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를 처음 본 건 <원더플 라이프>였다. 상영관이 광화문 씨네큐브였는데 예매를 해놓고도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시간에 쫓겨 마구 뛰어갔던 기억이 난다. 헐떡이는 숨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지켜본 그 영화는 죽은 사람들이 저승으로 가기 전에 열흘 정도 림프계에 머물면서 자신이 살아있을 동안 가장 행복했던 기억이 무엇인지 반추해 보고 그걸 토대로 자기만의 단편 영화를 하나씩 찍는다는 내용이었다. 일본 사람들이 일생을 살면서 제일 행복했던 순간으로 '도쿄 디즈니랜드에 갔던 때'를 꼽은 경우가 많았다는 기사에 충격을 먹어 이 영화를 만들기로 했다는 후일담을 어딘가에서 읽은 기억이 있는데(아내는 원작소설을 읽은 것 같다고 한다) 당시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죽음이든 죽음에 대한 생각이든 이 감독은 전혀 슬프지 않게 일상처럼 차분하게 다룬다는 점이었다. 아무튼 나는 이 영화로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팬이 되었고 그 후로 <아무도 모른다>, <걸어도 걸어도>,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등을 차례차례 극장에서 보게 되었다.


그러다가 뒤늦게 개봉한 그의 데뷔작 <환상의 빛>을 벼르고 벼르다가 드디어 어제 보게 된 것이다. 영화는 아무런 이유 없이 3개월된 어린 아이와 아내를 남겨두고 스물여섯 살에 자살하듯 기차에 치여 죽은 남자 얘기로 시작된다. 망연자실한 아내. 그러다가 몇 년 후 아랫집 세탁소 아주머니의 소개로 멀리 바닷가 마을로 재혼을 하러 간다. 상대는 딸이 하나 있고 늙은 아버지와 함께 살고 있는 평범한 남자다. 처음엔 좀 어색했지만 아이들도 여자를 잘 따르고 남자도 서글서글하니 잘 대해준다. 처음 남편이 죽었을 때는 도저히 못 살 거 같았는데 또 어찌어찌 다른 곳에서 정을 붙이고 살게 된다. 



여자는 전남편이 왜 그렇게 허무하게 죽어버렸는지 늘 궁금해 하지만 인생엔 끝내 답을 찾을 수 없는 게 너무나 많다. 여자는 아무런 기대도 없이 전남편의 죽음에 대해 현재 남편에게 물어본다. 그런데 남편은 담담하게도 자기 아버지에게서 들은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래서 여자는 어쩌면 지금 남편이 시아버지에게 들었다는(마치 사이렌의 노래를 닮은) 수평선 위 반짝반짝 빛나는 '환상의 빛' 때문에 그 남자가 그렇게 된 건 아닐까 그냥 짐작해 볼 뿐이다. 분명한 건 누군가의 죽음 뒤에도 다른 사람들의 삶은 계속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감독은 그걸 서두르거나 채촉하는 일 없이 카메라를 통해 천천히 바라볼 뿐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씨네21의 20자평을 찾아보니 그냥 다짜고짜 '환상의 힘'이라고만 쓴 평론가도 있고(진짜 이 영화를 본 건지 의심이 간다) '동전의 양면 같은 생사불이, 거기 아롱대는 빛의 매혹!"이라고 과대하게 의미부여를 한 사람도 있었다. '남겨진 사람의 통증. 답을 찾으려, 빛을 찾으려'라는 휘트먼의 싯구절 같은 평마저 있다. 내 생각엔 영화에 죽음이 나온다고 해서 그 것에 큰 의미를 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 영화들엔 죽음이 자주 등장하지만 그것들은 그 자체의 비장함보다 죽음 이후에도 또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을 따뜻하고 차분한 시각으로 관조하는 데 쓰임으로써 더 큰 의미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특별한 악인이나 극적인 사건, 또는 캐릭터가 등장하지 않아도 그의 영화는 언제나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리라. 


이 영화는 만든 지 21년이나 된 작품이다. 영화를 보고 나서 아내는 "저 어린 여배우도 이젠 나이가 많이 들었겠네..." 라고 혼잣말을 했다.  1995년 베니스 영화제 촬영상(황금오셀리오니 상), 카톨릭 협회상, 이탈리아 영화산업협의회 상을 수상하고, 유수의 영화제에 초청을 받은 것도 모자라, 평론가들은 이 영화에게 '영화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데뷔작'이라는 수식어를 선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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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곡성]을 두 번 보았다. 우리 부부는 시간이 안 맞아서 이 영화를 따로따로 보았는데 어느 날 다시 극장에서 함께 보고 작품에 대해 서로 얘기해 보자는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오늘 아침 조조를 봄으로써 그 약속을 이루게 되었다. 


한 마디로 곡성은 ‘왜’가 아니라 ‘어떻게’에 대한 이야기이다. 무슨 영문인지 모르지만 사람들이 계속 죽어나가는 마을이 있다. 얼마 전 마을로 들어온 외지인의 짓이라는 소리도 있고 귀신의 짓이라는 소리도 있다. 그러다가 마을 경찰인 종구의 딸 효진이가 병에 걸려 이상한 짓을 하게 된다. 그런데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걸까? 이상하게도 왜, 라고 묻는 순간 할 말이 없어진다. 그냥 재수가 없어서? 아니, 그걸 설명하는 건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이 영화는 세상 모든 일 중 ‘왜?’ 라는 질문에 딱 부러지게 대답할 수 있는 게 그리 많지 않음을 얘기하는 듯하다. 대신 ‘어떻게’에 대한 얘기가 끊임없이 펼쳐진다. 왜 효진인가, 가 아니라 효진이가 선택된 이후에 종구는 딸을 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고 일광은 어떻게 어떤 굿을 했으며 무명은 마을을 지키려고 어떻게 노력했는지가 이 영화를 보는 재미의 포인트다.

어떤 사람은 이 영화가 ‘피해자’에 대한 이야기라고 한다. 어떤 이는 종교와 샤머니즘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다고도 한다. 다 맞는 말 같다. 그런데 나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이건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왜?’라는 전자의 질문이 그럴듯한 담론들을 만들어낸다면 후자의 ‘어떻게?’라는 질문은 옳고 그름을 떠나 어디로 뻗어나갈지 모르는 무궁무진한 스토리를 만들어 낸다. 외지인이 왜 곡성에 들어왔는지는 모른다. 왜 사람들을 죽이는지도 모른다. 일광이 외지인과 얼마나 깊은 관계를 갖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들이 어떻게 최선을 다했나,에 이르면 스토리와 디테일들은 단박에 날개를 달고 끝없이 달려 나간다. 


나홍진 감독은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주된 이야기는 치열하고 치밀하게 침입을 방어하고자 하는 어느 가장에 대한 이야기다. 2시간 내내 전력을 다해 방어하는데 들어오려고 하는 존재가 우리 편인지 남의 편인지 모르는 상황이 가장 무섭다.”라고 했다. 영화는 일광이나 무명이 우리 편인지 남의 편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이야기의 끝까지 간다는 데 진짜 묘미가 있다. 심지어 끝나고 나서도 좋은 편과 나쁜 편의 구별이 희미하다. 어쩌면 사건의 중심에 있으며 동시에 최대 피해자인 종구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맨 마지막 장면에 도달해서도 “걱정 마, 아빠가 다 해결 할게.”라는 하나마나 한 맥빠진 소리나 중얼거리고 있다. 난 이렇게 아무 것도 해결되지 않은 '열려있는 결말’이 좋았다. 

그래서 이건 일종의 거대한 ‘ 사기극’이라고 생각했다. 포스터나 예고편에도 나오고 일광도 얘기하던 그 ‘낚시질’ 말이다(미국에도 있다.J.J. 에이브람스라고, 거대한 '떡밥'의 일인자). 만약 당신이 사기꾼을 만났다면 그가 왜 사기꾼이 되었는지를 묻는 건 별 의미가 없다. 대신 어떤 사기를 어떻게 쳤는지 물어보는 게 옳다. 아마 그는 전자보다는 후자의 질문에 더 신이 나서 자신의 이야기 보따리를 양껏 풀어놓을 것이다. 물론 진짜 사기꾼이라면 나중에 당신까지 속여먹고 튈지 모르니까 그 전에 얼른 차버려야겠지만, 그게 나홍진 같은 영화감독이라면 기분 좋게 한 번 속아줘도 좋지 않겠는가. 가뜩이나 재미 없는 세상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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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를 보고 아내가 많이 울었다. 극장을 나와 얼굴이 빨개진 아내에게 왜 울었냐고 물었더니 챙피해서 그렇다고 대답한다. 무엇이 챙피했는지는 묻지 않았다. 나 역시 부끄러웠으니까. 우리보다 훨씬 못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미래가 아닌 더 큰 가치들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친 젊은이들이 있었다는 사실에 일차적으로 부끄러웠고 우리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도 더 어른 같았던 선배들의 언행에 이차적으로 부끄러웠다. 지금처럼 시험에 나오는 지식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서 지녀야 할 기본적인 것들에 대해 가르치고 배우던 시대라 그런 '인간의 품격'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시인 윤동주는 어렴풋이 알지만 독립운동가 송몽규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고 살았던 우리들의 얕은 역사 지식에 또 한 번 부끄러워졌다. 마치 영화 <암살> 덕분에 뒤늦게야 천만 명의 한국인이 김원봉이라는 거인의 존재를 처음 알게 된 것처럼.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중학교 땐가 무슨 상을 받으면서 같이 받은 시집이었다. 그 후로 계속 이 시집을 끼고 살았던 것 같다. 몇 년째 나의 카카오톡 메신저 대화명이 하늘을 우러러 여러 점인 것만 봐도 윤동주의 시가 나에게 끼친 영향이 얼마나 지대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윤동주의 시는 그저 막연히 아름다웠으며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나서 그런지 글에서 늘 청년의 냄새가 났을 뿐, 그 시들이 어떤 상황에서 어떤 심정으로 씌여졌는지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었다.  

영화 <동주>를 만들기로 한 사람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얼마 되지 않는 역사적 사실만으로 참 감동적인 씨나리오를 썼다 생각하고 찾아보니 극본을 쓴 신연식은 <러시안 소설>이라는 영화를 만든 감독인데 그가 먼저 씨나리오를 써서 이준익 감독에게 보여주었고 이후 둘이 같이 각본 작업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백억 원이 넘는 흥행작을 주로 만들던 감독이 순제작비 5억 원짜리 흑백영화를 만드는 것은 또 다른 의미에서의 모험이었을 것이지만 이준익은 거기서 흥행의 부담감을 덜어낸 자유를 느꼈던 것이리라. 대신 이준익은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과정이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자라고 말했다고 한다. 비록 적은 예산이지만 70년 전에 살았던 젊은이들의 순수한 마음과 뜨거운 혈기는 만드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펄펄 살아날 수도 있고 그냥 날아가 버릴 수도 있을 테니까. 


감독과 제작자의 간절한 마음이 통해서 그랬는지 영화는 흑백임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호연으로 찬란하게 빛이 난다. 북간도에서 함께 나고 자란 윤동주와 송몽규는 사촌형제다. 둘 다 공부도 잘하고 똑똑한 편인데 내성적이고 섬세한 동주에 비해 몽규는  행동주의자적인 면모를 지녔다. 당연히 몽규가 앞장서고 동주가 따라가는 경우가 많다.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의 나아갈 길을 제시하고 실천으로 보여주는 것도 그렇고 심지어 장난처럼 투고한 글이 동아일보 꽁트 부문에 당선되는 것도 몽규가 먼저다. 늘 시인이 되기를 꿈꾸던 동주는 뭐든 결심하면 곧바로 몸을 던지는 몽규가 부럽다. 몽규는 니는 계속 시를 쓰라. 총은 내가 잡을 테니.라고 말한다. 그러나 성격과 성향이 달랐을 뿐 뜨거운 심장을 가진 것은 똑같았기에 결국 둘은 같은 감옥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런 두 사람을 얘기하면서 배우 얘기를 안 할 수가 없다. 우선 유아인을 제치고 동주 역을 맡게 된 강하늘(시나리오를 읽어본 유아인이 동주 역을 매우 탐냈으나 너는 너무 스타라서 안 된다며 감독이 거절했다는 얘기를 아내에게서 들었다). 섬세하고 내성적인 윤동주의 파리한 얼굴은 물론 원고지에 세로로 써내려가는 펜글씨까지도 윤동주의 필체를 닮았다. 이준익 감독도 영화를 찍으면서 깜짝 놀랐다고 한다. 실제로 윤동주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지금 윤동주를 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 만큼 윤동주가 된 사람. 이는 강하늘만이 아니다. 배우들 뿐 아니라 전 스태프가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 윤동주평전을 읽었다고 하니 과정이 아름다운 영화를 만들자는 감독의 다짐은 사실이었던 것 같다. 

영화의 제목이 ‘동주’지만 사실은 ‘몽규’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소리가 나올 정도로 송몽규 역을 맡은 박정민의 연기는 대단하다. 특히 마지막 부분 취조장면에서 뿜어내는 카리스마는 엄청나다. 박정민은 지치고 아픈 연기를 하기 위해 촬영 전날부터 물과 밥을 안 먹고 버텼으며 연기에 너무 몰입하느라 안압이 올라 실핏줄이 터지는 바람에 촬영을 중단하고 병원에 실려갈 정도였다고 한다. 

감옥 창살 사이로 별을 헤아리며 동주의 목소리로 '별 헤는 밤'이 흘러 나올 때부터 아내는 울었지만 영화에서 가장 슬프고 아팠던 부분은 일본 경찰이 동주와 몽규에게 각각의 죄상을 적은 서류를 주고 서명을 요구하는 장면이었다. 동주는 자신의 손가락을 잘라서 지장을 찍으면 될 것 아니냐며 서명을 거부하고 몽규는 거기에 적힌대로 내가 다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울부짖으며 서명을 한다. '우리는 문명국이라서 절차를 지키는 것이라는 일제의 궤변 앞에서 목숨을 걸고 서명을 거부하는 젊은이도 불쌍하고 눈물을 뿌리며 서명을 감행하는 젊은이도 불쌍하다. 객석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진다. 

면회 장면에서 동주의 죽음을 알리는 몽규의 비참한 얼굴이 눈에 선하다. 동주와 몽규가 살아서 지금 엉망이 된 우리나라를 본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다행히 영민한 배우들이 있어서 조금 위안이 되긴 한다. 연기를 잘 하던 배우 박정민은 글도 잘 쓰는 모양이다. <톱클래스>라는 월간지에 매달 칼럼을 연재한다고 한다. 그가 쓴 글 <동주>를 덧붙인다. ‘언희(言喜)’는 말로써 기쁨을 준다는 그의 필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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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영화를 처음 봤던 건 [원더플 라이프]라는 작품이었다. 꽤 오래 전 광화문에 있는 극장에 예약을 했는데 무슨 일 때문이었는지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혼자 전철역에서부터 미친듯이 달려 영화 시작 직전에 겨우 입장을 했고 뛰어오느라 너무 숨이 차서 몇 분간 민망할 정도로 숨을 헐떡거리며 봤던 기억이 생생하다. 


죽은 사람들이 저승으로 가기 전에 림프계에 머물면서 일 주일간 자신의 인생을 정리하고 작은 단편 영화를 한 편씩 찍은 다음에 비로소 다음 세상으로 간다는 내용이 참 우화적이면서도 통찰력 있다는 생각을 했었다.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경험을 묻는 질문에  ‘도쿄 디즈니랜드에 가서 놀았던 기억’을 대는 사람들이 의외로 너무 많았다는 사실이 서글퍼서 이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는 감독의 인터뷰를 ‘씨네21’에서 읽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아무도 모른다]라는 영화를 정말 인상 깊게 보았고 [걸어도 걸어도]나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도 무척 좋아하는 영화가 되었다. 게으른 탓에 데뷰작 [환상의 빛]이나 오다기리 조가 나오는  [진짜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은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오늘 본 [바닷마을 다이어리] 역시 좋았다. 정말 악인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드라마인데도 이렇게 지루하지 않은 이야기를 만들 수 있는 저력은 아디서 나오는 것일까. 이번 작품은 어렸을 때 가족을 버리고 다른 가정을 꾸몄던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하게 되는 시건을 계기로 배다른 여동생과 살게 되는 세 자매의 이야기인데, 고레에다 감독 특유의 차분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스토리텔링이 여전히 빛을 발하고 있었다. 특히 여성들과 아이들, 노인들 각각의 심리를 묘사하는 상황설정과 대사의 섬세함은 정말 최고다. 내친 김에 영화의 내용을 자세하게 쓰고 싶은 마음도 없지 않지만,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영화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내가 아무리 그 내용을 상세히 전달한다 한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는 아야세 하루카는 예전엔 그저 예쁘다는 생각만 했는데 이젠 공력이 쌓여서 그 어려운 맏언니 역할도 참 똑부러지게 잘 하는구나 하는 생각, 가세 료가 어느새 저렇게 나이가 들었구나 하는 생각, 릴리 프랭키는 정말 멋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그리고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는 앞으로도 무조건 봐야겠구나, 라고 생각했다는 것 등을 짧게 메모해 놓는 게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면서 아내는 ‘릴리 프랭키 아저씨는 우리나라 김창완과 참 비슷하다’는 얘기를 했다. 맞는 얘기다. 소설도 쓰고 영화나 드라마에 출연도 하는 릴리 프랭키는 여러 가지로 김창완과 많이 닮았다. 특히 둘 다 어깨에 힘을 빼고 자유스러운 일상과 영혼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 그렇다. 


일상이 바쁘고 단조로워서 밀린 영화들이 많다. 개봉한 지 꽤 지난 타란티노의 영화도 봐야 하는데. 어쨌든 오늘은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영화를 한 편 보았으니 이 또한 뿌듯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내일은 월요일. 또 다시 일상과의 전쟁이다. 뭐 어쩌겠는가. 오늘 본 영화의 좋은 에너지를  연료 삼아 내일 하루를 또 무사히 잘 버텨보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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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령 레이먼드 카버나 윤대녕의 소설을 지금 열 다섯살 중학생이 읽는다고 생각해 보자. 뭐, 하얀 종이 위에  까만 글씨들이니 읽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그건 읽는 것이 아니다. 뜻도 모르고 그냥 눈으로 스캔하는 것에 다름 아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 같지만 사실은 매번 엄청난 일들이 일어나는 카버의 짧은 소설들이 우리 인생의 뒤통수를 후려치는 행위라는 것을, 여행만 떠나면 자살 직전일 것 같은 여자들을 만나 카페에서 술을 마시거나 여관에서 같이 자는 주인공의 여정이 인생의 쓸쓸함과 신산함을 돌려 말하는 글이라는 것을 열 다섯살 나이가 어찌 알 수 있겠는가. 인간은 일정 나이가 되기 전까지는 절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는, 그런 존재다. '열 두살은 열 두살을 살고 열 여섯은 열 여섯을 살지’라는 김창완의 노래도 바로 그런 얘기일 테니까.

홍상수 감독의 새 영화 <지금은맞고 그때는틀리다>가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장면이 거의 없는데도 '미성년자 관람불가’가 된 것은 미성년이 봐서는 아무런 의미도 느낄 수 없고 재미도 없을 것이라는 감독의 판단과 배려 덕분이다.  에로나 포르노만 성인영화가 아니다.  진짜 성인영화란 이런 것이다. 어른들이 아니면 절대로 느낄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런 이야기, 그런 이데올로기. 


홍상수의 작품들을 즐겨 본 사람들이라면 이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이야기할 것이다. 또 그 얘기야? 그렇다 또 그 얘기다. 이번에도 영화감독이 주인공이고 그림을 그린다는 젊은 여자가 하나 나온다. 둘은 우연히 만나 차를 마시고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술에 취해 서로 약점을 드러내고 속내를 탐색하다가 치사하거나 어이 없는 공방전이 몇 차례 지나가고 결국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서 이야기는 끝을 맺는다. 그런데 이런 지리멸렬한 이야기로 감독은 이번 로카르노 영화제 대상을 탔고 정재영은 남우주연상까지 탔다. 어떻게 그런 결과가 가능했을까. 


수원에 GV 및 특강이 있어서 내려 온 영화감독 함춘수는 주최측의 착오 때문에 하루 일찍 오는 바람에 행사 전날 숙소를 정해두고 하릴없이 화성행궁 안을 배회하고 있었다. 후줄근한 청바지와 오리털 파카는 자유로운 영혼이라기보다는 돈 없고 시간은 많은 소외된 지식인의 모습에 가깝다. 고궁의 따뜻한 햇빛이 내려쬐는 툇마루에서 잠깐 졸던 춘수는 그곳에서 바나나우유를 마시고 있는 젊은 여자 희정을 목격한다. 뭐 하세요, 라고 거의 본능처럼 남자가 말을 붙이고 우유 마시는데요, 라고 여자가 대답을 하고. 어렵게 어렵게 말을 붙인 두 사람은 남자가 유명한 영화감독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여자가 “저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 것 같아요"라고 말을 하면서 급반전을 이룬다.

커피를 마시러 밖으로 나간 두 사람은 그녀가 그림을 그린다는 작업실로 가게 되고 거기서 그녀의 그림을 본 남자는 “희정 씨는 모르고 들어가서 뭔가 대단한 걸 발견하는 것 같아요”라는 애매모호로 칠갑을 한 칭찬들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해가 지자 자연스럽게 스시집으로 가서 소주를 마신다. 원래는 치킨집에 갈 계획이었는데 춘수가 즉흥적으로 스시집 앞에 멈추는 바람에 희정이 그집으로 들어가자고 한 것이다. 

단 둘이 술을 마시며 남녀가 하는 일이 무엇이겠는가. 남자는 계속 여자에게 작업을 걸고 여자는 아는 듯 모르는 듯 웃음을 흘리며 남자의 애간장을 태운다. “아유, 제가 무슨…”이라는 입에 발린 지식인의 겸손을 몸에 두른 듯한 정재영의 연기도 그렇지만 이제는 나이가 들어 인생의 맛을 어느 정도 알게 된 김민희의 자연스러운 목소리와 연기도 일품이다. 널리 알려진 얘기지만 홍상수 영화에 나오는 음주 장면은 모두 실제 술을 마시는 것이라고 한다. 이번에도 배우들은 진짜 술을 마시고 그 술에 취해가는 것을 실시간으로 느끼며 연기를 했다고 한다.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나의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저 배우들은 술이 좀 약하네. 보통 홍상수 영화에는 테이블에 소주가 대여섯 병은 늘어서 있는데 아까 걔네들은 세 병밖에 없었잖아.”

그렇다. 세 병이든 다섯 병이든 중요한 건 배우들이 정말로 술을 마시며 연기를 한다는 사실이다. 이건 대사를 정확하게 외우고 연기를 하냐 아니냐의 문제를 훌쩍 넘어서는 연출법이며 연기 테크닉이다. 배우들은 그날 아침에야 감독이 쓰기 시작하는 시나리오를 받다들고 연기를 한다. 물론 그 전에 감독과 충분한 대화를 통해 이 영화가 어떤 컨셉과 얼개로 진행이 될 것이고 어떤 소재들이 등장할 것이라는 건 알지만 1부와 2부가 어떻게 미세하게 다를 것이라는 것까지는 모르고 영화를 찍게 된다. 그건 감독도 닥쳐보기 전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천재의 자신감이 아니면 생각할 수도 없는 독단이요, 파격이다. 아무튼 이번엔 술이 약한 배우들이 술 영화를 찍느라고 고생을 좀 했겠다. 나중에 들었는데 정재영은 정말 스시집 장면을 찍고 나서 기절하듯 쓰러져 잤다고 한다. 


술을 마시던 두 사람은 희정이 깜빡 잊고 있었던 파티에 함께 가게 되고 거기서 최화정, 기주봉, 서영화 등을 만나게 되는데 이미 술이 많이 취했고 또 깐깐한 최화정에 의해 춘수가 일찍 결혼을 한 유부남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계에서 바람둥이로 소문이 자자한 인물이라는 것이 모두 밝혀진다. 화가 난 희정은 다른 방으로 가서 책상에 업드려 자고 춘수는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한채 숙소로 돌아간다. 다음날 GV때 사회자이자 평론가인 유준상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춘수는 밖으로 나와 담배를 피우며 마구 그 평론가를 욕하게 되고 마침 엉뚱하게 자신의 시집을 들고 찾아온 서영화를 만나 인사를 나누게 된다. 여기까지가 1부다.

2부는 똑같은 이야기가 조금씩 다르게 펼져친다. 이건 <오!수정>이나 <강원도의 힘>에서부터 계속 되던 '홍상수표' 전개방식이다. 그때는 정보석이 “포크예요”라고 하다가 “스푼이에요”라고 바뀐 것 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그 후로 시간대를 마구 뒤섞어본다든지(<자유의 언덕>) 시점이 바뀌면서 드러나는 코미적인 상황들을 보여준다든지(<우리 선희>) 하는 변주가 점점 더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홍상수의 '반복과 차이’는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전에는 그런 것을 통해 지식인의 위선, 남자들의 찌질함, 여자들의 빤한 속내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이 홍상수 영화가 재미 있지만 불편하다고 한 이유이기도 했다. 그런데 점점 나이가 들어가면서 홍상수는 더 여유로워지고 깊어진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은맞고 그때는틀리다> 리뷰를 쓰려고 다시 살펴보니 제목의 띄어쓰기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다. 왜 그런가 궁금해 인터넷을 찾아보니 홍상수 감독 왈 ‘제목이 너무 길어서’ 였다고 한다. 제목의 의미를 찾아 헤맨 사람들에겐 다소 김이 빠지는 설명일 수 있겠다. 그런데 난 그게 이 영화를 이해하는 작은 팁이 될 수도 있다 싶었다. 

홍상수 영화가 세상의 찌질함, 남자들의 유치함을 연료로 삼고 있는 코미디 영화라는 점은 데뷔적부터 지금까지 여전하지만 그 걍팍함은 많이 사라졌다. 거짓말을 일삼는 춘수도 2부에서는 더 솔직해지고 희정도 그런 춘수를 탓하기는커녕 나중에 술에 취한 춘수가 선배 언니들 앞에서 팬티까지 내리는 추태를 보였다는 얘기를 듣고도 오히려 귀엽게 여긴다. 거짓말을 하든 참말을 하든 애초부터 세상에 큰 변화는 없다는 것이다. 이건 1부와 2부가 사뭇 다르게 진행되지만 큰 그림으로 놓고 보면 별 차이가 없다는 점에서 그렇다. 2부에서 둘이 즉흥적으로 택시를 타고 강원도로 놀러가기로 의기투합하지만 잠깐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그 얘기가 흐지부지 되어 없었던 얘기처럼 취급되는 장면도 그렇다. 둘이 택시비로 십만 원을 내고 강원도까지 가든 안 가든 뭐 그리 달라질 일이 있겠는가. 


자세히 들여다보면 홍상수 영화는 절망도 희망도 없고 ,그저 흘러갈 뿐이다. 그런데 그 흘러감이 인위적이지 않고(우연을 질료로 삼는데도 불구하고!) 인생의 쓴맛단맛을 아는 통찰력이 스며있기에 가치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그 나른한 술자리와 반복되는 헛소리들 속에서 우리들의 인생이 의외의 위로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 홍상수의 영화들은 흥행과 상관 없이 또 만들어질 것이고(2009년 <잘 알지도 못하면서>부터 전원사라는 영화사를 차려 자유롭게 영화를 찍고 있다) 비슷한 얘기를 하더라도 또 다른 재미와 의미가 피어날 것이다. 또 어디서 어떤 영화가 만들어질까. 이번엔 수원이었지만 다음엔 제천일 수도 있고 부산일 수도 있다. 그게 어디면 어떻겠는가. 어디나 사람은 살아가고 있고 이야기는 만들어지는데. 우리 곁에 홍상수가 있다는 게 참 다행이다. 그는 영화라는 형식을 통해 인간을 탐구하고 새로운 세상을 발명하는 발명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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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이 힘든 이유는 누구에게나 기쁜 날보다 힘든 날이 월등히 많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퇴근 후에 허름한 술집에 모여 직장 상사를 욕한다. 아니면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시댁 사람들 흉을 본다. 휴가를 가서 멋진 여행 사진을 찍어 SNS에 올리기도 한다. 그리고 단골 바에 가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다. 그런데 유난히 기분 나쁘고 우울한 날엔 어떤 음악을 듣는 게 좋을까. 얼핏 신나는 음악을 듣고 마구 춤이라도 추면 나아질 것 같지만 심리학자들은 오히려 그럴 땐 슬픈 음악을 듣는 게 더 낫다고 조언한다. 신나는 리듬과 볼륨으로 자신의 감정을 속이면 당장은 효과가 있을지 모르지만 결국 그런 ‘자기기만’은 현실적으로나 심리적으로나 무엇 하나 해결해 주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파티가 끝나고 나면 다음날 더 쓸쓸해지는 ‘파티 증후군’을 생각하면 쉽게 수긍이 가는 얘기다.


그건 영화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물론 입시 준비나 직장 생활, 구직 생활 등등 무엇 하나 잘 풀리지 않는 답답한 현실에 시달리다 오랜만에 극장 나들이 한 번 하기로 한 사람들이라면 신나게 달리고 때려부수는 블록버스터나 샤방샤방한 로맨틱 코미디에 먼저 눈이 가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그러나 당의정에 싸인 예쁜 알약은 잠깐의 진통효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가끔은 입에 쓰지만 약효가 서서히 퍼지는 보약처럼 우리 마음에 자양분이 되는 영화들을 찾아보아야 하는 것이다. 지난 주에 개봉한 [산다]가 바로 그런 영화다.



강원도 건설현장에서 잡부로 일하는 주인공 정철은 매순간 벼랑끝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질 정도로 위기와 고통의 연속을 사는 인물이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이 대한민국 지방도시에서 정규 직장 없이 살고 있는 30대 남자. 부모는 산사태로 집이 무너질 때 흙더미에 깔려 돌아가셨고 옆에는 정신이 좀 온전치 못하고 행실도 헤픈 누나와 그녀가 낳은 아빠가 누군지도 모르는 어린 조카, 그리고 착하긴 한데 약간 모자라 보이는 친구 명훈이 있을 뿐이다.


기댈 언덕 하나 없는 척박한 세상에서 하루하루 밥을 벌기 위한 정철의 고군분투는 우직하고 눈물겹다. 첫장면에서 정철 혼자 가시덤불을 자르고 나무를 베는 장면이 한참 나온다. 대사는 한 마디도 없다. 그저 계속 일을 할 뿐이다. 그 장면이 지나간 다음에도 왜 그 일을 했는지에 대한 설명조차 없다. 박정범 감독은 강원도 일대를 돌아다니며 로케이션 헌팅을 하다가 그 장소를 발견하고 즉흥적으로 그 장면을 찍었다고 한다. 이 첫 장면은 그 후로 계속되는 공사장, 벌목장, 메주공장(그리고 메주공장 사장집에서의 가사노동까지!) 등에서 펼쳐지는 고된 노동현장을 압축해서 보여준 것이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박정범 감독은 놀라운 사람이다. 혼자 영화를 기획하고 시나리오도 쓰고 연기도 한다. 전작인 [무산일기]를 보면 그가 얼마나 연기를 잘 하는 '배우'인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영화의 경우는 시나리오를 무려 50번이나 고쳤다고 하니 영화에 대한 그의 집념이 놀랍다. 신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는 젊은 여자 아이 이야기를 다뤘던 다르덴 형제의 [로제타]처럼 현실적인 주제의 이야기를 고안하고 그 위에 실제로 메주공장을 운영했던 자신의 가족사를 얹으니 영화가 씨줄날줄로 튼튼해질 수밖에 없다. 흔히 독립영화라고 하면 습작처럼 어둡고 거친 화면과 녹음, 허술한 내러티브 등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선입견을 가볍게 배신한다. 물론 돈이 없어서 조명을 거의 쓰지 못한 듯한 촬영 상태는 좀 아쉽지만 능수능란한 화술과 시제를 적절히 뒤섞은 편집은 165분 동안 영화에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리고 대사들도 훌륭하다.



정철은 자신과 동료들의 돈을 떼어먹고 서울로 도망간 공사장 십장의 집을 찾아간다. 밖에서 두드려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아이 혼자 라면을 끓여먹으려 하고 있던 집 창문을 부수고 들어간 정철 일행은 그 집 현관 철문을 떼어들고 나온다. “현관문 다시 찾으려면 아빠한테 돈 들고 오라고 해.”라는 말을 어린 아이에게 남기고. 잔인하지만 할 수 없는 일이다. 영화는 정철을 멋진 남자나 정의로운 사람으로 그리지 않는다. 그저 살아가기 위해 뭐든 다 하는 무색무취한 사람으로 보여줄 뿐이다. 툭하면 가출을 하고 고속터미널에서 아무 남자나 끌고 가 섹스를 한 뒤 돌아와서는 자해를 하는 누나를 어쩔 것인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아빠를 찾고 싶다며 교회 헌금통에서 훔친 돈과 명훈이 알려준 쪽지만 들고 무작정 서울의 공장까지 올라간 조카 하나를 어쩔 것인가. 돈 떼어먹은 십장과 내통했다고 자신을 찾아와 린치를 가하는 동료들이나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뺀다고 악다구니를 쓰는 된장공장 기존 노동자들의 질시를 어쩔 것인가.



이런 이야기일수록 배우들의 좋은 연기가 관건인데, 마침 이 영화는 정철을 연기하는 박정범은 물론 그의 바보 친구을 연기하는 박명훈의 연기도 믿음직하다. 연극판에서 이미 검증된 배우 이승연의 열연 또한 눈이 부시다. 나는 동생에게 붙잡혀 트럭을 타고 가다가 갑자기 트럭문을 열고 그냥 도로로 굴러떨어지는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아마 정철의 누나가 대학로에서 오디션 보는 장면에서는 거의 모든 관객들이 전율을 느껐을 것이다. 그리고 이번 연기가 처음이라는 하나 역의 신햇빛과 메주공장 사장딸 역의 박희본까지 모두 제 역할에 충실하고도 남는다. 다만 메주공장 사장의 연기만 조금 어색했는데, 알고보니 그 분은 감독의 친아버지였다고 한다.


그렇다고 이 영화가 시종일관 무겁고 답답한 것만은 아니다. 간간히 유머코드도 있고(‘우리 같이 잤잖아’, ‘저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공장에서 함께 밥을 나눠먹는 메주공장 노동자들의 인간적인 면모들도 눈물겹지만 트로트적인 감성이 깔려있다. 난 특히 뭐든 곁에서 도움이 되고싶다는 명훈에게 “그럼 수퍼에 들어가서 저 무우 하나 훔쳐봐”라고 말한 뒤 그렇게 못하겠다는 명훈에게 시범을 보이려 일부러 무우를 훔쳐나와 땅바닥에 패대기 치던 정철의 모습과, 술에 취해 버스 승무원으로 일하고 있는 여자친구 진영을 찾아가 행패부리던 장면이 특히 좋았다. 해가 진 저녁, 터미널에 멈춰있는 고속버스 안에서 손님들과 함께 조하문의 ‘이밤을 다시 한 번’을 부르던 진영은 갑자기 버스 안으로 들어온 정철 때문에 당황한다. 그리고 곧 손님들에게 린치를 당하는 정철. 취해서 저항도 제대로 못한다. 그리고 그런 정철을 감싸는 진영. 너무 가난하고 힘들면 사랑하기도 힘들다. 가슴 아픈 장면이지만 따스한 장면이기도 하다.



버스 안에서 주인공이 창밖을 바라보다가 정류장이 다가오자 좌석으로 허리를 낮추어 몸을 숨기던 [무산일기]의 마지막 장면을 잊을 수가 없다. 툭하면 “아닙니다. 할 수 있습니다!”라고 말하던 절실한 대사가 잊혀지지 않는다. 이 영화에서도 메주공장 사장이 “자네, 닭 잡을 수 있나?”라고 물었을 때 박정범의 “할 수 있습니다!”라고 외치는 장면은 기시감처럼 튀어나와 나의 뇌리에 박혔다. 이것은 뭐든 할 수 있다고 얘기하지 않으면 당장 밥을 굶어야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남들의 일자리라도 빼앗지 않으면 가족들을 건사할 수 없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답이 보이지 않는 많은 대한민국 사람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비참한 이야기 속에서도 희망의 빛은 피어난다. 가출한 누나를 위해 조카 하나와 함께 집앞에 가로등을 설치하는 장면이 그렇고 한밤중에 철문을 짊어지고 가서 다시 아이에게 현관문을 달아주는 정철의 전기드라이버 소리가 그렇다. 165분 내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봤던 영화였고 불이 켜지고 일어나면서 꼭 다시 한 번 봐야겠다는 생각이 든 영화였다. 지금 극장에서 상영 중이다. 강추한다. 놓치지 마시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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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때던가, 시드니 셀던의 데뷔작인 [네이키드 페이스] 읽다가 깜작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소설 속에선 헐리우드에 입성한 무명 여배우가 스튜디오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꼬마 사환에게 어찌어찌 꼬투리를 잡히는 바람에 즉석 섹스를 하게 되는데, 꼬마가 '엉뚱한 삽입을 하려는 바람에 여배우가 매우 당황하는 장면이 있었죠. 알고보니 10 꼬마는 항문섹스를 즐기는 변태성욕자였던 것입니다


어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 투 더 스타(Maps to the stars)] 보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소설이 다시 생각났습니다이 영화에 나오는 아역배우 벤지 때문이었죠. 벤지는 어렸을 때 출연했던 시트콤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지금은 자기보다 더 어린 배우에게 밀려 초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열세 살짜리 소년입니다. 그런데 영화 초반에 그에게 뭔가 충고를 해주는 남자 매니저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언사("차라리 바지를 내리고 그 안에 든 보지를 보여주지 그래? 이 뚱땡이 게이새끼야!")로 앙칼지게 욕을 해대는 걸 보고 저는 그만 기가 질려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만나 권총을 뽑아들고 러시안 룰렛 흉내를 내다가 개를 쏘아 죽이는 아슬아슬한 장면은 정말 섬뜩하죠. 그리고 무엇보다 늘 집에서 가운 비슷한 옷을 입고 지내는 그의 표정이나 몸짓은 권태롭지못해 ‘데까당’ 하기까지 합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이 지경입니다. 얼굴과 목에 화상 자국이 선명한 채 나타난 정체불명의 소녀 애거서, 어렸을 때 엄마에게 당한 성적 학대를 잊지 못하며 늘 캐스팅에 대한 초조함에 시달리는 여배우 하바나, 아들 벤지의 약물문제와 일탈 때문에 늘 전전긍긍하는 크리스티나,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방화범 딸에게서 나머지 가족을 보호하고 심리치료사로서의 자신의 명성에도 누가 되지 않게 하려 애쓰는 샌포드까지. 이들이 벌이는 근친상간과 쓰리썸, 살인, 방화, 화형(태워 죽임) 등이 이 영화의 스토리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입니다. 게다가 주요 등장인물들은 걸핏하면 눈앞에 유령이 나타나는 신경쇄약증세까지 보이고 있죠. 마치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처럼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극단적인 상황들을 한꺼번에 모아 일렬종대로 전시해 놓고는 “여기 제정신인 사람이 어딨어? 하하.”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비디오 드럼]이나 [플라이], [그래쉬] 같은 ‘신체변형’영화들을 거쳐 근작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 프러미스]로 어둡지만 품격 있는 신화의 세계를 직조해 내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왜 새삼 이렇게 적나라한 메타포에 달겨들었을까요.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미 오래 전에 이야기를 완성해 놓은 작가 브르스 와그너의 시나리오를 보고 ‘헐리우드가 근친상간 관계로 유지된다’는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어 이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문제를 극단적으로 풀어내기엔 헐리우드만한 무대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겠죠.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인 브르스 와그너는 빌리 와일더 감독의 [선셋대로] 첫장면이 호화저택 풀장에서 빠져죽은 시나리오 작가의 대사로 시작되는 데서 이야기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등장 인물 중 애거서와 사귀면서 하바나와도 섹스를 하게 되는 제롬 역의 로버트 패틴슨이 리무진 운전기사로 나오는데, 시드니 셀던이 17살에 이미 허리우드에 들어와 각본가로 활동했던 것처럼 브르스 와그너도 젊었을 때 헐리우드에 와서 리무진 기사로 시작해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다고 하죠.



이 영화는 일반인들은 도저히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들만의 정신세계’ 이야기라는 점에서 우리 정치인들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정치란 원래 사람들의 삶을 이롭고 조화롭게 하기 위한 행위라지만 실제 정가는 정의보다는 거대한 욕망의 수레바퀴를 따라 굴러기기 때문입니다. 욕망 앞에선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데,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고,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행복할 수 없다,는 개 같은 삼단논법이 성립됩니다. 



멀쩡해 보이지만 알고보면 모두 외롭거나 비정상인 사람들. 그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열연이 눈부십니다. 특히 칸느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줄리안 무어의 변화무쌍한 연기는 어느 정도 예상을 했었지만 그래도 막상 보고 다시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출연하고 싶었던 영화에 먼저 캐스팅 되었던 동료 여배우가 갑자기 아들을 잃는 바람에 영화를 포기하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슬퍼하는 척 하다가 곧바로 신이 나서 춤을 추는 장면이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될 것 같습니다. 그 장면에서 옆에 있던 미아 와시코브스카에게 같이 춤을 추라 명령하며 자신도 몸을 흔드는 장면은 정말 사악하고도 기괴하죠. 그런데 제 개인적으로는 친한 친구들과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는 장면 바로 다음에 점프컷으로 그 멤버들이 쓰리썸을 하는 장면이 더 좋았습니다. 이상한 건 남자 배우도 그리 호색한으로 생기지 않았고 줄리안 무어의 동성 친구도 그냥 평범한 비즈니스 파트너나 오랜 친구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쓰리썸을 한다는 건 그들의 평소 삶이 윤리적으로 얼마나 왜곡되어 있고 서로가 공범의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난 의문의 소녀 애거서 역을 맡은 미아 와시코브스카의 재감 또한 무시무시합니다. 자신의 부모가 남매였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집에 불을 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애거서는 7 년만에 다시 가족 앞에 나타나 그들의 삶에 균열을 만듭니다. 약간 또라이처럼 보이는 보이시한 여자 역할을 미아 와시코브스카만큼 잘 소화해내는 배우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가만히 있어도 그림이 되는 특이한 배우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하 [스토커]에서도 마지막에 살인을 저지르는 역할이었는데 여기서도 마지막에 영화상 트로피로 줄리안 무어를 때려죽이는 역을 진짜 리얼하게 해냅니다. 그밖에도 벤지 역의 에반 버드도 천재인 거 같습니다. 마치 요즘 우리나라의 감초배우 안내상처럼 어느 영화에 나와도 제 역할을 다 하는 존 쿠삭을 보는 것도 즐겁구요.



헐리우드 뿐만 아니라 매스미디어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얘기이고 공감하는 명제 중 하나는 ‘연예인들은 부업을 해야 한다’는 법칙입니다. 인기라는 건 언제 시들어질지 모르는데 한 번 그 생활에 맛을 들이면 다른 일은 도저히 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거죠. 지금도 기획사에서 또는 골방에서 열심히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이 땅의 수백 만 연습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오르려 했던 나무는 다름 아닌 ‘욕망의 나무’인데 그 나무 끝에는 뭐가 있을까요. 그게 찬란하고 달콤한 열매는 아닌 것 같다고 이 영화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0억 원이 있으면 행복할까. 잘 나가는 스타나 CEO가 되면 행복할까. 우리나라 최고 부자라는 삼성 이건희 가족들도 그리 행복해 보이진 않던데…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많아진다고 해서 마냥 심란하기만 한 영화는 아닙니다. 장면장면의 몰입도가 높고 배우들의 대사 구사력도 압권입니다. 일단 좋은 시나리오라서 그렇겠지요. 어쨌든 시간이 된다면 한 번 극장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제 술을 마시며 이 영화 생각을 다시 하다가 엉뚱하게도 줄리안 무어가 미아 와시코브스카게 맞아죽을 때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던 피투성이 트로피가 오스카였는지 골든글로브였는지가 궁금하더라구요. 뭐, 어느 쪽이라도 비참하고 씁쓸하긴 마찬가지겠지만 말입니다. (맥스무비에 실린 허남웅 기자의 리뷰에서 많은 내용을 참조해 썼습니다. http://m.maxmovie.com/news/news_view.asp?mi_id=MI0100775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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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춘희로 나왔던 심은하의 직업이 결혼식 촬영기사였죠. 주말이면 정말 바쁜 결혼식 촬영기사. 결혼식은 두 사람에게 거의 단 한 번뿐인 행사고 또 단숨에 지나가기 때문에 혹시라도 잘못 찍게 되면 두고두고 욕을 먹는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결혼식 비디오라는 게 집들이날 당사자들에게나 재밌지 다른 손님들까지 박장대소하며 같이 볼 영화는 아니지요(그래서 저희 부부는 결혼식 비디오를 아예 찍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결혼식 비디오만으로 훌륭한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큐멘터리 감독 덕 블록(Doug BLOCK)입니다.


뉴욕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살아가던 덕 블록은 ‘아르바이트’로 이십 년 간 결혼식 비디오를 촬영했답니다. 수입이 꽤 짭짤하고 안정된 생활이었던 모양이지요. 그런다가 어느날 자기가 비디오를 찍어준 그 사람들은 결혼식 이후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평범했던 결혼식 비디오들이 감독의 신선한 발상에 의해 새로운 영화로 탄생하는 순간이었죠. 무려 112쌍의 결혼식 고객 중 9쌍이 그에게 인터뷰 허락을 전해왔습니다. 감독은 그들을 다시 만나 결혼식 이후 각자의 스토리들을 추적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시작과 진행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고 인생에 대한 우문현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순간을 들여다보는 손쉬운 방법이기도 합니다. 다큐 감독이라 그런지 예전에 찍어놓은 결혼식 비디오도 범상치가 않습니다. 더구나 십여 년 후에 만나 그들을 인터뷰한 필름은 놀랍기까지 합니다. 인터뷰어의 통찰력에 따라 인터뷰이들의 대답의 깊이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죠. 

젊었던 신랑 신부가 아이들을 낳고 자신의 커리어를 착실하게 쌓아간 이야기를 듣는 것은 흐뭇한 일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해 간 모험담이니까요. 그런데 더 대단한 것은 그렇게 희망에 부풀어 함께 시작했던 사람들 중 누군가는 결국 이혼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까지 가감없이 털어놓는 장면들이 있다는 것이죠. 이건 감독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영화에는 레즈비언 커플도 나오고 우리나라 여성도 나옵니다. ‘윤희’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바이올린을 전공했던 재원이었는데 어느날 비행기 옆자리에서 “혹시 그 바이올린 케이스로 총기류를 운반하는 거 아니냐?"고 농담을 하던 남자와 사랑에 빠져 미국에 정착하게 된 사연이었습니다. 딸이 한국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을 줄 알았던 그녀의 부모님들은 미국에서 찍힌 결혼식 비디오에서 매우 찹찹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랜 세월이 지나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죠. 


일부러 그렇게 고른 것은 아닐텐데 인터뷰이들이 거의 다 평범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말도 조리있게 잘들 합니다. 여유있고 유머도 풍부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천생연분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천생연분은이란 없다.” 참 열려있는 생각이죠. 이건 '첫 번째 결혼’에 출연한 ‘수와 스티브 커플’에서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시작은 어이없게도 부킹클럽이었지만 지금까지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잘 살고 있으니까요. 





“모두가 두 사람을 축하해 주기 위해 있는 날, 나는 그 장면들을 잡으려 거기 있었다”라는 감독의 말이 아니라도 이 영화엔 설레는 첫출발의 순간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애쓰고 살아가는지가 진실되게 담겨 있습니다. 아이디어란 이런 것이지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서도 남과 다른 시각으로 새로운 의미를 뽑아내는 것. 그래서 덕 블록 감독을 다시 한 번 칭찬하고 싶어집니다. 저는 평소 다큐를 좋아하는 아내 덕분에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참 행운이었죠. 다른 분들과도 이 행운을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www.eidf.org/kr 에 들어가시면 공짜로 영화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번 주까지만 상영하는 것 같습니다.이런 영화는 때를 놓치면 나중에 DVD나 ‘어둠의 경로’로도 찾기가 매우 힘드니 지금 시간을 내서 꼭 보시기 바랍니다. 러닝타임은 95분 6초. 올해 ‘EIDF 2014’ 시청자·관객상을 수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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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일 아침에 늦게 일어나 토요일자 신문을 읽었습니다. 신동호 논설위원이 쓴, 2001년도 베니스영화제에서 상을 탔던 [버스44]라는 중국의 단편영화 이야기를 다룬 칼럼이었죠. 세월호 참사에 일그러진 우리들의 현실 인식이 겹치는 기발한 영화였습니다. 아내에게 이 이야기를 했더니 그녀도 이 영화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올렸더군요. 짧은 영화니까 다들 한 번씩 보셨으면 해서 공유합니다. 신문칼럼도 함께.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405092010555&code=99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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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다는 것은 일부러 돈과 시간을 내고 컴컴한 극장으로 들어가 남들이 만들어놓은 거짓말에 기꺼이 속아줄 마음을 먹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이건 좀 미친 짓인 거 같다. 그런데 얼마 전 개봉한 [그랜드 브다페스트 호텔] 같은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오늘 이런 미친 짓 하길 참 잘 했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해보자,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니 이를 또 어쩌랴. 한 번 생각해 보자. 그 옛날 남부러울 것 전혀 없고 아라비아의 왕이기도 했었던 그 자는 왜 매일밤 아름다운 샤라자드의 옷을 벗기는 대신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 달라고 너드짓을 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어렸을 때 잠들기 전이면 할머니에게 호랑이든 곰이든 나무꾼이든이 나오는 뻔한 옛날 얘기를 해달라고 매일 졸랐을까?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던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지구인들 유전자 어딘가엔 권태를 이기지 못하는 취약점이 있거나 아니면 ‘이야기 본능’이라고 하는 의외의 요소가 찰지게 아로새겨져 있는 모양이다. 


이야기. 그렇다. 이야기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래서 누구든 틈만 나면 ‘이빨’을 까고 ‘구라’를 푼다. 그런데 똑같은 이야기라도 어떤 놈이 하느냐에 따라, 또는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 이야기의 깊이와 재미는 시시각각 달라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요즘은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듣고 보고 느끼는 공감각의 시대라 그 방법론이 더욱 중요해졌다. 그래서 요즘 잘 나가는 소설가나 철학자, 교수들 중에는 자신의 직업명을 제껴버리고 ‘이야기꾼’이라는 닉네임을 이름 앞에 달고싶어 안달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원한다고 다 이룰 수는 없는 법. 품새가 어설프거나 도그마적인 한계에 부딪혀 엉뚱한 길을 헤매는 수많은 중생들을 뒤로 하고 단연 괴팍한 천재로 우뚝 빛나고 있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웨스 앤더슨이다. 그는 자신만의 강박적인 스타일과 자유로운 상상력, 복고적 화법, 강렬한 색채, 미친 속도감과 블랙유머 등을 무기로 단숨에 그 분야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번엔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흥미진진한 가상 공간을 삽으로 푹 떠서 통째로 들고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1930년대 동유럽의 가상국가 주브라스카 공화국에 있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총지배인 구스타프가 고객이자 연인이었던 마담 D의 아들에 의해 그녀의 살인범으로 몰린 뒤 ‘사과를 든 소년’이라는 비싼 그림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무자비한 암살자에게 쫓기는 것은 물론 투옥과 탈옥 등 갖은 고초를 놀이공원 자유이용권 코스처럼 두루 겪다가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누명을 벗게 되지만 그만 허무하게 사망해 버리고 그 호텔은 벨보이였던 무스타파(또는 제로)가 물려받게 된다는 코믹 환타지 역사 미스터리 모험극, 이라고 거칠게 줄거리를 요약하고 나면 그 무신경함에 분개한 나머지 나를 죽이려 드는 사람들이 여럿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살인사건을 다룬 스릴러나 미스터리라고 하기엔 그 구조가 너무나 빈약하다. 더구나 코미디라고 하기엔 고급스러운 유머가 너무 많이 등장하고 역사극이라고 하긴엔 그 연대가 흐릿하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일단 너무 재밌어서 지난 몇 달 간 봤던 다른 영화들이 어느 하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호텔 부다페스트 호텔]이 관객 40만을 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2014.04.08. 경향신문 24면 하단) 소위 ‘다양성 영화’로서는 초대박을 친 것이다. 무엇이 이 영화를 이토록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작품으로 만들었던가. 우선 이전 웨스 앤더슨의 이전 영화들(이르테면 ‘로얄 테넌바움’이나 ‘다즐링 주식회사’, ‘문라이즈 킹덤’ 같은)에 열광했던 매니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감독의 필모그라피는 물론 카메라나 렌즈의 종류, 영화 속의 세세한 미장센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형식미를 중요시하는 시네필들의 헌신적인 입소문이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영화평론가 이동진, 영화감독 박찬욱 등 문화계 유명인사들의 ‘투 썸즈 업’ 추천이 그 인기몰이에 더욱 불을 지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앞서는 요인들이 있으니 그것은 이 영화가 그 자체로도 참 이쁘고 경쾌하고 재밌다는 사실이다. 우선 주인공들의 말이나 행동이 엄청 빠르다. 주인공 구스타프는 물론 그의 천적인 드미트리, 벨보이 제로, 그리고 벨보이의 여자친구이자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는 빵집 아가씨 아가사까지 이들은 한결같이 대사가 빨라서 이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듣고 있자면 흡사 우리나라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를 보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이나 표정들도 옛날 무성영화 시절의 배우들처럼 속도가 급하고 경쾌해서 어떤 슬픈 장면에서도 결코 완전 슬퍼지지는 않고 위험한 순간에 이르러서도 어느 정도 마음을 덜 졸이게 되는 것이다. 



옛날 옛적에 어떤 마을에…하고 고전적으로 이야기 파일을 여는 형식들은 결국 ‘이거 내가 누군가에게서 들은 얘긴데…’라는 조건이 전제됨으로써 전달자의 각색이 더 흥미진진해지는 법인데 이 영화는 그림 속의 그림이 몇 개나 겹치고 책속의 책처럼 이중삼중 구조를 가지고 있는 ‘챕터식 구조’라 이야기의 변용이나 화면비율이 만화나 동화처럼 자유롭고 또 그로 인해 어느 시점에서 카메라가 멈추든 결국 그 시절의 아련한 노스텔지어를 불러오고 마는 의외의 효과까지 거두게 된다. 


거기다가 웨스 앤더슨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을 기꺼이 하찮은 소품 정도로  취급해도 상관없다는 듯 작정하고 모여든 수많은 일급 배우들 - 랄프 파인즈, 틸다 스윈튼, 시얼샤 로넌, 윌렘 데포, 애드리언 브로디, 에드워드 노튼, 주드 로, 빌 머레이, 하비 케이틀, 레아 세이두 등을 동시패션으로 보는 즐거움이 있다. 도대체 무슨 깡으로 이런 대스타들을 한꺼번에 스크린 안에 담을 생각을 할 수 있느냐고? 배우들을 병렬식 구조로 줄줄이 세우는 데 일가견이 있는 ‘대규모 앙상블’의 대가 로버트 알트먼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역설적으로 어느 면에선 이게 더 쉬울 수도 있다고 한다. 뭐 하나가 삐끗하면 다른 쪽으로 도망갈 구석이 생기니까. 


예나 지금이나 엄청난 수의 등장인물들로 인한 복잡함이나 지루함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미스터리 구조를 슬쩍 끼워넣는 것이다. 이 영화의 시작도 틸다 스윈튼이 분한 마담D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살인사건이었다. 물론 이 살인사건이나 누명은 일종의 ‘맥거핀’ 효과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단순하고 사소하다. 그러나 이 모티브 덕분에 주인공들이 호텔을 벗어나 알프스 산등성이에 있는 수도원까지 올라가서 서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히치콕의 옛 영화를 보는 듯한 흐뭇한 착각마저 일으키게 된다. 거기다 ‘체크포인트19 교도소’ 등을 잡을때의 카메라 앵글이 보여주듯 웨스 앤더슨의 좌우대칭에 입각한 엄격한 카메라 워킹과 대담한 컬러감은 불현듯  팀 버튼의 초기 영화를 떠오르게 하고 때로는 박찬욱의 어떤 영화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가장 큰 덕목은 방금 말한 영화들나 감독의 생산물과 어느 정도는 유사할지언정 결코 같다고는 할 수 없는 또다른 ‘향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이 영화에서 제 3의 텍스트나 영화가 떠오른다며 자랑하는 것은 영화 마니아적인 취미를 즐기는 호사가의 잘난 척일 뿐이다. 



베를린 영화제는 작년에 이 영화에 심사위원 대상을 안겼다. 아마 그들의 시상 이유에는 웨스 앤더슨의 독창적인 미학과 그를 효과적으로 표현한 테크닉들, 유려한 음악들,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의 지평을 넓힌 뛰어난 기획력, 그가 영화 말미에 언급한 오스트리아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에 대한 예우까지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그럴듯한 이유보다 앞서는 것은 역시 상영관에서 엔딩 크레딧을 보고 일어서는 순간 ‘아, 이런 영화라면 한 두 번쯤은 더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거웠던 시간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웬만하면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는 극장문을 나서지 마시길 바란다. 웨스 앤더슨은 영화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깨알 재미’를 선사하는 성실한 감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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