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먼저 본 이야기를 연극으로 다시 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연극 [클로저]를 보러 가면서 문득 그런 의문이 들었다. 난 영화를 두 번이나 봐서 줄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었고 캐릭터도 어느 정도는 파악을 하고 있다. 그러니 전혀 새로운 얘기는 아니다. 그런데도 입장료는 영화를 볼 때보다 훨씬 비싸다. 단지 연극이라는 이유만으로 이 텍스트를 관객들이 대학로까지 가서 다시 봐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클로저]는 1997년 5월 런던에서 초연된 후 유럽, 일본, 호주 등 전 세계 50개국 100여 개 도시에서 지금도 공연되고 있는 인기 작품이다. 영화 또한 백전노장인 마이크 니콜스 감독에 주드 로, 줄리아 로버츠, 클라이브 오웬, 나탈리 포트만 등 대 배우들이 출연했던 화제작이다. 



“Hello, Stranger”라는 유명한 대사로 시작하는 이 연극(영화)는 신문사에서 부고 기사를 쓰는 소설가 지망생 댄과 스트립 댄서 앨리스가 우연히 교통사고로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차에 치어 쓰러졌다가 일어나면서 “안녕, 낯선 사람”이라 인사를 건넸던 앨리스는 젊고 매력적인 댄과 금방 함께 사는 사이가 되고 댄은 그런 그녀와의 동거생활을 소재로 소설을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다. 그런데 댄은 소설의 표지사진을 찍으러 가서 만난 사진작가 안나에게 대뜸 키스를 하며 사귀자고 유혹한다. 이건 뭐 아주 개새끼가 아닌가. 


그런데 영화에서 하필 댄 역을 맡은 배우가 주드 로였다. 원래도 잘 생겼지만 그때 당시엔 정말 ‘전세계 남녀 배우를 통틀어 최고의 미모’라는 소리까지 듣던 막강 포스였다. 그러니 ‘개새끼를 개새끼라고 부를 수 없는’ 이상한 상황이 연출되고 만 것이다. 더구나 주드 로와 입술을 맞대던 세련된 사진작가 안나는 바로 줄리아 로버츠였다. 그들의 지적인 매력에 격조 높은 연출력, 게다가 하필 데미안 라이스의 마약성 농후한 불멸의 미친 곡 ‘Blower’s Daughter’까지 배경음악으로 겹쳐져 우리는 이 막장 드라마를 마치 꽤 세련된 영화라고 착각하기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연극은 좀 달랐다. “안녕, 낯선 사람”이라 인사를 건네며 시작하는 것은 같지만 분위기도 달랐고 대사도 달랐다. 앨리스 역을 맡은 이윤지는 새처럼 자그만 몸집에 아이 같은 도발성으로 관객들의 흥미를 돋구었고 명민한 배우 김혜나는 자신의 욕망을 따르기 두려워하는 안나의 복잡미묘한 심리를 잘 표현해 주었다. 댄 역을 맡은 이동하도 물론 좋았지만 최고의 캐릭터는 피부과 의사 래리 역을 맡은 배성우였다. 능수능란한 대사 구사력과 타이밍, 찰진 욕설 구사력까지, 이 연극을 이만큼 살아 숨쉬게 하는 데 이만한 일등 공신이 없었다. 


만났다가 헤어지고 용서를 구하다가도 또 배신하고, 헤어지는 순간까지도 “근데 걔랑 잤어 안 잤어?”하고 묻는, 홍상수 영화의 등장인물들보다 더 찌질하고 끈적한 네 사람은 간결한 세트와 자막, 오밀조밀한 구성 등을 선보인 연출자 추민주의 능력에 의해 연극에서 확실한 생명력을 얻었다. 우리와 같이 연극을 보았던 페친 안재만 대표도 “영화에서는 미처 다 이해할 수 없었던 주인공들의 행동을 이제야 확실히 이해하게 되었다”며 좋아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 자잘한 유머들(채팅창에 성기 사이즈 18cm를 18m라고 잘못 쓰고 욕을 내뱉는다든지 하는)이 그 우아했던 드라마에 막장의 개연성과 더불어 페이소스까지 더해 주었던 것이다.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영화와 연극의 차이는 무엇일까? 혹시 완벽한 반복과 변주의 차이는 아닐까? 예전에 슬픈 결말이 너무 안타까워서 한 번쯤은 해피엔딩으로 변하지 않을까 하고 매일 똑 같은 영화를 보던 소녀 얘기를 읽은 적이 있다(노래 가사였던가?). 


영화는 늘 똑같지만 연극은 그날그날의 캐스팅과 컨디션에 따라서 미묘한 차이가 생긴다. 그러니까 영화는 매번 똑같은 맛에 보고 연극은 매번 다른 맛에 본다는 얘기가 된다. 선택은 자유다. 만약에 영화 속 배우가 하던 연기를 집어치우고 스크린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나오면 어떻게 될까, 라는 기발한 상상을 실천에 옮긴 우디 앨런의 [카이로의 붉은 장미]도 있지 않았던가. (아, 그러고 보니 그 영화에 나왔던 멋진 남자 주인공이 지금 [뉴스 룸]에서 앵커로 나오는 그 제프 대니얼스로구나) 



연극 [클로저]에는 영화와는 또다른 찰진 이야기들과 에피소드가 드글드글 하다. 그러니 이 가을에 기필코 연극을 한 편 봐야겠다고 결심한 분이라면 망설이지 말고 [클로저]를 선택하시라고 권하고 싶다. 연기도 연출도 고루 좋다. 12월 1일까지 대학로에서 계속 상연한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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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GV강변에서 옴니버스 영화 [키스]를 관람했습니다. 2년 전에 만든 영화인데 우여곡절끝에 이제야 개봉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여덟 편의 키스에 얽힌 이야기들로, 거의 하룻동안에 다 찍은 영화들이라고 합니다. 제작비도 적고 시간, 장소 등에 제약이 많은 인디영화였기 때문이겠죠. 

저는 북한의 핵발사로 인해 라디오 생방송 스튜디오에 갇힌 채 청취자들에게 유언처럼 서로의 오랜 사랑을 고백하게 되는 디제이와 PD의 이야기인 '행복한 오후 2시' 와 골목에서 친구 삥뜯던 반장을 혼내주던 여고생 이야기 '소녀시대', 그리고 키스방에서 일하는 키스 알바생에게 훈계를 당하는 고시생 시봉이 이야기인 '달인' 이 재밌었습니다. 

배우 김혜나 씨는 제 여친과 친분이 있는 사이인데, 마침 이 영화에 출연하는 열 아홉 명의 배우 중 열 한 명을 감독과 제작진에게 소개한 '캐스팅' 담당으로 오늘 와서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잠깐 인사를 하더군요. 아마 인간성이 좋거나 대인관계가 대단히 넓은 배우인 거 같습니다. 행사가 끝나고 저희와 잠깐 만나 대화를 나눴는데, 요즘은 이런저런 재능기부도 하고 EBS에서 무슨 낭독 프로그램도 맡아 한다고 하더군요. 저와 예전에 일로 잠깐 만날뻔했던 얘기를 했더니 당시 상황을 너무나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어서 놀랐습니다. 김혜나 씨는 앞으로 소셜테이너로서의 활약이 기대되는 영특한 배우입니다.

이 영화엔 제 페친인 연극배우 서민성 씨도 잠깐 나옵니다. 실력 있는 연극배우들과 홍대앞 인디밴드 멤버도 배우로 출연을 하는 꽤 흥미로운 프로젝트입니다. CGV강변에서 사흘간 상영을 하고 오늘이 마지막 날이라는데 앞으로 다른 극장에 더 걸리게 될지 아니면 IPTV등으로 옮기게 될지는 잘 모르겠다고 합니다.  2년 전 부산국제영화제 발표 때는 전회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었다던데 이렇게 상영관을 잡지 못하고 있다니 안타까운 일입니다. 나중에 케이블이나 IPTV로라도 한 번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적은 예산으로 만들었지만 이야기나 연기는 결코 허술하지 않습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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