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청문회 같은 데서 질문과 대답을 주고받는 국회의원이나 고위공직자들을 보고 있노라면 ‘저 사람들은 공부도 많이 했을 테고 사회적 지위도 높은 인간들인데 어쩌다가 저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주절거리며 살게 됐을까?’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고려대 윤성식 교수는 “그래서 인생의 밑그림이 중요하다”라고 말한다. 그가 말하는 밑그림이란 ‘큰 틀’과 같은 개념이다. 어떤 인생을 살 것인가에 대한 커다란 비전 없이 그저 ‘열심히’만 산 사람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무엇이 옳은 것인지 그른 것인지는 물론 삶에 있어서 진정 소중한 가치가 무엇인지도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무언가를 추구하며 살아간다. 권력과 명예를 추구하든 안락과 쾌락을 추구하든 아니면 봉사와 헌신, 참된 나의 발견, 행복한 가정, 깨달음의 길 등 그 어떤 것을 추구하든 그로부터 가치와 의미를 찾지 못한다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 



윤성식 교수는 행정학과 경영학을 전공하고 뒤늦게 대학과 대학원에서 불교 공부까지 한 다음 대학교에서 공인회계사 준비반 지도교수, 행정고시 지도교수, 기숙사 사감 등을 역임하며 젊은 학생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눈 사람이다. 행정고시나 회계사 준비를 하는 아이들이니 앞날에 대한 걱정과 계획이 오죽 많겠는가. 그런데 윤성식 교수는 학생들을 만나 얘기를 나눠보고 깜짝 놀라게 된다.  ‘스마트폰이나 가방을 살 때는 몇 날 며칠을 심사숙고하면서 인생의 향방에 영향을 줄만큼 중대한 결정은 너무나도 쉽게 해버리는’ 아이들이 많다는 걸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생은 크고 작은 선택의 연속이다. 그런데 그 선택을 위한 어떤 절대적 가치판단 기준이 마음 속에 확고하게 자리잡고 있지 못하면 ‘팔랑귀’가 되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저자는 유학이나 대학원 진학을 상담하는 학생들에게도 “도대체 그 정보는 어디서 들었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친구나 선배에게서 들었다는 알량한 대답이 돌아온다고 개탄한다. 


 

세상은 불확실하고 복잡하며, 상호의존적이고 비선형적이며 상대적이다. 지금 내린 결정이 인생이라는 바다에 어떤 파도를 일으킬지 정확히 예측하기란 결코 쉽지 않다. 비전과 전략이 없으면 그때그때 근시안적이고 단편적인 관점에서 판단을 내리게 된다. 그 결과 작은 파도에도 이리저리 휩쓸려 우왕좌왕하며 일관성을 잃게 되고 무엇보다도 소중한 노력을 모두 낭비하게 된다. 



세상을 볼 줄 알아야 한다.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성찰’이 필요하다. 나에 대한, 그리고 세상에 대한 성찰.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스마트한’ 기기를 자유자재로 이용하며 살게 된 우리들은 정작 삶에 대한 성찰은 잃어버린 세대가 되어버렸다. 책을 읽고 토론하는 것은 휴대폰이나 SNS에 비하면 대단히 느리고 귀찮은 일이므로 피해버린다. 더구나 내 앞가림 하기에도 바빠 남과 사회적 아젠다에 대해 토론하거나 걱정할 여유도 없다. 그러니 트렌드엔 민감하고 출세하길 간절히 바라긴 하지만 막상 세상 돌아가는 것에는 둔감한 세대가 되어버린다. 남은 것은 가장 쉬우면서도 마음에 드는 방법, 즉 ‘너는 할 수 있다’, ‘간절히 소망하면 우주가 화답한다’ 는 식의 [시크릿]이나 파울로 코엘류의 책들, 그리고 [아프니까 청춘이다] 같은 ‘위로 기획’에 매달리는 것뿐이다.  



‘너는 할 수 있다. 간절히 소망하면 우주가 화답한다’고 속삭이는 공허한 성공학이나 ‘실패를 두려워하지 말라. 실패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위로에만 솔깃할 뿐이다. 그런 이야기들이 당장은 달콤할지 몰라도 삶을 바꾸지는 못한다. 더구나 인생의 밑그림이 없는 상태에서 그런 이야기들은 우리를 로맨틱한 방랑자로 만들 뿐이다. 방랑자란 미래를 향해 가는 사람이 아니라 지금 당장 좋은 것만 찾아서 우왕좌왕하다가 결국 길을 잃어버리는 사람을 말한다. 방랑자는 산만하고 중심이 없는 삶을 살기 때문에 아주 작은 일에도 흔들릴 수밖에 없다. 



저자는 강남에서 제일 잘 나간다는 과외선생의 일화를 소개한다. 그 강사에게 잘 나가는 비결을 물으니 ‘비전에 의한 공부’를 얘기하더라는 것이다. 자기는 처음 학생을 만나면 스스로가 왜 공부를 해야 하는지 알게 될 때까지 며칠간 책을 덮은 채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계속 대화를 한다고 한다. 한낱 과외선생도 공부를 비전과 연결시킬 줄 아는 것이다. 그 정도로 비전은 중요하다. 저자도 행정학을 공부하고 공인회계사 시험을 거치는 등 이런저런 방향전환을 많이 했지만 ‘학자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큰 비전은 변함이 없었기에 흔들리지 않는 인생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비전을 잘 세워놓으면 인생의 뒤안길에서 후회가 적어진다. 왜냐하면 행복, 가치, 의미에 대항할 수 있는 대안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아일랜드 트리니티 칼리지의 사이언스 갤러리에는 “행복은 문제가 없는 상태가 아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능력이다”라는 말이 붙어있다고 한다. 우리는 흔히 삶의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행복’이라고 대답한다. 그러나 저자는 그건 목표가 아니라고 말한다. 진정한 행복은 의사나 판검사가 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의사나 판검사가 된 후에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고귀한 신분이 되고 좋은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하더라도 일에서 보람과 즐거움, 자부심 그리고 전 인류에 적용되는 보편타당한 가치에 대한 공감 등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건 성공한 인생도 행복한 삶도 아닌 것이다. 



“인생 계획이요? 음…, 일단 졸업하면 회사에 취직할 겁니다. 그리고 5년 안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집을 장만해야죠. 그리고 또…….” 

“그게 인생계획이야?”

“그럼요. 은퇴 후의 인생까지도 계획해 놓은 걸요?” 

“정말로 그게 인생 계획이란 말이야?” 



이 책은 [사막을 건너야 서른이 온다]라는 제목 때문에 자칫 스무 살들을 위한 단순한 인생 지침서로 오해 받기 쉽다. 그러나 찬찬히 책장을 넘기다 보면 20대 보다는 성숙한 나이가 돼서 읽을수록 더 효과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 라는 ‘우문’은 탁상공론이 아닌 학생들과의 구체적인 상담 사례를 거쳐 ‘현답’이라는 형태로 우리 앞에 제시된다. 더구나 책을 읽다 보면 내가 최근 반복해서 들춰보던 [혼•창•통]이나 [일본전산 이야기], 박웅현의 책들, 사사키 아타루나 스티브 잡스 등의 말과 글들이 수없이 어른거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역시 통찰이 있는 이야기들은 공집합 안에서 다 모이게 되는 모양이다. 








* 책을 읽다가 명백한 오류가 있는 문장을 하나 찾아냈습니다. 혹시나 해서 집에 있는 [톰 소여의 모험]을 찾아보니 톰에게 페인트칠을 시킨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라 폴리 이모였더군요. 톰은 부모가 없는 아이였으니까. 어느 책이나 이런 오류들은 발견되기 마련입니다. 나중에 그걸 알게 된 편집자들은 책상에 앉아 머리카락을 쥐어뜯게 되고…제가 심술궃은 인간이라 이런 게 보이는 모양입니다.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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