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 한 여덟 살이나 아홉 살 때쯤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당시 동양방송(지금의 JTBC인데 1980년 군사정권 때 KBS로 통폐합 되었죠. 중앙일보가 그때의 억울함 때문에 그리 이를 악물고 종편을 따냈던 것입니다)에 'TBC향연'이라는 교양 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어느날 거기에 이은관이라는 불세출의 국악인이 나와 배뱅이굿을 완창했습니다. 억울하게 죽은 부잣집 딸 배뱅이의 혼을 달래는 굿마당을 지나던 주인공은 공짜술이나 한 잔 얻어먹을 요량으로 그 집에 들어갔다가 졸지에  박수무당 노릇을 하게 됩니다. 큰 소리를 치긴 했지만 아무 것도 할 줄 모르던 주인공은 마침 배뱅이 할아버지의 갓을 찾는 기발한 꾀를 내는 바람에 '배뱅이의 환생'으로 행세를 하게 되죠. 저와 저희 형은 정말 넔을 잃고 그 프로를 끝까지 다 보았습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꼬장꼬장하게 완창을 하던 이은관 씨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네요.


그런데 그 후로는 국악이나 마당극을 볼 기회가 거의 없었죠. 더구나 저는 대학 때 통기타 동아리를 하는 바람에 국악과는 더더욱 멀어질 수밖에 없어습니다. 그래도 어쩌다 마당극이나 판소리 공연은 보게될 때면 그 때마다 참 신기합니다. 고수와 함께 소리꾼 딱 한 사람이 나와 두어 시간 쉬지 않고 소리도 하고 사설도 늘어놓고 하는데 그 원맨쇼에 관객들은 훌러덩 빠져들어 어느 순간은 깔깔깔 웃고 어느 대목에선 불현듯 눈시울을 붉히곤 하니까요. 서로 아는 처지니까 좀 봐주자고 약속한 것도 아닌데 소리꾼이 변신을 할 때마다 사람들은 그가 제시하는 캐릭터마다 동화되어 사사건건 기꺼이 그의 마술에 빠집니다.


지난 일요일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심청전을 현대적으로 각색한 1인 창극 '눈먼사람'. 소리꾼 김봉영 씨가 극본을 쓰고 직접 출연까지 했습니다. 공연 첫날이라 음향 상태가 간혹 좋지 않았고 소리꾼의 목도 많이 잠겨 있었습니다. 그러나 널리 알려진 심청전을 '조금' 현대적으로 각색하고 심청이 아버지 심학규를 맹인 이야기꾼으로 만든 뒤 멍석까지 한 장 깔아주니 아주 그럴듯한 무대가 완성되었습니다. 게다가 마당극의 흐름을 튼튼하게 받쳐주는 북은 물론 드럼, 신디싸이저 등으로 풍부한 음향을 만들고 그 위에 아쟁 연주로 방점을 찍으니 객석 여기저기에선 스스로 '고수'를 자처하고 앞다투어 추임새를 넣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비록 목소리는 잠겨 고생을 했고 마지막에 수염까지 떨어지는 바람에 집중력도 떨어지긴 했지만 김봉영은 역시 베테랑 소리꾼이었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능수능란하게 소리와 사설을 자유자재로 섞어 스토리텔링을 완성했고 돌발적인 상황이 생길 때마다 특유의 애드립으로 오히려 관객들을 더 즐겁게 했습니다. 특히 이날 공연은 맨 앞에 앉아 있던 젊은 여자관객 한 분에게 심봉사가 시비를 살짝 걸어봤는데 이 분이 의외로 넉살 좋게 대거리를 척척 잘 해주는 바람에 더 즐거운 공연이 되었습니다. 푸른색 도포와 지팡이 하나만으로도 어찌나 입체적인 공간과 감성을 잘 표현해 내던지 그가 웃을 땐 객석 전체가 동시에 웃음바다였고 그가 눈물을 보일 때면 객석 여기저기서 그렁그렁한 눈망울들이 반짝였습니다.


관객의 마음을 들었다놨다 하던 중간까지의 극의 흐름에 비하면 "자, 오늘 내가 준비한 이야기는 여기까지요. 그러니 이제 다들 돌아가시오..."라고 말하는 마지막은 다소 허탈했죠. 기-승-전-결을 기대했던 관객에게 '기-승-전-허탈'을 선물했다고나 할까. 마지막에 이 극이 탄생하게 된 기획 뒷이야기나 에피소드 등으로 짧게 한 대목만 더 만들어 '매조지'를 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뭐, 다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는 것입니다. 아마 첫 공연이었기도 했고 또 제가 그날 연극을 본 뒤 대학로에서 편안하게 한 잔 하지 못하고 일요일인데도 불구하고 곧바로 회사로 돌아가 회의를 하는 바람에 더 그런 심통이 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오랜만에 판소리 공연을 한 편 보아 매우 좋았습니다. 더구나 제게 이런 공연을 시시때때로 저렴한 가격에 보여주시는 오준석PD 같은 분이 계시니, 어찌 좋지 않을 수가 있겠습니까마는.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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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자람은 신기한 사람이다. 어렸을 때 국악을 배워 국악인으로 생활하는 한편, 자신의 일렉트릭 밴드도 가지고 있다. 운 좋게도 몇 달 전엔 홍대앞 클럽에서 ‘이자람밴드’의 공연을 보았는데 지난 토요일엔 과천시민회관 대극장에서 이자람이 혼자 공연하는 판소리 [억척가]를 보았다. 이 공연은 2011년 초연부터 관객과 평단의 만장일치 찬사를 받고, 프랑스와 루마니아 등 세계적으로도 기립박수를 받으며 큰 화제를 뿌린 바 있다고 한다. 






판소리는 모든 등장인물의 대사와 노래, 동작을 혼자 하는 종합예술이다. 나에게는 얼마 전 타계한 이은관 선생이 ‘TBC향연’이라는 TV프로그램에 나와 ‘배뱅이굿’을 할 때 넋을 잃고 본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제대로 접하는 판소리였다. 놀라운 건 두 시간 반 동안 무대를 꽉 채우며 종횡무진 활약하는 판소리꾼 이자람 뿐 아니라 애초에 브레이트의 희곡을 읽고 영감을 얻어 이 극의 모든 대사와 작창(작곡)까지 해낸 사람 역시 이자람이라는 사실이다. 


숙련된 기교나 타고난 천성을 자랑하는 예술가들은 많다. 하지만 그것을 넘어 지성과 감성, 그리고 그것을 표현할 수 있는 창조력까지 두루 갖춘 사람은 그리 흔치 않다. 그런 점에서 이자람은 우리 예술계의 소중한 자산이라 할 것이다. 


무대가 열리면 이자람이 나와 의고체로 된 ‘적벽가’의 첫 소절을 한 번 읊는다. 그리고는 “이렇게 어려워서 어디 알아먹겠느냐?”면서 더 쉽게 고친 ‘억척가’를 하겠다고 의뭉을 떤다. 김순종이라는 이름처럼 ‘순종적이었던’ 여인이 어떻게 우여곡절 끝에 남편과 헤어져 달구지 하나만 끌고 어린 아이들과 전쟁통을 살아가면서 김안나(이제 애는 더 안 낳아, 안 낳아…하다가 안나킴이 됨), 김억척이라는 이름으로 변하게 되는지를 보여주는 이 대단한 일인극은 부채 하나를 든 소리꾼 이자람과 고수, 그리고 기타와 드럼, 키보드로 이루어진 밴드와 함께 두 시간 반 동안 관객들을 칼칼칼 웃게 만들고 어흐어흐 눈물 흘리게 만든다. 


그녀의 절창, 능청, 액션, 절묘한 의성어까지…아, 길게 써봐야 손가락만 아프다. 기회가 되거든 다음엔 꼭 놓치지 마시고 직접 보시라. 이런 공연은 ‘Seeing is believing’이요, ‘보는 게 남는 거’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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