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택시라는 인생의 메타포>

망망디 2018. 10. 2. 16:07


문정희 시인의 시집을 한 권 샀습니다. 수백 편의 시 중 아무 페이지나 넘기다가 전부터 좋아했던 '남편'이나 '초대받은 시인' 같은 시도 다시 만나고 슬픈 억척 어멈을 그린'찬밥'이라는 시도 만나고 '치마', '내가 한 일', 동백꽃', 칸나' 같은 싱싱한 시들이 발견될 때마다 페이지 윗쪽 귀퉁이를 접어놓고 하다가 마침내 '그 소년'이라는 시를 만났습니다.


시인이 삼성동까지 가는 택시 안에서 만난, 입이 거친 남도의 택시운전사와 얘기를 나누다가 어린 시절 어떤 소녀를 사랑했던 순수한 소년까지 만나게 되는 이야기('그러고는 속으로 이 시를 시대 풍자로 끌고 갈까 그냥 서정시로 갈까 망설이는 순간그에게서 믿을 수 없는 한 소년이 튀어나왔다')를 시로 풀어놓은 내 누님 같은 시인 문정희.


택시라는 곳은 일차적으로 장소 이동의 수단이지만 때로는 정치 토론의 장, 나아가 인생의 축소판처럼 느껴지는 공간이기도 하지요. 저도 예전에 '심야택시'에 관한 글을 두 편 쓴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택시운전을 하는 초등학교 동창 한식이한테 들었던 얘기고 또 하나는 야근을 하고 오다가 택시 운전사와 죽이 맞아 인생과 죽음에 대해 수다를 떨었던 내용입니다. 감히 대 시인의 글과 제 글을 나란히 놓는 게 죄스럽긴 하지만 '택시'라는 공통분모가 있는데 못 할건 또 뭐냐, 라는 건방진 마음으로 이어붙여 봅니다.


그 소년 / 문정희


터미널에서 겨우 잡아탄 택시는 더러웠다

삼성동 가자는 말을 듣고도 기사는

쉽게 방향을 잡지 않더니

불붙은 담배를 창밖으로 획 던지며

덤빌 듯이 거칠게 액셀을 밟았다

그리고 혼잣말처럼 욕을 하기 시작했다

삼성동에서 생선탕집을 하다가

집세가 두 배로 올라 결국 파산하고 말았다 했다

적의뿐인 그에게 삼성동까지 목숨을 내맡긴 나는

우선 그의 사투리에 묻은 고향에다 안간힘처럼

요즘 말로 코드를 맞춰보았다

그쪽이 고향인 사람과 사귄 적이 있다고 했다

그러고는 속으로 이 시를 시대 풍자로 끌고 갈까

그냥 서정시로 갈까 망설이는 순간

그에게서 믿을 수 없는 한 소년이 튀어나왔다

한 해 여름 가난한 시골 소년이 쳐다볼 수 없는

서울 여학생을 땡볕처럼 눈부시게 쳐다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가을날 불현듯 그 여학생이 보낸

편지를 받았다고 했다 마치 기적을 손에 쥔 듯

떨려서 봉투를 쉽게 뜯지 못하고 있을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친구 녀석이 획 낚아채서

편지를 시퍼런 강물에 던져버렸다고 했다

그는 지금도 밤이 되면 흐르는 불빛 속을 가면서

그때 그 편지가 떠내려가던 시퍼런 급류 앞에서

속으로 통곡하는 소년을 본다고 했다

어느새 당도한 삼성동에 나는 무사히 내렸다

소년의 택시는 그 자리에서 좀체 움직일 줄을 몰랐다


<심야택시>


야근을 하고 열두 시 넘어 택시를 타고 오면서 기사 아저씨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다. 내가 마흔일곱 살에 뒤늦게 결혼을 했다고 하니 깜짝 놀라며 자긴 서른넷에 하면서도 늦게 한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때 결혼한 게 결정적인 실수였다며 웃는다. 다시 할 수만 있다면 혼자 자유롭게 살고 싶다는 것이다. 저희는 아이 없이 살 거니까 둘이서만 재밌게 살다 깨꾸닥 죽으면 괜찮지 않을까요, 했더니 그것도 좋은 방법이라고 맞장구를 친다.


'저는 어머니가 삼 년을 꼬박 앓다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기 전에 아파트 한 채를 병원비로 다 쓰고 가셨어요. 근데 그 뒤로 아무리 열심히 일을 해도 이게 복구가 안 되네...'라고 말하는 기사 아저씨. '저는 어머니가 너무 갑자기 돌아가셔서 그게 정말 가슴 아팠는데' 라고 말하는 나.


이미 택시기사와 손님이라는 관계를 망각한 우리는 죽을 때 돼서 금방 죽는 것도 복이라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얘기가 흘러간다. 아저씨는 행여 자신이 죽기 전에 오래 아프거나 치매 같은 거 걸려서 자식들에게 폐라도 끼칠까봐 그게 걱정이라고 한다. 나도 우리 부부 둘이 재밌게 살다가 같이 죽는 게 바람이라고 소원을 얘기한다.


앞으로 원하는 사람들에겐 인도적인 안락사나 자살 같은 방법은 좀 열어놔야 하는 것 아니겠냐는 데까지 얘기했을 때 택시가 집 근처에 도착했다. 우리는 '서로 알아서 잘 죽읍시다' 라는 이상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밤 12시 52분이었다.


<심야택시에 두고 내린 옛사랑들>


몇 년 전에 술 마시면서 택시운전하는 초등학교 동창 한식이한테 들은 얘기가 기억난다. 택시를 몰다 보면 별별 사람을 다 만나게 된다고 한다. 이런저런 취객은 말할 것도 없고 가끔 요금 안 내려고 문 열리자마자 냅다 튀어나가는 놈들도 많은데 그런 놈들은 그냥 놔둬야 한다고 한다. 쫓아가갔다가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농염한 자세와 멘트로 기사를 유혹하는 아줌마들도 꽤 있었다고 한다. 노르스름한 잡지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제일 기억에 남는 얘기는 택시비 대신 주고 갔다는 반지나 목걸이에 대한 이야기였다. 하긴 이 세상엔 사랑을 시작하는 옵티미스트들도 많지만 사랑을 끝내는 페시미스트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아저씨, 저 이거 더 이상 필요없는 물건인데 택시비 대신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손님들은 야밤에 술에 취해 또는 맨정신에 고즈녁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하며 사연이 붙어있는 금붙이나 보석들을 택시에 두고 내린다고 한다. 그날 그 친구가 보여준 목걸이도 그런 스토리가 내장된 물건이었다. 처음 그가 들고 온 진주목걸이를 보고 놀라던 그의 아내도 이젠 그런 물건들을 가져다 주면 태연하게 처리한다고 한다.


잠도 오지 않는 초여름 심야. 내가 심야택시에 두고 내렸던 기억은 어떤 것들이 있었나 생각하다가, 이런 건 눈이 펑펑 내리는 날 떠올려야 하는 이야긴데...하고 창밖을 힐끔 내다본다. 자야겠다. 내일은 일요일이지만 출근을 해야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