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본다는 것은 일부러 돈과 시간을 내고 컴컴한 극장으로 들어가 남들이 만들어놓은 거짓말에 기꺼이 속아줄 마음을 먹었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어찌 생각해 보면 이건 좀 미친 짓인 거 같다. 그런데 얼마 전 개봉한 [그랜드 브다페스트 호텔] 같은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오늘 이런 미친 짓 하길 참 잘 했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해보자,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니 이를 또 어쩌랴. 한 번 생각해 보자. 그 옛날 남부러울 것 전혀 없고 아라비아의 왕이기도 했었던 그 자는 왜 매일밤 아름다운 샤라자드의 옷을 벗기는 대신 새로운 이야기를 계속 만들어 달라고 너드짓을 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어렸을 때 잠들기 전이면 할머니에게 호랑이든 곰이든 나무꾼이든이 나오는 뻔한 옛날 얘기를 해달라고 매일 졸랐을까?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던데) 아무리 생각해 봐도 우리 지구인들 유전자 어딘가엔 권태를 이기지 못하는 취약점이 있거나 아니면 ‘이야기 본능’이라고 하는 의외의 요소가 찰지게 아로새겨져 있는 모양이다. 


이야기. 그렇다. 이야기는 언제나 존재해 왔다. 그래서 누구든 틈만 나면 ‘이빨’을 까고 ‘구라’를 푼다. 그런데 똑같은 이야기라도 어떤 놈이 하느냐에 따라, 또는 어떤 방식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 이야기의 깊이와 재미는 시시각각 달라지게 마련이다. 더구나 요즘은 가만히 앉아서 이야기를 듣기만 하는 게 아니라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듣고 보고 느끼는 공감각의 시대라 그 방법론이 더욱 중요해졌다. 그래서 요즘 잘 나가는 소설가나 철학자, 교수들 중에는 자신의 직업명을 제껴버리고 ‘이야기꾼’이라는 닉네임을 이름 앞에 달고싶어 안달하는 자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나 원한다고 다 이룰 수는 없는 법. 품새가 어설프거나 도그마적인 한계에 부딪혀 엉뚱한 길을 헤매는 수많은 중생들을 뒤로 하고 단연 괴팍한 천재로 우뚝 빛나고 있는 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웨스 앤더슨이다. 그는 자신만의 강박적인 스타일과 자유로운 상상력, 복고적 화법, 강렬한 색채, 미친 속도감과 블랙유머 등을 무기로 단숨에 그 분야의 새로운 강자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번엔 ‘부다페스트 호텔’이라는 흥미진진한 가상 공간을 삽으로 푹 떠서 통째로 들고 다시 우리 앞에 나타난 것이다. 




1930년대 동유럽의 가상국가 주브라스카 공화국에 있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총지배인 구스타프가 고객이자 연인이었던 마담 D의 아들에 의해 그녀의 살인범으로 몰린 뒤 ‘사과를 든 소년’이라는 비싼 그림을 들고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무자비한 암살자에게 쫓기는 것은 물론 투옥과 탈옥 등 갖은 고초를 놀이공원 자유이용권 코스처럼 두루 겪다가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누명을 벗게 되지만 그만 허무하게 사망해 버리고 그 호텔은 벨보이였던 무스타파(또는 제로)가 물려받게 된다는 코믹 환타지 역사 미스터리 모험극, 이라고 거칠게 줄거리를 요약하고 나면 그 무신경함에 분개한 나머지 나를 죽이려 드는 사람들이 여럿 있을 것이다. 



사실 이 이야기는 살인사건을 다룬 스릴러나 미스터리라고 하기엔 그 구조가 너무나 빈약하다. 더구나 코미디라고 하기엔 고급스러운 유머가 너무 많이 등장하고 역사극이라고 하긴엔 그 연대가 흐릿하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보고 나면 이것저것 따지기 전에 일단 너무 재밌어서 지난 몇 달 간 봤던 다른 영화들이 어느 하나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된다. 





오늘 아침 신문을 보니 [호텔 부다페스트 호텔]이 관객 40만을 넘었다는 기사가 실려 있다.(2014.04.08. 경향신문 24면 하단) 소위 ‘다양성 영화’로서는 초대박을 친 것이다. 무엇이 이 영화를 이토록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작품으로 만들었던가. 우선 이전 웨스 앤더슨의 이전 영화들(이르테면 ‘로얄 테넌바움’이나 ‘다즐링 주식회사’, ‘문라이즈 킹덤’ 같은)에 열광했던 매니아들이 있었다. 그리고 감독의 필모그라피는 물론 카메라나 렌즈의 종류, 영화 속의 세세한 미장센에 이르기까지 영화의 형식미를 중요시하는 시네필들의 헌신적인 입소문이 있었을 것이다. 거기다 영화평론가 이동진, 영화감독 박찬욱 등 문화계 유명인사들의 ‘투 썸즈 업’ 추천이 그 인기몰이에 더욱 불을 지폈을 것이다. 


하지만 이것보다 더 앞서는 요인들이 있으니 그것은 이 영화가 그 자체로도 참 이쁘고 경쾌하고 재밌다는 사실이다. 우선 주인공들의 말이나 행동이 엄청 빠르다. 주인공 구스타프는 물론 그의 천적인 드미트리, 벨보이 제로, 그리고 벨보이의 여자친구이자 나중에 그의 아내가 되는 빵집 아가씨 아가사까지 이들은 한결같이 대사가 빨라서 이들이 주고받는 말들을 듣고 있자면 흡사 우리나라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를 보는 착각이 들 정도이다. 그리고 이들의 행동이나 표정들도 옛날 무성영화 시절의 배우들처럼 속도가 급하고 경쾌해서 어떤 슬픈 장면에서도 결코 완전 슬퍼지지는 않고 위험한 순간에 이르러서도 어느 정도 마음을 덜 졸이게 되는 것이다. 



옛날 옛적에 어떤 마을에…하고 고전적으로 이야기 파일을 여는 형식들은 결국 ‘이거 내가 누군가에게서 들은 얘긴데…’라는 조건이 전제됨으로써 전달자의 각색이 더 흥미진진해지는 법인데 이 영화는 그림 속의 그림이 몇 개나 겹치고 책속의 책처럼 이중삼중 구조를 가지고 있는 ‘챕터식 구조’라 이야기의 변용이나 화면비율이 만화나 동화처럼 자유롭고 또 그로 인해 어느 시점에서 카메라가 멈추든 결국 그 시절의 아련한 노스텔지어를 불러오고 마는 의외의 효과까지 거두게 된다. 


거기다가 웨스 앤더슨을 위해서라면 자기 자신을 기꺼이 하찮은 소품 정도로  취급해도 상관없다는 듯 작정하고 모여든 수많은 일급 배우들 - 랄프 파인즈, 틸다 스윈튼, 시얼샤 로넌, 윌렘 데포, 애드리언 브로디, 에드워드 노튼, 주드 로, 빌 머레이, 하비 케이틀, 레아 세이두 등을 동시패션으로 보는 즐거움이 있다. 도대체 무슨 깡으로 이런 대스타들을 한꺼번에 스크린 안에 담을 생각을 할 수 있느냐고? 배우들을 병렬식 구조로 줄줄이 세우는 데 일가견이 있는 ‘대규모 앙상블’의 대가 로버트 알트먼의 생전 증언에 따르면, 역설적으로 어느 면에선 이게 더 쉬울 수도 있다고 한다. 뭐 하나가 삐끗하면 다른 쪽으로 도망갈 구석이 생기니까. 


예나 지금이나 엄청난 수의 등장인물들로 인한 복잡함이나 지루함을 피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은 미스터리 구조를 슬쩍 끼워넣는 것이다. 이 영화의 시작도 틸다 스윈튼이 분한 마담D의 급작스런 죽음으로 인한 살인사건이었다. 물론 이 살인사건이나 누명은 일종의 ‘맥거핀’ 효과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단순하고 사소하다. 그러나 이 모티브 덕분에 주인공들이 호텔을 벗어나 알프스 산등성이에 있는 수도원까지 올라가서 서로 쫓고 쫓기는 추격전을 벌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히치콕의 옛 영화를 보는 듯한 흐뭇한 착각마저 일으키게 된다. 거기다 ‘체크포인트19 교도소’ 등을 잡을때의 카메라 앵글이 보여주듯 웨스 앤더슨의 좌우대칭에 입각한 엄격한 카메라 워킹과 대담한 컬러감은 불현듯  팀 버튼의 초기 영화를 떠오르게 하고 때로는 박찬욱의 어떤 영화를 떠올리게도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의 가장 큰 덕목은 방금 말한 영화들나 감독의 생산물과 어느 정도는 유사할지언정 결코 같다고는 할 수 없는 또다른 ‘향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즉, 이 영화에서 제 3의 텍스트나 영화가 떠오른다며 자랑하는 것은 영화 마니아적인 취미를 즐기는 호사가의 잘난 척일 뿐이다. 



베를린 영화제는 작년에 이 영화에 심사위원 대상을 안겼다. 아마 그들의 시상 이유에는 웨스 앤더슨의 독창적인 미학과 그를 효과적으로 표현한 테크닉들, 유려한 음악들, 그리고 영화라는 매체의 지평을 넓힌 뛰어난 기획력, 그가 영화 말미에 언급한 오스트리아 작가 스테판 츠바이크에 대한 예우까지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그럴듯한 이유보다 앞서는 것은 역시 상영관에서 엔딩 크레딧을 보고 일어서는 순간 ‘아, 이런 영화라면 한 두 번쯤은 더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즐거웠던 시간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웬만하면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는 극장문을 나서지 마시길 바란다. 웨스 앤더슨은 영화가 끝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깨알 재미’를 선사하는 성실한 감독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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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상은 복잡하지만 법칙은 단순하다”

 – 박웅현이 전하는 인생의 ‘단순한’ 법칙들 [여덟 단어] 




은퇴했지만 제가 좋아하는 CF 감독, 김규환 씨와 호주로 촬영을 간 적이 있어요. 촬영장엔 외국인 모델들이 캐스팅을 위해 찾아왔었어요. 우리가 선택을 하는 입장인데도 180센치미터가 넘는 금발의 여자들이 쭉 서 있으니까 이쪽에서 다들 기가 죽었죠. 그런데 김규환 감독이 가더니 “어 그래, 이 친구 괜찮네”라면서 한국어로 의견을 말하고 통역을 시켰어요. 만약 영어로, “You beautiful” “I like it”, 이런 식으로는 말하고자 하는 바의 절반도 전달할 수 없었을 거예요. 김규환 감독은 모델들을 찬찬히 살피고 한국어로 의견을 전달하고 통역사에게 말을 전하게 했죠. 당시에 그 눈빛에 모델들이 압도돼서 떨더라구요.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나요? 외국어라고, 외국인 모델과 일을 한다고 해서 모든 말을 꼭 영어로 할 필요가 있을까요? 



[여덟 단어]라는 책을 읽을 때 저는 특히 이 부분에서 신선함과 통쾌함을 느꼈습니다. 우리가 살면서 많이 마주치게 되고 괴로워하게 되는 ‘권위’에 대한 챕터였는데요, 박웅현은 여기서 저의 광고 선배이자 개인적으론 홍익대학교 학생 동아리 ‘뚜라미’의 선배인기도 했던 규환이 형과의 에피소드를 통해 ‘불합리한 권위에 굴복하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해줍니다. 



박웅현의 신작 [여덟 단어]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필요한 자세들을 여덟 개의 단어로 나눈 뒤 각 챕터마다 그 의미를 곱씹어보는 책입니다. 서재에 가만히 앉아서 쓴 게 아니라 20,30대들을 모아놓고 매주 강연한 내용을 따로 옮긴 거니까 에세이라기 보다는 강연록이라고 하는 게 더 맞을 거 같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요? 그걸 대답해 줄 수 있는 사람은 공자나 부처, 예수를 능가하는 수퍼맨이거나 사이비종교의 교주쯤 되겠지요. 박웅현도 말합니다. 인생은 강의 몇 번 듣는다고, 책 몇 권 읽는다고 달라지지 않는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얘기를 시작하는 것은 그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아가는 과정이 스스로에게 답이 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통찰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여자들은 왜 남자친구한테 "김태희가 이뻐? 내가 더 이뻐?"라는 질문을 하죠? 김태희가 더 이쁘고, 하지만 난 널 사랑해. 5만원이 비싸? 100원이 더 비싸? 이런 거잖아요.” 성시경, 재밌다. 하하하. 



어제 제 페이스북 친구 김정욱 씨가 올린 글입니다. 성시경이 하는 라디오 방송을 들은 모양이죠? 이번 책 [여덟 단어]는 ‘자존’이라는 글자로 문을 엽니다. 우린 모두 김태희처럼 예쁠 수도 없고 고소영이 될 수도 없죠. 고소영한테 왜 김태희처럼 예쁘지 않냐고 따지는 건 어불성설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변의 모든 ‘엄친아’ ‘엄친딸’들은 이런 어불성설을 먹고 자라납니다. 남과 비교하자면 한도 끝도 없습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이 바로 ‘자존’이죠. . ‘나의 기준점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세상을 보는 눈이, 그리고 나를 대하는 자세가 달라집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 독특한 개성과 능력을 가진 독립체들이니까요. 


그런데 남들과 비교되는 순간 불행의 늪으로 빠져들고 맙니다. 이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어나는 일인가 봅니다. 알랭 드 보통도 [불안]이라는 책에서 이런 경험을 토로하죠. (그러나 쾌적한 집에 살며 편안한 일자리로 출퇴근한다 해도 경솔하게 동창회에 나갔다가 옛 친구 몇 명((이들보다 더 강력한 준거집단은 없다))이 아주 매력적인 일에서 나오는 수입으로 우리 집보다 더 큰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왜 이리 불행하냐는 생각에 정신을 못 가누기 십상일 것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보고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찾아내 성공한 케이스로 박웅현은 [나무열전]이라는 책을 쓴 사학자 강판권 씨를 들고 있습니다. 그는 ‘촌놈’출신이라는 자신의 약점을 강점으로 바꿔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학자라죠? 이러한 자존의 성찰은 자연스럽게 ‘본질’의 문제로 연결됩니다. 



박웅현은 남들 앞에 서서 말하는 게 힘들었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그 단점을 어떻게 극복했는가 하는 과정을 다시 떠올리며’본질’의 문제를 풀어갑니다. 남들보다 잘 하자, 가 아니라 ‘내 얘기를 내 방식대로 잘 전달하자’고 생각을 바꿨을 때 그는 비로소 프리젠테이션의 공포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수영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였다고 합니다. 왜 나는 이렇게 남들보다 배우는 속도가 느릴까,하고 자책하는 대신 “잘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땀 흘리려고 하는 거니까”가 본질이라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어찌 보면 간단한 이치죠? 


본질(本質). 


저는 이 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많이 씁니다. 그런데 'Everything changes but Nothing changes.’라는 에르메스 브랜드의 지면광고 카피만큼 본질을 한 마디로 표현한 예는 드물 것입니다. 세상 모든 것은 변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도 있게 마련이죠. 예를 들면 사람들의 웃음 같은 거. 예나 지금이나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웃음, 기쁨, 감동, 행복, 공감 등 몇 가지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그래서 전 “기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감동하는 것이다”라는 말을 참 좋아합니다. 



지난 학기 제게 강의를 들은 학생 중에 학점에 불만이 있다고 이메일을 보낸 온 친구가 있었습니다. 자기는 제가 내준 과제를 빠짐없이 성실하게 다 했고 밤새워 ‘프레지(Prezi)를 배워 기말과제도 발표했다는 것입니다. 그 학생의 심정은 이해가 갑니다. 파워포인트에 글이나 그림을 올리고 링크시키는 것도 다른 사람들의 도움이 없으면 하지 못하는 저에게 프레지 같은 프리젠테이션 도구는 그야말로 신세계처럼 멋진 것이었으니까요. 그러나 중요한 건 도구가 아니라 ‘콘텐츠’였습니다. 저는 그 학생보다 더 투박하지만 좀 더 아이디어가 살아있는 과제물에게 좋은 점수를 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박웅현은 ‘촛불’을 예로 들어 콘텐츠의 힘을 역설합니다. 한일월드컵이 열리던 2002년 “죽은 이의 영혼이 반딧불이 된다고 합니다”라는 어느 네티즌의 제의에 의해 일파만파 퍼져나갔던 촛불의 힘. 이는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 촛불시위로 번져갔습니다. 누가 시켜서 한 것도 아니고 의무감에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던 거죠.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것. 좋은 콘텐츠는 미디어가 무엇이든 퍼지게 되어 있다는 것. 광고를 하는 저희들 머릿속에도 늘 이런 생각으로 가득하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이런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까요? 리처드 파인먼은 [생각의 탄생]이란 책에서 “현상은 복잡하다. 그러나 법칙은 단순하다.”라는 중요한 힌트를 던져줍니다. 잡다한 지식이나 곁가지 상황들을 걷어내고 ‘정말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라는 물음과 통찰에 집중하면 문제는 의외로 쉽게 풀릴 수 있다는 것이죠. 인구에 회자되는 지구상의 모든 강력한 콘텐츠들은 다 그렇게 탄생했다고 봐도 무방할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콘텐츠를 만드는 기초체력을 기르기에 가장 좋은 것은 다시 ‘책 읽기’라고 박웅현은 조심스럽게 말합니다. 전작인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나 [책은 도끼다]같은 경우에서도 늘 책 읽기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저자는 자신이 신문보다는 단행본을 즐겨 읽는 이유도 신문은 그냥 흘러가는 느낌인데 비해 책은 집중해서 다 읽고 나면 뭔가를 얻는 힘이 있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밑줄을 치게 되고 다시 펼쳐보게 되고 그러다가 이런 시도 발견하게 되니까요. 안도현 시인의 ‘스며드는 것’ 이라는 시입니다. 며칠 전에 제 페이스북 친구 중 한 분이 먼저 쓰신 [여덟 단어] 리뷰에서 이 시를 올리셨더라구요. 저도 한 번 다시 읽어보겠습니다. 




스며드는 것 


 안도현

 

꽃게가 간장 속에 

반쯤 몸을 담그고 엎드려 있다.

등판에는 간장이 울컥울컥 쏟아질 때

꽃게는 뱃속의 알을 껴안으려고

꿈틀거리다가 더 낮게 

더 바닥쪽으로 웅크렸으리라

버둥거렸으리라 버둥거리다가

어찌할 수 없어서

살 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한 때의 어스름을

꽃게는 천천히 받아들였으리라

껍질이 먹먹해지기 전에

가만히 알들에게 말했으리라

 

저녁이야

불 끄고 잘 시간이야

 

시집 <간절하게 참 철없이>2008년 창비





시인이라서 이런 눈을 가지게 된 걸까요? 아닙니다. 남들보다 더 열심히, 더 자세히, 마음으로, 제대로 들여다봤기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살면서 열심히 본다는 것(見) 역시 참 중요한 것이죠. 이 책에서는 자존에서 시작해 본질, 클래식(고전), 본다는 것, 현재 등등의 단어들이 서로 연관성을 가지고 줄줄이 이어집니다. 그 단어들은 모두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첫 물음에 대한 답의 단서들을 품고 있는데 어떤 때는 안도현이나 고은 시인의 시로 설명되기도 하고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아포리즘이나 고전평론가 고미숙의 문장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눈만 뜨면 정보가 넘쳐나고 인터넷, 모바일 기기들이 24시간 옆에서 나를 끊임없이 간섭하는 시대. 이는 곧 ‘결핍이 결핍된’ 역설의 시대이기도 합니다. 예전엔 구하기도 힘들었던 책들이, 영화들이 이젠 너무 많아서, 구하기가 너무 쉬워져서 제목만 읽었는데도 이미 그걸 안다고 생각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러나 읽기만 하고 생각을 안 하면 남는 건 제목뿐입니다. 박웅현이 강조하는 인문학도 바로 그런 것이죠. 무엇이 본질적인 것인지, 고전이 왜 중요한지, 발견이라는 것이 왜 필요한지를 천천히 생각해 보는 것. 그것은 많은 책을 읽어 지식을 쌓는 것보다는 한 가지를 보더라도 ‘깊게’ 읽고 느낌으로써 본질적인 것에 좀 더 가까워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잘 나가는 광고인들 중에는 욕을 먹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회사 일은 안 하고 밖으로 돌아다니며 강의나 심사위원만 하다고 욕 먹고, 해외광고제 같은 데 가서 자료들을 잔뜩 선점해 뻔한 광고책 쓴다고 욕 먹고, 실력에 비해 과대평가 되어 방송에만 자주 나온다고 욕먹고. 어쩌면 박웅현도 그런 사람일지 모릅니다. 다른 사람이 하면 그냥 광고 얘긴데 박웅현이 내는 책만 왜 유독 ‘인문학’ 딱지를 붙여주느냐 불평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박웅현을 이 책에서 배우고 함께 궁리해 본대로 다시 한 번 생각해 봤으면 합니다. 박웅현이 계속해서 이런 책을 쓰고 강의를 하는 ‘본질적인’ 이유는 뭘까요? ‘자존’을 생각한다면 남보다 더 인정받는 광고인이나 유명인이 되기 위해서는 아닌 거 같구요. ‘현재’를 생각한다면 노후를 위한 꼼수로 이러는 것도 아닌 거 같고. ‘권위’라는 챕터에 비춰보면 우리는 ‘똑똑하고 잘난 박웅현’한테 주눅들 필요가 하나도 없는 거겠죠. 


잘은 모르겠습니다. 전 그저 그저 박웅현이 책 말미에 쓴 대로 ‘묵묵히 자기를 존중하면서, 클래식을 궁금해 하면서, 본질을 추구하고 권위에 도전하고. 현재를 가치 있게 여기고, 깊이 봐가면서, 지혜롭게 소통하면서 각자의 전인미답의 길을 가자.”라는 그의 주장으로 만들어지는 ‘박웅현의 인생’이라는 고유 브랜드를 앞으로도 흥미롭게 천천히 지켜보고 싶을 따름입니다. 



이 독서일기를 쓰기 전에 제법 많은 단어와 문장들을 메모했었는데, 쓰면서 대부분 버렸습니다. 이런 책은 남의 리뷰만 휘리릭 훑어보고 ‘음, 무슨 얘긴지 대충 알겠네.’라고 넘겨버리기엔 너무 아까우니까요. 그러니 지금 제 리뷰를 대충 읽어보신 뒤 얼른 책을 사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책상 옆에다 놓고 인생이 막연해질 때마다, 자신이 무능해 보일 때마다, 싫은 놈이 죽이고 싶을 정도로 미울 때마다 한 번씩 들쳐 보시기 바랍니다. 정답이야 얻을 수 없겠지만 적어도 유용한 힌트 몇 개 정도는 건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제가 보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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