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력이 뛰어나야 연기도 잘 한다는 걸 알려주는 영화 – [더 테러 라이브] 




조정래의 [아리랑]을 읽으면서 정말 신기했던 것은 친일파에 대한 작가의 뛰어난 묘사력이었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하와이 사탕수수밭으로 팔려가던 민초들을 다루거나 순진한 마음으로 정신대에 자원하다시피 끌려가는 소녀들을 다룰 때는 독자들을 같은 편에 서서 울분에 떨게 만들던 작가가 친일파들을 묘사할 때는 180도 돌변해서 어찌 그리 얄미우면서도 논리정연하게 남의 속을 긁는지.. 정말 대단합니다. 혹시 작가가 친일파 출신은 아닐까라는 의심이 들 정도였죠. 



오늘 [더 테러 라이브]에서 하정우를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정우가 맡은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진행자 윤영화 앵커는 영화의 주인공이긴 하지만 정말 정이 안 가는 밥맛이죠. 아홉시뉴스 앵커를 5년 간 하다가 뇌물수수 비리로 인해 며칠 전 라디오로 쫓겨온 인물이며 방송기자인 아내의 아이템을 훔친 일 때문에 별거까지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테러범의 전화를 받은 뒤 경찰에 신고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남들보다 먼저 이걸 가로채 재기의 발판으로 삼으려 드는 야비한 인물입니다. 


그런데 하정우가 하는 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혹시 저 자식이 실제로 저런 야비한 놈 아닐까?”라는 생각이 절로 들 정도로 인물에 몰입을 하게 만듭니다. 처음에 후줄근한 차림새와 잠 덜 깬 얼굴로 방송을 하다가 화장실에 가서 순식간에 야욕이 넘치는 모습으로 변하는 장면은 참 대단합니다. 더구나 하정우는 이 영화에서 야비한 면뿐 아니라 시시각각 변하는 상황에 따라 때론 아주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어떤 시점부터는 자신이 속한 시스템에 진한 회의를 느끼는 역할까지 동시다발적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게다가 흔들리는 카메라는 잠시도 하정우라는 배우를 떠나지 않죠. 



이창동 감독은 어리버리한 [오아시스]의 설경구 캐릭터를 설명하며 “그게 다 내 안에 들어있던 모습”이런 얘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의 무의식 속엔 참으로 많은 캐릭터들이 숨어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많은 캐릭터들 중에 한 가지만 꺼내서 살게 되죠. 두 가지가 번갈아 나오면 그게 ‘지킬과 하이드’가 되는 것이구요. 그런데 뛰어난 작가나 배우들은 수시로 여러 캐릭터들을 꺼내 독자나 관객에게 보여줍니다. 김수현의 드라마를 봐도 그렇습니다.그녀의 드라마에서는 도저히 한 사람이 썼다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인물들이 저마다의 개연성을 가지고 빼곡하게 등장하죠. 


전 이게 상상력의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상상력은 작가에게만 필요한 게 아닙니다. 흔히들 배우는 상상력과는 별 관계가 없다고 생각하죠. 그러나 전 배우야말로 머리가 좋고 상상력이 뛰어나야 한다고 단언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머리 좋은 사람들이 연기도 잘 합니다. 머리가 나쁘면 연기도 못해요. 자신의 무의식 속에 숨어있는 캐릭터를 꺼낼 수 있는 힘, 이건 훈련만으로 되는 건 아니거든요. 타고난 상상력과 노력이 합쳐져야만 가능한 일입니다. 



한때 ‘설리가 진리’라는 말이 있었듯 요즘 몇 년간은 ‘하정우가 대세’입니다. [더 테러 라이브]를 보시면 왜 지금 하정우가 대세 소릴 듣는지 확실히 알 수 있으실 겁니다. 물론 “근데, 저 자식도 실제 저렇게 야비한 인간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게끔 하는 이경영의 날렵한 연기를 보는 즐거움은 ‘덤’이구요.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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