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관 옆 동물원]에서 춘희로 나왔던 심은하의 직업이 결혼식 촬영기사였죠. 주말이면 정말 바쁜 결혼식 촬영기사. 결혼식은 두 사람에게 거의 단 한 번뿐인 행사고 또 단숨에 지나가기 때문에 혹시라도 잘못 찍게 되면 두고두고 욕을 먹는 부담스러운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결혼식 비디오라는 게 집들이날 당사자들에게나 재밌지 다른 손님들까지 박장대소하며 같이 볼 영화는 아니지요(그래서 저희 부부는 결혼식 비디오를 아예 찍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 결혼식 비디오만으로 훌륭한 영화를 만든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큐멘터리 감독 덕 블록(Doug BLOCK)입니다.


뉴욕에서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살아가던 덕 블록은 ‘아르바이트’로 이십 년 간 결혼식 비디오를 촬영했답니다. 수입이 꽤 짭짤하고 안정된 생활이었던 모양이지요. 그런다가 어느날 자기가 비디오를 찍어준 그 사람들은 결혼식 이후 어떻게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평범했던 결혼식 비디오들이 감독의 신선한 발상에 의해 새로운 영화로 탄생하는 순간이었죠. 무려 112쌍의 결혼식 고객 중 9쌍이 그에게 인터뷰 허락을 전해왔습니다. 감독은 그들을 다시 만나 결혼식 이후 각자의 스토리들을 추적합니다. 그것은 사랑의 시작과 진행에 대한 성찰이기도 하고 인생에 대한 우문현답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평범한 사람들의 특별한 순간을 들여다보는 손쉬운 방법이기도 합니다. 다큐 감독이라 그런지 예전에 찍어놓은 결혼식 비디오도 범상치가 않습니다. 더구나 십여 년 후에 만나 그들을 인터뷰한 필름은 놀랍기까지 합니다. 인터뷰어의 통찰력에 따라 인터뷰이들의 대답의 깊이가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실감할 수 있죠. 

젊었던 신랑 신부가 아이들을 낳고 자신의 커리어를 착실하게 쌓아간 이야기를 듣는 것은 흐뭇한 일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던 ‘아이'들이 ‘어른'으로 성장해 간 모험담이니까요. 그런데 더 대단한 것은 그렇게 희망에 부풀어 함께 시작했던 사람들 중 누군가는 결국 이혼을 하게 되는데, 그 과정까지 가감없이 털어놓는 장면들이 있다는 것이죠. 이건 감독에 대한 믿음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 영화에는 레즈비언 커플도 나오고 우리나라 여성도 나옵니다. ‘윤희’라는 이름의 이 여성은 바이올린을 전공했던 재원이었는데 어느날 비행기 옆자리에서 “혹시 그 바이올린 케이스로 총기류를 운반하는 거 아니냐?"고 농담을 하던 남자와 사랑에 빠져 미국에 정착하게 된 사연이었습니다. 딸이 한국으로 돌아와 자리를 잡을 줄 알았던 그녀의 부모님들은 미국에서 찍힌 결혼식 비디오에서 매우 찹찹한 얼굴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오랜 세월이 지나 자신의 선택이 옳았음을 확신하게 되죠. 


일부러 그렇게 고른 것은 아닐텐데 인터뷰이들이 거의 다 평범하면서도 지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말도 조리있게 잘들 합니다. 여유있고 유머도 풍부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천생연분은 분명히 있다. 그러나 단 하나의 천생연분은이란 없다.” 참 열려있는 생각이죠. 이건 '첫 번째 결혼’에 출연한 ‘수와 스티브 커플’에서도 느낄 수가 있습니다. 그들의 시작은 어이없게도 부킹클럽이었지만 지금까지 서로를 사랑하고 존중하며 잘 살고 있으니까요. 





“모두가 두 사람을 축하해 주기 위해 있는 날, 나는 그 장면들을 잡으려 거기 있었다”라는 감독의 말이 아니라도 이 영화엔 설레는 첫출발의 순간들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그 행복을 지키기 위해 평범한 사람들이 얼마나 애쓰고 살아가는지가 진실되게 담겨 있습니다. 아이디어란 이런 것이지요.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것들에서도 남과 다른 시각으로 새로운 의미를 뽑아내는 것. 그래서 덕 블록 감독을 다시 한 번 칭찬하고 싶어집니다. 저는 평소 다큐를 좋아하는 아내 덕분에 이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참 행운이었죠. 다른 분들과도 이 행운을 나누고 싶습니다. 지금 www.eidf.org/kr 에 들어가시면 공짜로 영화를 관람할 수 있습니다. 아마 이번 주까지만 상영하는 것 같습니다.이런 영화는 때를 놓치면 나중에 DVD나 ‘어둠의 경로’로도 찾기가 매우 힘드니 지금 시간을 내서 꼭 보시기 바랍니다. 러닝타임은 95분 6초. 올해 ‘EIDF 2014’ 시청자·관객상을 수상했습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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쌔비(아내의 닉네임)가 제주도를 좋아하는 바람에 저도 벌써 네 번이나 제주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번엔 결혼을 하고 나서 처음 가는 제주였죠. 우리는 남들과 달리 일요일 오후에 출발하기로 했습니다. 쌔비가 다시 일을 시작하기 전 평일에 여행을 할 수 있는 기간은 지금 뿐이었거든요. 태풍과 장마전선이 몰려온다는 일기예보에도 불구하고 저희는 제주도행 비행기표를 예약했습니다. 비오면 제주 가서 이박삼일 동안 떨어지는 빗방울이나 보고 오면 되지 뭐. 이런 얘길 주고받으면서요.

 

이번 여행의 포인트는 ‘저렴하게, 실속있게’였습니다. 최근의 초호화 결혼식, 초호화 하와이 신혼여행 등등으로 인해 분에 넘치는 소비를 단기간 동안 압축적으로 경험한 저희들은 이젠 또 굳이 비싼 돈을 들여 고급스런 숙소에서 자고 싶지도 않았으니까요. 그래서 비행기는 민간항공 중에서도 평일 노선으로, 그리고 숙소는 호텔이나 펜션이 아닌 민박집으로 하기로 기준을 세웠습니다.


평소 제주도와 관련된 트위터리안들을 많이 알고 지내는 쌔비가 트위터로 문의를 해보니 몇몇 분들이 ‘써니허니 게스트하우스’라는 곳을 알려주더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게스트하우스보다는 민박을 원하던 바, 고맙게도 ‘써니허니’의 주인장께서 친히 알려준 민박집이 바로 ‘성산가는길’이었습니다.

 

 

 

 

올레 20코스 근처에 있고, 2인 1실에 5만 원. 방마다 욕실이 딸려있답니다. 우리는 괜찮은 가격이라 생각했습니다. 항공료도 세금까지 합쳐 채 5만 원이 안 되는 가격이었으니 그야말로 ‘격’이 맞는 셈이었죠. 그런데 막판에 동행이 하나 생겼습니다. 쌔비가 페이스북에 올린 우리의 여행 계획을 듣고 반응을 보인 ‘예전부터 아는 동네 형’이었던 근식이 형을 초대한 것이었습니다. 싱글인 근식이 형은 다름 방에 묵어야 하는데 혼자 5만 원을 내는 건 좀 … 하고 있는데 쌔비가 집주인과 문자메시지를 통해 4만 원으로 합의를 보았다며 웃습니다.

 
제주도에 도착하자마자 제주시에 있는 ‘오막칼국수집’에서 점심부터 한라산을 부어라 마셔라 하던 우리들은 세화 바닷가에서 맥주를 또 한 잔씩 하고 좀 취한 상태로 구좌읍 세화리에 있는 ‘성산가는길’에 도착했습니다. 세화고등학교 근처에 있는 골목으로 들어가니 잔디밭 위에 보도블럭이 깔린 단아하고 조용한 민박집 입구가 보였습니다.


주인은 50대의 온화한 인상을 가진 사장님과 사모님이셨는데 나중에 얘길 들어보니 원래 이곳 분들이 아니고 부천에 사시다가 거기에 20대 딸 둘을 남겨두고 ‘독립’ 하셨다고 하네요. 사장님은 그동안 쭉 건축일을 하셨다고 하는데 제주도에 내려오셔서는 사진을 많이 찍으러 다니시는 모양이었습니다. 잠깐 나갈 때도 DSLR카메라를 들고 다니시는 게 인상적이었습니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집안이 환하고 조용해서 좋았습니다. 흔히 여행을 가면 여러 다른 팀들과 살을 비비고 지내야 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긴 두 팀만 꾸려와도 독채를 온전하게 쓸 수 있고 또 각 방마다 안쪽으로 화장실이 딸려 있어서 아주 마음이 편했습니다. 더구나 두 팀이 오면 나머지 한 팀은 받지 않는다는 방침이 놀라웠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서 하는 생계형 민박집이 아니라는 걸 눈치챌 수 있는 대목이죠. 민박집 뒷뜰엔 두 분이 가꾼 여러 채소와 꽃들이 자라고 있었습니다. 3년쯤 뒤면 더 예뻐질 거라는 사모님의 말씀에 쌔비는 벌써 감동을 먹은 눈치였습니다.


가운데에 자리한 거실의 낮은 탁자와 벤치, 그리고 한쪽에 있는 컴퓨터 책상도 간단한 음식을 해먹을 수 있는 주방과 잘 어울리는 구도였습니다. 무엇보다 가운데 놓인 책장이 마음에 들었는데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단행본들 사이사이로 사진 관련 서적이나 포토그래퍼들의 에세이가 많았습니다. 사장님의 취향이 묻어나는 컬렉션이었습니다.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입안에 가시가 돋친다’를 모토로 삼고 있는 저희들은 이날 저녁도 해녀박물관 근처에 있는 ‘별방촌’이란 횟집에 가서 떨어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과음을 단행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 사모님께서 맛있는 죽을 쑤어서 가져다 주시는 게 아닙니까. 우린 이게 웬떡이냐, 웬죽이냐 하면서 맛있게 먹는 수밖에요. 물론 태어나자마자 서울 생활을 하셨다지만 그래도 사모님은 부산 출신이라는데 의외로 반찬들이 모두 정갈하고 맛깔스러웠습니다.

 

 

 

 

 


둘째날 큰그리오름에 다녀와 좀 지쳤던 우리들은 “오늘 저녁엔 집에서 먹는 게 어떠냐?”라고 의견을 모았습니다. 민박집이 편안하고 깨끗해서 그게 더 나을 듯했습니다. 쌔비가 전화로 여쭤보니 고기만 사오면 나머지는 대충 준비를 해주시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농협하나로마트에 들러 돼지목살과 술을 사가지고 집으로 갔습니다. 사모님은 벌써 탁자 위에 신문지를 깔고 고기를 구울 수 있도록 준비를 다 해놓은 상태였습니다. ‘우리가 먹던 거’라며 같이 내오신 밥까지 염치없이 얻어먹던 우리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같이 술이나 한 잔 하시자’고 청한 것 같습니다. 그랬더니 의외로 두 분이 너무나 반가워하시며 술과 찬을 가자고 건너오시는 게 아닙니까.


그때부터 즐거운 술자리의 향연이었습니다. 월요일 저녁이라 민박엔 다른 손님도 없고 우린 걱정할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점잖게 생긴 두 분이 부천에 과년한 딸들을 남겨두고 연고도 없는 제주까지 내려와 ‘독립’하게 된 사연. 저희들이 각각 카피라이터와 출판기획자, 작곡가 등의 일을 해오면서 있었던 수많은 에피소드들. 저희 부부가 만나 결혼까지 하게 된 드라마 등등 이야기마다 웃음과 공감이 끊길 틈이 없었습니다.

 

사모님은 나이가 드셔도 아직 출중한 미모를 자랑하는 분이었습니다. 제가 사모님은 [내일을 향해 쏴라]와 [졸업]에 나온 캐서린 로스를 닮았다고 아부를 하고 있는데 옆에서 근식이 형이 ‘바다가 육지라면’을 부른 가수 조미미를 닮았다고 초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혜자는 사모님도 미인이지만 사장님이 참 잘 생기셨다고 했습니다. 한 마디 할 때마다 웃음꽃이 피어나는 날이었습니다. 아무튼 이래저래 두 부부께서도 오랜만에 마음껏 웃어보았다고 좋아하셨습니다. 물론 사장님 사모님께서 안채로 돌아가신 후에도 저희들의 ‘부어라 마셔라’는 오랫동안 지속되었지요. 센스있는 사장님께서 한라산을 몇 병 더 남겨놓고 가셨더라구요.

 

 

 

 


쌔비는 사모님이 마당에서 자신을 부를 때 “손님!”이라고 하는 대신 “혜자 씨~”라고 부르는 게 정말 정겹고 좋았다고 합니다. 여행을 하는 사람들은 나쁜 마음을 먹는 경우가 거의 없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들과 만나면 더 즐거운 시너지 효과가 생깁니다. '성산가는길'도 그런 경우였습니다.

 

저희는 다음날 아침 또 ‘우리가 먹던 거’라는 뻔한 거짓말에 속는 척하며 콩나물국을 얻어먹고 나왔습니다. 일기예보와는 달리 첫날 빼고는 쨍쨍하게 맑기만 했던 제주도 여행. 이번 일정은 좋은 사람들과 좋은 장소에서 게으르게 지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리고 깨끗하고 평화로웠던 B&B(Breakfast & Bed)형 민박집 ‘성산가는길’이 있었죠. 정말 다시 와서 묵고 싶은 집입니다.

 

 

 

제주시 구좌읍 상도리 657(상도로 5-2)

010-5549-9908 / 010-8294-9908

http://blog.naver.com/stella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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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날/ 공항 – 제주시 [오막집국수] – 함덕해수욕장 – 구좌읍 상도리 – 민박집 [성산가는길] -  저녁 해녀박물관 옆 [별방촌] 

 

* 둘째날 / 상도-박물관 점심 [생이소리] – 큰그리오름 - 저녁 민박집 [성산가는길]

 

* 셋째날/ 우도 – 성산 - 공항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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