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피터의고백'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18.07.01 원숭이를 통해 꿰뚫어보는 인간의 본질 [빨간 피터들]<추ing_낯선 자>

어떤  극장은 장소 이전에 그 자체가 추억이요 고유의 작품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있다. 나에게는 '명동 엘칸토예술극장'과 '삼일로 창고극장'이 그런 경우인 것 같다. 아직 감수성이 여물기 전인 십대 후반에 처음 연극을 봤던 곳이 바로 이 극장들이었으니까. 나는 여기서 추송웅이 번역, 연출, 연기 등 거의 모든 것을 도맡아 했던 화제의 연극 [빨간 피터의 고백]을 보았다. 당연히 초연은 아니었고 나중에 시간이 지나 앵콜공연을 할 때 보았던 것 같다. 창고극장은 운영 상의 문제로 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나중에 '떼아뜨르 추'라는 이름으로 바뀌기도 했던 것 같다. 아무튼 이런 명동의 추억들 말고 더 추가하자면 송승환이 출연했던 테네시 윌리엄스의 [유리 동물원]을 보았던 광화문의 '마당세실극장'과 운석화 윤소정의 [신의 아그네스]를 보았던 명륜동의 '실험극장' 정도였을까. 

삼일로 창고극장에서 추송웅의 [빨간 피터의 고백]을 해석한 작품들이 재개관 기념극으로 새로 올라간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전화 예매를 했다(인터넷으로 예매하려다가 이런저런 난관에 부딪혀 결국전화를 했다). 내가 표값 4만 원을 카드로 계산하겠다고 하자 담장자가 놀라서 물었다. 무슨 통신할인이나 하다못해 배우할인이라도 없냐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4만 원 을 계산할 테니 예약을 해달다고 했다. 제 값을 안 내고 보는 게 추세이다 보니 이런  해프닝이 생기는 것  같아 씁쓸했다. 

우리가 예매한 작품은 [빨간 피터들] <추ing_낯선 자>라는 작품이었다. 신유정 연출에 하준호 배우가 출연하는 모노드라마였다. 40 여 분 정도의 짧은 작품이라고 했는데 극장 안으로 들어가면 무대와 객석이 따로 구분되어 있지 않고 바닥에 놓인 스툴에 관객들이 앉아 있으면 되는 시스템이었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 안내방송이 나왔다. '이 연극은 무대와 객석이 따로 구별되어 있지 않으니 적당한 의자를 골라 앉으시면 되고 조금 있다가 배우가 나와 연기를 하다가 관객 가까이 가더라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말라'는 안내멘트였다. 우리는 웃으며 배우를 기다렸다. 연극영화과를 다니는 듯한 젊은 관객들이 많았다. 

불이 꺼지고 어디선가 배우가 나타났다. 바지를 입고 웃통을 벗은 원숭이 분장이었는데 코를 뒤집어 원숭이처럼 꾸미고 가슴과 등에 털을 달아서 언뜻 보면 진짜 원숭이 비슷하기도 했다. 말을 전혀 하지 않고 원숭이처럼 '기긱', '우우~' 소리만 내는 무언극이었다. 잠시 후 천정에서 땅콩이 후두둑 떨어지고 배우는 그 땅콩을 집어던지며 관객들과 이야기거리를 만들어갔다. 우리는 흡사 진짜 원숭이를 본 것처럼 놀라워했고 수 많은 사람들 틈에서 혼자 원숭이 역을 잘 해내고 있는 배우를 보며 감탄했다. 관객의 반응에 따라 순간순간 달라지는 연기이기에 배우 관객 모두 빠른 순발력이 필요했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상황이 계속 이어진다는 사실에 서로 신기해 하거나 뿌듯해했다. 순간 나는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혼란스러웠다. 원숭이 역을 하고 있는 배우를 진짜 원숭이로 여겨야 하나, 아니면 원숭이 역할을 잘 수행하고 있는 배우로 봐야 하나 헷갈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건 원작자인 카프카가 원하는 바이기도 했고 왕년의 각색자인 추송웅이 원하는 바이기도 했으며 새롭게 추송웅과 카프카의 작업을 재해석한 연출가 신유정과 배우 하준호가 원하는 바이기도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부가 끝나고 암전 후 웃도리를 차려 입은 하준호가 나와 2부를 시작하면서 극은 새로운 활기를 띄었다. 하준호는 잘 나가지 못하는 연극배우 역할을 했는데 끊임없이 울리는 핸드폰으로 통화를 하는 중간중간 관객들을 툭툭 건들면서 자신의 위치와 생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렇게 배우로서의 애환이나 개인적인 역사를 드러내던 배우는 돌연 다시 원숭이가 되어 무대 위를 훨훨 날아다니다가 끝을 맺었다. 배우가 끝내 인간과의 커뮤니케이션에 실패하고 다시 원숭이로 돌아간 것 같아 슬펐다. 

그런데 왜 원숭이일까. 

설마 이 기회에 원숭이의 생각이나 삶을 들여다보자는 건 아닐 것이다. 우리 인간들은 스스로를 객관화하는 것에 늘 어려움을 느낀다. 그래서 인간과 닮은 '원숭이 메타포'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영화 [혹성탈출]도 마찬가지다. 원숭이의 눈을 통해 들여다 볼때 인간의 모습은 더 적나라하게 보이지 않던가. 그래서 '빨간 피터'라는 원숭이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생명력을 가지는 것이고 추송웅의 작업을 재해석한 일련의 작품들도 2018년 현재 대한민국에서 나름의 의의를 갖는 것이라 생각한다. 40여 분의 짧은 러닝타임이었지만 느낀 바가 많았고 신선한 자극이 되었던 시간이었다. 좋은 연극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연극이라고 해야할지 퍼포먼스라고 해야할지 약간 헷갈리긴 하지만. 




Posted by 망망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