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없는 새벽 산길을 혼자 걷는 상상을 해보자. 아니면 해가 뉘엇뉘엇 지는 풍경이 무심히 펼쳐지는 홍대앞이나 서촌의 골목 또는 이면도로도 좋다. 이 그림들이 내 머릿속에서 선명하게 펼쳐지는 건 상상만이 아니라 실제로 그 시간에 그 길을 걸어본 적이 있어서다. 그렇다. 나도 산책을 좋아한다.

'나도' 라고 쓴 이유는 동서고금의 수많은 인간들이 산책을 좋아한다고 이미 고백을 했기 때문이다. 니체는 어지간히 걷는 것을 좋아했는지  “심오한 영감, 그 모든 것을 길 위에서 떠올린다”라고 했고 칸트는 매일 마을길을 산책했는데 그 시간이 늘 일정해서 마을 사람들이 그를 보고 시계를 맞췄다는 얘기가 있을 정도다. 그러나 칸트처럼 강박적으로 일정한 시간에 산책을 하는 건 미친 짓이다. 왜냐하면 산책의 진정한 묘미는 '목적이 없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은 어디어디까지 걸어봐야지' 하는 정도의 마음을 먹을 수는 있다. 그러나 목적지가 너무 분명하거나 몇 시까지 어디를 꼭 갔다와야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걸 산책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아마 이번에 [산책 안에 담은 것들]이라는 산문집을 낸 이원 시인도 나와 비슷한 심정일 것이다. 


새벽에 깨어 홀로 걷는 것을 좋아한다는 이원 시인. 그녀는 왜 산책을 좋아하는 것일까. 내 생각엔 산책은 '걸으면서 하는 독서'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또는 걸으면서 하는 '비움'일 수도 있겠다. 산책하는 사람의 발걸음은 가볍고 허허롭다. 두 다리는 길을 걷고 있지만 마음은 머릿속에 있는 상념들 사이를 거닐고 있다. 그 상념들은 도서관에서 마주쳤던 책들이기도 하고 극장에서 보았던 수천 편의 영화이기도 하고 자신이 그동안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원 시인이 걷는 길은 그곳이 절두산 성지든 홍대앞이든 결국은 시인의 마음 속 길에 다름 아니다.

어떤 때는 울 일이 있어 9Kg의 몸무게가 빠지도록 몇 달을 계속 울기도 했던 시인은 결국 또 다시 힘을 낸 자신의 두 다리 위에 몸을 실어 산책길에 나선다. 그녀에게 '산책은 한가로운 시간인 동시에 뜨겁고 깊은 시간' 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는 곳이 달라질때마다 어떤 날은 경복궁역 2번출구로 나와 이상이 살았던 집터 앞에 무한정 서서 "예술가의 흔적을 찾아 골목을 찾게 만드는 힘, 문화는 다름 아닌 그것이다'라고 중얼거리기도 하고 어떤 날은 은평구에 있는 진관사 입구까지 걸어가 합장을 하기도 한다. 그녀가 그동안 걸어다닌 홍대, 한강, 명동, 시장, 골목, 동네, 갤러리는 물론 멀리 파리의 골목에 가서도 그녀는 어떤 특별한 것을 하지 않는다. 그저 걸음으로써 마음에 빈 공간을 만들 뿐이다. 


이 산문집은 한 번에 휘리릭 읽히는 책이 아니다. 어떤 때는 시인다운 아름다운 문체로 이루어진 깊은 잠언을 들려주기도 하고 어떤 때는 수다스러운 누나처럼 우리가 가보지 못한 길의 비밀들을 알려주기도 하는 이원의 산문들. 그러니 이 책을 한 번에 휘리릭 읽는 것은 바람직하지도 않거니와 저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우리가 하루에 한 번씩 짧은 산책을 하듯 이 책도 한 챕터씩, 또는 몇 장씩 아껴가며 읽는 것은 어떨까. 나는 이번주 토요일에 저자와 함께 이 책을 들고 홍대와 절두산 주변을 산책할 것이다. 아내가 일하는 출판사에서 나온 책이라 나도 운 좋게 그 행사에 초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모두 같은 책을 들고 시인과 함께 조근조근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산책이라니. 벌써부터 토요일 아침이 기다려진다. 

마지막으로 그녀가 쓴 '우리동네'에 대한 짧은 글을 여기에 옮겨본다. 

우리 동네가 된다는 것. 슬리퍼를 신고 트레이닝복을 입고 헝클어진 머리로 어슬렁거리는 동선이 생긴다는 것. 잘 모르는 가게 주인과도 "안녕하세요" 인사를 나눌 수 있다는 것. 뒷골목에 있는 오래된 빵집과 오래된 떡집을 비교할 수 있다는 것. 가장 맛있는 떡과 빵을 고를 수 있다는 것. 지도에 생겨나고 사라지는 곳을 표시할 수 있다는 것. 길을 자꾸자꾸 발견하게 된다는 것. 알게 되는 골목만큼 잠시 멈춤, 즉 간단(間斷)의 시간도 늘어난다는 것.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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