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쪽을 닮아 길쭉길쭉한 몸매와 금발의 잘 생긴 얼굴을 물려 받은 사내로 태어나 학교는 물론 뉴어크 전 지역을 대표하는 스포츠 스타였다가 해병대 제대 후엔 장갑 비즈니스계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또 미스 뉴저지 출신 미녀의 남편으로 모범적인 삶을 살아 온 유태계 미국인 스위드 레보브. 거의 완벽에 가까운 스위드의 스펙을 보면서 우리는 '저런 놈에게 무슨 걱정거리가 있겠나'라고 투덜대고 싶어진다. 하지만 하나뿐인 외동딸 메리가 월남전에 반대한다면서 엉뚱하게 마을 우체국이 딸린 작은 점방에 사제폭탄을 설치해 사람을 죽임으로써 도망자 신세가 된 사건을 시작으로 그의 인생도 함께 작살이 난다. 예쁘고 영특하지만 말을 심하게 더듬는 게 유일한 걱정거리였던 십대 소녀가 어쩌다가 그런 괴물이 되어 버렸을까. 

어려서부터 밝고 곧은 길만 걸어왔던 스위드 레보브의 참모습은 고등학교 졸업 50주년 기념파티에서 만난 후배이자 작가인 네이선 주커먼에 의해 서서히 그 모습이 포착되기 시작한다. 딸 때문에 흔들렸던 그의 정체성은 아버지와 옛 친구들, 그리고 이웃에 사는 오컷 부부까지 함께 모인 올드림록 홈파티 날 저녁에 아내와 건축가 오컷이 자기집 부엌에서 남몰래 섹스를 하고 있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결정타를 맞는다. 나는 이 장면을 읽으며 '이제 스위드도 갈 데까지 갔군'이라 생각하고 그가 오컷이나 아내인 돈이나 둘 중 하나를  총으로 쏴 죽이며 소설이 끝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작가는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이 '시모어 스위드 레보브'라는 멋진 사내의 비극을 강조한다. 이후 계속된 만찬 자리에서는 당시 미국 사회를 흔들었던 린다 러브레이스 주연의 '목구멍 깊숙히(Deep throat)'라는 포르노 영화에 대한 지루한 세대 토론이 있을 뿐이고, 결국 스위드 대신 술주정뱅이이자 오컷의 부인인 제시가 칼로 스위드의 아버지를 죽일 뻔한 에피소드로 허무하게 끝을 맺는다. 

[미국의 목가]는 가장 완벽할 뻔했던 사내가 가장 불행한 남자로 전락하는 비극적인 이야기다. 그런데 그가 불행한 이유는 유태인으로 태어나서도 아니고 미국인이어서도 아니다. 원래 인간이란 다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이 작품의 확장성은 시대와 국경의 경계를 가볍게 지워버린다. 필립 로스는 이 도저한 비관주의를 수다스럽고 신랄하고 야멸차고 유머러스한 문체로 두 권의 책 속에 마음껏 풀어놓는다. 힘과 품격이 대단한 작품이다. 더불어 퓰리처상을 탄 주류 문학작품 속에서 씹, 좆, 보지 같은 비속어를 심심치 않게 접하는 것은 당혹스러우면서 즐거운 일이다. 그건 역설적으로 그 어떤 비속어를 쓰더라도 그 쓰임새가 정확하기만 하면 얼마나 멋진 효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는 통쾌한 증거가 되니까. 

아름다운 자연이 펼쳐진 뉴어크 올드림록이 배경이지만 내용은 전혀 목가적이라 할 수 없는데도 굳이 제목을 '미국의 목가'라 붙인 이유는 뭘까. 아마도 페데리코 펠리니가 슬프고 비참한 인생 이야기에 '달콤한 인생'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나 김지운이 그걸 따라한 것이나 아니면 로베르토 베니니가 '인생은 아름다워'라는 슬픈 영화를 만든 것처럼 필립 로스도 제목의 패러독스를 통해 독자들에게 잔인한 쾌감을 선사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그리고 이 작품은 제목만 멋진 게 아니다. 소설 곳곳에 격렬하면서도 참신하게 멋진 문장들이 산재해 있다.  

2부 첫머리에 말썽쟁이 딸 메리 때문에 장갑 공장을 찾아온 비키라는 여자에게 스위드가 장갑 생산 공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특히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무두질하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가죽 무역 이야기, 그리고 장갑 사업의 역사를 거쳐 재단•재봉 작업에 대한 아주 세세한 공정과 일화까지 장장 18페이지에 걸쳐 숨가쁘게 펼쳐지는 이 스펙터클한 묘사는 소설가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한 하나의 표본이나 다름없다. 필립 로스는 이 한 장면을 쓰기 위해 가죽과 장갑 생산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많이 섭렵했을까? 제시가 알콜중독자가 되는 과정을 짧게 묘사한 문장이나 오컷이 전시한 어설픈 추상화를 비평하는 스위드와 그의 아버지 루 레보브의 신랄한 대사들을 읽어보라. 이런 단락 하나만으로 시작해도 당장 훌륭한 단편소설이 하나씩 후딱 튀어나올 것 같다고 당신이 느낀다,에 나는 거액을 걸 용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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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을 읽는 기쁨 - 필립 로스의 [미국의 목가]

요즘 출퇴근길에 필립 로스의 [미국의 목가]라는 반어법적인 제목의 소설을 읽고 있는데 2부 첫머리에 말썽쟁이 딸 메리 때문에 장갑 공장을 찾아온 비키라는 여자에게 스위드가 장갑 생산 공정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은 감탄을 금할 수가 없다. 무두질 하는 방법부터 시작해서 가죽 무역 이야기, 그리고 장갑 사업의 역사를 거쳐 재단 재봉작업에 대한 아주 세세한 공정과 일화까지 장장 18페이지에 걸쳐 숨가쁘게 펼쳐지는 이 스펙터클한 묘사는소설가가 가져야 할 자세에 대한 하나의 교본이나 다름없다.  

필립 로스는 이 한 장면을 쓰기 위해 가죽과 장갑 생산에 대한 지식을 얼마나 많이 섭렵했을까. 책을 읽다가 너무 좋아서 전철 안에서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무릇 소설을 읽는 쾌감은 이런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처럼 카메라로 보여주고 스토리라인으로 알려주는 것만으로 도저히 느낄 수 없는 서술의 세계. 필립 로스의 전작을 다 구해서 읽고싶다. 아마 그렇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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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평소에 사람들이
페이스북에 글을 쓰면서
내가 지금 쓰는 것처럼
문장이 맨 오른쪽까지 가서 
허공에 부딪혀 다음 줄로 가기 전에 
아무 때나 서둘러 행을 바꾸는 것은 

(또는 이렇게 맥락 없이 행을 띄는 것은) 
자기가 쓴 글이 마치 시처럼 보이게
하기 위한 꼼수라는, 얼토당토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다가 아니, 그게 아니라 
글을 읽는 독자의 시선이 
매번 맨 오른쪽까지 가느라
혹시 피곤하거니 주의력을 읽을까봐
노심초사한 나머지 알아서 적당히 
행을 바꿔주는 글쓴이의 노력이나 
배려가 아니었을까 하는
기특한 생각도 하게 되었는데.   

이런 쓸 데 없는 생각을 하던 찰라,  
문학동네 시인선 084 김민정 시집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을 읽게 되었다. 

거기엔 글을 읽는 독자의 시선이
매번 오른쪽 끝까지 가느라
혹시 피곤하거니 주의력을 읽을까봐
노심초사한 나머지 알아서 적당히 
행을 바꿔주지 않는, 요 며칠 유행하는 말로
'시건방진' 시가 하나 있었으니 

이제까지 산문시를 한 번도 읽어보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위와 같은 얼토당토한 생각을 
하던 찰라에 마침 읽은 참신하고 재미있는 시라 
한 번 소개를 해볼까 하는 생각인데. 

시의 제목과 내용은 아래와 같다; 

그럼 쓰나 

  만나보라는 남자가 82년생 개띠라고 했다. 나보다 여섯 살이나 어린 핏덩인데요. 이거 왜 이래 영계 좋아하면서. 젖비린 내 딱 질색이거든요. 이래 봬도 걔가 아다라시야. 아다라시. 두툼한 회 한 점을 집어 우물우물 씹는데 어느 대학의 교수씩이나 하는 그가 내게 되물었다. 아나, 아다라시? 무슨 스키다시 같은 건가요? 일본어 잘 몰라서요. 왜 그래 아마추어같이. 그들은 웃었고 그들은 소주잔에 젓가락을 찢어 숯이니 숫이니 히로키에게 써 보였고 얌전한 히로키는 빨개진 얼굴이더니 고개를 푹 숙여버리는 일로 그들과의 대화에서 조용히 빠져나갔다. 동경대에서 교환학생으로 와 공부를 했다는 동갑내기 히로키와는 가끔 만나 커피 마시며 시 얘기를 하는 사이인데 그는 윤동주의 시를 나보다 더 많이 외우고 나보다 더 많이 베껴본 터라 내가 모르는 윤동주의 시를 토론의 주제로 삼곤 하여서 내게 반강제적으로 송우혜 선생의 [윤동주 평전]을 사게도 하였는데 그런 그가 한국에 와 처음 배운 단어는 밤도 아니고 별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고 자지라 했다. 자라고 할 때는 자지, 보라고 할 때는 보지. 그렇지. 그건 맞지. 그래서 우리말 번역이 어렵다는 얘기지. 누가 저 문장을 가르쳤는지는 모르겠으나 웃음기 없이 술자리도 아닌 데서 듣는 아랫도리 사정이다보니 참으로 거시기하여 거시기하구나 하는데 그 거시기가 뭐냐 물으니 그러니까 나는 합치면 자보자라 하여 권유형 자보지가 된다며 뻘쭘하니 한술 더 뜨고 앉아 있을 수밖에 없던 것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얼렁뚱땅 시인의 시를
딱 한 편만 시 같지도 않은 형태로 소개하고 
이 시집엔 이런 유쾌발랄하고
귀엽게 음란하면서도 자기비하적인 시들이 
수두룩하다는 평을 슬쩍 흘림으로써 

(옆에서 내 얘기를 듣던 아내는 시인이 마치
단어들을 두 주먹 안에 넣고 저글링을 하는 것처럼 
자유롭고 통쾌한데 그 산문적  경쾌함이
매우 현대적이고 비주얼라이징하면서도 
시류에 영합하지는 않는 것 같다고, 말했다고
써달라 부탁을 하므로 나는 그렇게 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읽고 그 궁금함을 못이겨 당장 
서점으로 달려가 이 [아름답고 쓸모없기를]이라는
시집을 뒤늦게 사게 만들었노라 허튼 자위를 하면서 
나는 에어컨 바람 앞에 앉아 껄껄껄 웃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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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눈이 떠져 물을 마시러 밖으로 나왔다가 설거지를 하게 되었다. 아니, 사실은 물을 마시고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가 잠이 안 와서 책이나 읽으려고 나왔는데 아내가 잠결에 설거지나 하라고 해서 하게 된 것이었다. 간밤에 친구들이 놀러와서 술을 마셨으므로 싱크대엔 많은 술잔과 접시들이 널부러져 있었고, 그 그릇들을 보니 책을 읽고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책을 읽기 전에 설거지부터 하자고 마음 먹었다. 처음엔 하기 싫었는데 하다 보니 점점 재미가 붙어서 열심히 하게 되었다. 설거지를 다 하고 마른 행주로 유리잔과 그릇들의 물기까지 다 제거하고 난 뒤 비로소 식탁에 앉아 따뜻한 차를 마시며 최은영의 <쇼코의 미소>를 집어들었다. 


제목을 읽고 쿤데라의 소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마지막 챕터 소제목이 '카레닌의 미소’ 아니었던가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쇼코의 미소>는 제목과 달리 그리 서정적인 작품이 아니다. 고등학교 때 영어를 잘 한다는 이유로 한국에 와서 홈스테이를 하며 주인공 소유를 만나게 된 쇼코의 이야기로 시작되는 중편 소설이다. 그런데 유창한 영어로 “언젠가는 유두 근처에 애벌레 모양 타투를 할 거야.”라고 말해 주인공 소유를 웃게 만들었던 쇼코는 시간이 지나면서 소유와 점점 괴상하고 살벌한 대화를 주고받게 되고 소설은 이 부분부터 범상치 않은 공력을 발휘한다. 

소설을 읽기 전 평소의 버릇대로 ‘작가의 말’을 먼저 읽었는데 거기엔 작가가 등단하기 전에 얼마나 여러 번 좌절하고 절망했는지가 잘 나타나 있었고 그 심정은 소설 속 소유가 영화감독 지망생이 되어 시나리오를 쓰고 단편 영화를 만들며 주변 사람들에게 혹평을 받을 때의 모습으로 그대로 투영된다. 나는 훌륭하게 쓰인 거의 모든 소설은 실패담이라고 믿는 편인데 이 소설도 예외는 아니어서 소유는 끝내 영화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로 성공하지 못한다. 아니, 그녀가 성공했더라면 이 이야기는 쓰이지 못했을 것이고 만약에 작가가 살짝 미쳐서 그렇게 썼더라면 아무런 재미도 없는 소설이 되었을  것이다. 

할아버지와 쇼코가 일본어로 주고받는 편지에 대한 질투, 소유가 일본으로 찾아갔을 때 쇼코가 보여줬던 이상한 행동 등은 나중에 할아버지와 엄마의 비밀들과 반전으로 얽히면서 기이한 감동을 준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가 아내에게 ‘당신은 술이 취하면 안주를 너무 게걸스럽게 먹는다’는 주의를 듣고 짧게라도 독후감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의 띠지에 ‘소설가들이 뽑은 2016년 올해의 소설 1위!’라고 쓰여 있더니 정말 묘하게 마음을 움직이는 소설이다. 이 느낌을 한 마디로 뭐라 표현해야할지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작년에 읽은 권여선의 <안녕, 주정뱅이>, 김금희의 <너무 한낮의 연애>와 더불어 책꽂이에 나란히 세워두고 싶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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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에 재밌게 읽은 짧은 소설이었죠. 오스트리아 작가의 작품이었는데, 오늘 잘못 온 문자 메시지 사진을 페북에 올린 걸 보고 홍콩에 사는 제 친구 지연 씨의 언니 문정 씨가 일깨워주시는 바람에 다시 찾아 여기에 올려봅니다. 



연휴가 시작되는 토요일 오후, 잠깐 강남역 근처에 갔던 나는 혼자 점심을 사먹은 후 교보문고에 들렀다. 마침 이날은 현영이 쓴 무슨 ‘재테크 일기’ ㄴ가 하는 책의 사인회가 있는 날이라 매장이 무척이나 붐볐다. 아무 생각없이 지하 1층 매장으로 향하던 나는 교보빌딩 옆 가판대의 30% 할인 행사를 보자마자 눈이 뒤집혀 옛날 책 몇 권을 급하게 샀다. 사실은 이 책들을 사러 온 게 아닌데.

 지하 1층 본매장에 가서 선택한 책은 다니엘 글라우티어라는 오스트리아 작가가 쓴 장편 였다. 얼마 전 신문의 신작 코너에서 간단한 소개글을 읽은 기억이 났기 때문이다.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라는 다분히 칙릿소설 같은 제목의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메일로만 이루어진 특이한 소설이다. 얘기는 에미라는 웹다자이너가 한 잡지의 정기구독을 취소하려고 이메일 보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단순히 ‘라이크’와 ‘라이케’를 혼동하는 바람에 엉뚱한 사람에게 메일이 전달된 것이다. 그러나 곧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에미는 라이케라는 남자에게 정중하게 죄송하다는 메일을 다시 보내고 둘은 금방 이 일을 잊어버린다.

 아홉 달 후, 언어심리학 교수인 레오 라이케는 컴퓨터를 켜자마자 ‘즐거운 성탄절과 복된 새해 맞으시기를 에미 로트너가 빌어드립니다’ 라는 뜬금없는 단체 메일을 받게 된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예전에 정기구독을 취소하겠다고 항의 메일을 자꾸 보내오던 바로 그 여자다.

 다분히 장난스러운 기분으로 이 메일에 답장을 보낸 레오는 다시 죄송하다는 에미의 답장을 받게 되고 그 안에서 ‘그리고 혹시라도 그동안 불행한 날들을 정기 구독하셨다면 마음 놓고 저에게 - 실수로 - 구독을 취소하십시오’ 라는 문장을 보고 감동한다.

 그 뒤에 에미가 또 아직도 취소되지 않은(듯한) 잡지의 정기구독을 취소하려는 항의 메일을 보내오고, 또 레오가 장난스럽게 답장을 하고 하면서 둘은 어느새 호감을 갖게 된다. 얼굴이나 배경, 나이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로 매일 서로의 안부를 묻고 시시콜콜한 일상을 전하는 것은 두 사람 모두에게 신선한 자극이 된다.

 더구나 에미는 언어심리학자답게 재치 있는 글 솜씨와 유머를 겸비한 그에게 늘 감탄하는 중이었고, 레오는 레오대로 하고싶은 말마다 걸핏하면 1), 2), 3)…하는 식으로 번호를 매기는 그녀의 독특한 버릇과 솔직한 감정 표현에 몰입하게 된 것이다.

 이 책은 참 빨리 읽힌다. 그렇다고 내용이 허술한 것도 아니다. 모르는 사람이라서 더 편하게 얘기할 수 있고 그러다가 어느덧 사랑의 감정까지 느끼게 되는 현대인의 아이러니가 절묘하게 구현되어 있다. 심지어 남의 사생활을 훔쳐보는 것 같은 스릴까지 맛보게 해준다. 밀고 당기는 두 사람의 재치 있는 문체들은 정말 현실적이다. 난 처음에 작가가 당연히 여자일 거라고 생각했다. (에미가 쓴 메일들을 읽어보면 안다)

 서로 그렇게 만나고 싶어하면서도 서로에 대한 환상이 깨질까봐 만나지 못하는 두 사람. 에미와 레오는 어느날 한 가지 아이디어를 낸다. ‘후버 카페’라는 붐비는 곳에서 (아마 강남역 뉴욕제과 앞 정도 되는 것 같다) 그동안 주고받은 이메일의 이미지만으로 서로 알아보기를 시도한 것이다. 즉, 진짜 에미와 레오를 찾는 게 아니라 ‘에미처럼 보이는 여자’와 ‘레오처럼 보이는 남자’ 를 찍기로 한 것이다... 과연 그들은 서로를 알아 봤을까?

 
스포일러는 여기까지다. 난 한밤중에 쳇 베이커의 CD를 올려놓고 이 소설을 읽었다. 바람이 부는 새벽 세시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때로는 장난스럽고 때로는 절실한 사연에 쉽게 잠이 들지는 못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선물로 주면 참 좋을 것 같은 소설이다.

 사족)

초판이라 그런지 책을 읽다가 명백한 오자를 발견했다. 321페이지 마지막과 322페이지 초입에 걸쳐 ‘로트너씨’를 ‘라이케씨’로 세 번이나 잘못 표기했다. 오늘 문학동네편집부에 전화를 해서 알려줬더니 ‘지금 자기 앞에 책이 없어서 그러는데 검토 후 다음 판본부터 반영하겠다’ 는 심드렁한 대답을 들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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