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생 때던가, 시드니 셀던의 데뷔작인 [네이키드 페이스] 읽다가 깜작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소설 속에선 헐리우드에 입성한 무명 여배우가 스튜디오에서 잔심부름을 하던 꼬마 사환에게 어찌어찌 꼬투리를 잡히는 바람에 즉석 섹스를 하게 되는데, 꼬마가 '엉뚱한 삽입을 하려는 바람에 여배우가 매우 당황하는 장면이 있었죠. 알고보니 10 꼬마는 항문섹스를 즐기는 변태성욕자였던 것입니다


어제 데이비드 크로넨버그의 [ 투 더 스타(Maps to the stars)] 보면서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소설이 다시 생각났습니다이 영화에 나오는 아역배우 벤지 때문이었죠. 벤지는 어렸을 때 출연했던 시트콤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지만 지금은 자기보다 더 어린 배우에게 밀려 초초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열세 살짜리 소년입니다. 그런데 영화 초반에 그에게 뭔가 충고를 해주는 남자 매니저에게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언사("차라리 바지를 내리고 그 안에 든 보지를 보여주지 그래? 이 뚱땡이 게이새끼야!")로 앙칼지게 욕을 해대는 걸 보고 저는 그만 기가 질려 버렸습니다. 뿐만 아니라 친구들과 만나 권총을 뽑아들고 러시안 룰렛 흉내를 내다가 개를 쏘아 죽이는 아슬아슬한 장면은 정말 섬뜩하죠. 그리고 무엇보다 늘 집에서 가운 비슷한 옷을 입고 지내는 그의 표정이나 몸짓은 권태롭지못해 ‘데까당’ 하기까지 합니다. 


이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모두 이 지경입니다. 얼굴과 목에 화상 자국이 선명한 채 나타난 정체불명의 소녀 애거서, 어렸을 때 엄마에게 당한 성적 학대를 잊지 못하며 늘 캐스팅에 대한 초조함에 시달리는 여배우 하바나, 아들 벤지의 약물문제와 일탈 때문에 늘 전전긍긍하는 크리스티나,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방화범 딸에게서 나머지 가족을 보호하고 심리치료사로서의 자신의 명성에도 누가 되지 않게 하려 애쓰는 샌포드까지. 이들이 벌이는 근친상간과 쓰리썸, 살인, 방화, 화형(태워 죽임) 등이 이 영화의 스토리를 떠받치고 있는 기둥입니다. 게다가 주요 등장인물들은 걸핏하면 눈앞에 유령이 나타나는 신경쇄약증세까지 보이고 있죠. 마치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서처럼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극단적인 상황들을 한꺼번에 모아 일렬종대로 전시해 놓고는 “여기 제정신인 사람이 어딨어? 하하.”라고 하는 것 같습니다. [비디오 드럼]이나 [플라이], [그래쉬] 같은 ‘신체변형’영화들을 거쳐 근작 [폭력의 역사]와 [이스턴 프러미스]로 어둡지만 품격 있는 신화의 세계를 직조해 내던 데이비드 크로넨버그가 왜 새삼 이렇게 적나라한 메타포에 달겨들었을까요. 


크로넨버그 감독은 이미 오래 전에 이야기를 완성해 놓은 작가 브르스 와그너의 시나리오를 보고 ‘헐리우드가 근친상간 관계로 유지된다’는 아이디어가 마음에 들어 이 영화를 만들게 되었다고 합니다.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철학적 문제를 극단적으로 풀어내기엔 헐리우드만한 무대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겠죠. 이 영화의 시나리오 작가인 브르스 와그너는 빌리 와일더 감독의 [선셋대로] 첫장면이 호화저택 풀장에서 빠져죽은 시나리오 작가의 대사로 시작되는 데서 이야기의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합니다. 등장 인물 중 애거서와 사귀면서 하바나와도 섹스를 하게 되는 제롬 역의 로버트 패틴슨이 리무진 운전기사로 나오는데, 시드니 셀던이 17살에 이미 허리우드에 들어와 각본가로 활동했던 것처럼 브르스 와그너도 젊었을 때 헐리우드에 와서 리무진 기사로 시작해 시나리오 작가가 되었다고 하죠.



이 영화는 일반인들은 도저히 알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그들만의 정신세계’ 이야기라는 점에서 우리 정치인들을 떠올리게도 합니다. 정치란 원래 사람들의 삶을 이롭고 조화롭게 하기 위한 행위라지만 실제 정가는 정의보다는 거대한 욕망의 수레바퀴를 따라 굴러기기 때문입니다. 욕망 앞에선 그 누구도 행복할 수 없는데, 욕망이 없는 사람은 없고, 그러므로 인간은 누구나 행복할 수 없다,는 개 같은 삼단논법이 성립됩니다. 



멀쩡해 보이지만 알고보면 모두 외롭거나 비정상인 사람들. 그들을 연기한 배우들의 열연이 눈부십니다. 특히 칸느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은 줄리안 무어의 변화무쌍한 연기는 어느 정도 예상을 했었지만 그래도 막상 보고 다시 감탄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기가  출연하고 싶었던 영화에 먼저 캐스팅 되었던 동료 여배우가 갑자기 아들을 잃는 바람에 영화를 포기하게 되었다는 전화를 받고 슬퍼하는 척 하다가 곧바로 신이 나서 춤을 추는 장면이 가장 많이 인구에 회자될 것 같습니다. 그 장면에서 옆에 있던 미아 와시코브스카에게 같이 춤을 추라 명령하며 자신도 몸을 흔드는 장면은 정말 사악하고도 기괴하죠. 그런데 제 개인적으로는 친한 친구들과 일상적인 얘기를 나누는 장면 바로 다음에 점프컷으로 그 멤버들이 쓰리썸을 하는 장면이 더 좋았습니다. 이상한 건 남자 배우도 그리 호색한으로 생기지 않았고 줄리안 무어의 동성 친구도 그냥 평범한 비즈니스 파트너나 오랜 친구 이상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아무렇지도 않게 쓰리썸을 한다는 건 그들의 평소 삶이 윤리적으로 얼마나 왜곡되어 있고 서로가 공범의식으로 연결되어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장면이란 생각이 들어서입니다. 


갑자기 그들 앞에 나타난 의문의 소녀 애거서 역을 맡은 미아 와시코브스카의 재감 또한 무시무시합니다. 자신의 부모가 남매였다는 사실을 알아내고는 집에 불을 지른 것으로 추정되는 애거서는 7 년만에 다시 가족 앞에 나타나 그들의 삶에 균열을 만듭니다. 약간 또라이처럼 보이는 보이시한 여자 역할을 미아 와시코브스카만큼 잘 소화해내는 배우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로 그녀는 가만히 있어도 그림이 되는 특이한 배우입니다. 박찬욱 감독의 영하 [스토커]에서도 마지막에 살인을 저지르는 역할이었는데 여기서도 마지막에 영화상 트로피로 줄리안 무어를 때려죽이는 역을 진짜 리얼하게 해냅니다. 그밖에도 벤지 역의 에반 버드도 천재인 거 같습니다. 마치 요즘 우리나라의 감초배우 안내상처럼 어느 영화에 나와도 제 역할을 다 하는 존 쿠삭을 보는 것도 즐겁구요.



헐리우드 뿐만 아니라 매스미디어 속에 살고 있는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본 얘기이고 공감하는 명제 중 하나는 ‘연예인들은 부업을 해야 한다’는 법칙입니다. 인기라는 건 언제 시들어질지 모르는데 한 번 그 생활에 맛을 들이면 다른 일은 도저히 할 수가 없기 때문이라는 거죠. 지금도 기획사에서 또는 골방에서 열심히 춤을 추고 노래를 부를 이 땅의 수백 만 연습생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이 그렇게 열심히 오르려 했던 나무는 다름 아닌 ‘욕망의 나무’인데 그 나무 끝에는 뭐가 있을까요. 그게 찬란하고 달콤한 열매는 아닌 것 같다고 이 영화는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10억 원이 있으면 행복할까. 잘 나가는 스타나 CEO가 되면 행복할까. 우리나라 최고 부자라는 삼성 이건희 가족들도 그리 행복해 보이진 않던데…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많아졌습니다. 그러나 생각이 많아진다고 해서 마냥 심란하기만 한 영화는 아닙니다. 장면장면의 몰입도가 높고 배우들의 대사 구사력도 압권입니다. 일단 좋은 시나리오라서 그렇겠지요. 어쨌든 시간이 된다면 한 번 극장에서 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어제 술을 마시며 이 영화 생각을 다시 하다가 엉뚱하게도 줄리안 무어가 미아 와시코브스카게 맞아죽을 때 그녀의 머리를 강타했던 피투성이 트로피가 오스카였는지 골든글로브였는지가 궁금하더라구요. 뭐, 어느 쪽이라도 비참하고 씁쓸하긴 마찬가지겠지만 말입니다. (맥스무비에 실린 허남웅 기자의 리뷰에서 많은 내용을 참조해 썼습니다. http://m.maxmovie.com/news/news_view.asp?mi_id=MI01007756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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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본다는 것은 일부러 돈과 시간을 내고 컴컴한 극장으로 들어가 남들이 만들어놓은 거짓말에 기꺼이 속아줄 마음을 먹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이건 좀 미친 짓인 거 같다. 그런데 얼마 전 개봉한 [그랜드 브다페스트 호텔] 같은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오늘 이런 미친 짓 하길 참 잘 했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해보자,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니 이를 또 어쩌랴. 한 번 생각해 보자. 그 옛날 남부러울 것 전혀 없고 아라비아의 왕이기도 했었던 그 자는 왜 매일밤 아름다운 샤라자드의 옷을 벗기는 대신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 달라고 너드짓을 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어렸을 때 잠들기 전이면 할머니에게 호랑이든 곰이든 나무꾼이든이 나오는 뻔한 옛날 얘기를 해달라고 매일 졸랐을까?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던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지구인들 유전자 어딘가엔 권태를 이기지 못하는 취약점이 있거나 아니면 ‘이야기 본능’이라고 하는 의외의 요소가 찰지게 아로새겨져 있는 모양이다. 


이야기. 그렇다. 이야기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래서 누구든 틈만 나면 ‘이빨’을 까고 ‘구라’를 푼다. 그런데 똑같은 이야기라도 어떤 놈이 하느냐에 따라, 또는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 이야기의 깊이와 재미는 시시각각 달라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요즘은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듣고 보고 느끼는 공감각의 시대라 그 방법론이 더욱 중요해졌다. 그래서 요즘 잘 나가는 소설가나 철학자, 교수들 중에는 자신의 직업명을 제껴버리고 ‘이야기꾼’이라는 닉네임을 이름 앞에 달고싶어 안달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원한다고 다 이룰 수는 없는 법. 품새가 어설프거나 도그마적인 한계에 부딪혀 엉뚱한 길을 헤매는 수많은 중생들을 뒤로 하고 단연 괴팍한 천재로 우뚝 빛나고 있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웨스 앤더슨이다. 그는 자신만의 강박적인 스타일과 자유로운 상상력, 복고적 화법, 강렬한 색채, 미친 속도감과 블랙유머 등을 무기로 단숨에 그 분야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번엔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흥미진진한 가상 공간을 삽으로 푹 떠서 통째로 들고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1930년대 동유럽의 가상국가 주브라스카 공화국에 있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총지배인 구스타프가 고객이자 연인이었던 마담 D의 아들에 의해 그녀의 살인범으로 몰린 뒤 ‘사과를 든 소년’이라는 비싼 그림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무자비한 암살자에게 쫓기는 것은 물론 투옥과 탈옥 등 갖은 고초를 놀이공원 자유이용권 코스처럼 두루 겪다가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누명을 벗게 되지만 그만 허무하게 사망해 버리고 그 호텔은 벨보이였던 무스타파(또는 제로)가 물려받게 된다는 코믹 환타지 역사 미스터리 모험극, 이라고 거칠게 줄거리를 요약하고 나면 그 무신경함에 분개한 나머지 나를 죽이려 드는 사람들이 여럿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살인사건을 다룬 스릴러나 미스터리라고 하기엔 그 구조가 너무나 빈약하다. 더구나 코미디라고 하기엔 고급스러운 유머가 너무 많이 등장하고 역사극이라고 하긴엔 그 연대가 흐릿하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일단 너무 재밌어서 지난 몇 달 간 봤던 다른 영화들이 어느 하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호텔 부다페스트 호텔]이 관객 40만을 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2014.04.08. 경향신문 24면 하단) 소위 ‘다양성 영화’로서는 초대박을 친 것이다. 무엇이 이 영화를 이토록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작품으로 만들었던가. 우선 이전 웨스 앤더슨의 이전 영화들(이르테면 ‘로얄 테넌바움’이나 ‘다즐링 주식회사’, ‘문라이즈 킹덤’ 같은)에 열광했던 매니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감독의 필모그라피는 물론 카메라나 렌즈의 종류, 영화 속의 세세한 미장센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형식미를 중요시하는 시네필들의 헌신적인 입소문이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영화평론가 이동진, 영화감독 박찬욱 등 문화계 유명인사들의 ‘투 썸즈 업’ 추천이 그 인기몰이에 더욱 불을 지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앞서는 요인들이 있으니 그것은 이 영화가 그 자체로도 참 이쁘고 경쾌하고 재밌다는 사실이다. 우선 주인공들의 말이나 행동이 엄청 빠르다. 주인공 구스타프는 물론 그의 천적인 드미트리, 벨보이 제로, 그리고 벨보이의 여자친구이자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는 빵집 아가씨 아가사까지 이들은 한결같이 대사가 빨라서 이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듣고 있자면 흡사 우리나라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를 보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이나 표정들도 옛날 무성영화 시절의 배우들처럼 속도가 급하고 경쾌해서 어떤 슬픈 장면에서도 결코 완전 슬퍼지지는 않고 위험한 순간에 이르러서도 어느 정도 마음을 덜 졸이게 되는 것이다. 



옛날 옛적에 어떤 마을에…하고 고전적으로 이야기 파일을 여는 형식들은 결국 ‘이거 내가 누군가에게서 들은 얘긴데…’라는 조건이 전제됨으로써 전달자의 각색이 더 흥미진진해지는 법인데 이 영화는 그림 속의 그림이 몇 개나 겹치고 책속의 책처럼 이중삼중 구조를 가지고 있는 ‘챕터식 구조’라 이야기의 변용이나 화면비율이 만화나 동화처럼 자유롭고 또 그로 인해 어느 시점에서 카메라가 멈추든 결국 그 시절의 아련한 노스텔지어를 불러오고 마는 의외의 효과까지 거두게 된다. 


거기다가 웨스 앤더슨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을 기꺼이 하찮은 소품 정도로  취급해도 상관없다는 듯 작정하고 모여든 수많은 일급 배우들 - 랄프 파인즈, 틸다 스윈튼, 시얼샤 로넌, 윌렘 데포, 애드리언 브로디, 에드워드 노튼, 주드 로, 빌 머레이, 하비 케이틀, 레아 세이두 등을 동시패션으로 보는 즐거움이 있다. 도대체 무슨 깡으로 이런 대스타들을 한꺼번에 스크린 안에 담을 생각을 할 수 있느냐고? 배우들을 병렬식 구조로 줄줄이 세우는 데 일가견이 있는 ‘대규모 앙상블’의 대가 로버트 알트먼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역설적으로 어느 면에선 이게 더 쉬울 수도 있다고 한다. 뭐 하나가 삐끗하면 다른 쪽으로 도망갈 구석이 생기니까. 


예나 지금이나 엄청난 수의 등장인물들로 인한 복잡함이나 지루함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미스터리 구조를 슬쩍 끼워넣는 것이다. 이 영화의 시작도 틸다 스윈튼이 분한 마담D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살인사건이었다. 물론 이 살인사건이나 누명은 일종의 ‘맥거핀’ 효과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단순하고 사소하다. 그러나 이 모티브 덕분에 주인공들이 호텔을 벗어나 알프스 산등성이에 있는 수도원까지 올라가서 서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히치콕의 옛 영화를 보는 듯한 흐뭇한 착각마저 일으키게 된다. 거기다 ‘체크포인트19 교도소’ 등을 잡을때의 카메라 앵글이 보여주듯 웨스 앤더슨의 좌우대칭에 입각한 엄격한 카메라 워킹과 대담한 컬러감은 불현듯  팀 버튼의 초기 영화를 떠오르게 하고 때로는 박찬욱의 어떤 영화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가장 큰 덕목은 방금 말한 영화들나 감독의 생산물과 어느 정도는 유사할지언정 결코 같다고는 할 수 없는 또다른 ‘향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이 영화에서 제 3의 텍스트나 영화가 떠오른다며 자랑하는 것은 영화 마니아적인 취미를 즐기는 호사가의 잘난 척일 뿐이다. 



베를린 영화제는 작년에 이 영화에 심사위원 대상을 안겼다. 아마 그들의 시상 이유에는 웨스 앤더슨의 독창적인 미학과 그를 효과적으로 표현한 테크닉들, 유려한 음악들,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의 지평을 넓힌 뛰어난 기획력, 그가 영화 말미에 언급한 오스트리아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에 대한 예우까지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그럴듯한 이유보다 앞서는 것은 역시 상영관에서 엔딩 크레딧을 보고 일어서는 순간 ‘아, 이런 영화라면 한 두 번쯤은 더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거웠던 시간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웬만하면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는 극장문을 나서지 마시길 바란다. 웨스 앤더슨은 영화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깨알 재미’를 선사하는 성실한 감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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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룡의 유작 [사망유희]는 악당들의 인질극 덕분에 주인공 이소룡이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대한민국에 있는(!) 파고다탑에 가서 보물을 탈취해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탑엔 각 층마다 세계의 무술 고수들이 지키고 있는 거죠. 이소룡은 첫 칸부터 압둘 자바가 기다리고 있는 맨 윗층까지 올라가 차례차례 고수들을 제압해 나갑니다. 전 그 영화를 볼 때 어린 마음에도 “쟤네들은 도대체 이소룡이 오기 전까지는 저기서 뭘 하고 기다릴까? 먹을 것도 놀 것도 없는 텅 빈 방에서…그리고 왜 이소룡이 괴조음을 내지르고 싸울 때 밑으로 내려와 동료 고수들과 같이 싸우지 않을까?”하는 걱정을 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건 등장인물들에 대한 ‘개연성’에 대한 목마름이었던 것 같습니다. 봉준호의 [설국열차]를 보면서도 비슷한 마음이 일었습니다. 설국열차라는 설정 자체가 ‘노아의 방주’ 같은 세기말적 상징성을 가지고 있다는 거야 짐작 못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꼬릿칸의 사람들은 저토록 현실적이고 삶에 대해 확고한 신념과 욕구, 기대치가 있는데 반해 다른 칸 사람들은 왜 저렇게 비현실적이며 도대체 ‘인격체’처럼 느껴지지 않는 걸까 하고 의아했습니다. 물론 꼬릿칸 사람들이 최하층민 계층이니까 반란의 욕구가 매우 강하고 다른 사람들은 지배층에 속하거나 그 사람들에게 동조하는 계층이라서 그렇다고 할 순 있겠으나, 그렇다고 하더라도 반란군들이 달려오는데도 자신의 열차칸을 벗어나지 않고 기다리고 있다가(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문이 열리면 비로소 총을 쏘거나 도끼질을 한다는 게 얼른 이해가 가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그런 심각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칸’이라는 이유만으로 한가하게 앉아 초밥을 만들어 먹거나 어린이들과 수업을 하거나 계속 마약을 하고 춤을 추고 사우나를 한다는 건 지나치게 관념적이라고 느껴졌습니다. 한마디로 불편한 거죠. 그런데 제 아내는 이 장면이 너무도 당연하고 잘 된 설정으로 느껴졌다고 합니다. 저와 삐딱선을 탄 결정적인 계기가 바로 여기였던 모양입니다.  



그리고 봉준호의 영화인데도 불구하고 박찬욱의 냄새가 너무 많이 나는 것도 관람의 즐거움을 떨어뜨리는 요인이었습니다. 열차가 터널을 통과할 때 서로 망치 살육전을 벌이던 적들끼리 “해피 뉴 이어!”를 외치며 잠깐 멈추는 유머코드는 [올드보이]에서 자기 생니를 뽑으며 고문하던 악당에게 “우린 친구잖아”라고 말하는 오달수를 떠올리게 합니다. 박찬욱은 이런 잰체하는 유머코드를 좋아합니다. 연기력은 뛰어나지만 필요 이상으로 과장된 틸다 스윈튼의 연기도 거북했습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요? 결정적으로 삶은 계란을 나눠주다가 그 트레이 속에서 기관총을 꺼내 쏘는 장면은 [싸이보그지만 괜찮아]의 명백한 오마주라고 해야겠죠. 



이 영화는 첫 장면부터 마지막 시퀸스에 이르기까지 ‘팔’에 대한 고찰이 많이 나옵니다. 앤드류의팔은 열차 밖으로 내밀어졌다가 박살이 나고 꼬리칸의 선지자 길리엄은 팔이 없는 반면 반란군의 우두머리인 커티스는 아직도 자기가 팔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 대해 미안함을 느끼죠. 그런데 이 모든 게 나중에 ‘달마대사’의 메타포임이 밝혀집니다. 전 이게 좀 싱겁습니다. 


그리고 열차의 엔진을 소유하고 있는 맨 앞칸의 윌포드가 작은 아이를 납치해 가는 이유도 “이 작은 곡사포 안을 어린아이 손 아니면 어떻게 닦아낸다 말입니까?”라는 거짓말로 나치들로부터 어린 생명을 구했던 쉰들러의 대사를 거꾸로 변용한 것 같아서 좀 낯간지러웠습니다. 



얘길 하다 보니 온갖 불만을 늘어놓으며 남이 공들여 만들어 놓은 영화를 일방적으로 폄훼하고 있는 꼴이 되어버렸군요. 그런데 평소에 안 그러던 정말 제가 정말 왜 이럴까 생각해 봤더니 가장 결정적인 건 ‘감동’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짜릿함이나 감동 부분의 트리거 역할을 해야 할 요나와 남궁민수의 ‘캐릭터’가 너무 평면적이라는 생각에 이르렀습니다. 


그 연기 잘 하는 송강호와 동서양 어디서도 통할 거 같은 매력적인 포스를 뿜어내는 고아성은 영화 내내 심드렁하게 겉돕니다. 캐릭터 구축이 제대로 되지 않아서죠. 이 열차의 보안 책임자였던 남궁민수와 다음 칸에 뭐가 있는지 볼 수 있는 요나는 원할 때마다 열차칸의 문을 척척 열 수 있을 정도로 능력이 뛰어나지만 정작 자신이 왜 그래야 하는지에 대한 ‘성취동기’가 부족합니다. 하다 못해 윌포드에게 철천지 원수 진 일이 있어 그걸 꼭 갚아야 한다든지, 아니면 그게 인류를 구할 수 있는 진실과 통한다든지 하는 확실한 동기가 그들에게 주어졌으면 어땠을까요. 그런데 그들이 원하는 건 고작 1년에 한 번씩 세계를 뱅뱅 도는 ‘윤회’ 같은 이 지겨운 열차를 멈추고 밖으로 나가 새로운 세상에서 생존 가능성을 찾는 것뿐입니다. 이건 좀 맥이 빠지는 결론이며 안일한 통찰이죠. 



이상이, 엄청난 스케일과 비주얼, 쟁쟁한 스타들의 뛰어난 연기가 등장하는 만듦새 훌륭한 일급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제가 [설국열차]를 재미 없게 본 이유입니다. 물론 이 메모는 순전히 ‘개인적’인 의견임을 밝혀야 뒷탈이 없겠으나… 따지고 보면 개인적이지 않은 의견이 어디 있습니까. 게다가 저는 유명한 평론가나 기자도 아닌 일반 관객인데요 뭐. 그런 의미에서 매우 성급하고 편협한 영화 일기인지 알면서도 그냥 올립니다. 이건 그저 제 개인적인 블로그이고, 개인적인 페이스북 담벼락일 뿐이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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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스토커]를 봤습니다. 월요일 오후라 극장 안이 좀 한산하더군요. 영화는 시종일관 묘한 긴장감으로 팽팽하고 흥미로웠습니다. 다 끝나고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데 우리 뒤에 앉아있던 50대 아주머니 두 분이 일어서며 “박찬욱, 한국사람 맞아? 어이구 미친놈…” 하시며 화를 내시더군요. 전 이런 평가를 들을 때마다 묘하게 즐겁습니다. 캐슬린 비글로의 [하트 로커]를 볼 때도 영화를 견디지 못하고 제 뒤에 있던 아주머니가 욕을 하며 나가신 적이 있습니다.

 

영화는 막판에 미아 바시코프스카가 집 밖으로 나가면서 좀 세계 던져놓은 느낌이 없진 않지만, 어쨌든 어떤 상황에서도 결코 자신의 취향을 포기하지 않는 박찬욱은 멋집니다. 미아 바시코프스카를 비롯해 니콜 키드만, 매튜 구드 등 출연 배우들도 모두 작품을 잘 이해하고 있다는 게 느껴지더군요. 지난 주 박찬욱 감독의 인터뷰를 라디오에서 우연히 들었는데 스마트폰이나 전자제품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이 영화의 시간적 배경이 언제인지 좀 애매하게 느껴지도록 설정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런지 살인사건이 일어나는 장면들이 나올 때마저도 본 듯 안 본 듯, 아는 듯 모르는 듯, 생시인 듯 환상인 듯… 처음부터 끝까지 주인공들간의 팽팽한 긴장감과 매혹적인 분위기를 놓치지 않는 박찬욱표 장면장면들이 꽤나 황홀합니다. 특히 오래된 와인 얘길 하며 "어린 것들을 따는 것하고는 비교가 안 된다"라는 대사를 치는 순간  매튜 구드와 미아 바시코프스카, 니콜 키드만을 순간적으로 교차편집한 장면은 짧지만 강렬하고, 아주 교활합니다. 이 영화, 강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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