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778350.html 


생은 하나의 문을 닫으면 다른 문이 열린다. 매일 머리 아프게 걱정하며 사는 것보다는 정리하고 다시 시작하는 게 낫다. 자신이 싫어하는 상황에 본인을 둘 필요가 없다. 인생의 한 부분이 끝나버렸다고 해서 (전체가) 다 끝난 건 아니다. 나는 영화 몇 편이 될 정도의 재밌는 삶을 살았다. 그런 삶이 ‘좋은 인생’이다. 늘 재밌는 일이 생겨 인생이 불안하지 않다.


일 년 전 오늘 아내가 소개해줘 읽고 공유했던 요리사 스스무 요나구니의 인터뷰. 머리가 복잡했던 당시에 많은 용기와 위로를 받았는데 다시 읽어봐도 여전히 좋다. 좋은 위스키처럼 킵해 놓고 가끔 꺼내 음미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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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인의 페이스북 담벼락을 구경하다가 뒤늦게 좋은 칼럼을 읽고 공유합니다. 

쓸모없는 것들을 가르치고 배우는 이유가 '황우석 사태'처럼 언젠가 있을 대박을 터뜨리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라는, 너무도 당연하지만 잊고 있었던 사실을 다시 한 번 되새기게 해주는 글이라서요.





[정동칼럼]쓸모없는 것들을 가르칠 의무

대학에 갓 입학한 ‘고등학교 4학년’들이 내 수업에서 플라톤의 <국가>를 읽어야 한다는 말을 듣게 되면 눈이 휘둥그레진다. 이들의 첫 질문은 과연 그것이 시험 범위에 들어가는지 여부이고, 내가 궁금한 점은 어떻게 모든 종류의 추천도서 목록에 빠지지 않는 이 책을 읽어본 학생이 없는가 하는 점이다. 이들이 예의 바르게도 묻지 않는 질문은 아마도 다음과 같을 것이다. “이게 우리 인생에 어떤 도움이 되나요?”

목적의식이 뚜렷한 세대이며 목적 없는 “쓸모없는 것들”을 가차 없이 퇴출시켜나간 교육시스템이다. 대학은 더 좋은 직장으로의 취업을 준비하는 곳이고, 고등학교는 더 좋은 대학으로의 입학을 준비하는 곳이며, 중학교는 더 좋은 대학에 많이 입학시키는 고등학교로 갈 준비를 하는 곳이며, 초등학교는, 그리고 유치원은…. 아니, 이 앞의 문장은 상식이 되어버려 새삼 지면에 옮기기도 뜬금없다.

그러나 나는, 우리 교육의 황폐화와 우리 현실의 암담함이 이런 목적론적 교육에서 출발한다고 믿는다. 문화의 시작이 쓸모없는 것들에 대한 집착이었고, 학술의 근원이 보이지 않는 것을 보려 하는 궁금증이라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 교육에는 문화도 학술도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쓸모없는 것들을 연구하고 가르치며 그것이 매우 자랑스럽다. 이것을 서생정신이라 불러도 좋고 아마추어리즘이라 불러도 좋다. 쓸모없는 것이 자랑스럽다는 것은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을 통해 아이폰을 만들 수 있었고, 워런 버핏이 ‘풍부한 독서’를 통해서 훌륭한 투자자가 될 수 있었다는 것과는 정반대의 의미이다. 학술과 교육과 문화는 무엇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예기치 않게 페니실린이 발견되기도 할 것이며 우연찮게 뢴트겐은 X선에 손을 대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폰과 주식투자와 페니실린과 X선이 - “대박”이 - 학술과 교육의 목적이 될 수는 없다.

내가 학생들에게 들려주는, 혹은 전해주고 싶은 대답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이 책이, 이 강의실이, 나아가 학교에서의 모든 경험들이 당신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 있고 만들어주어야 한다고. ‘동굴의 우상’이 무엇인지를 외우기 전에, 동굴에서 무기력한 삶을 살던 이가 동굴을 나와서 처음 광명한 햇살을 느꼈을 때의 그 저미는 고통을, 그리고 다시 동굴로 되돌아갔을 때의 뼈를 깎는 격통을 책으로 느낄 수 있다면 당신들은 이미 보다 나은 사람이 되었다는 것. 이것은 시험에 절대로 나오지 않을 것이며 당신들이 살아가는 데 하등의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지금, 이 자리가 아니라면 다시는 읽어볼 수도, 고민해볼 수도, 토론해볼 수도 없을 마지막 기회라는 것. 나는 우리의 대학교와 고등학교와 중학교와 초등학교가 학생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더 훌륭한 시민으로 성장시킬 수 있는 소중한 ‘마지막 기회’들을 허비하고 있다는 강한 의심이 든다.

계절이 지나 겨울방학을 앞둔 시기에 어김없이 찾아오는 학생들이 또 있다. 취업의 어려운 관문을 뚫은 졸업예정자들인데, 축하의 말을 건네기가 무섭게 기말고사를 치를 수 없다는 양해를 구한다. 학점을 받아야 졸업을 할 수 있지만 당장 회사에서 출근 - 무급인턴 - 을 하라고 하니 시험 대신 다른 것으로 학점을 달라는 부탁이다.

우리 교육시스템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위치한 ‘회사’들은 이토록 촌스럽기 짝이 없으며 이들에게 묻고 싶은 말은 다음과 같다. 학생들 일생에 다시는 오지 않을 교정에서의 마지막 두어 달 기간에 당신들이 학생들을 얼마나 더 잘 성장시킬 자신이 있는지. 세상의 모든 관심과 배려를 받고 초·중·고·대학의 십수년 교육기간 동안의 학생 생활을 마감하는 이들을 두어 달 기다려줄 여유도 없는지. 사회적 배려라는 것이 수능일 아침 앰뷸런스로 고사장에 실어주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들에게 약간의 시간을 주고 성장을 기다리는 것은 아닌지.

이런 교육환경이 이르는 종착역은 바닥 모를 둔감함이다. 배려받지 못한 학생들은 공감하지 못하는 시민으로 자라고, 손톱 밑의 가시가 아니면 고통과 분노는 건망증에 포획된다. 세월호, 국정원, 부패리스트, 메르스 등 신문 지면을 화려하게 수놓았던 공동체의 사건들이 너무도 쉽사리 잊혀지고, 일상의 아득함만 우리 앞에 벽처럼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어떤 공동체를 만들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우리는 아들 딸들에게 어떤 공동체를 물려줄 것인가. 대답은 생각보다 훨씬 어렵고 근원적인 곳에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대안 없는 쓸모없는 글로 지면을 허비하게 되어 송구한 마음이다.

<박원호 | 서울대 교수·정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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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독후감은 쓴지도 꽤 됐고 또 지금도 가끔 인터넷에 떠돌아 다니기도 하는 글입니다. 그런데  최근 다시 이 책을 찾아 읽어볼 필요가 생겼고, 또 어떤 분께서 이 글을 이메일로 한 번 보내달라 하시는 바람에  다시 들춰보게 된 겁니다.  



다시는 광고인이 낸 책을 구입하지 않으리라 다짐했던 나는, 어느날 고속터미널역에 있는 영풍문고에 가서 '인문학으로 광고하다' 라는 따끈따끈한 새 책을 발견하게 된다. 에잇, 또 광고책이군. 책값도 더럽게 비싸네.(17,500 원이다) 심드렁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서 책을 들쳐보던 나는 두 시간 동안 꼼짝않고 책 속에 빠져들었다가 결국 읽을 분량이 반 정도 남은 그 책을 들고 계산대 앞에 서고 말았다. 젠장. 

<인문학으로 광고하다>는 엄밀히 말해서 광고인이 낸 책이 아니다. 광고를 하는 박웅현 CD를 출판기획자이자 컬럼니스트인 강창래가 만나 오래도록 인터뷰하고 함께 어울려 고민도 하고 해서 펴낸 공동저작이다. 


어떤 사람은 연애편지를 보낼 때 "보고싶습니다" 라고만 쓴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얼굴 하나야 손바닥 둘로 폭 가려지지만 보고 싶은 맘 호수만 하니 눈 감을 밖에."라고 쓴다. 어떤 사람의 마음이 더 잘 전달되겠는가. 박웅현은 정지용의 이 시를 인용하면서 광고 커뮤니케이션은 '보고 싶다는 말을 뭐라고 하면 좋을까'에서 출발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광고를 만들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인문학적 소양이라고 말한다. 가령 박경리의 '토지'를 읽는 것은 당장 광고 아이디어를 내는 데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지만 기초 체력을 기르는 데는 보약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는 '넉 달 간, 한 첩의 보약을 먹듯 <토지>를 읽었다' 고 한다. 인문학적 소양이 받쳐주면 그다음부터는 세상의 모든 일들이 아이디어가 되고 소재가 된다. 길 가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주는 사람을 보고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이타심'을 새삼 환기한 그는, 이를 그대로 광고에 넣는다.


 왜 넘어진 아이는 일으켜 세우십니까?

왜 날아가는 풍선은 잡아주십니까?

왜 흩어진 과일은 주워주십니까?

왜 손수레는 밀어주십니까?

왜 가던 길은 되돌아가십니까?

 

사람 안에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을 향합니다.


   

그렇다면 인문학적 소양이란 무엇인지 구체적인 예를 들어달라고 하자 그는 베네통 광고의 사진을 찍었던 올리비에르 토스카니의 일화를 얘기해준다.

수녀와 신부의 키스 장면, 천사와 악마로 분장한 백인과 흑인 아이의 포옹 장면, 흑인 여성의 젖을 빨고 있는 백인 아기의 사진 등 수많은 화제작을 남긴 토스카니가 [아카이브]라는 잡지와 인터뷰를 할 때 공산주의에 대해 "우리는 공산주의자가 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진화하지 못했다."라고 말한 것이다.

박웅현은 공산주의라는 돌발적 주제에 대해 이렇게 잘라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웬만한 철학적 인문학적 깊이가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그는 어딘가에서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이 가장 무섭지 않다는 말도 한다.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장면은 강창래가 따라가서 목격했다는 박웅현의 상공회의소 강의다. 주제는 '한국에서 효과적인 광고 캠페인'이었는데 이제 곧 한국에 와서 커뮤니케이션을 펼쳐야하는 외국인들에게 해야하는 강의였다. 그때 박웅현의 첫 마디는 "저는 한국말로 하겠습니다."였단다.


 "제가 영어를 전혀 못하는 건 아니지만 설명할 수 없는 어떤 이유로 인해 영어로 말하는 순간 제 지적 수준이 초등학생 수준으로 떨어집니다. 석사 학위까지 받은 사람으로서 석사 학위를 가진 지적 수준으로 말하고 싶습니다."


 

  

박웅현은 이날 동시통역사를 대동하고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했다고 한다. 이는 좋은 프리젠테이션을 위한 과감한 장치이기도 했고 프리젠테이션의 주제를 더 깊게 부각시키는 효과까지 발휘했다. 아무리 칸이나 뉴욕페스티벌에서 상를 타는 광고라도 그 나라의 문화와 생활에 맞지 않으면 이해받지 못한다는 것(우리는 버드와이저 wazzaup~광고를 이해 못한다)을 말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동시통역사를 쓰는 것으로 문화적 자존심을 지키면서도 내용과 형식이 강의 내용과 제대로 맞아들어간 예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우리말을 잘하는 외국인이 있다고 해도 언어만 알아서는 그 문화에 깊이 젖을 수 없는 것이고, 이를 뒤집어서 말하면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위해서는 그 나라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적 소양이 쌓여야 한다는 것이다.

 박웅현은 2002년 월드컵과 촛불집회라는 사회적 이슈 속에서도 또다른 통찰을 발견한다. 아디다스라는 광고주에게 팔려고 만든 이 광고는 결국 집행되지 않았지만 그의 인문학적 소양이 어떤 식으로 발현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기에 인용한다.

 

촛불

 

믿지 못할 일이었다.

월드컵 16강

거리는 기쁨에 넘쳤다.

같은 시각

또 하나의 믿지못할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두 명의 여중생이 죽었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서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던 길이었다.

언론은 크게 다루지 않았다.

미군은 책임이 없다는 발표를 했고

정부는 침묵했다.

두 명의 소녀가 죽었는데

세상은 조용하기만 했다.

한 네티즌이 있었다.

죽은 이의 영혼은 반딧불이 된다고 합니다.

촛불을 준비해주십시오.

저 혼자라도 시작하겠습니다.

작은 제안이었다.

한 개의 촛불이었다.

그것으로 무엇을 밝힐 수 있을까?

상대는 미국의 군대였고

모든 이의 시선은 월드컵을 향해 있었다.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적이 일어났다.

촛불이 옮겨 붙었다.

그해 한국은 월드컵 4강에 진입했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해 한 개의 촛불이

세상을 환하게 밝혔다.

 

모두들 불가능하다고 했었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는 자신이 예전에 만들었던 '2등은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다'와 작년 '그리고 대학에 떨어졌습니다...수험생여러분, 수고하셨습니다'라는 광고 모두 시대의 흐름을 읽고 그 흐름 속에서 한 기업의 다짐과 의견을 표현한 것이라고 말한다. '넥타이와 청바지는 평등하다'도 마찬가지였다. 그 시대를 읽고 인간을 연구하는 것, 그것이 그가 말하는 인문학이다.

 박웅현은 나도 전에 3년 남짓 다닌 적이 있던 광고대행사 TBWA/Korea의 ECD다. '총괄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라는 뜻이다. 그런 그가 'TV, 책을 말하다'라는 프로그램에 패널로 나온 적이 있다. 젊은 작가 전아리와 함께 출연했었는데, 나는 그때 그가 진정으로 부러웠다. 광고인으로서 독서 프로그램에 나왔다는 게 부러운 게 아니라 광고인이 TV에 나와서 광고 얘기를 한 마디도 하지 않는 게 부러웠던 것이다.

 며칠 전 TBWA/Korea에서 박웅현과 함께 일한 적이 있는 친구 이문선의 사무실에 카피 알바 때문에 갔다가 이 책 얘기를 해줬더니, 그는 박웅현에 대해 이런 표현을 했다.

 "나는 세상엔 두 가지 CD가 있다고 생각한다. 박웅현과 박웅현이 아닌 CD." 

 이런 게 바로 최고의 찬사다. 쉣.


 

Posted by 망망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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