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자들에게 가장 큰 애증의 대상은 누구일까. 아마 스승과 제자 사이가 아닐까 한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남김 없이 전해준 스승, 그리고 걷는 법부터 시작해 창작의 방법론까지 그에게서 모든 것을 다시 배운 제자. 서로는 너무나 잘 아는 사이이면서도 주종 관계에 놓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애증이 존재할 수밖에 없다. 더구나 제자들에게는 제 스승을 넘어서야 하는 무의식적인 의무감까지 있다. 흔히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라는 말이 스승을 존중하고 어려워하는 말로 해석하지만 사실은 스승이 이룩한 길을 피해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야 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여기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 발생하는 애증의 결정판 같은 이야기가 있다. 토종 연극 <도둑맞은 책>이 바로 그것이다. 현재 천만 관객을 동원하는 작품을 쓸 정도로 잘 나가는 시나리오 작가가 된 서동윤은 어느 날 자신의 보조작가였던 조영락에게 납치를 당한다. 영락은 스승의 방과 똑같이 꾸민 곳에 그를 집어넣고 최소한의 음식과 커피만 제공하면서 자신이 원하는 이야기를 쓰라고 위협한다. 주제는 '슬럼프에 빠진 작가가 살인을 하고 그의 작품을 훔친다'이다. 동윤은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게 다 무슨 미친 짓인가 하는 생각에 쓴웃음을 지으며 제자에게 욕을 하고 야단을 친다. 그러나 휠체어에 자신의 두 팔을 결박한 채 골프채를 휘두르며 달겨드는 영락을 본 후로는 쉽게 웃을 수 없게 되었다. 자, 좋든 싫든 살기 위해선 시나리오를 써야 한다. 어디서 많이 본 얘기라고? 그렇다. 모티브만 놓고 보면 캐시 베이츠가 출연했던 스티븐 킹 원작의 영화 <미저리>가 떠오른다. 그러나 모티브는 비슷해도 지향하는 바가 다르기에 각 작품이 도달하는 위치는 사뭇 다르다.


이 연극은 원래 영화를 위해 씌여진 글(2011년 대한민국 스토리공모대전 수상작)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스릴러의 외피를 두른 심리 드라마'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지만 사실 위에서 언급한 '미저리'를 생각하면 이 컨셉은 스릴러나 심리 드라마로서 그리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그런데 살아남기 위해 할 수 없이 글을 쓰던 서동윤이 작품이 진행됨에 따라 점점 자신의 시나리오에 애착을 갖게 되고 어느 순간부터 영락과 함께 '좋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진정으로 고민하는 장면부터 이야기는 급속도로 재미있어진다. 그리고 시나리오 안으로 들어가면서 생기는 플래시백을 통해 맨 처음 수업 시간에 <차이나타운>의 시나리오 작가가 누구인가를 묻는 장면부터 시작된 두 사람의 '영화지식 겨루기'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오타쿠적인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즐거운 장면들을 목격할 수 있다. 동윤을 위협하면서 예전 스승의 가르침을 하나하나 상기시키고 지금 동윤이 쓰는 시나리오에 적용시키며 비웃는 영락, 그리고 그에 맞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지키려 몸부림치는 동윤. 이 연극은 어쩌면 그런 두 남자의 불꽃 튀는 화학작용이 가장 큰 '스펙터클'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작품의 장르적 분류는 작가를 위협하며 자신이 원하는 방향대로 글을 쓰게 하는 미친 팬심 스릴러 <미저리>보다는 기존 공포영화의 온갖 룰들을 들먹이며 가지고 놀던 <스크림>의 악동들 쪽에 더 가까운 듯하다. 


연극이 시작되기 전에 객석을 둘러보니 오른편 뒤쪽에 배우 송영창이 혼자 앉아 있었다. 더블 캐스팅 중인 배우가 다른 팀의 연기를 모니터링 하며 자신의 대사도 한 번 더 점검하기 위해 온 것이다. 그날 밤 연극이 끝나고 서동윤 역을 맡은 박호산 배우와 술을 한 잔 하며 들어보니 지금 진행되고 있는 캐스팅 중 송영창 박용우 팀은 '클래식'에 가깝고, 자기네팀은 '재즈' 분위기를 내기로 해서 똑같은 연출가와 각본이라도 아주 다른 연극으로 관객들에게 다가간다고 한다. 욕심 같아서는 다른 팀의 공연도 한 번 관람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이지만, 내가 뭐 평론가도 아니고 또 그렇게 시간을 낼 자신도 없다. 사실은 그날도 갑자기 업무가 길어지는 바람에 야근하는 동료들을 놔두고 혼자 도망치듯이 뛰쳐나와 겨우 관람한 연극이었으니까.


얼마 전 성북동으로 이사를 와서 새로 생긴 이웃들이 몇 있는데 그 중 한 사람이 바로 박호산 배우였다(도대체 우린 이게 무슨 인복인지 모르겠다). 아무튼 같이 연극을 본 아내는 박호산 배우가 '너무도 능글맞게 연기를 잘 하는 바람에 무대 위로 달려가서 머리를 한 대 탁 때려주고 싶은 심정이었다'고 하며 웃었다. 노련하고 안정감 있는 배우와 연출의 힘이 균형감 있게 느껴지는 흐뭇한 공연이었다. 다만 소극장이라고 하기엔 공간이 약간 크지 않나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소극장 공연은 관객이 바로 옆에서 피부로 느끼는 맛도 있는 법인데 말이다. 


9월 1일부터 25일까지 동대문역사문화공원역에 있는 충무아트센터 블루에서 만날 수 있다. 한가위 연휴 빨간날들 중 하루 골라서 이 연극을 한 번 보시는 건 어떨까 적극 권장하는 바이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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