와 고등학교와 중학교와 초등학교가 학생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더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소중한 ‘마지막 기회’들을 허비하고 있다는 강한 의심이 든다.

계절이 지나 겨울방학을 앞둔 시기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학생들이 또 있다. 취업의 어려운 관문을 뚫은 졸업예정자들인데, 축하의 말을 건네기가 무섭게 기말고사를 치를 수 없다는 양해를 구한다. 학점을 받아야 졸업을 할 수 있지만 당장 회사에서 출근 - 무급인턴 - 을 하라고 하니 시험 대신 다른 것으로 학점을 달라는 부탁이다.

우리 교육시스템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위치한 ‘회사’들은 이토록 촌스럽기 짝이 없으며 이들에게 묻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다. 학생들 일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교정에서의 마지막 두어 달 기간에 당신들이 학생들을 얼마나 더 잘 성장시킬 자신이 있는지. 세상의 모든 관심과 배려를 받고 초·중·고·대학의 십수년 교육기간 동안의 학생 생활을 마감하는 이들을 두어 달 기다려줄 여유도 없는지. 사회적 배려라는 것이 수능일 아침 앰뷸런스로 고사장에 실어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약간의 시간을 주고 성장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이런 교육환경이 이르는 종착역은 바닥 모를 둔감함이다. 배려받지 못한 학생들은 공감하지 못하는 시민으로 자라고, 손톱 밑의 가시가 아니면 고통과 분노는 건망증에 포획된다. 세월호, 국정원, 부패리스트, 메르스 등 신문 지면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공동체의 사건들이 너무도 쉽사리 잊혀지고, 일상의 아득함만 우리 앞에 벽처럼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아들 딸들에게 어떤 공동체를 물려줄 것인가. 대답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근원적인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대안 없는 쓸모없는 글로 지면을 허비하게 되어 송구한 마음이다.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Posted by 망망디
,



사진그림을 그리는 이화여대 교수이자 작가인 조덕현이 어느 날 인터넷에서 조덕현이란 이름을 발견한다. 영화배우 조덕현이다. 작가 조덕현은 배우 조덕현을 만나 가상인물 조덕현(1916~95)을 만들어내자고 제안한다. 일제시대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조덕현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1960년대 한국 영화계도 전전하다가 결국 독거노인으로 쓸쓸하게 죽는 최후까지. 이야기 구성에는 소설가 김기창이 합류했다고 한다. 그걸 연극무대처럼 만들어 전시를 한다. 오늘 아침에 신문에서 읽었다. 이런 게 스토리텔링이지. 재밌을 거 같다. 10월 25일까지란다. 일민미술관. 보러가자.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312145275&code=960202





Posted by 망망디
,

정부나 기업의 고위직들이 하는 일들은 일반인들이 보기에 얼핏 대단한 것으로 보이기 십상이다. 그들은 우리들이 접근하기 어려운 고급정보를 가지고 있고 또 그것을 감당한 만한 교육을 받았으며 그동안 일로써 얻은 통찰력 또한 대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중에 그 성과는 대부분 논리적이고도 아름답게 포장된다(대부분의 위인전이나 인터뷰 기사가 그렇다).


물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것처럼 보이던 천문학적 액수의 사업적 결단이 나중에 알고 보면 단순히 오너 일가의 취미 때문인 것으로 밝혀질 때도 있고 한 나라의 미래 비전도 지도자의 터무니 없는 낙관론이나 잘못된 것이든 아니든 자신이 믿고 싶은 정보만 고르기 때문인 경우가 많다.


결론은,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해서 그 판단이 언제나 높은 가치를 가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그놈의 '위치' 때문에 아무도 그들의 결정을 막거나 반론을 제기하기 힘들다는 것. '산다는 것은 불합리한 것을 견디는 것'이라는 말과 글을 알고는 있지만...그래도 이래저래 아침부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172120215&code=990100

Posted by 망망디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8061915061&code=990201 


조선은 호락호락하지 않다. 죽음은 끝이 아니다. 이제 시작이다.”


가끔은 정말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신념과 용기를 가진 사람들을 보며 전율하곤 한다. 이를테면 김훈의 소설 [흑산]에 나오는 정약전과 황사영 같은 사람들이다. 또는 독립운동을 하다 감방에 간 한용운 선생 같은 분. 선생은 감방에서도 전혀 기가 죽거나 회유를 당하지 않았고 오히려 고문을 당하느라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에게 “도대체 뭐가 아프단 말이냐”고 호통을 치셨다고 한다. 대단한 기개가 아닐 수 없다. 


어제 경향신문 <여적>에서 읽은 남자현 선생의 ‘피 묻은 적삼’ 일화도 감동적이다. 내가 저런 상황에 처한다면 저 분들의 십분의 일이라도 따라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못 할 것 같다. 




 

Posted by 망망디
,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code=990100&artid=201506192049365



칼럼을 쓴 조운찬 소장처럼 저도 이만수 감독의 독서목록에 감탄했지만 그보다 더 놀랐던 것은 명창 안숙선 선생이었습니다. 국악인이면 창 연습이나 하고 판소리 대사나 반복해서 외우겠지, 라는 저의 안일한 생각을 단숨에 깨부수는 깊이 있는 리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위고의 '장발장'(레 미제라블)과 고전 '춘향가', 그리고 한운사의 '대야망' 등에 대한 해석은 통찰력이 대단합니다. 책을 많이 읽는 것보다 중요한 게 깊이 읽는 것이란 점을 깨닫게 해주는 분들입니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504222242325&code=960205&s_code=ac188

Posted by 망망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