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의 작가 밀란 쿤데라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불멸] 등을 쓴 위대한 소설가지만 동시에 [소설의 기술], [커튼] 등을 쓴 뛰어난 에세이스트이기도 하다. 같은 사람이 썼더라도 소설과 에세이는 다르다. 그래서 그가 에세이에서 밝혀놓은 개인적 체험들과 소설 작법, 그리고 사람과 세상과 역사를 바라보는 통찰과 유머 등이 소설에서는 과연 어떻게 구현되었는지를 하나하나 생각하면서 읽는 것은 그의 책들을 더욱 즐겁고 고급하게 즐기는 또다른 방법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소설이 2차원의 영역이라면 영화는 분명 3차원의 영역일 텐데 그가 쓴 소설은 영화화되면서([프라하의 봄]이라는 멋진 영화를 물론 좋아하지만) 오히려 그  입체감이 사라지고 이미지와 캐릭터만 강렬하게 남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건 아마 아직도 소설이라는 장르만이, 또는 소설가만이 할 수 있는 어떤 절대적인 부분이 남아 있다는 것을 강력하게 역설하는 증거가 아닐까. 조지수의 장편 [나스타샤]를 읽으면서도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이야기를 누군가가 잘못 영화화 하기라도 한다면 캐나다의 광활한 풍광과 조지와 나스타샤의 사랑 이야기만 덩그라니 남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 



[나스타샤]를 쓴 소설가 조지수는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조중걸의 필명이다. 서양철학사와 서양미술사를 전공한 학자이며 이미 우리집 책꽂이에도 여러 권의 저서가 있는 일급 에세이스트지만 작년에 아내의 권유로 사놓았던 이 소설책은 분량이 너무 많고 또 앞부분의 문장들이 좀 딱딱해 보여 몇 페이지 읽다가 덮은 뒤로 그동안 읽을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지난 5월 초 회사 일이 좀 한가해진 틈에 우연히 펼치는 바람에 그야말로 며칠동안 ‘푹 빠져’ 읽게 되었다. 


이야기는 한국에서 태어나 대학을 다니다가 젊은 나이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 현재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미술사 강의를 하고 있는 33세쯤의 조지라는 주인공의 독백으로 시작된다. 캐나다 웰드릭이라는 도시에서 호의적인 친구들과 어울려 생활하고 있는 이 남자는 강의 준비와 저술 활동 이외에는 주로 플라잉 낚시를 즐기는 데 거의 모든 돈과 시간을 쓰는 바람 같은 자유인이다. 낚시는 이들에게 매우 중요한 행위이자 생활이다. 왜냐하면 플라잉 낚시는 그저 물고기를 낚는 것 이상으로 그들의 삶에 의미를 주고 저마다에게 영감을 주는 철학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이 소설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는 낚시에 대한 묘사와 보트, 그들의 커티지, 심지어 자비를 들여 낚시터에 건설하는 작은 수력발전소 등에 대한 글들을 반복적으로 읽다보면 누구나 당장 캐나다로 달려가 광활한 호수변에 서고싶은 충동이 일 것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스토리텔링’이라고 하면 어떤 시퀀스의 연속으로 이해하기 쉽다. 우연히 주인공이 어떤 사건에 휘말리고 갈등구조와 위기를 겪다가 결국 결말로 치닿게 되는 담백하고 전형적인 플롯 말이다. 그러나 소설가의 성향과 역량에 따라 그 구조는 얼마든지 달라질 수가 있다. 철학자 김용규가 쓴 [알도와 떠도는 사원]을 보라. 이 소설은 과학자인 아빠를 찾아 나서는 알도의 모험담임과 동시에 우리가 알아야 할 철학적 개념과 심리학적 고찰들을 자연스럽게 풀어놓은 지식의 라이브러리다. 조지수의 소설 또한 자칫 줄거리만 놓고 보면 꽤 단순한 외국 체류 경험담이나 좀 특이한 사랑 이야기로 읽힐 수 있다. 심지어 소설의 제목이자 주인공인 ‘나스타샤’라는 여인의 등장도 무려 200페이지가 넘어서야 시작된다. 그러나 그 큰 이야기 기둥 사이로 펼쳐지는 작가의 눈부신 철학적 사유와 통찰력 있는 담론들은 이 소설을 아주 풍부하고도 탄탄한 교양서이자 지적 모험담으로 만들어 준다. 


나는 특히 저자의 간결하고 단호한 문체와 정치적 올바름에 반하게 되었다. 여기서 얘기하는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은 진보나 보수 또는 어떤 특정 정당을 지지하느냐 하는 따위의 좁은 개념이 아니라 보편타당한 인류학적 관점으로 모든 현상을 공평하게 보려 노력하면서도 사안별로 그때마다 분명하게 자신의 견해를 표명하는 태도를 말하는 것이다. 



낚시터로 향하는 고속도로 중간 매번 들르는 케빈의 커피숍에서 나스타샤라는 우크라이나 출신의 여인을 만난 조지는 설명할 수 없는 측인지심에 이끌려 그녀를 자신의 거처로 데려오게 되고 곧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다. 나스타샤는 분리독립주의자인 남편을 돕다가 러시아 비밀경찰에 체포되어 극심한 고문과 폭력에 시달린 뒤 빈털터리로 탈출한 여인이었는데 선량한 커피숍 주인 케빈이 점원으로 채용했던 것이다. 고문 후유증으로 가만히 서있기조차 힘들었던 그녀는 조지의 도움으로 웰드릭 주민들의 호기심어린 시선을 견뎌내며 차츰 건강을 되찾고 정신적으로 안정을 찾아가게 된다. 그러나 그녀에게는 고국 어딘가에 살아있을지 죽었을지조차 모르는 남편 보리스와 아들 아니카가 있다. 



30대 초반의 토론토 대학교수, 어린 시절의 유학, 그리고 낚시와 강의, 저술활동에 이르기까지 이 이야기는 작가의 자전적 스토리임이 거의 확실하다. 구체적인 사건들 뿐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 또한 작가의 숨결이 그대로 느껴진다. 그래서 소설 곳곳에선 교육, 인종차별은 물론 역사, 성공, 사랑, 품위, 고결함 등에 대한 생각들이 거의 소설가의 육성 그대로 흘러 나온다.  또한 그동안 인류가 만들어놓은 철학과 예술에 대한 가치와 그것을 즐기며 사는 것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얼마나 중요한가를 끊임없이 강조하고 있다. 조지는 나타샤에게 영어를 가르치며 셰익스피어와 헤밍웨이를 읽게 하고 더 나아가 제임스 조이스와 윌리엄 포크너를 읽는 행복을 누리라고 격려한다. 그리고 ‘피가로의 결혼’이라는 오페라를 본 사람과 보지 못하고 사는 사람의 삶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도 설명해 준다. 여기까지가 그들의 행복한 시절이다. 선천적으로 총명하고 밝은 나스타샤는 조지가 그려주는 지도대로 새로운 삶을 부지런히 찾아가지만 운명이 예고해 놓은 비극까지 피해가지는 못한다. 



조숙한 수학 천재였으며 여호와의 증인인 동료 교수 그렉, 억만장자이자 허영 덩어리인 유태인 변호사 매튜, 조지의 아이디어로 지렁이 재배에 성공해 큰 부자가 된 뒤 등을 돌리는 김유진에 이르기까지 이 소설에 등장하는 다양한 인간군상들 각각의 이야기를 읽는 맛도 각별하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나스타샤와의 관계는 결국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행복만을 바라지 않는 조지는 눈물을 머금고 그녀를 가족의 품으로 돌려보낸다. 그리고 깊은 시름에 빠져 알콜중독자가 된다. 


어떤 인생도 늘 행복할 수 없으며 마음대로 되지도 않는다. 심지어 소설가 조지수는 인생엔 목적이 없고 과정만 존재한다고까지 말한다. 삶은 허무하지만 그것이 그리 나쁜 것만도 아니며 사랑하는 사람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것이 최선이라는 그의 생각은 산문집 [One Man’s Dog]에도 잘 나타나 있다. 



무려 719페이지에 이르는 장편이다. 책을 읽으며 많은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어 표시를 했고 밑줄을 그어야 했다. 밑줄을 긋는다는 것은 언젠가는 그 문장을 다시 읽겠다는 나와의 약속이다. 결국 나스타샤는 자살하고 조지도 슬쓸하게 과거를 회상하는 처지가 되었지만 그들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고받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성장했음을 무언 중에 깨닫게 된다. 그러고 보면 이건 사랑 이야기를 통해 펼쳐진 성장소설이기도 하다. 긴긴 이야기 끝에 그 성장을 확인하는 것만으로도 이 소설은 혼자 새벽안개를 맞는 것처럼 알싸한 뿌듯함을 안겨준다. 


누군가가 '네가 읽은 책 중에 정말 신나게 재미있게 읽은 현대소설 몇 권만 얘기해 봐'라고 하면 나는 그동안 조너선 샤프란 포어의 [엄청나게 시끄럽고 믿을 수 없게 가까운]과 주노 디아스의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 그리고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 또는 [인생], 레이먼드 챈들러의 [안녕, 내 사랑], 아사다 지로의 [칼에 지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영화처럼], 레이먼드 카바의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을 비롯해 윤대녕, 김훈, 배명훈의 몇몇 단편과 중편들을 추천했었다. 이제 그 목록에 하나를 더 얹어야겠다. 내가 가장 최근에 읽은 조지수의 소설 [나스타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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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일후]라는 영화가 있다. [트레인스포팅]을 만들었던 대니 보일 감독의 이 작품은 시민들의 자발적 도움을 얻어 찍었다는, 아무도 없는 텅 빈 런던의 시가지가 강렬하게 기억에 남는 좀비 영화의 걸작이다. 나중에 [28주후]라는 속편도 나온 이 작품을 보면서 감탄했던 건 좀비 영화이면서도 인간의 ‘관계’에 대해 냉철하게 질문하는 그 철학적 깊이 때문이었다.

 

영화에서는 같이 도주하던 가족이나 애인이라도 좀비에게 물리거나 그 체액이 눈이나 입으로 떨어지면 바로 옆에 있던 사람이 2초 이내로 망설임 없이 죽여야 하는 딜레마가 등장한다. 이미 좀비로 변했기 때문이다. 영화는 ‘당신이라면 바로 전까지 사랑하는 가족이었던 사람을 애도 기간도 없이 그 즉시 죽일 수 있는가?’라고 묻고 있는 듯했다. 대중적인 장르영화에서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해 보는 드문 경험이었다.

 


정유정의 [28]은 정식 병명도 지어질 틈 없이 그저 ‘빨간눈’이라고만 알려진 인수공통전염병이 도는 가상의 도시 ‘화양’을 무대로 펼쳐지는 상황극이다. 개와 사람만 걸리고 퍼지는 이 병은 전염되자마자 눈동자와 눈 주위가 빨간 색으로 변한 뒤 사흘을 넘기 전에 사망에까지 이르는 무서운 질병이다. 치료약도, 대책도 없다.

 

만약 실제로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정부는, 그리고 다른 지역 사람들은 어떻게 나올까? 정유정은 그런 의문에서 소설의 얼개를 엮어나간다. 먼저 정부와 다른 도시 사람들은 이 지역을 봉쇄할 것이다. 그리고 화양 안에 들어온 사람들은 당연하게도 개들을 전염병의 진원지로 지목하고 살육을 감행할 것이다. ‘미친개’ 또는 ‘병을 옮기는 짐승’이라는 말 앞에서 살처분이라는 단어는 얼마나 정당하게 들리는가.

 

작가는 구제역 파동 때 돼지들을 생매장하는 장면을 보고 이 소설을 구상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도 TV에서 그 필름을 본적이 있다. 처음엔 수많은 돼지들이 트럭에서 비명을 지르며 커다란 구덩이로 쏟아지는 장면들이 너무 참혹해서 눈을 감았었는데, 잠시 후 그걸 찍던 VJ가 카메라 옆에서 엉엉엉 통곡을 하는 소리에 눈을 떴던 기억이 난다. 전달자로서 냉정을 유지해야 할 그녀의 울음소리는 뜻밖이었고, 순간 감정이입이 되었으며, 조금 후에 우리는 과연 돼지나 닭들을 이처럼 태연하게 살처분할 자격이 있는가? 이러다 죄받지,라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소설은 수의사 서재형, 신문기자 김윤주, 119구조대장 한기준, 개를 살해하는 싸이코 박동해, 그리고 늑대개 링고의 시점을 번갈아 오가며 진행된다. 다인칭 시점은 외국 스릴러물에서도 자주 보는 것이지만 이처럼 개에게도 인격(?)을 부여한 것은 이 작품의 주제에도 부합하는 매우 탁월한 선택이요 플롯이었다.

 

 

정유정은 ‘정말 인간만이 이 세상의 주인인가?’라는 명제를 주인공인 서재형에게 부여한 채 스피디한 문장들로 무간지옥에 갇힌 인간군상들을 거침없이 그려 나간다. 사전 조사를 철저히 하기로 유명한 작가답게 동영상처럼 그려지는 119구조대의 시스템 묘사나 인수공통전염병에 대한 의학적 지식, 그리고 너무도 생생한 응급실과 간호사들의 세계(간호사 출신인 정유정 작가는 학생시절에 간호학과를 다닐 때도 국문과 친구들의 과제를 대신 써주곤 했다고 한다)에 대한 디테일에 힘입어 소설 속 화양은 점점 실제 공간으로 변해 간다.


특히 정유정은 악인을 묘사할 때 힘이 넘친다. 이번 소설에서는 박동해라는 인물이 단연 돋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형이나 여동생에 비해 인정을 받지 못하고 급기야 아버지에게 창고에 갇힌 경험까지 갖고 있던 동해는 집에 있던 개 쿠키를 잔인하게 죽이려다 우연히 수의사 재형을 만나는 바람에 실패하고 군대로 끌려간 싸이코다. 그러나 군대 안에서 여러 마리의 개를 잔인하게 도륙함으로써 존재증명을 하다 쫓겨나 결국 엉뚱하게도 한기준이 대장으로 있는 소방서에 파견근무를 하게 된 문제적 인물이다.

 

보통 이 정도 매력을 가진 인물이라면 클라이맥스까지 끌고 가서 주인공과 한 판 대결을 벌이는 것이 상식이다. 그런데 정유정은 이번 작품에서는 절대 악인 박동해를 너무 일찍 죽여버린다. 이것은 무슨 뜻인가? 작가는 [28]이라는 소설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극적 상황들을 즐길 생각이 없었던 것이다. 대신 통제된 공간 속에서 국가는 어떤 조치를 취하고 군대는 어떻게 움직이며 사람들은 어떻게 저항하는가를 시뮬레이션하듯 입체적으로 조명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같은 통신은 어떻게 단절되며 언론이나 SNS는 어떤 역할을 하는지, 나아가 30년 전 광주와 지금의 이 상황은 얼마나 비슷하고 또 얼마나 다른지 독자들에게 질문한다.

 


군인들이 개를 총으로 쏴죽이고 트럭으로 싣고 가 날카로운 창칼이 버티고 서 있는 구덩이에 산 채로 던져 넣는 장면들은 끔찍하다. 한기준의 부인이 어린 딸을 안고 분노한 개들에게 목이 물려 죽는 장면도 섬찟하다. 방독마스크 안으로 붉게 변해가던 동료들의 슬픈 눈두덩들은 또 어떤가. 그의 이번 소설이 너무 무섭고 잔인해서 읽기 싫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어떤 상황에서도 정유정은 에둘러 가지 않는다. 독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장면들은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정확하게, 간결하게, 손에 잡힐 듯 글로 쓴다.

 

 

그리고 이 작가에게 ‘하드보일드’만 있는 건 아니다. 곳곳에 심드렁하고 무심한 농담 같은 문장들을 툭툭 던져놓는가 하면 자신의 예전 작품에 나오는 인물을 재미로 슬쩍 끼워 넣기도 한다(정신병원의 환자 김용).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가라고 밝혔던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애정도 놓치지 않는다(챈들러 얘기로는, 술이 사랑과 같다던데요. 첫 키스는 마법 같고, 두 번째는 친밀하고, 세 번째는 지겹다). 그리고 애잔한 마음을 묘사할 땐 눈물을 감추지 못하게 하는 마력도 있다. 난 쿠키가 죽은 뒤 그 개에 대한 추억과 소회를 밝히는 174페이지부터 한 장 반까지 이어지는 문장들을 읽으며 눈물을 참느라 혼났다.

 


‘새로운 엔터테인먼트 소설의 등장’이라 여겨졌던 [7년의 밤] 이후 또 정유정이다. 난 그녀가 좋다. 일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철저한 준비, 그리고 아니다 싶으면 거침없이 버리고(자기가 쓴 걸 버린다는 게 얼마나 힘든 일인가!) 다시 쓰는 프로정신이 좋다. 글이 안 될 땐 어떻게 하냐고 묻는 기자의 질문에 “술 먹지. 혼자 술 먹고 울면서 벽에 머리를 쿵쿵 박는 거지.”라고 웃으며 대답하는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가 좋다. 더구나 이번 소설은 엔터테인먼트를 뛰어넘는 묵직한 울림까지 있다. 올 여름은 [28]을 읽은 친구들과 함께 시원하게 한 잔 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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