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위의 생각들
실수담이 많은 게 낫다
망망디
2018. 11. 30. 08:08
'유난히 재미 없는 사람들의 공통점은 실패담이 없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있다. 한 번도 옆길로 새지 않고 반듯한 모범생으로만 살아 온 사람에게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생길 리 없다. 그래서 나는 예전에 인기 있었던 <성공시대>라는 TV프로그램이 그렇게 싫었다. 거짓말로 치장되어 있는 것은 물론이고 내용이 교장선생 훈화 말씀처럼 뻔하고 재미 없었기 때문이다. 토머스 에디슨의 '천재란 1퍼센트의 영감과 99퍼센트의 노력으로 이루어진다'라는 말도 짜증나긴 마찬가지였다. 흔히 이건 노력이 중요하다는 말로 오해되곤 하는데 사실은 '누구나 노력은 다 하지만 1퍼센트의 천재성이 없으면 다 소용없다. 다행히 나는 그걸 가지고 있었다' 라고 잘난 척하는 얘기였으니까.
나에겐 실패담보다는 실수담이 많다. 실수담의 기본은 건망증과 부주의인데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 두 분야에서 가히 독보적이었다. 일단 초등학교 다닐 땐 등교하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일이 많았다. 이유의 대부분은 '도시락을 두고 가서', 또는 '런닝셔츠만 입고 나가서' 같은 것이었는데 가장 백미는 학교에 갔더니 아무도 없었던 날이었다. 일요일에 혼자 등교를 한 것이었다. 식구들은 그런 나를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그러나 나이가 들어서도 나의 건망증과 부주의는 개선되지 않았고 오히려 기계를 잘 다루지 못하는 '기계치'에 갔던 길도 까먹는 '길치'에도 소질이 있음이 밝혀졌다.
다행히 성격이 꼼꼼한 아내를 만나 나의 삶이 조금은 나아지는 듯 싶었으나 아침에 교통카드를 놓고 나가서 다시 집으로 돌아오거나 하는 일상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나의 자잘한 실수들을 목격하고도 웃어 넘기던 아내도 비가 오는 날 택시 안에 우산을 두고 내린 남편을 목격했을 땐 좀 충격을 받은 것 같았다. 아내는 한숨을 내쉬며 위로했다. 그렇게 헛점투성이면서 여태 세상을 살아왔으니 얼마나 힘들었겠냐고.
'드라마란 주인공이 뭔가 이루려고 엄청 노력하지만 결코 이루지는 못하는 이야기'라는 정의를 좋아한다. 그래서 재미있는 드라마의 핵심은 언제나 '성공'이 아닌 '실수'나 '엇나감'에 방점이 찍혀있기 마련이다. 어제도 그제도 나는 실수담을 썼다. 일단 내가 가진 성공담이 거의 없어서가 첫 번째 이유이긴 하지만 그보다는 작은 실수담들이 주는 효용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나의 작은 바람은 사람들이 내 실수담을 읽으면서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라는 위로를 받는 것이다.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아량을 넘어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다'라는 통찰에 이르기라도 한다면 정말 기쁜 일이고.
인생의 목표는 성공이 아니라 '즐겁고 재미있게 사는 데 성공하는 것'으로 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 개의 성공담보다 여러 개의 실수담이 있는 게 낫다. 실수담이 많은 사람일수록 부자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