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일기

사람을 살리는 공감의 한 마디 - '당신이 옳다'

망망디 2018. 10. 18. 15:17



점잖은 사람도 운전대만 잡으면 욕쟁이로 변하는 경우가 있다. 운전은 생명과 직결되는 행위라서 그렇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누구든 좀처럼 다른 운전자의 입장에 서지 못하기 때문이다.

저기서 왜 깜빡이를 안 켜?
저 아저씨 왜 안 가고 저기서 뭉기적거리는데?

나도 그런 운전자 중 하나였다(이제 운전 안 한지 십 년도 넘었지만). 어느 늦은 밤 아내와 택시를 타고 집에 오다가 우리가 들어가야 할 진입로 입구를 막은 채 오도가도 못하는 차 한 대를 만났다. 아, 뭐하는 거야...? 라고 작게 중얼거리는 내게 택시운전사가 하신 말씀은 정말 뜻밖이었다.

"다 이유가 있어요."
"네?"
"서있는 차는 다 이유가 있는 거예요."

과연 그 차도 조금 있다가 뭔가 사소한 문제를 해결한 모양인지 위잉,하고 가려던 길로 가버렸다. 어안이 벙벙했다. 그렇구나. 우리는 "아저씨 말씀이 명언이네요!'라고 외치며 택시비에 팁 이천 원을 더 얹어 드렸다.

사람은 누구나 외롭고, 누구나 아프다. 시인 이성복은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라고 썼다. 사실은 아프지 않은 게 아니라 아픈데도 서로 이유를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그 이유를 알고자 하는 대신 누군가의 마음에 '우울증'이라는 이름을 붙인 뒤 어서 정신과 의사를 만나보라고 충고한다. 나는 의사나 심리치료사가 아니니까, 미안하지만 다른 데 가서 잘 치료하고 오라고.

'정혜신의 정적심리학 [당신이 옳다]'는 마음이 아파서 숨이 넘어가는 사람은 큰 병원이나 전문가에게 보내지 말고 심폐소생술(CPR) 하듯 지금 당장 여기서 섬세한 시선과 지지를 통해 보살펴줘야 한다고 말하는 책이다. '적정기술'이란 무엇인가? 간단하지만 본질을 건드려서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책에 나온 것처럼 아프리카 아이들이 힘겹게 이고 다니는 물동이 대신 큰 공 모양의 물통을 만들어 굴리고 다닐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언젠가 보았던, 오염된 물에 꽂고 빨아도 순식간에 정수 작용을 해 오지의 아이들도 맑은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주는 빨대 같은 것이다.  

정혜신은 겉으로 멀쩡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요즘 마음이 어떠세요?"라고 묻는 것만으로 엄청난 비밀을 털어놓게 하거나 삶이 달라지게 하는 경험을 여러 번 했다고 한다. 사실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다가가 그렇게 묻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하지만 그 질문 전후로 털어놓는 이야기의 질이 너무나 달라지는 걸 계속 경험했기 때문에 그렇게 묻는 것이라고 했다. 다만 건성으로 묻지 않고 정말 호기심을 가지고 사소한 부분까지 마음으로 느끼면서 세세하게 물어야 한다는 말을 빼놓지 않는다.  

어떤 이유로 집을 뛰쳐나와 울다가 밤늦게 전화를 걸어온 친구에게 "야, 달밤에 체조하지 말고 빨리 집으로 들어가."라고 충고하는 건 당사자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는다. 정혜신은 바로 이 지점에서 한 사람의 운명이 결정될 수도 있다고 단언한다. 자신의 자의적 판단과 논리에 입각해 '빨리 들어가라'고 다그치는 대신 "니가 이 시간에 집 밖을 배회하고 있다면 그건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라고 섬세하게 공감해주는 순간 '천애고아' 같았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리고 가슴엔 따스한 체온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책을 읽어볼수록 심리적 CPR의 핵심은 '행동'이 아니라 '태도'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월호 사건이 터졌을 때 많은 자원봉사자들은 진도에 내려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다'고 울면서도 무슨 일이든 했다고 한다. 같이 손 붙잡고 울고 같이 밥 먹고 같이 자는 것만으로도 유족들에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는 일인지는 정작 그들도 몰랐던 것이다. 이는 심리적 CPR이 이해하는 게 아니라 느끼는 것이고,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영역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해주는 사례다. 그리고 그 기술의 핵심 키워드는 언제나 '사람'과 '공감'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달리 '한'이 많은 민족이다. 스트레스가 그만큼 많다. 그런데 그걸 어디 가서 털어놓을 곳이 없어 못된 시어머니가 되고 태극기 부대가 되고 가출 청소년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나의 감정에 집중해주고 내 얘기를 들어주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뒤늦게 결혼하고서 가장 좋았던 것은 우주 최강의 '내 편'이 하나 생겼다는 사실이었다. 언제나 내 이야기에 먼저 귀를 기울여주고 내 기분이 어떤지 제일 먼저 헤아려주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눈보라 치고 성난 파도가 넘실대는 바깥에서의 삶을 견디게 해주는 철갑옷을 얻은 것과 같았다. 

정신과 의사 정혜신과 심리 기획자 이명수 부부. 그들은 책상머리가 아니라 국가폭력 피해자, 쌍용자동차 해고 노동자, 세월호 참사 피해자들이 생과 사를 넘나드는 심리적 참전의 현장에서 그들이 개발한 '심리적 CPR'로 사람들의 목숨을 살리는 전사들이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무기는 엄격한 잣대나 의학 지식이 아니라 공감이다. 묻고 또 물어 마침내 같은 입장에 서고 또 공감함으로써 벼랑끝에 선 사람들을 살린다. 그래서 이 책에 나온 수 많은 경험담과 사례는 한 번 읽고 머리로 이해하는 게 아니라 늘 곁에 두고 도움이 필요한 타인을 만나는 경우마다 적용시켜야 할 보석 같은 이야기들이다. 

방탄소년단은 얼마 전 유엔에서 "오늘의 저는 과거의 실수들이 모여서 만들어졌습니다. 내일, 저는 지금보다 조금 더 현명할지도 모릅니다. 이 또한 저입니다. 그 실수들은 제가 누구인지를 얘기해주며, 제 인생의 우주를 가장 밝게 빛내는 별자리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였는지, 내가 누구이고 싶은지를 모두 포함해 나를 사랑하세요."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싶어도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옆에서 "미안해. 니가 그렇게 힘든지 몰랐어."라며 진심으로 나를 위로해주는 사람이 있을 때 비로소 나는 나를 사랑하고 존중할 수 있는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건 사람이다. 그리고 당신이 옳다, 라는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공감의 말 한 마디가 사람을 살린다. 그게 정혜신이 이 책에서 얘기하고 있는 전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