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얘기를 소설로 쓰면 열 권도 넘을 거야'에 해당되는 글 2건

  1. 2019.02.03 초단편 4 - 고재영은 천사
  2. 2018.11.21 초단편 1 - <나무들의 반란>


사장이 나가고 회의실엔 정적이 감돌았다. 십 년째 국내 점유율 1,2위를 다투는 등산복 브랜드 '에이픽스'의 새로운 광고대행사를 선정하기 위한 경쟁PT가 이주일 반밖에 남지 않았는데 아직 기획 컨셉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은 상태에서 3차 회의가 열렸으니 다들 이게 뭐하자는 짓인가 하는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문제는 사장이었다. 무슨 프로젝트가 시작되든 킥오프 하는 날부터 무조건 이틀에 한 번씩 회의를 하지 않으면 발작 상태가 되어버리는 이 대행사의 사장 현민섭 말이다. 사장이 회의실에 들어오는 이유가 회의를 하기 위해서인지 아니면 회의 시간에 화를 내기 위해서인지 모르겠다는 사원들의 반응은 그래서 오늘도 유효하다. 이번 사태에 대해서는 일차적인 잘못이 AE들에게 있다 하지만 찜찜한 건 고재영CD팀도 마찬가지였다.  고재영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장 이 새끼는 변하질 않지. 드디어 대행사를 그만 두어야 하나. 오늘따라 고재영은 자신의 뚱뚱하고 둔한 몸이 더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오늘 나온 얘기 가지고 뭐라도 아이디어를 좀 만들어서 내일 오후에 다시 만나시죠." 

이렇게 말하면서 고재영은 카피라이터 실장 편성준을 바라보았다. 아이구, 저 마음만 여린 병신 같으니라구. 내가 어쩌다가 저런 놈이랑 한 배를 타가지고 이 고생이냐. 역시 지난 달 사장과 싸웠을 때 미련 없이 사표를 쓰는 거였는데. 내가 너무 착했어. 너무 약해졌어. 고재영은 부글부글 끓는 마음을 진정시키려고 얼음이 다 녹은 아이스커피 텀블러의 빨대를 쭉 빨아들였다. 고 실장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편성준은 고 실장님, 오랜만에 우리 냉면이나 드시러 가실래요? 하고 속편한 소리를 하며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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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재영은 천사다. 흔히 마음씨 착한 사람을 표현할 때 쓰는 메타포로서의 천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진짜 천사다. 영어로는 Angel. 그가 태양계 중 지구라는 별로 파견 근무를 온 건 이만 년이 좀 넘는다. 당연히 지구 위에 인간들이 생겨나는 것을 지켜 보았고 수 많은 종교와 철학, 전쟁 들이 발발하고 유지되고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했다. 인간 세상에 어울려 살면서 그들을 연민하지도 억압하지도 않고 지켜보다가 위기의 순간이 오면 일종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 그것이 천사 고재영에게 부여된 주된 임무였고 그는 대체로 이 어려운 임무를 이만 년이 넘도록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었다. 

물론 뼈아픈 실수도 있었다. 예수가 태어나기 직전에 한 번, 그리고 십자군 전쟁 때 한 번 잠시 방심했던 고재영이 인간들에게 겉모습을 들켜버린 것이었다. 덕분에 지금까지 인간들이 생각하는 천사는 모두 흰 천으로 된 옷을 입고 하얀 날개가 달린 금발의 꼽슬머라 뚱보라는 천편일률적인 모습을 갖추게 된 것이다. 하긴 그때 내가 좀 많이 먹긴 했지. 고재영은 그때를 생각하며 잠깐 웃었다. 20세기에 물리학자 아이슈타인이라는 작자가  '4차원'이라는  개념을 들고 나왔을 땐 천국 여기저기서 그야말로 난리가 났었다. 당장 신과 인간계 사이의 비밀을 누설한 자가 누구인지 밝히는 대대적인 색출작업에 들어갔으나 범인은 끝내 잡히지 않았고 아인슈타인은 은하계를 통틀어 가장 이례적인 스타가 되어버렸다. 결국 천국에서 열린 긴급회의에서는 아이슈타인이 거절하지 못할 정도의 빅딜을 제시하기로 했고 그는 인간의 시간으로 장장 십오 년을 고민한 끝에 그것을 받아들였다. 우주를 통틀어 사람이  천사가 된 케이스는 아직도 앨버트 아인슈타인이 유일무이한데, 그는 원자폭탄과 인간들이 존재하는 지구가 싫다며 지금은 아주 먼 은하계에서 활약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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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어제 승찬이, 박수하고 한 잔 하면서 얘기를 해봤는데요. 에이픽스는 절대로 어렵고 복잡한 컨셉으로 가면 안 돼요. 더구나 창업주가 대구에 있는 재래시장에서 등산복 도매로 시작한 사람이잖아요. 밑바닥에서 시작해 메이저가 된 입지적인 인물이라구요. 신문 기사에서 읽었는데 자기 얘기를 소설로 쓰면 열 권도 넘을 거라고 큰소리를 치던데요. 고집이나 카리스마도 장난이 아닐 거구요. 아직도 회의 시간에 커피잔이 날아다닌다던데...이런 사람한테는 정말 직관적인 걸로 그냥 한 방 던지고 빠져야 돼요." 

편성준은 애주가다. 늘 어제 누구랑 몇 차까지 갔었고 술자리에서 어떤 실수가 있었는지 궁금하지도 않은 무용담을 늘어놓는 걸 즐긴다. 인간들은 왜 끊임없이 술을 마시는 걸까. 어젯밤 자신이 한 고민의 총량이나 반성의 질량을 주량과 병치시키길 좋아하는 인간들의 습벽을 마주하면 고재영은 쓴웃음부터 나온다. 자신이 불과 수십 년 전까지만 해도 얼마나 술고래에 골초였는지 알면 얘네들이 놀라 자빠질 텐데.  술이나 담배, 마약, 도박, 하다못해 섹스까지, 인간들이 즐기는 기호품이나 습성들 중에서 중독성이 유난히 강한 품목들은 모두 천사들에게서 온 것이었다.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천사들은 아무리 음주와 흡연을 일삼아도 죽지 않지만 인간들은 그럼으로써 원래 얼마 되지도 않는 수명을 더욱 단축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점이다. 덕분에 고재영은 수천 년 전부터 지구의 인구 수를 조절하는 데 술과 담배, 설탕을 요긴하게 사용했다. 어쨌든 그는 이만 년 전부터 태양계 안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 천사니까. 

그런 고재영이 당장 등산복 PT 때문에 고민을 하고 있다는 것은 우주적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잠복근무는 천사들의 또다른 숙명이다. 인간세상에 섞여 살려면 어쩔 수 없이 가정과 직업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 고재영에게도 가족이 있고 취미가 있다. 이사카 코타로의 소설 [사신의 7일]에 나오는 '사신 치바'는 인간이 만든 모든 것 중에 음악을 가장 마음에 들어해 틈만 나면 음악을 듣는데, 고재영은 그런 면에서는 음악보다 영화가 더 좋았다. 1890년 초반 우연한 기회에 뤼미에르 형제에게 '영화'라는 영감을 주게 되어서만은 아니었다. 인간 세상에 또 하나의 예술 장르를 만들어 내는 데 결정적인 공을 세우게 된 고재영은 그 이후로 수 많은 영화들을 섭렵했는데 그 중에서도 에밀 쿠스트리차와 크지쉬토프 키에슬롭스키, 그리고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을 좋아했다. 그가 지금 광고 아트디렉터라는 직업을 택한 것도 어쩌면 그런 이유에서였는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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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산복 시장은 급격하게 죽어가고 있었다. 고등학생들의 유니폼이라 불리던 **페이스 같은 제품의 판매량이 반토막이 나기 시작하더니 덩달아 어른들의 외출복 노릇을 하던 등산복 바지나 점퍼 등도 판매량이 뚝뚝 떨어졌다. 일본이나 이탈리아에서 들어온 SPA 브랜드들이 시장을 잠식하면서 트렌드가 변한 것이다. 그래서 광고량도 급격하게 줄었는데 이번에 에이픽스의 회장이 '기업의 명운을 걸고' 제품부터 광고까지 전혀 새로운 캠페인을 만들겠다고 해서 광고계의 이슈로 떠오른 것이다. 사람들은 궁금해 했다.  새로운 출구전략이 될 것인가, 아니면 언발에 오줌 누기로 그칠 것인가. 그러나 그것보다 중요한 건 일단 경쟁 PT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등산복 광고가 아무리 달라진다 해도 산 나오고 등산복 나오는 거야 당연한 일이니 PT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은 광고전략이요 컨셉이었다. 그 중에서도 메인 카피는 정말 중요했다. 

"박수, 내일 회의 때 내놓을 카피 좀 써봤어?" 
"몇 개 써봤는데, 다 별로예요." 

박수가 경쾌하게 대답했다. 고재영은 박수가 천사가 아닐까 약간 의심하고 있다. 일단 밥을 너무 안 먹는다. 깡마른 체격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토록 밥을 안 먹는 인간은 참으로 드물다. 참고로 천사들은 아무 것도 먹지 않아도 살 수 있다. 고재영은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어울리려 연기를 하다 보니 뚱뚱한 몸이 되었지만 갑자기 체형을 바꾸면 의심을 받을까봐 몇십년 째 지금 같은 섭식을 유지하고 있다. 박수가 천사라면 고재영은 긴장해야 한다. 가끔 천국에서는 기존 천사들의 동태를 살피기 위해 잠입 천사들을 내려보내기도 한다. 부정을 감시한다, 라기보다는 기존 천사가 너무 인간화되지는 않았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러나 당장은 박수가 천사인지 아닌지 알 도리가 없다. 모든 천사는 점조직으로 움직이게 되어 있고 어떤 잠입 천사라고 해도 고재영에게 문제가 생겼을 경우가 아니라면 신분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박수는 원래 이름 '박수연'에서 '박수'로 개명하기 훨씬 전부터 팔뚝에 '337'이라는 문신을 새기기도 했다. '337박수'라는 대한민국에만 있는 풍습으로 몸에 낙서를 한 것이었다. 이는 아무리 너그럽게 봐줘도 천사들이 할 만한 짓은 아니었다. 다만 일부러 그럴 수는 있다. 하긴 수만 년을 넘어 거의 영원히 사는 천사들의 속을 그 누가 알 수 있으랴. 

** 

서울 하늘은 며칠째 쨍하고 시원한 바람이 불었지만 고재영팀이 있는 논현동의 사무실엔 하루 종일 답답한 공기가 감돌았다. 편성준이 카피를 써왔다. 몇 개의 카피 중엔 다행히 에이픽스 회장이 마음에 들어할 만한 게 하나 있었다. 

"사람과 산 사이, 에이픽스가 있다" 

간결하면서도 등산복의 본질과 기능을 한꺼번에 꿰뚫은 펀치라인이었다. 고재영은 이번 PT는 이 슬로건 덕분에 이길 것임을 직감했다. 물론 고재영의 능력이라면 등산복 PT 정도야 얼마든지 이기게 할 수 있지만 그러고 싶진 않았다. 전쟁이나 자연 재해 등 커다란 이슈에는 가끔 개입을 해도 이렇게 자잘한 일상사는 개입하지 않는 게 고재영의 신조였으니까. 문제는 천국에서 받은 메시지였다.  갑작스럽게 고재영의 내근이 결정된 것이었다. 그동안의 임무를 대체로 무리없이 수행한 노고를 치하하는 의미로 50년 간의 안식년을 보너스로 받으면서 천국 내 인사과로 새로이 발령이 난 것이었다. 남은 시간은 겨우 육 개월. 고재영은 잠깐 망설였다. 이대로 가면 편성준은 이번 PT를 비롯한 몇 건의 프로젝트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어 광고계에서 제법 인정을 받겠지만 술을 좋아한 댓가로  간암에 걸려 일찍 죽을 텐데. 떠나는 마당에 그에게 조금 더 성취감을 주고 수명도 더 연장을 해주는 건 어떨까. 

"고 실장님, 전근 축하해요. 헤헤." 

그 때 박수가 와서 속삭였다. 역시 짐작대로 그녀는 잠입 천사였던 것이다. 고재영은 약간 짜증이 나서 이십만 볼트짜리 벼락 한 가닥을 품에서 꺼내 박수에게 던졌지만 그녀는 그것을 가볍게 손바닥 안으로 흡수해 버리며 소리 없는 웃음을 지어보였다.  

"이러기냐, 진짜? 안 그래도 너 좀 수상했어." 
"하지 마세요. 그런 인간 어디가 이쁘다고 봐줄 생각을 하시는 거예요." 
"설마 걔가 이뻐서 그러겠냐? 인간들 흥망성쇠가 게 하도 빤해서 장난 좀 쳐보려는 거지." 
"하지 마세요. 요즘은 제가 보고 안해도 천국에서 먼저 안다니까요." 

고재영은 이 순간 편성준을 살리려는 자신이 천사일까 악마일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았다. 인간들은 천사와 악마는 완전히 다른 존재이고 머무는 곳도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들은 언제라도 천사였다가 금방 악마가 될 수 있다. 인간의 선악 기준이라는 게 그만큼 편협할 뿐이다. 고재영은 편성준이 업계에서 승승장구하는 것은 취소하고 간암으로 사망하는 것만 막아주기로 했다. 술 좋아하면서 오래 살면 그것도 괜찮지 뭐. 딱 그정도가 적정선이라고 생각했다. 고재영은 자기가 전출되고 나면 다음에 어떤 천사가 올까 궁금해졌다. 기왕이면 자신처럼 악마보다는 천사쪽에 가까운 성격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며 노트북 앞에서 일하는 척하고 있는 박수를 다시 한 번 째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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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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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전쯤 모든 나무들이 한꺼번에 걸어다니던 적이 있었다. 보통 이런 이야기가 나오면 그때 나라에 큰 일이 생겨서 하늘에서 유성이 떨어졌다거나 어느 절의 탑이 밤새 소리를 내고 눈물을 흘렸다느니 하는 얘기가 나오기 마련이다. 아니니 다를까 십 년 전쯤에도 일시적인  은하계의 균열로 태양과 목성, 금성이 나란히 선 순간이 잠깐 있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난다. 아무튼 수백억 년 만에 한 번 있을까말까 한 우주적 사건이 있었던 날, 하루 아침에 지구 위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천연덕스럽게 걸어다니는 이변이 함께 일어난 것이었다. 믿거나 말거나. 

자신의 발로 걸어다닐 수 있게 된 나무들이 제일 먼저 한 일은 '출퇴근'이었다. 인간의 발처럼 뿌리를 인식하게 된 도시의 가로수들은 저녁이 되어 가로등에 불이 켜질 때쯤 스스로 땅에서 뿌리를 뽑아내고 자신이 빠져나온 지점을 탁탁 다진 뒤 퇴근을 감행했고 각자 어디론가 사라져서 평생 처음 안락한 수면을 취한 뒤 아침에 해가 뜨자 다시 출근을 해 근무를 섰다. 수많은 가로수들이 광화문과 을지로는 물론 뉴욕과 씨애틀, 모로코에서도 시내 곳곳으로 걸어 들어와 근무처로 향하는 광경은 그자체로 장관을 이루어 인터넷과 TV뉴스를 장식했다. 

물론, 출퇴근보다 더 특이한 행보를 보인 나무도 있었다. 용문사에 있는 오래된 은행나무는 이제 나도 세상 구경을 하겠다며 거대한 몸통을 일으켰다. 그가 크게 기지개를 켜고 일어서자 용문사 근처에 있던 모든 나무들이 앞다투어 길을 비켰다. 

"마루야마 겐지의 소설에 나오는 나무는 자그마치 천 년을 한 자리에 서 있었대. 그러면서 수십 세대로 이어진 인간들의 희노애락을 다 지켜 본 거지. 얼마나 힘들고 지루했겠어? 난 더 이상 그렇게 살지 않을 거야. 나도 오백 살이나 되었으니 내가 살아온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 가뿐히 열 권은 넘을 걸?" 

나무들 중에서도 큰 어른에 속하던 용문사 은행나무가 던진 메시지는 젊은 나무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그날 밤부터 나무들은 저마다의 자의식을 갖게 되었으며 급기야 자아를 찾겠다며 인도나 산티아고, 방디르드 등으로 명상여행을 떠나는 게 유행처럼 번졌다. 나무들이 산과 수목원을 벗어나자 목재상들과 출판계는 난리가 났다. 가구값이 상승했고 건축자재 품귀현상이 일어났으며 새 책을 찍어낼 펄프가 부족해서 만년 인기 없을 것만 같던 전자책이 뒤늦게 호황을 맞는 기현상까지 일어났다. 가장 큰 문제는 종이박스가 귀해서 졸지에 노숙자들이 찬서리를 맞게 된 것이었다. 인류는 20세기부터 컴퓨터나 스마트폰의 지배를 받는다고 엄살 섞인 잘난 체를 했지만 사실은 아직도 땅이나 하늘, 나무 등에 너무 많은 것을 의존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노벨문학상 수상작(작가가 거부했지만)이자 영화로도 유명한 작품 [닥터 지바고]에도 등장했던 자작나무들이 남쪽으로 내려 갔다가 태양열을 못이겨 말라죽는 사건이 일어나자 나무들의 긴급회의가 시베리아에서 열렸다. 거기 모인 자작나무, 측백나무, 소나무, 너도밤나무 등은 그 누구도 인간이라는 존재를 좋아하진 않지만 수억 년 지구 역사상 가장 진회된 생명체인 인류를 위해 나무들이 먼저 자숙을 하자는 성숙한 결론을 내렸다. 모든 나무가 다시 이전처럼 땅에 뿌리를 내리고 정착하기로 한 것이었다. 회의의 진행은 나무들의 인트라넷인 '트리파시(Tree-Pathy)'를 통해 태양계 전체에 실시간으로 전달되었고 투표 결과 '48대 52'라는 극적인 합의가 이루어졌음이 선언되었다. 

합의는 이루어졌지만 이런 사안이 공감을 얻으려면 먼저 어른들의 시범이 있어야 한다는 여론에 따라 아마존 밀림에 있던 만년수가 가지들을 꺽고 몸을 접어 스스로를 불태우는 용단을 내렸고  그 불꽃은 지상 5킬로미터까지 치솟아 전 세계인들에게 목격되었다. 신기하게도 그 불꽃을 본 순간부터 사람들은 나무가 움직였다는 사실 자체를 모두 잊었다. TV나 인터넷, 모바일로 그 장면을 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하필 나무가 움직이는 것을 본 직후 절벽 아래로 떨어져 기절했다가 실명된 채 구조된 나만 그걸 기억하고 있었다. 졸지에 시각장애인이 된 나는 의사에게 외쳤다. 

"저기요...나무가 걸어다녔다구요!"

그러나 내 말을 귀담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일시적인 쇼크로 머리가 어떻게 된 거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나무가 걸어다니던 시절의 일은 나무들과 나만 아는 비밀이 되었다.  지금도 나는 대숲에 가면 그들에게 속삭인다. 나는 알아. 니들이 한때 걸어다녔다는 것을. 대숲은 아무도 몰래 고개를 끄덕인다. 대숲이 가끔 내 얘기를 듣고 울음소리를 내는 건 이런 이유 때문이다.  

(*'행동' 사람들과 양평에 놀러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창 밖 나무들을 보고 문득 생각이 나서 메모했던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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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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