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상투적인 말의 힘 - 황현산 선생의 명복을 빌며

망망디 2018. 8. 8. 11:41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누군가 생을 달리 하셨을 때 우리가 위로를 전하며 흔히 하는 표현입니다. 불교에서는 사람이 죽은 후 가는 곳을  명부(冥府)라고 하므로 명복(冥福)을 빈다는 말은 고인이 저승에 가서 염라대왕으로부터 심판을 잘 받고 복을 누리기를 바란다는 뜻이라 합니다. 참으로 상투적인 말이지요. 그러나 막상 이 표현 말고 다른 말로 같은 뜻을 전하기도 참 힘든 게 사실입니다. 얼마 전 [황현산의 사소한 부탁]이라는 책을 낸 김민정 시인이 오늘 올린 황현산 선생님의 부음 포스팅에 저도 명복을 빈다는 댓글을 달았습니다. 이전의 책 [밤이 선생이다]부터 황 선생을 곁에서 모시고 흠모했던 김 시인의 슬픔이 그 누구보다 클 것이라 짐작해 봅니다. 

[사소한 부탁] 중 <날카로운 근하신년>이라는 글이 있습니다. '근하신년이라는 네 글자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나 '해피 뉴 이어'에 밀려 이제는 거의 쓰이지 않는 것 같다는 구절로 시작하는 이 칼럼은 이런 상투적인 말도 처음에는 굉장히 날카로운 뜻을 가지고 있었으며 때로 누군가에게는 지대한 영향을 끼치던 언어였음을 상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실제로  젊은시절 불운했던 어느 친구의 얘기를 들려줍니다.  고향에 노모를 두고 서울로 올라가던 그 친구는 고속버스 안에서 안내원이 해주는 "손님 여러분의 행운과 가정의 평화를 빈다"는 인삿말을 그날따라 유심히 들었다고 합니다. 의례적인 인사가 문득 가슴을 파고 든 것이지요. 그리고 그 길로 월부 책 장사를 시작해 지금은 조그만 건물을 소유할 정도로 성공을 했다고 합니다. 그 친구는 그때 고속버스 안내원의 말을 귀담아 들은 덕분에 자신에게 행운이 찾아온 것이라고 믿고 있답니다. 

어쩌면 모든 상투적인 말이 다 비장한 말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늘 염원하면서도 내내 이루어지지 않았던 희망을 그 상투적인 말이 한순간도 포기하지 않고 끌어안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말이 상투적인 말이 되도록 놓아둔 것은 늘 보던 것 외에 다른 것을 보려 하지 않는, 다른 것을 볼까봐 오히려 겁을 먹는 우리들의 나태함일 것이 분명하다. 말은 제 힘을 다해 우리를 응원하는데, 우리가 먼저 포기해버린 탓일 것이 분명하다. 상투적인 말들도 처음에는 그 날카로운 힘이 우리의 오장에 파고들게 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말이 나를 넘어뜨리고 내 안일을 뒤흔들 것이 두려워 우리가 철갑을 입을 때 말도 상투성의 철갑을 입기 시작할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시인들이 말의 껍질을 두들겨 그 안에서 비장한 핵심을 뽑아내려고 사시사철 애쓰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상투적인 말들이 갖는 의미를 헤아리다가 '말의 껍질을 두들겨 그 안에서 비장한 핵심을 뽑아내려고 사시사철 애쓰고 있는' 시인들에게로까지 생각의 가지가 뻗어나가는 황현산 선생의 따뜻한 사유의 힘이 그립습니다. 그리하여 저도 할 수 없이 상투적인 말을 하나 더 보태겠습니다. 황현산 선생님, 부디 안녕히 가십시오. 오늘 저희는 또 하나의 반짝이는 별을 잃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